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대사 선시(禪詩) 한 편
踏 雪 野 中 去
(답설야중거)
不 須 湖 亂 行
(불수호란행)
今 日 俄 行 跡
(금일아행적)
燧 作 後 人 程
(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행여 발걸음 하나라도 어지럽게 가지 말라
오늘 내가 걸어가는 이 발자취는
반드시 후인들의 길잡이가 되리니'
눈 내린 들판을 밟아 갈 때는
그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
낮에는 한잔의 차요
밤들면 한바탕의 자비일세.
푸른 산과 흰구름이 함께
나고 감이 없음을 이야기하네.
서산대사의 선시(禪詩)
결코,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가겠다.
당초 이 시는 지난 1948년 남북협상 길에 나선 백범 김구 선생이 38선을 넘으면서
인용해 읊었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그 고결한 정신과 함께 지사와 선비들의 방에 족자의 형태로 걸리기도 했다.
어려운 결단을 내릴 때마다 백범이 되새겼다던
이 시는 사실 서산대사(1520 ~ 160 4)의 「선시(禪詩)」라고 한다.
서산대사 (1520 ~ 1604)
서산대사는(1520~1604. 중종15~선조37)는 법명이 휴정休靜으로 호는 서산 외에 청허당淸虛堂이 유명하다.
사명대사 유정의 스승이며 임진왜란때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 총도섭이 되어 승병 1,500명을 모집하여 명나라군대와 합세해 서울수복에 공을 세운 그 분이시다.
서산대사는 일선一禪 선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있는데 일선은 울주군 온양읍 발리 마을 출신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는 호가 청허(淸虛)이며 법명이 휴정(休靜)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오랫동안 묘향산에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서산대사라고 불렀다.
스님은 안주(安州)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는데 고을 군수의 도움으로 한양에 올라와 공부하였다. 15살 때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여행길에 올랐는데 지리산에서 숭인장로(崇仁長老)를 만나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일선(一禪)화상으로부터 계를 받고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에게서 법을 배웠다. 이후 오대산과 금강산 등의 명산을 구름처럼 떠돌다가 33세 때에 문정왕후와 보우(普雨)선사에 의하여 부활된 승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36세에 판교종사(判敎宗師)와 판선종사(判禪宗師)가 되었고 이어서 선교양종판사라는 최고의 승직에까지 올랐으나 곧 이를 버리고 금강산·두륜산·묘향산 등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옥에 갇혔으나 결백이 밝혀져 선조의 명으로 석방되었다. 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패퇴하고 임금마저 의주로 피난하였는데, 73세의 휴정은 선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전국의 모든 승려들이 총궐기하여 싸움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스님의 문도가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승군(義僧軍)이 일어나니 그 수가 5000명이나 되었다. 이듬해 의승군은 휴정의 지휘로 명나라 군대와 함게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으며 왕이 환도한 후에는 늙었다는 핑계로 제자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총섭(摠攝)의 일을 부탁하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