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령사
638년(신라 선덕여왕 7)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이후 889년(0진성여왕 3) 대구화상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1254년(고종 41) 몽고의 장군 차라대(車羅大)가 상주성(백화산성)을 침공하자 황령사의 승려 홍지(洪之)가 관민병을 거느리고 나가서 적의 넷째 장수를 쏘아 죽였고, 적병의 사상자가 반수 이상이나 되자 적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다. 또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황령사가 함창(咸昌)을 중심으로 봉기한 창의진(昌義陣) 의병의 발원지로 알려지는 등 호국의 도량으로서 그 정신을 이어왔다. 때문에 임진왜란 때 병화로 대웅전, 천불전, 나한전, 신금당 등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이후 근세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901년 석교(石橋)가 중수하고, 1928년에는 도허(道虛)가 중수하였으나 소실되었다. 현재의 신금당은 1966년에 중건된 것으로 대웅전은 1976년과 1980년에 걸쳐 기와 보수와 단청을 했고 2003년 다시 해체 복원하였다.
황령사앞 황령지
불일증휘 법륜상전
부처님의 지혜 광명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법의 수레바퀴가 쉬지 않고 끊임없이 굴러 간다는 뜻.
황령사 벽허당 부도
벽허당(碧虛堂) 부도는 황령사의 산문으로 오르는 계단 근처에 위치한다. 이 부도는 인근 못 근처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연봉형 형태로 지대석 위에 양각된 복련이 있고, 그 위에 별석으로 제작된 탑신석이 있는데 상대와 하대에 연꽃무늬를 양각해 놓았다. 상대(上臺)에는 보주와 앙련 및 복련이 새겨졌고, 하대에 또한 복련이 부조되어 있다. 부도의 탑신은 높이 약 170㎝ 가량 된다. 상부의 보주 앞면에는 둥근 원을 음각으로 둘러 그 안에 '벽(碧)'자를 적고, 조금 띄워 '허(虛)'자를, 다시 '당(堂)'자가 돌아가며 같은 간격으로 선각되어 있다. 따라서 탑의 주인이 벽허당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부도의 상부인 보주에 당호를 적어놓은 경우는 구미 도리사의 세존사리탑에서 그 유형을 찾을 수 있다.
황령사 입구
황령사 대웅전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는 석가 삼존불상을 모셔 두고 있다. 탱화로는 1786년(정조 10) 조성의 아미타후불탱과 신중탱을 봉안하고 있었으나,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으로 이안되어 보관 중이다. 이 두 점의 탱화는 황령사의 성보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하다. 18세기 황령사의 사세를 짐작하는 데 있어서 대문간 밖의 부도와 함께 현존하는 유일한 유물이기 때문이다.
대웅전은 1976년과 1980년에 걸쳐 기와 보수와 단청을 했고 2003년 다시 해체 복원하였다.
황령사 요사채
황령사 심검당
황령사 수조
황령사 입구문
대웅전앞 석탑
대웅전앞 석조물
황령사 대웅전내 석가모니불
황령사 대웅전내 동종
황령사 관음전
황령사 관음전내 관세음 보살상
황령사와 칠봉산
칠봉산은 봉우리가 7개 솟아있어 북두칠성을 닮았다고 하여 이름이 붙었는데, 높이 595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유명한 전설 속의 명소를 감추고 있는 곳이다. 칠봉산엔 고개인 황령과 황령사뿐만 아니라, 산기슭에 중국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자룡이 태어나 무술을 닦았다는 전설을 가진 조자룡굴, 조자룡이 용마를 얻었다는 남곡용추, 무술을 연마하면서 마셨다는 약수터 등이 있으며, 산행 입구에는 은자를 묻었다는 은자산이 있다.
황령사 삼성암
황령사 전경
황령사 찾아가는 길
문경새재IC 우회전-901번 가은 방면-가은읍, 가은 중고등학교-901번 농암 방면-가은 초등학교-성유교-901번 화북, 함창 방면-농암 사거리에서 좌회전, 황령사 표지판-901번 은척 방면-봉중2교를 지나 우회전-성주봉 자연휴양림, 황령사 표지판(4km)-남곡리-황령사
첫댓글 혹시 비구니스님께서 계시는 사찰인가요. 참 단아한 모습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꼼꼼하게 챙겨 갑니다.
황령사 좋으네요... 계속적인 사찰소개 감사하게 잘 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