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푸른 갈기를 휘날리면서 전신주를 꺾는다. 흰 기둥들은 꺾인 채 완강하게 서 있고, 전선들은 끊어진 채 전신주와 구름 사이를 토막토막 잇고 있다. 그 아래 어두운 건물들의 덩어리가 뭉쳐진 채 솟아오른다.
신호등 아래서 솟아오르는 은사시나무의 윗가지 너머 푸른 신호등이 건너편 인도 위로 켜지길 기다린다. 푸르고 노란 또는 남빛의, 검은 차들은 은사시나무 새로 솟는 윗가지 위로 솟아오르는 소리만 뒤섞으며 나의 앞을 어지럽게 어디론가 내가 가야 할 곳으로 또는 결코 가볼 수 없는 곳으로 또는 그런 곳들로부터 와선 또 어디론가로 가버린다. 나는 기다려야 한다. 푸른 신호등이 켜질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이 길 건너 온통 거울로 벽을 바른 금융회사 6층 건물이 거울 속에 비쳐 있어야 한다. 폭풍의 구름 아래 솟아오르는 어두운 건물들의 덩어리 아래 너무 어두워 이쪽에서 보이진 않지만 나는 조그만 덩어리로 비쳐 있어야 한다.
구름의 갈기가 뒤섞이면서 전신주가 꺾인다. 심상치 않은 폭풍이 오려나 보다. 내가 길을 건너갈 때에도 솟아오르는 어두운 건물의 덩어리 아래로 나는 보이지 않고 검기만 한 그 속에 푸른 신호등만이 켜져 있다. 푸른 신호등 아래 은사시나무 가로수와 나는 안 보인다. 다만 빨리 건너가야 할 뿐이다. 건너가서 재빨리 저 유리를 빠져나가야 할 뿐이다. 나는 그 속에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내 눈에 내가 안 보였으니까.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휘젓는 폭풍을 그 속에서 보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