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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을 거치면서 난데없이 온 세상이 바이러스와의 사투에 진을 뺐다. 늘 곁에 있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사람들은 그제야 새삼 마주하게 됐다. ‘죽음이 멀지 않구나’, ‘주어진 삶이 소중한 것이구나’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느닷없이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돌아보게 된 것은 팬데믹이 가져다준 긍정적인 영향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기독교는 생명의 길을 전한다. 그 어떤 종교나 사상보다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 절실하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인간의 생명을 위해 자기 생명을 진실로 포기한 신을 찾을 수는 없다. 그렇게 보면 팬데믹을 막 지난 지금은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때다. 또한 이를 위해서 우리가 전하는 바로 그 생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도 무척 중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하는 생명과 일반인이 생각하는 생명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한 가지는 생명이 생명 아닌 존재(Non-living being)에서 시작됐다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이 생명을 가진 존재(living being)에서 시작됐다는 관점이다. 시작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가 기준이기 때문에 이 두 관점은 모두 방향성이 있다. 이 때문에 나는 첫 번째 관점을 상향식 관점이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하향식 관점이라 부른다.
사실 이 두 관점은 모두 생물학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과 비슷한 개념에서 비롯됐다. 상향식 관점은 생물학적 용어로 자연발생설(Spontaneous generation)에서, 하향식 관점은 생물속생설(Biogenesis)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1 말 그대로 자연발생설은 다른 생물적 기원 없이 모든 생명체가 스스로 생겨났다는 것이고, 생물속생설은 생명을 가진 다른 생물에 의해서만 생명체가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생물속생설은 프랑스의 저명한 생물학자인 루이 파스퇴르가 증명했다.2 지금은 누구나 부모 없는 자손은 있을 수 없다는 생물속생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자연발생설도 무척 긴 역사와 함께 20세기 초반만 해도 꽤나 대중적인 이론이었다. 한번 대중에게 각인된 과학 이론은 생각보다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는 좋은 사례기도 하다.
생명을 상향식으로 보는 것은 말 그대로 아래에서 위로, 즉 이 땅에 존재하는 물질에서 생명이 기원했다는 관점이다. 현대 생물학에서 생명의 가장 작은 단위는 세포(cell)다. 매우 다양한 생명체가 지구상에 존재하지만, 가장 작은 생명체는 하나의 세포가 하나의 개체가 되는 단세포 생물이다. 하지만 가장 작은 생명체인 단세포 생물도 더 작은 단위로 분해될 수 있다. 핵과 미토콘드리아, 소포체와 리소솜, 그리고 세포막 등 다양한 소기관이 그것들이다. 각각의 소기관은 세포의 생명 됨을 유지하기 위해서 각자의 고유한 기능이 있다. 예컨대, 핵은 유전물질인 DNA를 잘 보관하고, 다음 세대로 전달하기 위한 중요한 기관이다. 하지만 단순히 DNA의 저장, 보관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장된 유전정보를 RNA로, 그리고 다시 단백질로 전환하기 위한 복잡한 생화학적 기능도 역시 담당한다.3 생명체로서 세포가 살아가기 위한 모든 생화학적, 생리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은 대부분 단백질이기 때문에 일련의 이런 과정은 생물학적으로 매우 정교하게 조절되고 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조금 복잡하기는 하지만 조금 더 내려가 보자. DNA와 RNA, 그리고 단백질은 일반적으로 생명체의 실질적 기능 단위 중 가장 최소 단위라고 보지만, 화학적으로는 훨씬 더 작은 단위로 구성된다. DNA나 RNA는 탄소 원자를 중심으로 한 당(carbohydrate; sugar)과 아데닌(A), 구아닌(G), 사이토신(C), 티민(T) 등의 염기(base), 그리고 인산기(phosphate)를 기본 구조로 긴 사슬 형태를 가진다. 단백질의 경우 역시 다양한 아미노산이 긴 사슬 형태로 이어진 것인데, 각각의 아미노산도 화학적으로 역시 더 작은 단위로 구성된다. 탄소 원자를 중심으로 아미노기(-NH2)와 카르복실기(-COOH)를 기본 구조로 가지는 것이다. 보통 세포 단위는 마이크로미터(um; 106), 핵과 같은 소기관이나 DNA 같은 생화학 물질은 나노미터(nm;109) 단위까지 내려간다. 물론 각각의 화학 원자들은 그보다 더 작은 단위의 물질이며, 원자 역시 더 작은 단위로 또 쪼갤 수 있지만, 여기까지면 본고에서 이야기하려는 배경 설명으로 충분한 것 같다.
하나의 생명체는 이처럼 결국 아주 작고 작은 물질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이 작은 물질들에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크게 색다른 게 없어 보이는 이 물질들이 놀랍게도 더 정교한 구조와 구조에 적절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각각의 기능이 조금 더 큰 물질과 서로 상호작용하며, 결국에는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 과학이 밝혀 낸 것은 바로 이 사실이다. 우리가 생명체를 상향식 관점으로 보게 되는 것은 결국 이러한 현대 과학의 산물이다.
전자현미경 같은 가장 최신 과학기술 장비로도 볼 수 없는(수학적으로 계산해 추측할 수 있을 뿐) 이 작은 물질에 근거해 생명을 바라보는 상향식 관점은 언뜻 보면 무척이나 논리적이고 정교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관점은 매우 심각한 결함이 있다. 첫째는 의미(meaning)의 결함이다. 생명을 상향식 관점으로 해석하면, 생명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각각의 기능 물질이 왜 존재하는지는 물론이고 더 작은 가장 최소 단위 물질이 존재하는 이유를 상향식 관점은 제시할 수 없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많은 논쟁이 ‘어떻게’에 집중하지만, 실천적으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상 ‘왜’다. 한없이 양보해, 생명체를 비롯한 온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이 자발적으로 생겨났다 하더라도, 결국 ‘왜’에 대한 답을 얻을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상향식 관점에서도 ‘왜’에 대한 대답, 즉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생명의 존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흔히 생태계를 다양성의 개념으로 많이 접근한다. 다양한 생명체와 다양한 무생물적 환경의 상호작용이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매우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한 생명체의 존재는 전체 생태계를 위해서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현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에게 이 아름답고 소중한 생태계를 잘 전해 주려면 볼품없는 작은 생명체 하나도 아주 중요한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예는 존재의 ‘의미’와 ‘기능’을 구별하지 못해서 생겨난 오해에 불과하다.
어떤 기능이 있기 때문에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존재의 궁극적 본질과는 관계가 없다. 그 기능이 사라지거나 찾지 못하면 존재 자체가 부정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드러내 주는 아주 쉬운 예가 있다. 바로 모기다. 한여름 뜨거운 열기에 주춤하던 모기가 이 계절이 되면 오히려 극성을 부린다. 그리고 이때면 어김없이 교회학교 어린 친구들이 볼멘 소리로 묻는다. 도대체 왜 모기가 있는 줄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러고는 서슴없이 말한다. “아무 쓸데없는 모기를 하나님께서 모두 없애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무 쓸데없는’ 모기는 존재 의의를 순식간에 상실한다.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런 상관없는 존재에 불과해잔다.4 요컨대, 생명을 상향식 관점으로 보면, 본질적인 ‘의미’는 사라지고 오직 실천적 ‘기능’만 남는다.
의미가 결여돼 있기에 필연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조화로움(harmony)이다. 조금 더 쉬운 표현으로는 존중이 사라지고, 부차적으로 폭력과 차별이 발생한다. 생명을 기능으로만 이해하고, 그 기능으로만 의미를 찾기에 발생하는 문제는 모두 이 사회의 조화를 파괴한다. 놀랍게도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소위 생명윤리에 대한 모든 이슈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서 언급한 생태계 훼손의 문제는 역사적으로 인간들이 다른 여타 생명체를 포함한 자연환경을 기능적 존재로 대상화해서 벌어진 것이다. 생태계의 핵심은 조화로움이다. 생태생물학에서 발견한 가장 놀라운 자연 현상 중 하나는 다양한 공생 관계다. 과학적으로는 특정 어떤 생물의 공생 관계를 구체적인 사례 형식으로 발견해 보고하지만, 사실상 모든 생명체가 공생한다는 것이 생태계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오직 인간만 이 사실을 외면하고, 다른 생명체와 존재들을 기능적으로 대상화한다.
다른 예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최근 급격히 불거진 낙태 문제 역시 태아 생명의 궁극적인 존재 의미를 간과해서 벌어진 일이다. 엄마가 되는 여자의 인권도 중요하다. 복잡한 실천적인 문제가 여기에 얽혀 있음을 잘 안다. 하지만 그것이 태아의 생명보다 소중한가? 생명을 상향식 관점으로 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태아건 어떤 생명이건 단순히 물질에 불과한 것이고, 나에게 도움이 안 된다면 그 존재 의의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기능적인 기여가 없다면 존재 의의도 역시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슈를 너무 단순화해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것 아니냐 할 수 있지만, 지금 그 극단의 차별과 부조화가 온갖 형태로 사회면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타인의 생명에 대한 무차별 폭력과 살인, 심지어 자살과 안락사 문제는 물론 남녀 차별, 인종 갈등, 심지어 빈부 격차와 계층 간 차별 현상까지 역시 근본적으로 동일한 이유로 발생한다. 생명을 상향식 관점으로만 보는 세상은 서로에 대한 존중은 사라지고, 폭력과 차별이 만무하며, 결국 모든 존재 간의 조화로움은 깨지고 만다.
생명에 대한 상향식 관점의 무의미성과 무조화성을 극복하고, 지금 벌어지는 다양한 생명윤리 이슈에 대한 해답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너무도 당연한 결론이지만, 다른 또 하나의 생명에 대한 관점, 즉 하향식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생명의 하향식 관점은 하나의 생명을 기능적 물질의 구성체로 보지 않고, 위로부터, 즉 더 큰 다른 생명체에게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이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충분한 인격을 가진 존재가 있어서, 역시 다른 모든 존재의 그 의미를 조화롭게 묶어서 운행할 수 있는 절대적인 능력을 행사한다고 보는 관점이 곧 생명의 하향식 관점이다. 이 관점은 인간의 생명은 물론 모든 이 세상의 존재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관점이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기사를 읽어 보면 하나의 방향성을 찾을 수 있다. 빛을 통한 시공의 창조, 물과 뭍의 창조와 구분, 각종 식물과 동물의 창조,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인간의 창조.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를 통해 호흡하는 생령이 된다. 하나님 말씀에서 시작된 창조는 결국 인간의 생명을 향한다! 뒤집어 말하면, 인간의 생명은 결국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은 그 존재 자체가 신적 영광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의미와 조화로움의 원천인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담고 있기에 인간은 그 자체로 존재 의미가 있다. 내 생명은 물론 다른 이의 생명도, 심지어 태아도 하나님의 신적 영광을 담은 존재이기에 동일하게 소중하다. 그 의미는 더 나아가, 인간 생명을 중심으로 베풀어 두신 온 자연 만물의 조화로움을 위한 사명으로 이어진다. 우리와 공생하는 모든 다른 생명체가 소중한 것이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그만큼 죽음 또한 절망적인 것이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형제들과 이웃 앞에서 예수님은 눈물을 보이셨다. 그 눈물에는 생명을 구하나 죽음을 이길 수 없는 인생에 대한 긍휼함이 담겨 있다. 예수의 눈물에 담긴 그 긍휼함이 아니었다면, 이 땅의 생명에는 더 이상 아무런 소망도 없었을 것이다. 생명은 오직 위로부터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 예수의 눈, 곧 하향식 관점으로 생명을 보는 눈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늘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 땅에 무의미와 무조화 속에 속절없이 스러지는 생명들이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길 소망해 본다.
1) 사실 진화론을 따르는 현대 생물학에서는 최초의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abiogenesis’라는 다른 용어를 사용한다. 자연발생설은 이미 폐기된 생물학적 이론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지금 환경에서도 생명체가 자연에서 스스로 발생한다는 이론이기 때문에, 생명의 기원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생물속생설도 역시 현대 생물학에서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고 이해한다. 때문에 내가 이 글에서 정의하는 생명을 보는 두 관점은 생물학적 이론인 자연발생설이나 생물속생설과 동의어가 아님을 밝힌다.
2) 처음부터 파스퇴르가 생명체의 기원에 대해서 궁금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질병을 일으키는 매개체인 미생물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파스퇴르는 미생물이 번식하면 생기는 발효 현상을 연구하는 중에 자연발생설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됐다. 파스퇴르와 그의 업적들과 생물속생설에 대한 연구, 그리고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의 문헌과 ‘파스퇴르 연구소’ 사이트를 참고하라; Lois N. Magner, History of the Life Science, (New York: Marcel Dekker, 2002), pp. 247-263; https://www.pasteur.fr/en/institut-pasteur/history.
3) 분자생물학에서 다루는 주요 연구 대상이 바로 ‘DNA-RNA-단백질’로 상호 전환되는 생화학적 과정들이다. 때문에 이를 ‘분자생물학의 중심 원리’(Central Dogma of Molecular Biology)라고 부른다.
4) 흥미롭게도 최근 모기도 생태계에서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내용의 책이 출판됐다. 모기는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의 꽃가루를 운반해 수분시키는 매개체 역할도 하고, 모기의 유충인 장구벌레는 다른 곤충이나 물고기의 먹잇감으로 생태계 유지에 중요하다고 한다. 한편 피가 굳지 못하게 하는 성분이 있어서, 이를 활용해 의약품 계발에도 유용하다고 한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책을 참고하라; 프라우케 피셔, 힐케 오버한스베르트 공저, 추미란 옮김, 《모기가 우리한테 해 준 게 뭔데?: 절박하고도 유쾌한 생물 다양성 보고서》(북트리거,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