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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악한 왜적이 진해(鎭海)ㆍ고성(固城) 등지를 불태워 재물을 없애버리니, 본도 우수사 원 균(元均)이 퇴각
하여 남해(南海)의 노량(露梁)에 진을 치고 전라도의 수군에 구원을 청하다. 적병이 진주(晉州)로 향한다고
떠들썩하자, 목사 이경(李璥)과 판관 김시민(金時敏)은 지리산에 숨어 피하였다. 김성일이 이 소식을 듣고, 본주
(本州 즉 진주)에 달려가니, 경내(境內)는 싹 비어 있었다. 판관은 김성일이 진주에 온다는 말을 듣고 나와서
기다렸으나, 이경은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다. 김성일이 명령을 전하여 나오라 했는데, 이경은 등창이
발작하여 죽었다. 김성일이 김시민에게 영을 내려, 수천 명의 군사를 정돈하여 가지고 부대를 나누어 성을
지키게 하는 한편,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하천서(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강기룡(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적병이 고성으로부터 사천(泗川)에 와 머무르면서 진주를 범하려 하자, 김성일이 군관 중에서 용맹하고
건장한 자 10여 명을 시켜 강을 건너가 쳐서 쫓으니 왜적이 곧 퇴각하였다. 다시 군사를 나누어 사천의 성
밑까지 진격해 들어가서는 그들의 나무하고 물 긷는 길을 끊어버리자, 왜적은 퇴각하여 고성으로 돌아갔다.
또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도소모관(都召募官)으로 하여 생원(生員) 한계(韓誡)ㆍ정승훈(鄭承勳)과 함께 군사
6백여 명을 모집하여 고성의 의병장 최강(崔堈) 등과 합병(合兵)해 가지고 혹은 유인하기도 하고 혹은 매복했
다가 야습하게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왜적의 무리가 무너져 웅천(熊川)ㆍ김해(金海) 등지로 향하였다.
김대명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창원(昌原)의 마산포(馬山浦)로 들어가서 진을 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각 도 사림(士林)들의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이 빈번하게 나돌다. 이때부터 국가의 명맥에 활발한 기세를
얼마간 떨치게 되었다.
○ 경기 감사 권징(權澄)의 통서(通書)에, “평의지(平義智)가 조선에 온 것은 실은 모반한 백성들이 군사를 청한
데서였다. 그런데 수길(秀吉)에게 군공(軍功)을 보고할 때 모반한 백성들이 번번이 억눌리고 깎여 내리게 되자
분한 마음을 품게 되어 평의지를 쳐 죽이고 이때의 거짓 소문이 대부분 이러한 따위다. 모반한 백성들과 왜적
이 두 군으로 나뉘었으니, 오래 가지 않아서 틀림없이 자연 무너져 흩어질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한 대장이
겨우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에서 왜적과 교전하여 꽤 많은 자들을 목베고 사로잡았는가 하면,
왜적은 북쪽으로 퇴각하여 신문(新門)으로 해서 들어가는데 먼저 들어가려고 다투다가 서로 죽인 것이 또한
많았다고 한다. 또 왜적의 장수 한 사람이 임진강을 건너려 하자, 김명원(金命元)이 강의 요지를 지키고 있어
많은 자들이 편전(片箭)에 맞아 왜적들이 건널 수 없었고, 왜적이 배 두 척을 구하여 그 군사들을 가득 실었는
데 강 복판에서 뒤집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하였다.
○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대부대의 왜적이 하루는 사람을 죽여서 시위하라는 영을 내리자, 동대문으로부터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반식경에 쓰러진 시체가 길에 가득 차고, 왜적에게 항복하고 부동(附同)한 백성이 채
도망가지 못한지라, 피바다와 살더미의 참상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서야 중지시켜 다시 살육을
엄금하고 각 문에다 방을 내걸기를, “남자는 농사에 힘써 자기 생업에 안정하고, 여인은 누에고치 길쌈을 일삼
아라.” 하고,
또 강원도와 경기도에 글로 고시하기를, “대왕(大王)은 이미 도망갔고 중국도 지금 일본에 예속되었으므로
사자[使价]를 보내 각 도를 다스리려 하니, 나라의 선비들 및 촌 백성들이 일본에 복종하기를 전대(前代)에
복종한 것 같이 함에 어찌 이론(異論)이 없겠는가? 그러나 지금 군현(郡縣)의 관창(官倉)에 있는 미곡ㆍ옥백(玉
帛)ㆍ사마(絲麻) 등은 흩어 없애지 말아야 한다. 또 모(某) 목사[牧主]ㆍ모(某) 현감이며, 백성 남녀들도 역시
아무데나 가지말고 사자를 섬기기를 바란다. 이 점 유의하라. 천정(天正 당시의 일본 연호) 임진년 월 일,
풍신수가(豐臣秀家)ㆍ행정(行貞)ㆍ길성(吉城) 등이 양도(兩道)의 이(吏)ㆍ호(戶)ㆍ예(禮)ㆍ형(刑)ㆍ공(工)의
백(伯 즉 그 관계 책임자를 말함) 등에게 부치노라.” 하였다. 흉악하고 해괴한 말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만 대를 두고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 삼도(三道)의 해군 함대[舟師]가 가덕도(加德島) 앞바다까지 왜적을 추격하여 크게 이기다. 이에 앞서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왜적들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해군 함대를 이끌고 가덕도로
향했는데, 왜적의 배가 바다를 덮고 있는 것을 보자 마침내 퇴각하여 돌아오고, 여러 장수들도 점점 흩어져
가버렸다. 원균은 아군의 전함을 다 침몰시키고는 육지에 올라가서 왜적을 피하려 하였으나, 옥포만호(玉浦萬
戶) 이운룡(李雲龍)이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원균이 이운룡 등의 몇 척의 배와 함께 노량(露梁)에
퇴각해 있는데 적병이 뒤따라 좇아오자, 이운룡이 전라도의 해군에 구원을 청하고자 곧 작은 배 하나를 타고
달려갔다.
그런데 당시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해군 함대를 거느리고 좌수영(左水營)
앞바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척후병(斥候兵)이 외쳐 보고하기를, 작은 배 한 척이 와두해(瓦頭海)로부터 달려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히 척후선을 시켜 물어본즉, “경상도 옥포만호 이 모요. 적병이 가득히 몰려와 여러
진(鎭)이 와해됐소. 우수사 원 모가 힘으로 지탱하지 못해 퇴각하여 노량을 지키고 있는데, 흉악한 왜적이
뒤쫓아 와서 이미 사천(泗川)과 남해(南海) 바다에 가득 차 있소. 전라도의 함대가 그 선봉을 격파하여 주기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영남의 바다는 끝장이 나고 화가 호남으로 닥쳐올 날이 멀지 않을 것이오. 장군께서는
이 점을 숙고하시오.” 하였다.
이순신 등이 그 말을 듣고는 다들 놀라서 서로 돌아보는 것이었다. 광양 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湛)이 그때
여러 장수 중의 한 사람으로 진중에 있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서로 미루고 칭탁하는 것을 보자 팔뚝을 걷어
올리고 크게 소리치기를, “영남은 왕의 땅이 아닌가. 이 왜놈은 나라의 적이 아닌가. 영남 바다의 여러 진이
이미 다 함몰되고 단지 몇 척의 배만이 우리 경내에 와서 정박해 있으며 저 사나운 왜적이 요량없이[匪茹]
이미 그 뒤에 와 있다는데, 우리가 한 도의 완전한 군대를 가지고 여기서 관망이나 하면서 구원을 청하는
말을 듣고도 걱정 않고, 왜적이 온 것을 보고도 마음이 태연한 채 앉아서 영남 바다의 군사를 오늘 다 없어지
게 만든다면, 내일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남의 위급한 것을 구해주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서 왜적을
기다린다면 겁 많고 나약한 게 아니오. 장군께서 헤아려 하시오.” 하니, 여러 장수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그를 질시하였지만, 이순신은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밤을 지냈다.
이튿날 새벽, 이순신이 장병들을 모아 놓고 어영담을 불러다 말하기를, “광양 현감은 영남을 구원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나도 생각해 보니 역시 이치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영남 바다에서의 왜적 토벌은 반드시
노량에서 끝나는 것은 아닐텐데, 깊고 먼 물길을 시험해 본 사람이 없으니 이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어영담이 말하기를, “그것은 내가 맡겠소이다. 나를 선봉으로 삼아 주기 바랍니다.” 하자, 이순신이 기뻐
하면서, “광양의 말에 따라 분부하겠다.” 하고, 곧 장군기를 세우고 소라를 불며 대포를 터뜨리고서 어영담을
선봉으로, 방답귀선장(防踏龜船將) 신여량(申汝良)을 척후로, 순천 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과 가리포 첨사(加
里浦僉使) 구사직(具思稷) 등을 중위(中衛)의 좌ㆍ우장으로 하고는 이억기(李億祺)의 군함과 합세하여 노량으로
향발(向發)하여 원균과 만나기로 했다.
먼저 떠난 배가 광주(光州)의 바다에 이르자, 왜적의 배 5, 6척이 노를 바삐 저어 퇴각했다. 아군이 이들을
쫓아가자 그 배들에 탔던 왜적은 육지로 올라가서 달아났다. 아군이 그 배들을 다 부숴버리니 아군의 군졸들
은 기운이 났다. 날이 저물어 배를 돌려왔다. 이튿날 새벽, 또 영남 바다로 향하여 견내량(見乃梁)에 도착하였
는데, 적선들이 바다를 덮고 와서 척후장 신여량은 이미 왜적에게 포위되어 있으면서 부채를 흔들어 뒷 군사
들에게 물러가라고 신호했다.
이순신은 바다가 좁은 것을 보고 느릿느릿 퇴각하여 여러 배들이 차례로 나왔고, 이 억기는 이미 주도(柱島)
밖으로 달아나 있었다. 방답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이 큰 소리로, “사또는 왜 우리 두 배의 장수만을
버리고 갑니까?” 외쳤으나, 이순신(李舜臣)은 대답하지 않았다. 적병은 아군이 후퇴하는 것을 보자 급히 노를
저어 쫓아왔다. 한산도(閑山島) 큰 바다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은 소라와 나팔[角]을 불게 하여 일시에 기를
흔들고 함성을 지르며 배를 돌려 왜적과 맞붙어 싸웠다.
이억기도 노를 재촉하여 뒤따라 와서, 허다한 배들이 다 천지현전(天地玄箭 화살 가운데 천ㆍ지ㆍ현의 세 종류
가 있음)을 발사하여 총소리가 바다를 뒤흔들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가득 찼다. 접전한 지 얼마 안 되어
적선은 다 침몰되고 왜적은 불에 타고 물에 빠지고 하여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으며, 목을 벤 것만도 1백여
급이나 되었다. 그 이튿날, 어영담이 계속 선도(先導)가 되어 진해(鎭海) 바다를 거쳐 거제(巨濟)에 이르렀다.
당항포(唐項浦)ㆍ진도(珍島)의 배와 남도포(南桃浦)의 배가 앞서 가다가 왜적의 복병선(伏兵船) 2척을 만나 접전
했는데, 왜적이 패배하고 육지로 내려 달아나자 그 배들을 불태워 버렸고, 이어 왜적의 배 25척을 만나 접전
했다.
이달 5일, 삼도(三道)의 여러 배들이 합동으로 공격하여 왜적의 함대를 쳐 없애고 술시(戌時 지금의 하오
8~11시 동안의 시간을 말함)에 가서야 끝냈다.
6일, 경상 우수영의 전함이 전라도 보성(寶城)의 배와 합동으로 왜적의 큰 배 2척을 공격하여 불태워 없앴다.
그 이튿날, 왜적의 배들이 율포(栗浦)에서 떠나 일본으로 향하는 것을 삼도의 해군이 가덕도 앞바다까지 쫓아
갔는데, 적병은 우리 배들이 돌진하는 것을 보자 배를 돌려 우리 배들을 맞아 싸웠다. 소라 소리가 한 번 울리
자 총통(銃筒)을 일제히 발사하였고 화살과 돌이 뒤섞여 쏟아지며, 섭불[薪火]을 요란하게 던지니 함성이 바다
를 진동시키고 연기와 불길은 하늘에 가득 찼다.
왜적의 배가 부서진 것이 1백여 척이고, 불에 타고 물에 빠지고 하여 죽은 자가 무수하였으며, 수백 급의 목을
거두었다. 그 가운데 큰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층루(層樓)가 마련되어 있고 그 높이는 3, 4장(丈) 가량에 10여
명을 앉힐 수 있었으며, 밖에는 붉은 깁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안에는 금은으로 장식된 병자(屛子)가 있어
생김새가 퍽 견고하여 쳐부수기 어렵게 만들어진 것으로, 이는 바로 왜적의 주장(主將)이 탔던 배였다.
그 배 안에서 금색의 둥근 부채 한 자루를 얻었는데, 한쪽 면의 중앙엔 ‘6월 8일에 수길이 서명함[六月八日秀
吉着署]’이라고 씌어 있었으며, 그 오른편에는 ‘우시 축전수(羽柴筑前守)’의 5자가, 왼편에는 ‘타정류류수전(鼉井
流流守殿)’의 6자가 씌어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수길이 축전수에게 표신으로 준 물건일 것이고, 그 배에서
목 베인 왜장(倭將)은 바로 축전수였을 것이다.
원균의 배들은 비록 그 수효는 적었지만 돌격을 잘했다. 이순신의 배 형상은 거북이 같았으며 위에 지붕 판자
를 덮어 씌우고 두루 쇠못을 박았는데, 그것이 뾰족하고 날카로워 범접하기 어려웠고 또 퍽 견고하고 빨라서
전투에 나가기 편리했다. 거기다 어영담의 귀신 같은 지도(指導)를 얻어 전후의 전공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
다. 군영에 돌아와 장계를 올려 전후의 전승을 알렸다.
어영담은 경상도 함안(咸安) 사람으로 대담한 군략이 세상에 뛰어나고 유달리 강개하였으며, 과거하기 전에
이미 여도(呂島)의 만호가 되었고 급제 후에는 영남 바다 여러 진의 막하에 있었다. 그리하여 바다의 얕고
깊음과 도서(島嶼)의 험하고 수월함이며, 나무하고 물 긷는 편의와 주둔할 장소 등을 빠짐없이 다 가슴속에
그려 두었기 때문에, 해군 함대가 전후에 걸쳐 영남 바다를 드나들며 수색하거나 토벌할 때면 집안 뜰을 밟고
다니듯이 하여 한 번도 궁박하고 급한 경우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로 해군 함대의 전공은 어영담이
가장 높았는데도 단지 당상관에 올랐을 뿐, 선무훈(宣武勳)에는 참여하지 못하여 남쪽 사람들은 다들 애석히
여겼다.
○ 경기도 수원(水原)에 주둔한 왜적이 글로 고시하기를, “지난 20일 일본에서 사람을 서울로 보내 이 친구를
보내게 했다. 저 일본 사람이 길에서 조선 사람이 머리를 채취하는 것을 물은즉 그 이튿날 목을 벤 사람을
내놓고 그 수효를 세었다. 이것은 악한 사람이 한 짓이다. 또 조선 사람에게 기식(寄食)하던 5명을 사로잡았는
데 그 가운데 4명에게는 사형을 집행했고 남은 한 사람은 명 나라를 다루는 계략에 통해서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지나가게 해준 것이다. 이 자가 양성부(陽城府)에 있는 거처로 돌아가는 것을 물어서 양성의 촌 백성이
그를 집에 돌려보내 주었다.
풍신행정(豐臣行貞)이 서울에서 수원으로 보내졌는데 그가 수원에 체류하는 동안 장군 수종(秀宗)이 지령서를
주어 이르기를, ‘백성 남녀는 집으로 돌아가게 할 것. 수원군을 예로 취하고 단속하라.’ [去二十日日本差人至京
城使托差越斯友朋彼日本人於道問朝鮮採首則明日出人數右惡人打果又生擒寄食五人中四人行死罪一人者此通爲明計
差過也此者問在陽城府居歸云陽城村氓爲歸家豐臣行貞從京城差越水原滯留之間將軍秀宗任旨書百姓男女令歸宅者水
原郡禮取可束] 하였다.” 하다. 글 뜻이 알아보기 힘들어 재록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왜란 중에
일어난 한 가지 일이기 때문에 써둔다.
○ 서울에 머물러 있는 왜적이 선릉(宣陵)ㆍ정릉(靖陵) 두 능을 파내다. 선릉은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王
后)의 능이고 정릉은 중종(中宗)의 능이다. 진실로 이 왜적은 만세를 두고 잊어서는 안 되겠다.
○ 왜적의 장수 평행장(平行長)과 의홍(義弘) 등이 임진강을 건너고 신힐(申硈)이 이 싸움에 죽었으며, 김명원
(金命元)ㆍ이빈(李薲) 등이 패하여 관서(關西)로 달아났다. 애초에 의지(義智) 등이 10여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진강에 쇄도해서는 강에 방비가 있음을 알자 산골짜기에 군사들을 숨겨 두고 매일같이 약하게만 보였다.
신힐(申硈)은 왜적의 무리들을 엉성하게만 보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니, 잠복했던 왜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함성을 지르면서 닥쳐 오는 소리가 하늘에 치닿는 듯하고 그 형세가 바람에 불길 같아서, 손쓸 사이도
없이 혹은 칼에 맞아 죽고 혹은 물에 몸을 던지고 하여 한 사람도 빠져 나가질 못했다. 신 힐 역시 강물에
빠져 죽고 강을 수비하던 군사들도 일시에 놀라 흩어져 버렸다.
전 수사(水使) 유극량(劉克良)은 원수별장(元帥別將)으로 군에 있었는데, 그는 왜적의 모략을 염탐해 알았으므
로 신힐에게 건너가지 말기를 청했지만 신힐은 그를 늙은 겁쟁이라고 나무라며 몰아세우고는 강을 건넜던
것이다. 마구 찍어댈 때에도 유극량은 조금도 자기 부서를 떠나지 않고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다. 원수 종사관
홍봉상(洪鳳翔)도 원수에게 관광(觀光)의 일을 고하기 위해 강을 건넜는데 왜적이 마구 몰아댈 때 역시 물에
빠져 죽었다. 애석하다. 홍 종사는 양을 따라 범떼 속으로 들어갔으니 사람들은 쓸데없는 죽음을 당했다고
나무라지마는 소문만 듣고 달아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 피난하는 사람들은 각기 가깝고 편리한 대로 피난했다. 영남의 좌도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 간 외에는
다 영동(嶺東)으로 들어가고 우도 사람들은 전라도로 넘어 들어갔으며, 호서 사람들 역시 그렇게 하고 경기
사람들은 다 강화(江華)ㆍ아산(牙山) 등지로 들어가다. 계사년(1593, 선조 26)에 왜적이 물러간 후 고향에서
살아갈 길이 없자 있던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계사년과 갑오년(1594, 선조 27)에 사람이 서로 잡아먹
는 변고를 빚게 됐다.
○ 김해ㆍ동래(東萊) 등지의 사람들은 다 왜적에 붙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며 여인을 더럽히고
하였는데 왜적보다 심하였다. 김해의 경우에 도요저(都要渚) 마을은 낙동강 연변의 큰 고장인데, 왜란 초기부
터 왜적에 붙어서 도적질을 하고 혹은 지난날의 원수를 갚기도 했다. 한 서원(書員)은 일본에 들어가서 전세
(田稅)를 마련하느라고 혹 뱀을 잡아다가 그 세미(稅米)에 충당하기도 했으니, 왜인이 천성으로 뱀 먹기를 좋아
했기 때문이었다. 창원(昌原)의 왜적은 전라 감사를 자칭했고, 향리(鄕吏) 현호준(玄虎俊)은 전라 감사의 배리
(倍吏)라 자칭하여 선문(先文 관리 출장의 도착일을 미리 알리는 공문)을 발송하기도 하다. 본도의《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를 나누어 좌ㆍ우 순찰(巡察)을 두었는데, 이성임(李聖任)을 좌순찰로 했다. 당시 적병이 경상 좌우도
에 가득 차 있어서 호령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어명이 내린 것이다.
○ 초유사(招諭使)가 다음과 같은 통유문(通諭文)을 내다.
해적이 도량(跳梁)하여 우리 성지(城池)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우리 생령(生靈)을 도륙하였으며, 동서로 충돌하
면서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였으나, 67읍 중에서 한 사람도 충의를 제창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나라의 치욕을
씻은 자가 없었고 우두커니 앉아서 온 고장[道]을 왜적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습니다. 종묘 사직은 깃술[綴旒]
보다 위태롭게 되었고 정기(正氣)라곤 쓸은 듯이 없어져 국토[山河]엔 수치만이 안겨 있으니, 무릇 혈기를 가진
자라면 누군들 통분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본관은 어명을 받들고 이 땅에 와서 눈물을 뿌리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이 왜적과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여러 읍이 무너져 달아난 끝에 병력은
이미 꺾여진 터인지라 빈 주먹을 뻗고 흰 칼날을 무릅쓰면서 홀로 서서 분개하는 것입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귀하는 여염에서 분발하고 일어나 의병을 불러모아 가지고 강중(江中)에서 왜적의 배를
섬멸하여 의병의 명성을 한 고장에 날려 사람마다 기운을 돋구었다 하니, 선대부(先大夫)께서 훌륭한 자손을
두었다고 하시겠습니다. 그 뜻을 끝까지 관철하기에 힘쓰고 의병을 더욱 확장하여 역내(域內)에서 돼지 같은
왜적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도탄 속에서 구출하여, 위로는 임금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충효의 가문을 빛낸다
면 또한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본관이 비록 노둔하고 졸렬하기는 하나 충의가 천성에 뿌리박고 있으니,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일에
있어서는 감히 남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동지를 규합하여 의열(義烈)로써 그들을 격려한 다음 족하(足下)들과
더불어 좌우로 제휴하여 함께 하늘을 받치고 태양을 맑히는 공을 이룩하기 원하고 있습니다만 귀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살아서는 충의로운 선비가 되고, 죽어서는 충의로운 귀신이 되는 일이니 귀하께서는 노력하십
시오. 의령(宜寧)의 곽 의사(郭義士)께 내림.
○ 평의지가 송도를 함락하고 다시 해서의 여러 고을을 함락해서 깡그리 불타 없어지다.
○ 조정이 서경(西京 평양)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고[駐蹕]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팔도에
반포하다.
조종이 창업해 놓은 기업(基業)에 자리잡고 편안하게 지내느라 위험이 닥쳐올 일을 잊고 있다가 이미 전쟁의
핍박에 직면해 버린 이때 원량(元良)을 왕세자로 하고 신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노라. 왕위가 비록 불안하긴
하지만 난시(亂時)라 하여 어찌 경사를 잊겠는가. 이에 파천길을 옮겨야 하는 날에 즈음하여 널리 고유(告諭)하
는 글을 선포하노라. 못난 이 몸이 명철하지 못하여 국가의 다난한 때를 만났다. 25년 동안 조심하고 두려워
하면서 스스로 내 마음을 다하려 하였으나, 억만의 생령이 나를 떠나 버리니 앞으로 닥쳐올 백성의 원망을
어찌하리오.
다행히 이번에 인지(麟趾 세자를 가리킴)의 노래를 널리 폄은 실로 조종의 가호(加護) 있으심에 힘입은 것이로
다. 백성을 무육(撫育)하는 방법에는 비록 부끄러움이 있지마는 왕세자를 세우는 것은 마땅히 일찍 해야 되는
줄로 생각하노라. 책봉의 예(禮)는 근엄하게 해야 한다는 한신(漢臣)의 장주(章奏)가 한갓 잦았거니와 날짜를
오래 늦추면 범진(范鎭)의 머리털이 허옇게 돼버린다. 다만 이 야만 오랑캐의 외침(外侵)이 마침 국내(國內)가
어지러운 틈을 타고 빚어져, 수도를 침범하고는 사방으로 파급되어 여러 성의 장벽이 일제히 무너졌다. 재앙이
내 신변에까지 다가와 칠묘(七廟)의 의관(衣冠)이 옮겨졌으니 나라의 운명은 다급하고 인심은 두려워하기만
한다. 내 어찌 양위(讓位)를 부질없이 고집하겠는가. 이때야말로 세자를 정하는[定本] 일을 서둘러야 할 시기인
것이다.
둘째 아들 광해군 혼(琿)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철하며, 학문은 정밀하고 민첩하며, 어질고 효성스러움
이 일찍부터 드러나 오랜 동안 억조 백성들의 촉망을 받아 왔고, 그들은 또 그의 덕을 구가(謳歌)하면서 그에
게 귀의(歸依)하기를 생각하여 왔으니, 그는 선왕의 왕위를 계승할 만하다. 이에 그를 세자로 진봉(進封)하고
인하여 그로 하여금 군사를 위로하고 나라를 감독하게 하노라. 이 일이 비록 창졸간에 거행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 계획은 사실 전에 정해진 것이니 모든 백관(百官)들은 내가 우연히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 말라,
나라의 근본이란 본래 급작스러이 처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에 평양에 와서야 비로소 중외(中外)에
반포하게 되었다만, 전에 서울에서 이미 모든 백관의 축하까지 받았던 것이다. 온 나라 안[關中]에 소해(小海)
의 은택이 미쳐 있고 길에서는 전성(前星)의 광휘(光輝)가 바라보인다. 황천(皇天)도 우리 조종을 보우하는데
사직(社稷)인들 어찌 한쪽 구석 땅에서 편안하겠는가. 적의 혼이 이미 가 버리자 한강의 바람과 물결이 맑아지
기 시작하였고, 관군이 분발하려 마음먹자 우리 진터가 확청(廓淸)되어 간다. 용루(龍樓)에 문침(問寢)하는 예절
이 갖추어질 것이고, 학금(鶴禁)은 구도(舊都)의 위의를 회복할 것이다.
아! 신민은 내가 고하는 뜻을 살펴 알아서 태자를 위해 죽음을 바치고 나 한 사람의 수치를 남기지 않게 하기를 원하노라. 성심으로 널리 고하니, 너희들은 다 나와서 들어 보아라. 아! 큰 강을 건너는 데 그 나루터조차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것과도 같구나. 어려움을 구출하기 위해 원자(元子 즉 왕세자)를 공경스러이 보호하
라. 현명한 계승자를 택하여 세움으로써 사람들의 기대에 따른 것이다. 후일의 승평(昇平)은 실로 오늘의
이 일에 말미 암는 것이다.
○ 경상도 영천(永川) 사람 진사(進士) 정세아(鄭世雅), 신녕(新寧) 사람 봉사(奉事) 권 응수(權應銖), 하양(河陽)
사람 봉사 신해(申海), 고성(固城) 사람 봉사 최강(崔堈)이 다 군사를 모집해서 왜적을 토벌하다. 정세아가 그때
나이 67세였다. 왜적이 막 본성(本城)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정세아가 좌수(座首) 유몽서(柳夢瑞), 생원(生員)
조희익(曹希謚) 등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아 가지고 왜적을 잡아 목 벤 것이 무척 많았다.
그 후 성을 회복하고 큰 승리를 거둔 것은 다 정세아 등이 먼저 나서서 일한 힘이었다. 권응수는 애초에 수영
(水營)의 군관으로 자제와 노복을 거느리고 상도(上道)의 토적(土賊)을 목 베어 죽이기도 하였고, 요로에다
군사를 잠복시켜 흩어져 다니는 왜적들을 목 베어 죽이기도 하였으며, 장정들을 모집하여 혹은 요격(邀擊)하고
혹은 추격하곤 하여 일찍이 두려워하고 피한 적이 없었고, 누차 습격도 당했으나 말[馬]이 씩씩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초유사가 그를 의병대장으로 하였던 것이다. 최강은 젊어서부터 글을 해득
했고 늦게야 무과에 급제하였다. 담(膽)이 커서 무인이 승진 청탁 따위를 하는 짓을 수치스럽게 여겼고, 한편
성질이 강직해서 자기 뜻을 굽혀서 남에게 따르질 못했다.
이때에 와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군사는 비록 적었으나 그들한테서 인심을 얻었으며 전투에 당해서는 자신이
앞장서서 싸워 정기룡(鄭起龍)ㆍ안신갑(安信甲)과 함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많은 사람을 통솔하는 재주에
있어선 이들보다도 나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운봉 현감(雲峯縣監)이 다음과 같이 치보(馳報)하다.
이번 5월 24일 자시에 도부(到付 문서가 도착한 것)한, 5월 23일 진주(晉州)에서 성첩(成貼 책임자가 문서에
서명하여 그 문서의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것)한 경상 초유사의 비밀 전통(傳通 차례로 서로 전하는 통문)에
말하기를, “당일 창원(昌原)에 사는 황봉찬(黃奉贊)의 종 침향(沉香)이 본 부사(府使)에 현납(現納)한, 퇴로한
호장[戶長] 황중명(黃仲明)이 5월 22일에 성첩하여 고목(告目)한 속에, ‘본부(本府)에 머물러 진수(鎭守)하고
있는 왜인은 2백여 명이나마, 늘 동리에 왜적이 혹 백여 명이 떼를 지어 횡행하고 미포(米布)와 잡물(雜物)을
깡그리 가지고 갈 뿐 아니라, 이달 22일 김해에서 온 왜적의 말에 의하면 당일 부(府)에 들어와 9백여 명을
받아들여 사용하며, 전라감사ㆍ어사ㆍ도사ㆍ찰방 네 행차의 칭호로 그 도에 나갔다 오고 또 부중(府中)에 머물
러 있기도 하며, 함안(咸安)ㆍ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단성(丹城)ㆍ산음(山陰)ㆍ함양(咸陽)ㆍ운봉(雲峯)ㆍ남원(南
原)ㆍ임실(任實)ㆍ전주(全州)에 선문(先文 출발하기 전 먼저 도착 일자를 알리는 글)을 내어 그곳을 향해 갈
것을 차례로 전통하였고, 동 행차의 배리(陪里) 현호준(玄虎俊), 마두(馬頭) 이녹상(李祿祥)이 당일 배행(陪行)할
것을 예정하고 계획하였다가 어제 비가 내려 오늘 떠나는 것이라고 하며, 다른 왜적은 혹은 웅천(熊川)의 길로
해서 혹은 김해의 길로 해서 혹은 백여 명 혹은 50여 인이 잇달아 부에 들어가고 혹은 서울로 올라간다.’ 고
고목이 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이며, 왜적의 선성(先聲)은 믿을 수 없다고는 하나 우리나라 노리(老吏)가 방금
왜적 가운데서 왜적이 하는 바를 본 것이 이러하니, 이 고목과 같다면 왜적이 전주로 향해 가는 계획은 거짓
이 아닌 것 같은데, 호남의 장병들은 쓸은 듯이 내지(內地)에 근왕하러 갔으니 극히 우려된다.
차례로 전통하여 방비하고 조치하여 날마다 새로이 변란에 대비하되, 본도의 순찰사와 좌우 수사가 있는 곳에
모두 치보하여 앞의 일을 전통할 것이다. 이것 역시 함안의 가장(假將) 이향(李享)이 진고(進告)한 것인데, 왜적
으로 전라 감사를 칭호하는 자가 이미 함안ㆍ의령ㆍ정진(鼎津)에 도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황중명의 고목이
과연 거짓이 아니니 참고하여 시행할 것이다. 이상 순찰사에 보고함.
○ 세자에게 다음과 같이 하교하다.
큰 물을 건너는 데 나루터 없어 바야흐로 배와 노로 건널 바를 계획하고, 넘어진 나무에 싹이 돋은 것 같아서
오직 나랏일을 부탁하는 데 마땅한 사람 얻은 것을 다행하게 여겨, 이에 군사와 군정의 권한을 맡겨 부흥의
대업을 이룩하기 바란다. 돌아보건대 나는 덕이 엷은 몸으로 외람되이 나라의 큰 기틀을 지켜, 음우(陰雨)가
내리기에 앞서 뽕나무 껍질을 거두는 데 경계함이 있어서 매양 깊은 밤중에 썩은 새끼줄로 말을 모는 것같이
조심하였으니 어찌 백성의 병폐를 소홀하게 하였겠는가. 그러나 어찌 생각하였으리오. 바다 섬의 추악한 오랑
캐가 사람과 짐승이 본성을 달리함을 생각지 않고, 처음에는 상국(上國 명(明) 나라)에 유감을 품고 하늘을
향해 활을 당겨 쏘려 하다가 끝내는 우리나라에 앙화를 전가하여 감히 사람을 씹는 입을 움직여서, 모든 백성
들을 거의 남김없이 유린하고 서울에까지 급히 충돌해 온 것이다. 칠묘(七廟)가 불타 소진되었으니 폐허가
된 데 개탄함을 견디지 못하겠고 삼궁(三宮)이 별같이 사방으로 흩어져 파천하는 어려움을 함께 하였으니,
이미 사람과 귀신의 분노가 극도에 다다랐고 섶에 누워 쓸개를 핥으면서라도 그 원수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비록 나라의 운이 불행해서라고는 하지마는, 진실로 내가 덕이 적고 어리석어 그렇게 된 것이로다.
윤대(輪臺)에서 과오를 뉘우침이 이미 심하나 백성들은 그 덕을 알지 못하고, 봉천(奉天)에서 자기를 허물함이
한갓 간절하나 말이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어디로 돌아갈 건가’ 하는 원한은 바야흐로 깊고 깊은 물에
임하는 것 같은 두려움은 점차로 극심해지니, 제사를 주관하여 신주를 받들 중대한 자 아니면 나라를 일으키
고자 하는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음을 생각하노라. 세자 혼(琿 광해군)은 훤칠하고 숙성하며 그의 인효(仁孝)는
본래부터 알려져 뭇 아래 사람들이 아껴 추대하니 넉넉히 중흥의 운을 족히 찬할 수 있는지라, 사방의 사람들
이 그를 구가(謳歌)하여 다들 이르기를, “우리 임금의 아들이시로다.” 한다.
왕위를 물려줄 계획은 오래 전에 결정하였고, 군국의 대권을 총수(總帥)하는 명령을 의논할 수 있도다. 이에
혼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섭리하게 하노니, 무릇 관작을 제배(除拜)하고 상벌을 시행하는 등의 일을 편의
에 따라 스스로 결단하게 하노라. 아! 영무(靈武)의 의기(義旗)를 돌려와 이 나라의 건곤(乾坤)이 다시 열리는
것을 보게 되기를 바라거니와, 미앙궁(未央宮)의 수주(壽酒)를 놓고 부자가 다시 만나 기뻐할 때가 속히 오기를
목놓아 기다리노라. 나라 사람들은 각각 세자를 돕고 추대하는 마음을 격려하여 함께 평화를 가져오는 일을
이룩하라. 너희들 정부는 중외에 뚜렷이 일러주어 다들 이 일을 들어서 알게 하라. 그 때문으로 이에 교시하노
니 마땅히 잘 알리라 생각하노라.
○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이 은진(恩津)에 도달하여 본부(本府)의 선비들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다.
부관(府官)이 의병을 일으키기를 위하여서로다. 현풍(玄風)에 사는 선비[士子] 곽재우(郭再祐)본래는 현풍 사람
인데 지금 의령(宜寧) 처의 고향에 산다 가 왜적에게 완전히 함락된 땅에서 단지 촌락의 군사를 거느리고
재차 적병을 구축(驅逐)하여 왜적의 배가 다시는 낙동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는 바 그 의로운 명성과 높은
절조를 듣기만 하여도 모르는 결에 탄복하여 멀리서 배례(拜禮)하였다.
본도는 아름다운 풍속의 일컬어지는 것이 여러 도의 으뜸이로되 아직도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으므로
극히 수치스러웠는데, 듣자하니 김능성(金綾城)익복(益福)이 그때 본현을 맡고 있었다. 이 뜻을 같이 한 사람들
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왕업(王業)을 회복하려 한다 하는바 이로서도 족히 이곳에 인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의관 자제(衣冠子弟)들의 집에 통문(通文)하고 의논하여 나라가 2백 년 동안 휴양해 준 은혜를 생각하고
한 도의 전체가 충의를 느끼는 이름을 이룩하게 된다면, 영광이 한 몸에 가해지고 은택이 만 대에 미치며,
청사에 새겨진 공명(功名)이 사람들의 보고 듣는 가운데 밝게 빛날 것이니, 급속히 거행해서 신민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이다.
○ 대군(大軍)이 서울에 다다른 뒤에 호남의 각 관아에서 남은 장정 및 품관(品官)ㆍ교생(校生)ㆍ팔결(八結)ㆍ
연호(煙戶) 등의 군사들을 다 모아서 성의 방어에 대비시키다.
○ 경기도의 문신(文臣) 우성전(禹聖傳)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 병마절도사가 통지하는 사연으로 순찰사에게 도부(到付)한 관내(關內)에, 지금 도착한 충청 감사의 관내에
전하기를, “행재소의 도로가 갑자기 막혀 소식이 통하지 않으므로 사람을 모집해서 계본(啓本)을 가지고 상경
케 하였더니, 당일로 동인(同人)이 비변사(備邊司)에 가지고 관내에 하교하신 것이 있었소. 5월 9일의 강원
감사의 글에, ‘전문(傳聞)하건대, 성에 들어온 왜적은 발이 붓고 기운이 빠져 밤에는 흩어져서 곤히 잠을 잡니
다. 운운.’ 하거늘, 죽기를 무릅쓰고 싸울 군사 50명을 상을 내걸고 모집하여 하늘에 고하고 함께 맹세케 하여
어두운 틈을 타서 왜적을 마구 찍어 죽이려고 8일에 성 안으로 들여보내려 했더니, 5월 8일 도검찰사(都檢察
使) 이양원(李陽元)의 서장(書狀)에, ‘군관 유정언(柳廷彦)을 시켜 성 밑에 잠입하여 왜적의 기세를 엿보게 했더
니, 왜적의 기세가 급히 쇠해서 낮에는 오로지 약탈을 일삼고 밤에는 흩어져서 곤히 잠자느라 우리들이 왕래
하는 것도 모른다 하며, 신의 서울집 종이 왜적 가운데서 빠져 나와 말하기를, 신의 집 역시 왜적에게 약탈당
했는데 왜적의 형상을 보니, 단지 단검(短劍)을 가졌을 뿐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된 자들이 반이나 섞여서 흩어져 나가 도적질을 하고, 어떤 사람이든 총이나 활을
쏘면 검을 풀고 목숨 살려 주기를 요구합니다.’ 하기에, 그 기세가 곤궁한 것이 두려워할게 못 될 듯하여 곧
50명의 군사들과 더불어 많은 상을 걸고 결속하고서 10일을 기해 성에 들어가 왜적들을 마구 찍어 죽이기로
하였더니, 5월 10일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서장에, ‘왜적의 무리들은 욕기(慾氣)가 방자스러워 꺼리는
것이 없는데, 적은 수로 출몰하여 약탈하던 무리 또한 우리나라 사람에게 많이 피살되니, 우리나라 사람 중에
왜적을 보면 다들 쏘아 죽이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당초에 우리나라는 헛된 소식에 두려워 동요하여 겁내지 않는 자가 없었고, 어리석은 백성 중에는 혹 애걸하
여 구차스럽게 살아날 계획을 하는 자가 생기고는 했는데, 왜적이 서울을 점거하게 되자 온갖 하는 짓들 치고
해괴하지 않은 게 없어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다 그 해독을 입기에 이르렀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왜적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들 역시 흩어져 가버렸습니다. 그 시끄럽게 외치고 드나들던 자들 치고 기운이 빠지고
발이 붇지 않은 이가 없어 호통치던 기세는 없어지고 목숨을 내놓은 도둑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전날에 두려
워하던 자들은 분격하고, 살아나기를 꾀하던 자는 원망하고 성내어 다들 왜적을 무찌를 것을 생각하여서 제창
으로 보복하기를 생각하는데, 서울에서 왜적에 굽혔던 무리들 역시 왜적들을 저격할 계획을 합니다.’ 하였고,
5월 10일 검찰사의 글에, ‘왜적 가운데 포로가 되었던 사람 정인(鄭仁) 등 3인을 잡았는데 그 모두가 말하기를,
「왜적으로 철환(鐵丸)을 가진 자는 4, 5인 중에 겨우 한 사람이고, 한 사람이 가진 철환의 수효는 15, 16알에
불과하다. 왜적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으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가 5분의 1이 남아 있고, 여러 왜적이 동리
에 갈라져 있으면서 평상시같이 숙면하면서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아서 아침에 세수를 하고서야 비로소 칼을
찬다. 장수는 대낮이 되어야 일어나고 혹은 10명씩 혹은 20명씩 모여 있으면서 별로 진을 치거나 변고에 대비
하자는 생각이 없다.」하였습니다. 대개 왜적의 무리들이 재물을 얻고난 후에 소와 말을 많이 약탈해서 한강으
로 보내는 걸 보니, 군사를 퇴각시킬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였소. 이상의 갖가지 서장은 계하한 것이니,
이에 앞서 우리나라 인민들이 왜적의 소식을 잘못 듣고 서로 겁을 내어 싸우지도 않고서 스스로 무너졌으니
모든 것이 다 극히 통분스러운 일이오. 지금 왜적의 기세가 이러하니 무릇 의기(義氣)가 있는 자는 분발하고
일어나서 왜적을 무찌르고 왜적을 잡아야 할 것이오. 각 도의 각 관원에게 급속하게 알려 주도록 하시오.
운운.” 하다.
○ 전 봉교(奉敎) 정경세(鄭經世)경상도 상주(尙州) 사람이다. 가 초유사(招諭使)에게 다음과 같은 계(啓)를 바치
다.
작고 추한 것들이 중국을 어지럽히는 해독을 쌓아 수치스럽고 욕됨이 이미 종묘에까지 미쳤습니다. 한낱 필부
이기는 하나 목숨을 바치겠다는 마음을 지니고 계획을 감히 사신께 고하고자, 계시는 천막을 바라보며 눈물을
뿌리고 울면서 글월에 부쳐 성심을 피력하는 터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국가가 아름다운 덕을 전해온
것은 실로 고대의 상(商) 나라와 주(周) 나라에 그 성대함을 비길 것입니다. 신령하고 성스러운 임금이 왕위를
계승해 내려온 13대 동안 위대하게 드러나고 위대하게 왕업을 계승하여 물품이 풍부하고 백성은 편안하였습
니다. 2백 년 동안 모든 것이 풍부하여 군의 기록은 병란에 익숙하지 않았고 (즉 전쟁이 없었다는 말임) 백성
들의 생업은 단지 농경과 양잠을 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오. 숨겨진 섬의 흉악한 괴수[凶酋]가 감히 나라를 무시하는 교활한 계교를 마구 부려
자기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아 악을 쌓은 것이 이미 궁(窮)과 한(寒)보다 심하였고, 그 군대를 몰아다가
우리 언덕에 버티고 있으니 불공함이 훈육(獯鬻)과 밀(密) 같은 점이 있습니다. 그 군사를 일으키는 데 핑계로
잡을 만한 말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여,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으로 우리나라를 책하였습니다. 연교(燕郊)에서
말을 키우겠다고 소리쳐 말하니, 묵특[冒頓]의 서신이 지나치게 교만한 것이요, 덕진(德鎭)으로 교질(交質)해야
한다고 말하니 포악한 진(秦)의 공갈이 무궁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다 그 끝없는 흉악함에 성내니 하늘
의 뜻이 어찌 역적을 돕는 데에 용납하겠습니까.
무릇 군대란 의리로 보아 곧지 못하여 굽으면 기운이 쇠하기 마련이고 소나기는 아침 내 계속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우리 임금께서 진노하여 왜적을 징벌하도록 명령하였으니 태산이 어찌 알을 짓눌러 깨는 일을 힘들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어찌된 국운입니까. 위태로운 때를 당해서 사람의 모의가 좋지 못하여 융성한 때를
빼앗았으니 외적을 막는 성을 구축하였으나 그것이 나라에 무슨 조그마한 이익인들 있겠으며, 거기다 가르치
지 않은 백성을 모아다가 그들이 반드시 흩어져 버려 도저히 버텨내지 못할 땅을 준다는 것은 본래 삼척동자
조차도 부끄러워하는 일입니다.
조정의 계획이 그 마땅함을 잃은 것이 이미 그러했거니와 변방을 지키는 신하가 군율(軍律)을 범함이 어찌
그다지도 심합니까. 병사(兵使)가 군영의 군사를 옹유하고 있으면서도 머물러 꺽이어 지척에서 부산(釜山)을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방백(方伯)은 왜적의 창끝을 피해서 교령(嶠嶺)에 머뭇거리며 호남ㆍ호서 경계에 있고,
그 아래로 주목(州牧)ㆍ부사(府使)에서 군수ㆍ현감에 이르기까지 칼날을 맞대고 창끝을 겨루어 본 일도 없이
아기(牙旗 상아로 만들어졌다는 대장의 기)는 들판 가운데에 끌리고는 하였으니, 이들은 평소 부절(符節)을
차고 성군의 은덕을 생각하고 살다가 위급한 때에 와서 그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사마의 법[司馬之法 군법
(軍法)]이 만약 시행된다면 이런 사람들의 고기를 먹게 될 것입니다.(즉 사형을 가해 주살될 것이라는 말)
이러한 자들의 무책임한 소행 때문에, 마침내 새나 다닐 험준한 요새지가 지켜지지 않아 영남의 생령(生靈)들
이 도륙되어 썩어 문드러지게 하였고, 임금이 몽진하니 빈교(邠郊)의 행색이 참담했습니다. 피비린내와 연기가
종묘의 악기를 그을리고 물들였으며, 원한에 찬 귀신들은 가시나무 덤불 속에서 소리쳐 울고 있습니다.
말을 하면 다만 마음 아픈 것을 더할 뿐, 고래로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태평세대에 살아남은
좁은 골목길의 지친 백성들로 밭을 갈고 우물을 파서 사는 것도 임금님의 인자하신 은혜가 아닌 것이 없으니,
사방이 흔연히 성군의 교지를 받아 풀 속에 엎드리고 물구렁에서 자며 구차하게 살아남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였으리오. 난리를 만나게 되어 집이 부서진 것은 잠시 버려둔다 하더라도 나라가 당한
치욕을 어디서 씻을 수 있겠습니까. 병법(兵法)을 모르면 참된 선비가 아닙니다.
설사 건곤을 변하게 할 웅대한 군략이 없다고 하더라도 오직 하늘에서 내려준 진정한 마음은 누구나 다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니, 누구인들 충군 애국하는 본성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이에 원수와 같이 하늘을 이고 사는
분함이 절박하여 마침내 창을 베고 잠을 잘 각오로 왜적과 싸울 모의를 하여 동지들을 모아 작전 계획을
하고, 흩어져 도망간 군졸을 불러 거두어 요해지를 택해서 복병을 설치해 왜적을 요격하여 흉악한 무리를
쳐 없애기로 한 것입니다. 다만 이 목사나 수령들이 피해서 달아난 끝이라 바로 민심이 극도로 흩어져 있으니,
군기(軍旗)와 군고(軍鼓)를 주관할 자가 없어 군중에 지휘할 사람이 없고 기율을 엄하게 하기 어려워 전진에
임해서 군사들이 달아나 버릴 우려가 있으므로, 세울 만한 좋은 계책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막대한 근심거리
가 되고 있습니다.
외람되이 생각하건대, 우리 주(州)의 지형은 사실 우리나라의 하늘이 내려 준 부고(府庫)입니다. 예의(禮義)가
행해지고 민간의 습속이 돈독하고 후한 것은 신라 1천 년의 여풍이 있음이요, 창고가 차 있고 호구는 많은
것은 진한(辰韓) 70주의 중심되는 요지(要地)인 것입니다. 크게 집중되는 여러 진(鎭)을 모을 수 있고 긴 강의
상류를 둘러 있으니, 하북(河北) 지역이 비록 흩어지고 수복되지 못했다고는 하나, 어찌 한 사람의 의사(義士)
가 없겠습니까. 진실로 수양(睢陽)을 포기하고 지키지 아니한다면, 이는 1천 리 되는 강회(江淮)의 땅을 없애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좋은 계략을 헤아려 보건대, 이 성을 굳게 지키는 것 이상이 없습니다. 진실로 좋은 장수를 택해서
진무(鎭撫)케 하고 그로 하여금 의로운 외침을 피력하여 주선합니다. 정병을 골라서 낙동강[洛水]의 나루터를
지켜서 바닷길로 수송해 돌아가는 뱃길을 끊고, 곁 군(郡)에 격문을 내어 용추(龍湫)의 좁은 목을 거점으로
버티게 하여 고개를 넘어 도망해 돌아가는 관문을 막습니다. 가까이는 낙동강 좌안의 여러 주와 연락하고
멀리는 호남의 큰 군영과 호응해서 성세를 합해 멀리 몰고 간다면 군사들의 기세는 절로 배가할 것이요,
충의를 내걸고 곧장 전진한다면 그때에는 뭇 백성들의 마음이 다 돌아올 것입니다. 비록 바다를 건너가서
수길(秀吉)의 머리를 구하지는 못한다 하여도, 어찌 한강에 나아가 인의의 칼로 무도한 왜적의 고기를 저미는
것이 또한 어렵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영공(令公)께서는 충신(忠信)이 만맥(蠻貊)의 땅에서도 행해지고 인의(仁義)는 성현으로부터
배운 바입니다. 악비(岳飛)가 갓 금패(金牌)를 받자 3군이 우레같이 통곡하였고, 장준(張浚)이 다시 황하가에
부임해 오자 백성들은 이마에 손을 얹고 좋아하였습니다. 영공의 마음 속은 귀신도 알아 증명하고, 군기[旋旗]
는 부로(父老)들의 바람[望]이 매여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우리 무리가 발돋움하여 기다리는 것은 다른
고장에 비한다면 피나는 정성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1백 년 동안을 두고 이룩해 놓은 문물이 남김없이 없어진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긴다면 대의(大義)를 창도하여 분발하기를 생각하고, 한때 의로운 기운을 의탁할 곳이
없음을 염려하면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어디로 돌아갈지를 모르겠습니다.
유명한 장수를 바라나 만나기가 어렵고, 조그만 마음을 안고서 스스로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지성이면 사람
이 움직이지 않는 예가 없는 것이니 영공의 계극(啓戟 고관을 전도(前導)하는 붉은 칠을 한 창으로, 여기서는
초유사 자신을 두고 한 말임)이 어찌 내임(來臨)하는 것을 꺼리겠으며, 뜻을 지닌 자는 일이 반드시 이룩되는
것이니 비린내 나는 것들을 신속히 쓸어버릴 수 있을까 하나이다. 부디 광야에서 외뿔소도 아닌데 헤매고
있는 우리들을 가련하게 여겨, 저 들판의 당신의 얼룩말을 돌려 우리가 있는 곳으로 빨리 와 주소서.
아! 무릇 이 바다에 둘러싸인 땅 안에 살아있는 백성이면 누구인들 이씨(李氏)이 적자(赤子)가 아니겠습니까.
해바라기 같은 한 조각의 정성스러운 충심은 나라의 녹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에 따라서 얕고 깊은 차이가
생기는 것이 아니요, 7척의 초개 같은 몸으로 왜적을 제거하느냐 하지 못하느냐를 보고서 사생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죽백(竹帛 역사)에 이름을 남기느냐를 따질 것 없이, 다만 창과 칼 사이에 목숨을 바쳐야만 할 것입
니다. 동해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일이 이룩되지 않으면 그때에 가서 그곳에 빠져버려도 늦지 않을 것이고,
북극성이 실로 머리 위에 임해 있으니 의(義)는 마땅히 취해야 하고 사는 것은 구차하게 굴지 않을 것입니다.
사뢸 말씀은 대략 이상과 같으니 나머지 말은 이만 줄입니다. 영공의 안색을 받들게 될 때를 기다리며 마음속
을 삼가 진술합니다.
24일. 이광(李洸)의 군대가 온양(溫陽)에 머물다. 충청 순찰사 윤선각(尹先覺)이 방어사 이옥(李沃), 병사 신익(申
益)과 더불어 먼저 이미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다가, 이때에 와서 두 남도 순찰사와 같이 한때에 서울로
향하였다. 곽영(郭嶸)은 군대를 거느리고 공주(公州)를 지나 천안(天安)으로 향하였다.
26일. 대군이 다 진위평(振威坪)에 모이니 무릇 13만이다. 깃발이 해를 가리고 군량을 운반하는 대열이 1백여
리에 늘어섰다. 경호(京湖)의 피난민이 양떼를 몰고 가는 위세를 잘못 믿고 혹간 돌아와 모이는 자들도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신호열 (공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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