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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사망 | 1880.2.27.(음력) ~ 1951.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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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항일 운동에 투신한 홍언 선생은 이십 대 때 중국 간도(間島)에서 한인 교육에 힘 쓴 뒤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신한국보><신한민보> 등의 주필을 역임하면서 조국의 독립과 한인 교포들의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데 주력하였다. 흥사단의 창립위원으로 일했으며, 미국 내 중국인 사회에 신망이 높아 미국 내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회(國民會)의 화교위원으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후원자금을 모금했다. 선생은 고국을 그리워하는 이역만리의 동포들에게 독립 혼(魂)을 간직하게 한 문인이자 언론인이었다.
홍언(洪焉, 1880~1951) 선생은 1880년 2월 27일(음력)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종표(宗杓). 선생 집안의 원래 고향은 경북 영덕(盈德)으로 추정된다. 그의 장형이 살던 곳도 영덕이었으며, 훗날 미국으로 건너간 그와는 달리 국내에 남았던 그의 부인도 영덕에 거주하였다. 선생은 서울서 자라다가 1894년부터 1902년까지 광주와 춘천에서 살았다. 집에서 유학을 공부하고, 20세 전후 광주 그리고 춘천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여러 분야의 학문을 독학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박식한 소양은 이 때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그는 1902년 말에 중국 간도(間島)로 건너갔는데, 후일 미주에서 중국인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던 중국어 실력은 이때 쌓은 것으로 보인다.
홍언 선생은 1904년 7월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왔다. 그는 국내에 있을 때 결혼은 하였지만, 부인과의 사이에 소생은 없었다. 정착하고 나중에 부인을 데려올 생각이었는지 혼자서 태평양을 건넜다.
선생은 1907년까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대한자강회 회보의 편집을 맡았다. 대한자강회 하와이지회는 1907년 3월 31일 발기되었는데, 주도적 인물이 홍언 선생의 형인 홍경표였다. 홍언은 자강회의 기관지인 <자신보> 편집에 어렵지 않게 합류했고, 이후 <합성신보> 편집에도 참여했다. 1909년 2월 창간한 <신한국보>에는 이미 선생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즈음 선생은 하와이 현지의 교포단체에도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1905년 5월에는 대한인국민회(국민회) 호놀룰루지방회의 학무원으로 선임됐다.
1909년 국민회 하와이 지방 총회의 건원절 기념 사진.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홍언 선생이다.
그리고 하와이에 들어온 이후 이미 기독교에 입교했던 그는 1907년 기독교 감리회의 학습을 받고 그 다음해에 세례를 받았으며, 1909년 하와이 한인기독청년회에 입회하였다. 한편 홍언 선생은 1911년 8월 [대동위인 안즁근뎐]을 저술하여 신한국보사에서 발행하였다. 이 안중근 전기는 16면에 걸쳐 생애와 의거, 재판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는데, 장군으로서의 안중근을 부각시켰다. 이 전기는 하와이에서 적은 자료를 가지고 엮은 짧은 전기이지만, 홍언 선생이 역사가로 출발했음을 알리는 저술이다.
1911년 11월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기관지 <신한민보>의 주필이 되어 수십 년에 걸치는 신한민보사와의 관계를 시작하였다. 이름을 홍언으로 개명한 그는 ‘동해수부’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1912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상항지방회장에 선임되었다. ‘상항’은 샌프란시스코를 가리킨다. <신한민보> 1912년 1월 15일자부터 폴란드의 사적을 소설화한 ‘미인심’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한민보>와의 이 같은 첫 인연은 오래 가지 못하고 주필로 15호의 신문을 발간한 후 1912년 6월에 퇴사하였다. <신한민보> 역시 재정난으로 그 해 12월 정간에 들어갔다. 신문사 주필을 그만 둔 홍언은 대한인국민회 활동과 교회 활동에 열심이었다. 1913년 9월 상항한인감리교회의 청년회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의회 의장으로, 또 북미지방총회의 학무원과 상항지방회 대의원으로 적극 활동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신문에 글을 발표하며, 새로운 일에 적극 나서고 있었다. 안창호가 추진하던 흥사단의 창립에도 참여하였다. 선생은 1915년 초 신한민보로 다시 복귀하여, 편집인으로서 1919년까지 재임하였다. 이 해 1월 그가 그만 둔 것은 10년 이상 쌓인 피로과 신병 때문이었다.
4개년 동안을 간단없이 신한민보의 붓대를 잡고 우리의 독립정신을 고취하던 전 신한민보 주필 홍언씨는 그 뇌력이 실히 피곤함을 인하야 얼마 동안 쉬기로 작정하고 작일 ‘하버드’ 선편으로 로스앤젤레스에 향하였는데 홍 선생은 원래 하와이 있을 때부터 오늘까지 10여 성상에 국민회의 사업을 위하여 열심 성력을 다하던 터인데 오늘에 얼마 동안 휴가는 10년 동안에 처음이라 하며 어느 때에든지 중앙총회에 일이 있어 부르게 되면 곧 오겠노라고 하더라.(<신한민보> 1919년 4월 8일자)
휴식하러 떠나면서도 ‘중앙총회가 부르면 다시 돌아오겠다’던 그는 열흘이 지나지 않아 중앙총회가 부르자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고 말았다. 국민회 중앙총회에서 1919년 4월 6일 중국인에게 독립자금 모집을 위한 유세원으로 홍언 선생을 불렀던 것이다. 선생은 6월 스탁톤에서 중국인들을 상대로 모금을 시작하였다. 이 일은 몇 년 간에 걸쳐 계속 이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선생은 1920년 6월 루이지니아주 뉴올리언스에서 마약조사당국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모금을 위하여 뉴올리언스에 가있던 선생에게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중국인이 우편물을 보냈는데, 그 안에 마약 1파운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결국 마약사범으로 검찰에 기소 당하는 일까지 겪게 되었다. 하지만 선생 자신은 이 과정을 전혀 알지 못했고, 재미 법학박사인 강영승 선생이 뉴올리언스로 달려가 도움을 주어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다.
홍언이 191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촬영한 사진. 왼쪽부터 강영소, 홍언, 최정익.
선생은 이런 고초에도 불구하고 독립 자금 모금을 계속하여 1921년에는 캐나다에 사는 중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화교위원으로 봉사하고, 다시 미국 각처를 돌며 모금을 하였다. 이어서 파나마 등 중앙아메리카를 돌고, 이 해 8월에는 남미 페루에까지 가서 중국인 사회에 한국인들의 독립 운동 지원을 역설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페루의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100원을 기부 받았는데, 당시 신문사의 주필 월급이 60원 수준이었다. 각계 중국인들이 한국 독립을 지원하는 발기대회를 개최하고, 특히 <신한민보>는 1921년 9월 29일자에 ‘홍언 위원의 대활동’이라는 기사를 통해 그의 활약을 보도하였다. 그가 워싱턴을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것은 1922년 9월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캘리포니아 주를 돌며 미국 화교뿐 아니라 우리 교포들을 상대로 국민회에 대한 지지와 독립 자금 모금에 나섰다.
1924년 전후 선생은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이곳에 본부가 있던 흥사단 일에 진력했다. 1920년대 후반에도 그는 국민회 총회 또는 상항지방회의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신한민보>에 많은 글을 기고하였다. 총회장 백일규를 도와 국민회를 이끌던 그는 종종 백일규와 갈등을 빚었는데, 특히 사회주의와 관련된 부분이 적지 않았다. 백일규 총회장이 <신한민보>도 책임지면서 친사회주의적인 경향의 청년들 글이 적지 않게 실리게 되었다. 백일규는 1940년대에 좌파세력을 지지하여 국민회를 떠나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에 관여하며 그 기관지 <독립>의 간행을 책임지기도 하였다. 홍언은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관점에서 사회주의를 수용한 소장층의 주장을 비판하였으며 미주 한인의 대동단결을 주장했다.
선생은 1910년대부터 40년 동안 <신한민보>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면서, 소설과 희곡, 시가와 수필, 비평 등 많은 장르의 글을 발표하였다. 미주에서 그만큼 다양한 형식의 문예활동을 전개한 인물은 없었다. ‘미인심’ ‘철혈원앙’ ‘옥란향’ 등의 소설, ‘동포’ 등의 희곡을 비롯하여, 수백 편의 시가, ‘시인론’ ‘애국지사의 노래’ 등의 비평이 그런 작품들이다. 또 사화며 전기, 기행문 등과 ‘동국염향록’ ‘조선기생시화’ 등의 시화도 남기고 있다. 특히 가사를 통하여 고국의 산하를 추억하고, 기행의 감회를 표현했다. 이러한 그의 작품들은 이민지 문학의 대표적인 예로 꼽힐 만하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한시와 한문으로 쓴 논설과 문예작품을 미주에서 발행되던 중국신문에 발표하여, 중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그는 1931년 7월 만보산 사건이,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화교를 대상으로 한중합작을 주장하는 논설을 화교신문에 발표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당시 <신한민보>(1935년 9월 5일자)의 기사를 보자.
1931년 만주사변 당시부터 홍언 씨는 상항에서 발행하는 중국인의 5종 일간신문을 통하야 토문과 시로 한중합작을 제창하며 망한의 사적을 원용하야 중국민을 경성하며 열렬한 정신으로 애국열과 항일심을 고취하며 또 고려통신사의 명의로 한국혁명운동의 사정과 인물을 소개함을 하루같이 꾸준히 하여왔다 그리하여 상항 중국인 타운에서는 쳑동 유부까지라도 ‘고려인 홍언’을 모르는 이가 없으며 상항에서 발행하는 중국신문이 해외 화교계에 크게 세력이 있으니만치 홍언 씨의 문명도 캐나다 호주 쿠바 멕시코 등지의 화교계에 널리 퍼져 비범한 문장과 열렬한 한 정신을 탄모하는 사람이 많게 되었다. 그러므로 화교사회에서 씨를 원일견지하야 초청하는 곳이 많으며 또 한 곳에서도 여러 번식 요청하였으나 아직 가보지 않았는데 금년에는 우선 가주 몇 곳을 다녀보기로 하였다더라.
1935년 9월에 시작된 그의 여행은 화교들의 초청에 응한 것이었다. 캘리포니아, 오리곤, 뉴멕시코, 애리조나, 텍사스 주까지 다녀왔다.
1938년 3월 10일 국내에서 안창호 선생이 순국하였다. 홍언 선생은 1월에 국민회 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가 1개월 동안 애리조나를 여행하던 도중에 이 소식을 듣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신한민보>에 안창호 선생의 유업을 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만장을 지었다.
철인이 가시니 강산이 홀연히 의로워 거국이 같이 슬퍼하오며
정신이 계시매 일월이 영원히 비추어 민족의 앞길이 밝아지도다
그는 안창호의 순국을 슬퍼하며 보내온 각처, 각인의 조전ㆍ만장ㆍ애가ㆍ추도사 등을 모아 영애록를 편찬하였다. 그는 안창호 가족이 살던 집을 찾아 ‘도산의 꽃동산’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며 안창호를 기리곤 하였다. 홍언이 안창호와 처음 만난 것은 1911년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오면서 였고, 그는 안창호의 인격과 주장에 감복하여 안창호가 주도한 흥사단의 창립을 주관하였다. 안창호의 첫 딸이 태어나자, 그는 수산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1919년 중국으로 떠나기 전, 안창호는 그에게 국민회 지도자들과의 협조를 부탁하였다. 1924년 12월부터 1년여 안창호가 미국에 돌아와 머문 동안, 마침 홍언도 로스앤젤레스에 있어 그들은 매우 자주 만났을 것으로 보인다. 안창호는 미국 전역을 순방하며 독립운동을 역설하고 한인사회를 지도하였다. 1926년 3월 중국으로 다시 떠난 안창호와 이별한 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1938년 9월 홍언은 다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그는 국민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서기를 맡았고, 1940년 1월에는 신한민보사의 주필에 선임되었다. 1940년대 홍언은 임시정부의 주석인 김구의 활동을 널리 소개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김구의 [백범일지] 상권의 필사본과 [도왜실기]가 미국에도 전하여져, 그는 김구의 사적을 잘 알았다. 특히 그는 김구가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지휘하였음을 가리켜, 공을 드러내지 않은 옛 중국의 장군에 빗대어 ‘대수장군(大樹將軍)’으로 소개하였다. 홍언은 ‘한국혁명당 령수 김구 사략’을 중국신문에 기고하였고, 그것을 다시 <신한민보>에 번역하여 소개했다.
미주 흥사단 단소의 정면 모습.
1945년 8월 그토록 기다리던 고국의 해방이 찾아왔다. 미주에서는 고국방문단을 조직하여 수십 년 만에 고국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자비 여행이 가능한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방문단이 구성되었다. 당시 신한민보사의 주필을 맡고 있던 홍언은 현실을 비관할 수 밖에 없었다. 홍언은 <신한민보> 1949년 1월 27일자에 「신한민보의 붓을 놓으며」라는 퇴임사를 쓰고 주필 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간간히 ‘추선’이나 ‘해옹’이라는 필명으로 신문에 글을 게재하였다. 김구 선생에 대해 ‘김구사략’을 연재했으나 1949년 6월 김구가 암살된 이후 큰 충격을 받고, 연재를 중단했다. 그는 이 해 말 뇌일혈로 쓰러져 병고에 시달리다 1951년 3월 25일 숨을 거뒀다. 장지는 로스앤젤레스 로즈데일 공동묘지. 장례식은 성대하였고, 묘비는 준비되다가 세워지지 못하였다. 다만 그 공동묘지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들 대부분이 묻힌 곳으로, 후손이 없는 그의 영혼이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홍언은 미국에서 단신으로 생활하였으며, 흥사단우인 하상옥의 딸 소정을 양녀를 삼았다. 하소정은 줄리어드 음악학교와 뉴잉글랜드 음악학교를 졸업한 피아니스트로 성장하였다. 그는 하소정을 아끼며 자랑스러워하였고, 그녀도 홍언의 회갑연을 마련하는 등 양부로 잘 모셨다. 홍언은 지사적이었지만, 직선적인 면모도 있었다. 그러나 속정이 깊었다. 1944년 샌프란시스코에 들려서는 15년 전에 사망하여 아무도 찾지 않는 이대위의 집을 방문하여 미망인을 위로했다고 한다.
홍언 선생은 미주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문사였지만, 동시에 제일의 역사가였다. 윤봉길 안창호 이갑 등에 대한 전기를 펴냈으며, 이원규, 이새미 등과 같이 미국사회에 공헌한 동포들도 널리 소개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홍언이 정열을 불태운 것은 ‘국민회’의 역사였다. 1944년부터 <신한민보>에 연재한 ‘국민회약사’는 그가 혼신을 다하여 마지막 정열을 바친 작업으로 54회나 이어졌다.
홍언 선생의 평생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사사로움을 버린 지사적인 삶이었다. 해방되기 전까지 미주에서 대한인국민회와 <신한민보>의 역할과 그 영향력은 다른 단체나 신문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이 둘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것을 바쳤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그의 생애는 다복하고, 윤택한 것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그 문장보국(文章報國)의 자세는 오래 전범이 될 것이다.
‘…선생은 고결한 선배였고 참된 애국자였다(…)우리의 문화향상과 사회와 국가에 대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비판하던 작가요 시인이요 평론가였다 자기의 모든 사생활을 희생하면서 오직 한 조각 붉은 마음이 사회와 나라 뿐이었다…선생의 일평생 생활은 대단히 의로웠고 또 바쁘셨다…’<신한민보> 1951년 4월 19일자. ‘델라노 한 농부’라는 필자의 ‘고 동해수부 홍언 선생 영전에’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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