불어라, 봄바람!
- 관계의 복음화: 의로움을 거룩함으로 변화시켜라
에제 18,21-28; 마태 5,20-26 / 사순 제1주간 금요일; 2025.3.14
물기를 잔뜩 머금은 습설로 숱한 나뭇가지를 부러뜨렸던 기나긴 겨울 추위가 물러가고, 드디어 봄이 오고 있습니다. 옷깃을 여미게 했던 차가운 겨울 바람은 슬며시 물러갔고 어느 새 눈을 들어 생명의 기운이 약동하는 산과 숲의 변화를 보게 하는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이게 나라냐?” 하는 외침으로 온 나라를 꽁꽁 얼어붙게 했던 박근혜의 겨울을 뚫고, 다시금 온 나라를 국격의 상승과 민족 화해의 설레임으로 보낸 문재인의 봄을 지나더니, 느닷없이 불어 닥친 윤석열의 무속과 검찰 칼바람으로 지낸 3년이었습니다. 이제 그날이 옵니다. 봄바람이 불어옵니다. 민주주의의 봄이 다시 옵니다. 공정과 의로움의 봄바람, 다시 거룩함으로 뜨겁게 달아오를 따스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보낸 윤석열의 겨울, 이제 의로움의 봄이 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과 인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인류가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핵심은 우리네 인간관계를 하느님 나라의 가치로 채우는 데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은 왕과 사제 등 당시 목자 역할을 맡은 지도층이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멸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성이 지도층들을 원망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무능하고 부패했던 지도층을 탓하면서 자기 운명을 비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지혜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 실제의 삶에서 실현해 내는 가치에 의해서만 심판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깨달은 개인들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이치를 깨우쳐 준 것입니다.
세상 일에서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서 나오는 선의 가치로서, 정의와 평등이요, 달리 말하면 공정함과 의로움입니다. 그래서 그는 집단의 풍조가 어떻든 그에 영향 받지 말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도록 실존적인 결단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에제키엘의 경고에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고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결국 더 강경한 심판의 말씀이 떨어졌습니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 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에제 34,8). 그 결과로 나라의 공동선이 피폐해지고 국력이 쇠약해져서 강대국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지도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백성은 노예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가야만 했습니다.
이런 민족적 비극과 불행에서 돌아온 지 4백 년이 더 지나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시 유다인들은 자기들 조상이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 받았다고 해서 자신들도 당연히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유다인들에게 경종을 울리셨습니다. 당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십계명을 매우 형식적으로 지키거나 지키도록 가르치면서 자신들이 의로움의 기준인 양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위선적인 바리사이들의 처신에 대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들을 본받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황금율은 인간관계를 복음화시키고 성화시키기 위한 이웃 사랑의 최소한(最小限)과 최대한(最大限)으로 나타납니다. 이웃 사랑의 최소한은 남이 우리에게 해 주지 않기를 바라는 싫은 일은 우리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공정과 정의를 위해 규정된 법률을 지키고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한 질서를 준수하는 사회적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또 이웃 사랑의 최대한은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좋은 일은 먼저 우리가 남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안중근 의사나 유관순 열사 같이 하느님 사랑으로 겨레를 사랑한 위인들의 삶에서 배웁니다. 이것이 황금율이 알려주는 이웃 사랑의 범위인데, 오늘의 말씀은 그 이웃 사랑의 깊이에 대해 묵상하게 해 줍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또한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신 말씀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을 빛처럼 사람들을 비추어서 사람들이 그 사랑을 보고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 말씀에 비추어 다시 한 번 독서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에제키엘은 이웃에게 증거해야 할 사랑의 최소한에 대해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회생활에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불공정하고 불의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추구하기가 매우 어렵고 특히 가진 것이 없고 배운 것이 적은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지식이든 권세든 재산이든 또는 믿음이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가진 이들이 이들의 처지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 사람의 인격을 평가함에 있어서도 공정함과 의로움은 기본입니다. 에제키엘이 예언한 하느님의 말씀에 의하면, 공정과 정의는 악인이라도 과거에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이를 실천하면 살 수 있고, 의인이라도 이를 어기면 죽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구원의 잣대입니다(에제 18,26-28).
예수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호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에게 증거해야 할 사랑의 최대한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대하여 지닌 믿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관계를 복음적으로 변화시켜야 할 중요성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사회생활에서 공정하고 정의롭게 살아야 하는 이 과제도 만만치 않은 기본 과제이지만, 누구나 맺고 있는 개인적인 인간관계들을 하느님께 바쳐드릴 만한 예물로 가꾸는 일은 사회생활의 목표라 할 수 있을 만큼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가 오늘 복음인데,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형제가 우리에게 품고 있는 원망이 생각나거든 일단 예물을 제단에 그대로 두고 나서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예물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마태 5,23-24). 왜냐하면 하느님께 바쳐 드리는 예물에는 인간관계의 내용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규정된 예물이란 우리네 인간관계를 반영하는 그래서 그 산물로서의 표시에 불과합니다. 그 안에 담겨야 할 내용이란 바로 그 예물을 마련하기까지 거쳐야 했던 인간관계의 품질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예물은 우리가 행하는 이웃 사랑의 반영이고, 또 반대로 우리가 행하는 이웃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는 정성에 정비례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이란 우리의 인간관계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도록 가꾼 결과로 마련한 예물이며,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 자체가 사실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값지고 귀한 예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고자 하는 잣대입니다. 그분이 예시해 주신 사례에서는 마지막 한 닢까지 다 갚기 전에는 감옥에서 풀려나오지 못하리라고 경고하셨는데, 그 감옥이란 이웃과 화해하지 못해서 하느님께 진 빚을 상징합니다. 직접 화해해서 하느님께 빚을 갚을 수 없으면 다른 이웃에게라도 갚으면 됩니다. 그것이 불화 (不和)에 대한 보속(補贖)이고 먼저 베풀어야 하는 정신적 자비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인간관계를 똑같이 다 잘 하기는 어렵고 또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에, 가장 현실적으로 중요한 원칙은 선택과 집중일 것입니다. 즉, 주어진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소중한 관계를 자신이 하느님께 바칠 예물로 가꾸어 봉헌하려는 자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하느님 나라의 가치가 위협받는 경우에라면 엮이지 않도록 피해야 할 인간관계도 있습니다. 소중한 인간관계를 알아보고 가꾸는 안목만큼이나 엮이지 않도록 피해야 할 인간관계를 알아보고 거리를 두는 안목도 필요합니다. 이 중요성을 알아보고 매기는 일도 성령칠은에 속하는 의견의 은사입니다. 이 은사에 따라서 선택된 인간관계를 하느님께 봉헌할 예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함으로 변화되어야 할 의로움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겪어야 했던 고난과 마찬가지로, 우리 민족도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물질문명의 혁명 물결에 휩싸이던 근대 이래 쇄국 정책으로 나라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외딴 섬처럼 살던 조선 시대에 시대착오적이게도 정치 지도자들의 무능과 지식층의 비겁과 배신, 게다가 하느님을 믿겠다는 백성을 박해한 죄과를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 통치와 미군정 그리고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치룬 탓에 지금껏 이 고난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민족사의 겨울은 여지껏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정치적으로 엄중하고 사회적으로 험난한 때입니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때입니다.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스럽게 지내야 할 세월입니다. 옷깃을 여미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야 하고, 부드럽게 이웃을 대해야 할 일입니다. 의롭고 공정해야 함은 물론 인간 관계를 거룩하게 변화시켜서 하느님께 정성스럽게 예물로 바쳐야 할 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따스하고도 거룩한 봄바람이 불어오기를 소망합니다. 불어라, 봄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