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집마련] 영월 첩첩산중에 초가집 지은 부부
느티나무 (han8***)님
어느새 한여름 기온을 웃도는 후텁지근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날씨에 장거리 운전은 고문이나 다름없다. 방법은 딱 하나, 고속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국도를 타면 된다. 언제나 여유 넘치는 강원도로 향하는 길이 아닌가. 그다음에는 에어컨을 끄고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면 된다. 바람 따라 첩첩산중에 스며들어 초가집 짓고 사는 부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생각만 해도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국적 없는, 소위 전원주택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초가집이라니. 초록으로 짙게 물든 산골 풍광에 푹 빠져들 때쯤 영락없는 ‘산적소굴’을 닮은 초가집 서너 채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필자가 꿈꾸던 바로 그 오두막이다.
생면부지의 땅 영월에서 시작한 산 생활
‘기찻길 옆 오막살이~’ 이따금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노래다. 대신, 기찻길보다는 산밑에 오두막을 꿈꾸면서. 아마 그래서 이번 취재가 더 설랬는지 모를 일이다. 필자뿐만이 아니라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 한적한 전원생활을 그린다. 그 많은 사람이 다 꿈을 이루지는 못해도, 아마 단 1%도 안 되는 사람만이 그 꿈을 이루지만, 사실 그 생각만으로도 참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룬 부부는 얼마나 행복할까.
부부의 초가는 강원도 영월 공기리 마을에서도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더 들어가는 외딴 곳에 있다. 사방이 산이고, 그 뒤로 또 산이 첩첩이 두른 전형적인 산골풍경이다. “뭐 볼 게 있다고 오세요. 우리집은 그냥 산골 초가에요~” 취재요청을 위해 한 전화통화에서 했던 안주인의 말과 달랑 사진 한 장이 정보의 전부였지만, 미리 그려 본 풍경과 그리 다르지 않다.
어릴 적 산골생활이 지긋지긋도 하련만, 부부는 이 산 깊은 골짜기를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달랑 옷가방 하나에 등산 다닐 때 쓰던 코펠과 자일, 그리고 손수 집을 짓겠다는 의지가 전부였다. 그것도 가장 춥다는 2월 꽁꽁 얼어붙은 맨땅 위에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그리고 그 안에 한 평 반짜리 구들방을 만들고, 작은 싱크대 하나를 들여 놨다. 먹고 잘 최소한의 공간이었다. 시작은 그게 다였다. 가장 추운 2월에 들어 온 이유는 혹시나 마음이 변할까 봐 그랬다고 했다. 마을에서 2km 이상 떨어진, 인적이라고는 이따금 들리는 동물 울음소리가 전부인 첩첩산중이기에 가장 열악한 상황을 이겨 낸다면 꿈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살림집을 지은 처음 10개월은 전기도 수도도 없었다. 개울물을 길러다 밥을 하고 고양이 세수를 하며 따뜻한 봄날을 기다렸다.
“젊어서 산에 다니던 기억 하나만 갖고 왔어요. 산에서 침낭 하나만으로 자는 비박을 경험했기에 자신감은 있었죠. 하지만 마음속 두려움은 있었나 봐요. 마음 변할까 봐 가장 추운 날 들어왔으니까요. 하하”
다행인 것은 부부의 꿈이 같았다. 특히 오경순 씨가 더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음식사업을 하던 서울생활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다. 어릴적 나고 자란 토담집과 뜨근뜨근한 구들방을 상상하며 힘든 서울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생면부지의 땅 영월에 터를 장만하고, 비닐하우스 생활을 시작했지만 주변의 시선과 열악함을 견뎌내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묵묵히 자신들의 일을 하면서 주민들과 교류를 쌓아 나갔다. 그게 2년이 걸렸다고 했다. 가끔 와서 시끌벅적하게 먹고 놀다가는 외지인이 아닌, 진정한 주민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뭘 잘 보이려고 한 것은 없어요. 그냥 내 할 일 열심히 하면서 2년을 보냈죠. 우선은 집부터 지어야 하니까요. 덕분에 동네 어르신들이 많이 도와주시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도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시나 봐요. 그래서 시골생활의 어려움 중 하나인 주민과의 갈등도 다 자기 하기 나름이라 생각해요.”
초가만 다섯 채 지어 공동체를 만들다
지금의 살림집을 짓는 데는 꼬박 10개월이 걸렸다.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모든 과정을 부부의 힘만으로 지었다. 나무와 흙이 주재료다 보니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발품만 열심히 팔면 집 지을 재료가 쌓였다. 통나무를 세우고, 그 사이사이에 흙을 채워 나갔다. 틈나면 집주변 산을 오르며 풀과 나무와 꽃을 만났다.
“서울 살 때는 꽃이라고 아는 것은 우리가 흔하게 보는 그런 것들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무슨 꽃이 언제 피고 지는지, 이맘때면 무슨 꽃이 피었겠구나 할 정도로 많이 알게 됐어요. 책보고 공부했느냐고요? 아니요. 꽃에 물어봤죠. 근데 대답을 안 하더라고요. 가장 좋은 방법은 보고 또 보고 반복하면서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오경순 씨의 산골생활은 막연한 동경에서 시작되었지만, 적응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곳의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우선이고, 여느 집처럼 인위적인 가꿈을 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를 이용한 길과 쉼터를 만들고 앞산과 뒷산이 자연스럽게 정원이 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잘 가꾸어진 정원 속에 집만 들여 놓은 셈이다. 물론 오경순 씨가 머슴이라고 부르는 남편 전봉석 씨의 묵묵함이 더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경순 씨가 지휘자라면 전봉석 씨는 연주자랄까.
“처음에는 나무한테 욕도 무지 먹었어요. 잘 보이지는 않아도 집주변에 온통 과실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이리저리 몇 번씩 옮겼거든요. 그러니 나무가 제게 욕을 안 하겠어요? 하하”
살림집을 짓고 나서 두 번째 초가를 지었다. 간간이 찾아오는 지인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넓은 툇마루를 만들고, 아궁이 옆에 두어 명 앉을 공간을 따로 만들어 온기가 느껴지게 만들었다. 난방과 벽난로를 겸한 공간인 셈이다. 산에서 흐르는 물을 모아 가까이 흐르게 하였고, 황토방 안에는 넓은 창을 만들어 나무와 꽃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했다. 오경순 씨가 수년 전부터 그렸던 그림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렇게 시작한 부부의 초가집 짓기는 1년에 한 채 씩 총 다섯 채가 되었다. 지금은 살림집을 제외하고 모두 민박용으로 내놓고 있다.
“처음에는 민박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산에서 사는 꿈을 꾸었기에, 나물 뜯고 나무랑 꽃이랑 얘기하면서 살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찾아오는 사람마다 민박을 하라는 거에요. 그냥 와서 자고 가는 게 미안하니까 그랬던 건데, 그렇게 민박을 하게 됐어요.”
민박을 치면서 오경순 씨는 또 다른 재미에 푹 빠졌다. 그냥 민박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대한민국에 하나밖에 없는 집이라는 말이 맞겠다. 우선 몸만 가면 된다. 직접 담근 된장과 고추장은 물론 밑반찬까지 모두 준비되어 있다. 무엇보다 아담한 초가에 뜨근뜨근한 구들방, 한여름의 시원한 바람은 주인과 손님의 관계가 아닌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뜻하지 않게 민박을 치고는 있지만, 광고는 전혀 하지 않는다. 소문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많은 사람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산 생활 5년 차에 접어들면서 모든 게 안정이 되었지만, 2년 전에는 지옥 같은 일도 겪었다. 강추위에 물이 얼어 버린 것이다. 오경순 씨는 개울물을 길러오다 고관절까지 다쳤다. 환상이나 꿈만으로 시작한 산 생활이 아니었기에 좋은 경험으로 생각하고 있다.
산 생활을 부러워하고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부부는 언제나 같은 말을 한다. “욕심을 버리려고 하지 말고,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을 즐겨라.“라고. 산에 오면 자연스럽게 욕심은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즐기면 어떤 난관도 이겨낼 수 있다는 얘기다.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는 게 아니라, 잘 가꾸어진 정원 속에 집을 짓는다는 생각처럼 말이다.
“우리는 부자에요. 수만 평 정원을 갖고 있잖아요.하하”
<글, 사진> 눌산 최상석
출처-월간 산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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