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불국사'하면 누구나 다보탑과 석가탑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창녕 술정리 삼층석탑하면 동(東)삼층석탑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탑을 동탑(東塔)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사찰에 쌍탑이 건립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행정구역 상 술정리 내에 2기의 석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보' 대접을 받는 동삼층석탑에 비해 서삼층석탑은 이만저만한 찬밥 신세가 아니다. 창녕을 찾는 대부분의 답사자들도 동삼층석탑은 꼭꼭 눈여겨보고 가지만, 서삼층석탑은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필자도 여태까지 서삼층석탑의 존재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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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정리 서삼층석탑(경상남도 지방문화재 제520호) 술정리 서삼층석탑은 보물 제 520호이다.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309-1에 있는 높이 510cm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통일신라 시대의 탑이다. 술정리 동삼층석탑과는 약 1km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보는 석탑이지만, 두 탑이 쌍탑으로 건립된 것은 아니며 건립연대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또한 동 삼층석탑은 국보로 지정되어 (제 34호)있는 반면 서 삼층석탑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은 신라석탑의 전형을 잘 계승하고 있으나 기단부의 결구수법 및 안상의 족각으로 보아서 시대가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
ⓒ 박종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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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건립시기부터 따로국밥 신세였던 탓에 석공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는 동삼층석탑과 뭔가 모르게 품격이 떨지는 서삼층석탑은 견줄 바가 아니라는 평이다. 현재 위치해 있는 환경도 판이하게 다르다. 동탑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국보급답게 새롭게 단장했다. 그에 반해 서삼층석탑은 한국통신 창녕지사 건물 우측 골목으로 접어들면 농로가 나오는데, 그 근처 논 가운데 외롭게 서 있다. 국보급은 그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건만, 서삼층석탑은 여간 홀대를 받고 있는 게 아니다. 탑의 위상도 사람 사는 이치와 똑같다.
그러나 어쩌랴. 문화재에 대한 소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어정잡이 눈에는 오히려 서삼층석탑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여럿 속에서 대접받아가며 우쭐거리는 동삼층석탑보다 외로이 고적감에 휩싸여 있는 서삼층석탑에 더 애착이 간다. 게다가 답사자의 눈에 두 탑은 그렇게 품격차이가 나지 않는다. 전문가의 눈은 탑 자체를 마치 해부하듯이 낱낱이 헤집어 보았기에 탑의 품격이 다르게 매겨졌겠지만, 일반인의 눈엔 그게 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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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정리 서삼층석탑 명칭에 대한 오해 술정리 서삼층석탑은 술정리 동삼층석탑과 나란이 서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동삼층석탑과는 다소 멀리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이는 절터의 이름은 모르고 하니 발견된 장소의 지명을 따라 그저 명명된 성의없는 이름짓기 방식 때문에 생긴 오해다. 비록 술정리 동삼층석탑과 견주어져 폄하를 받기도 하나, 이 탑 또한 신라시대의 아름다운 석탑임에 틀림없다. 서삼층석탑은 높이가 4.5m로 동삼층석탑보다는 작지만 균형잡힌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보물 제5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삼층석탑과 서삼층석탑은 둘 다 각각 마을안 작은 공터에 있으며, 탑주위는 마땅히 쉬거나 놀 곳이 없는 노인들과 아이들에게 쉼터나 놀이터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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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층석탑은 창녕읍 술정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높이가 5.1m, 경상남도 지방문화재 보물 제520호다. 같은 절터의 술정리 동삼층석탑(昌寧述亭里東三層石塔, 국보 제34호)과는 대조적이다. 그 이유는 쌍탑이 아니고 별개의 탑이며, 건립시기가 다소 늦고, 탑 전체를 아우르는 조화미가 다소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탑의 구조를 살펴보면 2중 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 삼층석탑으로, 신라 전형양식을 따랐으나, 기단의 구성에 특이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한데 붙여서 만든 8매의 석재를 조합한 것인데, 양쪽 모서리에 우주(隅柱 모서리기둥)를 모각(模刻)한 석재 4매를 네 귀에 배치하고 그 사이사이에 탱주(撑柱 받침기둥) 2주씩을 모각한 중간석 4매를 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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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정리 서삼층석탑 규모와 조각수법 서삼층석탑의 기단은 2중으로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중석을 한 돌로 하여 모두 8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는데 중석은 각 면에 우주(隅柱 모소리 기둥)와 탱주(撑柱 가운데 기둥)가 두 개씩 모각(模刻)되었다. 갑석은 윗면에 약간의 경사가 있고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괴임이 있다. 상층기단 중석은 8매의 부재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앙에는 작은 판석을 한 장씩 끼웠다. 중석에는 우주와 탱주가 없이 각 면에 안상을 2구씩 조각하였다. 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아래에 부연이 있고 윗면에는 2단의 각형 괴임이 있다. 탑신부는 각 층 옥신과 옥개를 따로 만들었는데 옥신석에는 우주가 있으며 옥개석의 받침수는 각 층 5단이다. 옥개석은 처마밑선이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상면에는 1단의 괴임이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남아있다. 이 탑은 신라석탑의 전형을 잘 계승하고 있으나 기단부의 결구수법 및 안상의 족각으로 보아서 시대가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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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갑석은 지대석과 마찬가지로 8매의 판석으로 되었으며, 윗면은 거의 수평이고 2단의 굄을 높게 조각하였다. 상층기단의 면석 역시 8매의 석재로 구성하였기 때문에 면마다 중간에 작은 판석을 1장씩 끼웠으며, 우주를 모각하지 않고 2구식안상(二區式眼象)을 4면에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남면 중간에 끼운 장방형의 중간석 표면에 문비형(門扉形)이 거칠게 오목새김이 되어 있으나, 후세의 조작이 아닌가 싶다. 또, 동면의 중간석은 2단이며, 북면의 그것은 2열로 갈라져 있으나, 이것 역시 후세의 보수로 보여진다.
상층기단의 갑석은 4등분된 두툼한 판석을 얹은 것인데, 처마는 짧고 두꺼우며 윗면은 거의 수평이고, 2단의 모난 굄을 높게 조각하여 탑신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은 각 층의 옥신과 옥개를 따로 만든 것인데, 옥신에는 우주를 모각한 것 이외에 다른 조식이 없으나 2, 3
층이 적당한 비율로 감축되어 안정감이 충분하다.
옥개석은 밑에 5단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었으나, 길이가 짧아서 받침 1단의 넓이와 대차가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 지붕의 곡면이나 네 귀의 반전이 약간 두드러져서 중후한 느낌의 옥개가 된 것 같다. 전각의 좌우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2개씩 남아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우주와 갑석형을 모각한 노반(露盤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과 그 위에 한 돌로 조각된 앙화(仰花)와 보주(寶珠)가 얹혀 있다.
이 탑은 기단의 결구와 조식에 특이한 수법을 구사하였으나 정연한 규율성을 잃지 않았다. 탑신부가 약간 중후한 느낌이 있으나, 그 체감률이나 기단과의 균형은 대체로 무난한 편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특징은 술정리 동삼층석탑에 비하여 그 조성연대의 차이를 나타낸 것으로 좋은 대조가 되고 있다. 이 탑도 원래 소속되었던 절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남쪽 200m 거리에 영지(影池)라는 작은 못이 있어, 이 절터와 관련된 유적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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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국보제34호) 창녕은 '제2의 경주'란 말에 걸맞게 문화유산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지금은 비록 낙후한 지역이지만 낙동강변에 발달한 평야지대인 창녕지역은 일찍이 농경문화가 싹텄으며 선사시대부터 부족국가가 들어섰습니다. 삼한시대에는 불사국(不斯國)으로, 그 후에는 비화가야로 발전하였습니다. 6가야의 하나였던 비화가야는 신라 진흥왕 때인 555년에 신라에 점령되었으며, 신라에 속한 이후에도 창녕은 그 군사적인 중요성에 힘입어 경주에 버금가는 불교문화를 꽃피웠습니다. 바로 그 한 예가 술정리에 있는 동,서 삼층석탑입니다. 술정리 동삼층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의 완성기인 8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는 5.75m에 달하며, 석가탑과 비교되는 수려한 용모를 뽐내고 있다. 술정리 동삼층석탑에는 긴장감 넘치는 직선의 미와 절제된 선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고고한 기품이 넘치는 아름다운 석탑으로 국보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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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통일신라시대 2중 기단 위에 세운 3층석탑은, 상층부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지만, 군데군데 틈새가 많이 벌어져있고 뭔가 세련되지 못하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보물이 이렇게 논길에 방치(?)되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런데 현재는 주변에 터를 넓히고 잔디를 심어놓았다). 푸대접을 받는 게 당연하다는 것인데도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지는 게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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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직교리 당간지주(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7호) 당(幢)은 사찰을 장엄하게 하는 깃발의 일종이며, 당간(幢竿)은 당을 꽂는 장대로써 종종 철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받치기 위해 만든 석조기둥 구조물이다. 이 한 쌍의 당간지주는 화강석으로 제작되었고, 높이는 대략 2.5m이다. 이 당간지주에는 간공(竿孔)이 상하 각 2개씩 파져 있고, 그 중 한 당간의 상두부는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인근에 술정리 동서삼층석탑과 탑금당치성기문비가 있어 이 일대에 큰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떤 사찰이 있었는지는 현재로서 알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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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층석탑을 뒤로 하며 찾아간 곳은 ‘직교리 당간지주’(直橋里 幢竿支柱)였다. 직교리 당간지주는 경상남도도 문화재자료 17호다. 당간은 사찰의 정문에 해당하는 곳에 세워지며, 절의 각종행사 때 이곳에 당이라고 불리는 깃발을 높게 매달아 두는 간지대(竿支臺)로 일명 짐대라고도 불린다. 당간에는 아래위로 2개의 구멍이 각각 파여 있고, 그 중 기둥 하나의 꼭대기 부분이 특이한 형태로 되어 있는데,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또 인근에 ‘탑금당치성가문비’, 술정리 동, 서삼층석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에 큰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떤 사찰이 있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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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에게 직교리 당간지주 소재려 안내해 준 김해주(68)님 직교리 당간지주가 서삼층석탑에서 북쪽으로 불과 100m 거리에 있다는 데, 표지판 안내가 없어 찾기가 참 어려웠다. 민가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주의 깊게 찾아봐야 한다. 다행히 필자는 마침 집 앞에서 참깨를 털고 있는 직교리 터줏대감 김해주(68)씨를 만나 자세한 안내를 받아 크게 발품을 팔지 않고 당간지주를 찾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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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직교리 당간지주가 서삼층석탑에서 북쪽으로 불과 100m 거리에 있다는데, 표지판 안내가 없어 찾기가 참 어려웠다. 답사를 마치고 보니 쉽게 찾는 길이 있었다. 창녕읍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맞은편 개천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작은 다리가 나오는데 두 번째 다리에서 오른쪽 골목(직교리 마을회관)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런데 민가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주의 깊게 찾아봐야 한다. 다행히 필자는 마침 집 앞에서 참깨를 털고 있는 직교리 터줏대감 김해주(68)씨를 만나 자세한 안내를 받아 크게 발품을 팔지 않고 당간지주를 찾았다. 어딜 가나 입 부조만큼 고마운 게 또 있으랴. 다음 답사코스는 창녕 석빙고다.
찾아가는 길
1. 창녕 IC->좌회전(20, 24번 도로)->1km->오리정네거리->우회전(5번국도)->1.5km->창녕 한국통신 옆 골목길-> 우회전-> 300m지점
2. 창녕 IC->좌회전(20,24호도로)->300m->우측골목입구 정차->골목안 100m-> 직교리마을회관->직교리당간지주->다리건너 구창녕공설운동장을 가로질러->100m
답사 포인트 :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술정리서삼층석탑과 직교리당간지주 일직선상 중간에 위치한다.
주변유적
진흥왕척경비, 퇴천리삼층석탑, 석비군, 창녕객사, 대원군척화비, UN전승기념비, 창녕포교당목조석가여래좌상, 송현·교동고분군, 목마산성, 화왕산성, 창녕조씨득성비, 명상의숲 고분군, 박물관, 송현·교동고인돌군, 송현석불좌상, 이은대, 명성황후유적, 하병수가옥, 술정리동삼층석탑, 술정리서삼층석탑, 창녕석빙고, 직교리당간지주, 탑금당치성문기비, 창녕향교, 하마비, 석불사석불좌상, 첨성대자지, 소두자리, 왕궁지자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