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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서사시 금강산☆]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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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시 금강산◎]
공광규 시집 / 시작시인선 0316 / 천년의 시작(2019.12.30) / 값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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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금강산에 가며]
주인공의 말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천하의 명승 금강산, 수많은 이야기가 봉우리마다 계곡마다 깃들어 있고, 옛사람들이 절경에 매혹되어 붓을 들었다가 표현을 잘못할까봐 붓을 놓았다는 곳, 금강산을 과연 나는 시로 써낼 수 있을까? 나는 먼저 나온 금강산 관련 책들과 공책을 여행용 트렁크에 가득 넣고 금강산 탑승길에 올랐다.”
금강산
전해오는 이야기에
어떤 산 하나가 동해 가까이에 있는데
전체가 금으로 된 것은 아니나
산의 동서남북과 위와 아래
흘러내려 오는 물속의 모래까지도
금을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천하에 둘도 없는 이 돌산에서는
이따금
성현이 출현한다고 하는데
옛 인도의 성인 석씨가 이르기를
동쪽 바다 가운데
금강산이라 불리는 곳이 있어
예부터 여러 보살이 살고 있었는데
현재는 법기보살이
일만 이천 보살들과 불법을 편다고 한다
봄에는 아침 이슬이
햇살에 영롱하게 빛나는 것과 같은
금강석을 닮아 금강산
여름에는 계곡과 산봉우리에
짙은 녹음이 깔리는 것이
신선이 사는 곳을 닮아 봉래산
가을에는 산이 불타듯
잎에 단풍이 들어
흰 바위와 소나무와 잘 어울려서 풍악산
겨울에는 잎이 져서
바위 구석구석이 뼈처럼 보인다고 해서 불렀던
가장 오래된 이름이었다는 개골산
더 오래전에는
바위가 서릿발같이 희다고 해서
상악이라고 불렀다는데
눈 내린 겨울에는 설봉산
언젠가는 열반산
그리고 기달산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여러 가지 이름을 가졌던
산 너머 산 그 너머도 산인
천하의 절승 민족의 영산
소나무와 잣나무와 전나무
이런 상록수가 계절을 모른 채
정신처럼 푸르고
단풍나무와 신갈나무와 떡갈나무가
계절마다 산자락에
색깔을 바꾸고
금강초롱과 금강봄맞이꽃과 금강국수나무
이런 연약하고 작은 초목들은
바윗덩이에서 솟아올라 산기슭마다 어울리고
기암괴석 봉우리와
셀 수 없는 계곡의 폭포와 연못이
물을 흘려보내고
일출봉과
월출봉이 있어
해와 달이 뜨는 것을 복 수 있다
우리나라 신령스런
세 개의 영산
지리산 한라산 금강산 가운데 하나
백두산 묘향산 북한산 지리산과 함께
우리나라를 수호하는
민족의 성산 금강산
어느 날은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고 가고
어느 날은
선녀가 내려와 목욕하고 가거나
나무꾼 사내와 살고
어느 날은
하얀 수염을 한 산신령이 나타나
병들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어느 날은
하늘에서 날아온 선학이
창공을 맑고 길고 높게 울고 가는 산
신라 시대에는
화랑과 승려가 와서 심신을 닦고
불국정토를 이루어보려 하였고
고려 시대에는
승려과 관리가 와서
국토의 아름다움에서 자아를 고양시키고
조선 시대에는
승려가 호국을 실천하고
선비들이 민족의 자부심을 기록했던 곳
구한말에서 동족상잔과 분단 이전
기울어가는 나라에 새로운 기운을 찾으려
몰려갔던 지식인과 학생들
이 모든 세월을 거쳐
민초들의 신심으로
일만 이천 봉 아래 팔만 구천 개 절을 세운 곳
사람이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죽기 전에 한 번은
금강산에 올라야 한다는 부채 그림
분단 이후
늙어버린 얼굴로 이산가족 상봉하러 가서
울음바다를 만들고
잠시 금강산 관광 기회가 오자
그리웠던 금강산을 보려고
줄을 이었던 남녘의 관광 행렬
그리고 다시 길이 닫힌 지 오래
다시 우리 힘으로 열어야 하는
빛나는 우주의 선물이자 민족의 영지
[제2부. 내금강]
해설원의 말
“아랫동네에서 오신 시인 선생님 금강산 방문을 환영합니다. 많은 아랫동네 동포들과 같이 오실 줄 알았는데 혼자 오셔서 아쉽습니다. 민족의 영산을 찾아보고 싶어 하는 선생님과 아랫동네 동포들의 소마을 헤아려 금강산 여행을 잘 안내하라시며 저를 특별히 해설원으로 보내셨습니다. 여기 내금강은 비로봉을 중심으로 서부 지역입니다. 백두대간 북남으로 이어지는 오봉산, 상등봉, 옥녀봉, 비로봉, 월출봉, 차일봉 줄기 서쪽입니다. 만폭동을 비롯한 수많은 골짜기와 바위벼랑과 봉우리들이 있지요”
김소월, 많아도 잘도 울었음
단발령에서
소월의 시「팔베개 노래」에 나오는
단발령을 떠올린다
“두루두루 살펴도
금강 단발령
고갯길도 없는 몸
나는 어찌하라우“
이런 구절을 쓰며
많이도 잘도 울었을
소월
동경상과대학을 가고
신문사 지국을 운영하고
고리대금업을 하다 실패하고
생계에 좌절하여 술로 견디고
폐인이 되고
생활에 져서 자결한 시인
소월의 아버지는
소월이 두 살 때인
1904년
정주와 곽산 사이 철도 부설 공사장에서
일본인 감독에게 얻어맞아
정신 이상이 되었고
이것이 한이 된 소월은
식민지 조선의 한을
시로 썼을 것이다
수왕성, 마의태자를 지키던 돌성
마의태자를 따라와 일부 남은 군사들
돌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태자성이라고도 불리는 수왕성
태자가 머물던 곳이
아래 대궐 터와 위 대궐 터
아래 대궐 터 옆 넓은 바위는 계마석繫馬石
태자 무덤은 비로봉 북서능선
그러니까 내금강 구성구역
등룡계곡 맨 위에 ‘신라마의태자릉’ 비석과 함께 있다
무덤 옆에는 태자가 죽자
태자가 타고 다니던 말이 따라 죽으면서
돌로 변했다는 바윗덩어리 용마석이 있고
훗날 이곳에 들른 사람들은
태자의 충정을 기려
아래 대궐 터 입구 바위에 글자를 새겼다는데
東京義烈北地英風(동경의열불지영풍)
동경은 신라의 수도 경주
북지영풍은 초근목피로 연명한 태자의 모습
태자의 꿋꿋하고 의연한 태도를
칭송한 표현이라는데
태자인들 범부인들 세월 앞에 무엇이 다를까
보덕굴, 천리만리 꿰뚫어 보는 책을 받은
해설원의 말에 의하면
한봉이라는 아이가 어머니와
십 년을 공부를 약속하고 금강산에 들어왔다
삼 년째 금강산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지겨워져서
어머니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느티나무 가지에 앉아
글공부하지 않아도
노래 잘하는 매미가 부러웠다
만폭동 골짜기를 산책하던 한봉이
꽃송이를 꺾어 든
아름다운 처녀를 만나는데 이름이 보덕이었다
보덕이는 한봉이 가슴에 꽃을 달아주었고
한봉이는 보덕이 손을 잡았고
보덕이는 한봉이를 유혹하며 달아났다
쿵쿵거리는 가슴으로
보덕이를 쫓아간 한봉이
보덕이는 절벽가 바위 굴로 들어가 버리고
굴속에 따라 들어간 한봉이
보덕이한테 금빛 책 한 권을 받았는데
책 이름은 ‘천리만리 꿰뚫어 보기’
한봉이는 글자들을 한 자도 읽을 수 없었다
보덕이는 돌 책상 옆에 놓인 책 더미 가리키며
백 번 이상 읽으면 금빛 책을 읽을 수 있다고 하고
새로운 결심을 하고 돌아간 한봉이
어머니가 보내준 책들을 백 번씩 읽고
훗날 학자가 되었는데
자기를 깨우쳐준 보덕이를 잊지 못해
보덕이가 글공부하던 굴을 보덕이라 하고
나중에 보덕암이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이율곡, 보덕암에서 시를 쓴
열여섯에
어머니 신사임당을 잃고
시묘살이 3년 후
열아홉에
금강산에 들어와 공부한
머리카락이 발끝까지 오도록 길었다던 율곡
금강산 기이한 형상과 모습 기록하기는
정말 어렵다고 한 그는
보덕암에 와서 시를 썼다
“내가 사랑하는 보덕굴은
구리 기둥이 천 척이 넘는다
날렵하게 허공에 있는 절
하늘의 조화이지 사람이 만든 건 아니다
아래서 올려다보면 그림과 같고
올라오니 몸에 땀이 난다
선승은 속세와 인연을 끊어서
가진 것이라곤 종이 봉지에 솔잎뿐
이곳에 살려는 마음 가지면
곡기 끊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율곡 「풍악행」을 읽어가며
율곡 영향을 받은
고성 지역 유가들을 생각해 본다
이이 김장생 송시열 이항로 최익현
그리고 유인석으로 이어진 기호학파 기운은
금강산 주변에 유가 정신을 틀었다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향교를 마구간으로 쓰며
마구 짓밟자
“너희 오랑캐 족속이 공부자를 어찌 더럽히느냐”
왜적의 탄압을 무릅쓰고
호통치고 꾸짖어 공자의 위판을 지킨 고성
비로봉에서 읊은 시들
금강산에서 가장 높은
자연 전망대이자
일만 이천 봉을 거느린 금강산 주봉인 비로봉
비로봉에서 뻗은 장쾌한 지맥은
부드럽고 유장한 내금강과 장대한 외금강
아름다운 해금강을 뿌리로 내리고 있다
비로봉 아래 남쪽에는 비로암이 있고
내려가면 원적암이 있고
거기서 더 내려가면 묘길상이 있다는데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고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성삼문은
시조 「봉래산가」를 남겼다
“이 몸이 죽고 죽어 무엇이 될 고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돌야청청하리라“
솜다리와 곰취와 각시꽃 길로 오른 비로봉 정상에는
배처럼 생긴 배바위가 있어
바닷가에 나간 어부들이 등대를 삼았다 하고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비로봉을 이렇게 썼다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본 이 그 누구인가
동산과 태산이 어느 것이 높았던 고
노나라 좁은 줄도 우리는 모르거든
넓고도 넓은 천하 어찌하여 좁단 말고
아, 저 경계를 어찌하면 알 것인고
오로지 못하거든 내려감이 이상하다“
일제강점기에 비로봉이 오른 사람들은
내금강 쪽 바로 아래 산장이 있어
여기서 하루를 묵었다고 한다
[제3부. 외금강]
해설원의 말
“비로봉 동쪽이 외금강입니다. 금강산에서 손꼽히는 계곡과 폭포들이 많이 있지요. 이곳은 지역의 특성과 탐승경로에 따라 열한 개 구역으로 나누는데, 만물상구역과 구룡연구역과 수정봉구역이 아름답습니다. 선하구역도 아름답지요. 한하계, 만물상, 신계사, 옥류동, 구룡연, 상팔담, 12폭포, 구룡소 등 명소가 많습니다. 외금강에서 내금강으로 넘어가는 경계가 온정령입니다.”
금강산온천, 바위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수정봉과 바리봉과 대자봉 기슭
비둘기바위와 자라바위를 지나
삼단계절폭포와 계절폭포를 뛰어 내려온 개울
문주담에 고여있다 내려온 온정천
온정천과 만나는 혁명사적관 앞
문필봉과 하관음봉 사이
신계사로 넘어가는 원호고개 입구
금강산온천은
바위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석간수라고 한다
무색무취가 비누가 잘 풀린다는
백두대간 바위와
바위틈에서 나와 모인다는 석간수
조선 초기에는 온정리 옛 지명이
양진養珍이었다는
그래서 양진온천으로 알려졌다는 금강산온천
이곳에 석간수 약수터가
관음연봉과 수정봉 자락에
별이 흩어진 듯 많다고 한다
아름다운 금모래우물
인삼과 사슴뿔 효과를 본다는 삼록수
금빛 이슬을 비춘다는 금로수
그리고 장군이 마셨다는 장군수와
금강산의 이름을 딴 금강수
용바위에서 흘러나온다는 용암수
온정리 금강수
수정같이 맑은 수정수
약수마다 이름들이 붙었다고 한다
세조가 이곳 온천에서 휴양하였다는
신경통 심장병 고혈압 관절염
척수질환에 좋다는 해설원의 말
나는 세조가 북한강 물길로
궁궐에 돌아가던 중
안개 속에서 종소리가 들려 찾아가 봤더니
석간수에서 떨어지는 물이
종소리를 내어 수종사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풍광이 아름다운 남양주의 절을 떠올렸다
수종사를 드나들며 시를 썼던
조선인이나 조선시를 쓴다고 했던
민족의 문호 다산과
남녘 끝자락에서
스승인 다산을 뵈러 왔던
초의선사를 떠올려본다
추사의 후원으로 제자를 데리고
양평 철원 김화 회양을 거쳐
금강산에 온 초의는「유금강산시」를 남겼다
“첩첩히 산이요 굽이굽이 물길이다
첩첩한 산굽이 흐르는 물
활처럼 휜 하늘을 가릴 듯
안개이슬 구름으로 옷 만들고
서리 맞은 꽃잎으로 식량을 대신하리“
만물상, 금강산 제일 승경
나이 수백 살 미인송들이
잔가지 없이 죽죽 뻗고 줄지어 선
잣나무와 단풍나무와 산벚나무 숲길 따라 올라가다
상등봉에서 흘러내린 산관음봉과
관음연봉을 등 뒤로하고 바라보면
금강산 제일 승경 만물상이 보인다
기둥 모양 세로금이 가거나 깨진
주상절리를 이뤄 세상에 만 가지 물체를 닮은
화강암 바위들이 만물상을 만들어놓았다
삼선암과 삼선암 뒤에 귀면암
귀면암 뒤에는 2004년 맨발로 올랐던 천선대
천선대 뒤에는 오봉산이 우뚝하다
천선대에서 한참 쉬다 오봉산에서 흘러내린
천선대 아래
천선계곡을 따라서 내려오면
하늘문이 열리고
하늘문 아래는 안심대
안심대 위로는 세지붕이 솟아있다
온정령 아래
만산정으로 내려가면
옛날부터 차와 음료수를 팔았다는
매점이 있는 전망대 겸 휴게소
옆에는 수정같이 맑은 샘물 만상천이 있고
이 물을 마시면 무병장수한다고 한다
보기 나름 이름 붙이기 나름인 만물상을 보러 가려면
만상정 사거리에서
천선계곡으로 들어가야 한다
구룡연계곡, 폭포와 연못이 어우러진
구룡폭포와 구룡연 가는 계곡에는
내금강 만폭동과 같이
폭포와 연못이 아주 많다 하고
구룡연 가는 길은
험준한 바위산으로 둘어싸여
상팔담과 봉황잉 날아가는 듯 비봉폭포
구슬발을 드리운 듯 주렴폭포와
봉황이 춤추는 듯 무봉폭포
두 개 구슬을 꿰어놓은 듯 연주담이 있고
구슬방울이 굴러가는 듯 옥류담은
금강산에서 가장 크고
가장 맑다고 한다
지도를 보니
아래 골짜기부터 신계동 옥류동
구룡동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
수정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끼고 난 절로 가는 길을 걸으며
김병연은 이런 시를 썼다
“푸른 길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누각마다 시인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날아 내리는 폭포는 용의 조화
하늘 높이 솟은 봉우리는 칼로 깎은 듯
나무 위 선학은 몇천 년 묵은 듯하고
물가 푸른 소나무는 삼백길이나 되겠다
절간 스님은 봄병 든 내 마음 알길 없어
무심히 한낮에 종을 쳐 놀라게 한다”
구룡폭포, 천 길 흰 비단 드리운
남강 상류
옥류동 서쪽 좁고 긴 골짜기 구룡동에는
은실처럼 곱게 흘러내리는 은사류가 있고
무봉폭포 지나
왼쪽으로 일이 리쯤 들어가면
주렴폭포가 나오고
주렴폭포에서 오 리쯤 가면
구룡연을 향해
장쾌하게 쏟아지는 폭포
구룡동을 뒤흔들며 용이 올라가듯
웅장한 우렛소리
물보라가 싸락눈처럼 날린다
중향폭포라고도 한다는
바위 전체가 하나의 통바위여서
폭포수가 맑고 깨끗한 비단을 닮은 구룡폭포
송강 정철은
폭포 앞에 왔다가
「관동별곡」에서 이렇게 읊었다
“은 같은 무지개 옥 같은 용의 꼬리
섯돌며 뿜는 소리 십 리에 잦았으니
들을 때는 우레더니 와서 보니 눈이더라“
장쾌하고 웅장한 폭포 앞 너럭바위에는
신라 때 학자
최치원의 시가 새겨져 있는데
해석하면 이렇다
“천 길 흰 비단 드리웠는가
만 섬 진주알을 흩뿌렸는가“
폭포 옆 바위벽에는
해강 김규진 글씨 미륵불彌勒佛
글씨가 위에서 아래로 새겨져 있다
상팔담, 나무꾼과 선녀가 만난
구룡폭포 위에는 물을 담았다 내려보내는 상팔담
구정봉 기슭 구룡대에 오르면
상팔담이 내려다보인다
선녀 여덟 명이
달밤에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하고 돌아갔다는
한 장 통바위를 돌아 나가는
여덟 개 웅덩이는
거대한 구슬을 꿴 듯 장관이다
해설원이 말하길
옛날 금강산에 홀어머니 모시고 사는
나무꾼이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나무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포수에게 쫓기는 사슴이 나타나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나무꾼은 사슴을 나뭇단에 숨겨 주었고
목숨을 건진 사슴은
나무꾼이 장가를 못 간 노총각임을 알고
둥그런 보름달이 뜨는 날
금강산 구룡폭포 위 팔담에 가면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는데
옷을 감추면
하늘로 돌아갈 수 없느니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이 셋을 낳기 전에는
절대 옷을 보여 주어서는 안 된다 당부하고
숲속으로 사라진 사슴
나무꾼은 사슴이 시키는 대로
구룡폭포 위 팔담에 숨어있다가
목욕하러 내려온 선녀 옷 한 벌 감추었고
날개옷 잃어버린 선녀
하늘로 올라갈 수 없어 슬피 울다가
나무꾼 아내 되어 금강산에서 살게 되었다
세월은 흘러
나무꾼과 선녀 사이에는
아들과 딸 두 아이가 생겼고
나무꾼은 이제
날개옷 보여 주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날개옷 입은 선녀 하늘나라가 그리워
두 아이를 안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나무꾼이 크게 낙담하고 엉엉 울자
사슴이
나무꾼 앞에 나타나 말하길
“당신이 날개옷을 감춘 후로는
선녀들이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
하늘에서 목욕을 하니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면
아내와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나무꾼은 하늘에서 내려온 두레박 타고
하늘로 올라가
그리운 아내와 아이를 만났는데
그러나 하늘나라는 한동안 즐거웠지만
선녀에게도 나무꾼에게도
금강산만 못했다
나무꾼은 자기가 나서 자란 금강산보다
더 아름다운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고
선녀도 아름다운 금강산에서
선량한 나무꾼과 함께 살던 날들을
그리워했다
나뭇꾼과 선녀는
아이들 데리고 다시 금강산으로 내려와
어머니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영춘대, 봄이 먼저 찾아오는
산악미와 계곡미가 빼어나다는
동석동과 선하동과 세채동
기암괴석과 맑은 계곡
폭포와 담소와 숲으로 이루어진
집선봉에 모인 신선과
채하봉의 이내를 따서 이름을 붙였다는 선하동
이곳에는 금강산에서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온다는
영춘대가 있다
온정리 삼거리에서 술기넘이고개 넘어
신계천 건너고 솔밭 지나면
정면으로 맞아주는 영춘다
표고 삼백오십 미터라는
이곳에 올라서면 집선연봉들과 채하봉
세존봉 봉우리와 동해가 보인다
개울가 동쪽 바닥에 수십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넓고 흔들리는 바위가 있어서
동네 이름을 동석동이라고 붙였다는
바위 아래쪽에는 동석담이라는 연못
연못으로 맑은 물이 흘러 들어오고
흘러 나가는 골짜기가 있다
구룡소, 아홉 마리 용이 살던
지금 유점사 자리에는
원래 큰 못이 있었고
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는데
아홉 마리 용은 53불이 들어오자
용 무리들은 서로 재주를 부려
지는 편이 못을 떠나기로 하였다
먼저 용이 조화를 부려
뇌성병력을 일으키고
폭우가 쏟아지게 했다
그럼에도 부처들은
여전히 느릅나무 위에 앉아있었다
부처는 차례가 되자 화火를 써서 물에 넣었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용 무리들은
견디지 못하고 서쪽 효운동 못으로 옮겨 가서
다시 살았는데 거기가 구룡소
부처가 그곳에서도 못살게 하자
아홉 마리 용들은
오늘의 구룡연으로 옮겨 갔다
효운동 구룡소는 돌이 움푹움푹 패어있는데
크고 작은 독을 물속에 넣은 것도 같고
돌확을 깊이 파놓은 것도 같고
아홉 마리 용이 살던 자리라고도 하고
아홉 마리 용이 달아날 때
돌을 뚫고 나간 자리라고도 한다
천불동, 천 개의 부처가 있다는
부처처럼 생긴
기암괴석이 천 개가 된다는 천불동
장전만 서쪽 천불산과 천불천 계곡 상류다
천불천은 오봉산 동쪽에서 시작
이십오 리를 달려온
천불동 물과
세지붕 동쪽에서 시작
이십이 리를 달려온
천 개의 폭포가 있다는 천폭동 계곡
7번 국도를 건넌 다음
고성군 사기박리 여울에서 합류
장전항 북쪽 개울로 흘러든다
세지붕 문주봉 천불산으로 이어지는
능성 북쪽에 숨어있는
천폭동 계곡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는
두줄폭포 이단폭포 범바위 선인굴 육선암과
산주폭포 연주폭포 삼단폭로와 교향폭포와
비단폭포 군선암 작은이단폭포가 있고
다시 내려오다가
오봉산 천주봉 육선암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가리산 쪽 뻗어 내리는 천불동 계곡으로 올라가면
삼단폭포와 백사폭포와 오단폭포와 천불폭포
천폭동은 폭포돠 연못이 아름답고
천불동은 기암괴석이 천 개 부처 모양
장전항 쪽으로 나오면
삼구시대부터 있었다는
만리고성과 주험리고성이 있다
외금강을 나오며
계곡 상류에서 내려오면서
박달나무 군락에서
상수리나무 군락으로 이어진다
그 아래 음지에서 잘 자라는 서어나무가
골짜기를 가려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계곡에는 연분홍 옆구리 띠와
타원형 반점이 선명한 산천어
버드나무잎을 닮은 버들치가 있고
산송어와 알록고기
물이 고인 담소에는
옆구리에 주황색 세로띠를 두른 금강모치가 있다
장수하늘소 유충이 산다는
서어나무 줄기와
성충에게 줄기 즙을 젖으로 먹이는 신갈나무
큰흰줄나비와 네발나비
부전나비가 앉아있는
산기슭
금강산 대장봉 바위틈에서 발견됐다는
무메기름나물과 금강봄맞이꽃
금강초롱꽃과 도라지모싯대가 보인다
[제3부. 해금강]
해설원의 말
“동해안 금강산인 해금강은 기이하고 묘한 절벽들과 소나무가 울창한 바위섬들이 어우러져 천지신명이 만든 걸작품입니다. 고성군 입석리 일대 해안 절경을 포함하는 지역입니다. 삼일포, 영랑호, 감호, 남쪽의 화진포에서 바다만물상, 금강문, 북쪽의 금란굴, 총석정, 시중호를 아우릅니다. 고대로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한 국토 유람지였고 많은 흔적을 이야기와 시로 남겼습니다. 온정리지구에서 나와서 삼일포지구, 해금강지구, 성북리지구, 고성항지구, 고성읍지구, 통천지구, 시중호지구, 통천공항을 지나 시중호지구, 동정호지구를 지나 원산지구까지 여행선이 됩니다. 북남의 남북의 공동 금강산 관광사업은 화해와 협력의 상징이고, 상호 신뢰를 회복하는 한반도 긴장 완화에 중요한 사업입니다.”
삼일포, 화랑이 사흘 묵고 간
온정리에서 십 리
고성에서 북쪽으로 칠팔 리
남강 하류 후천이라 부르는 북강 옆 삼일포
참대 군락이 있는 삼일포는
네 명의 화랑이 3일간 머물렀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라고 한다
송강 정철은
총석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삼일포를 찾아와 이렇게 썼다
“고성을 저만치 두고 삼일포를 찾아가니
붉은 글씨 완연한데 사선四仙은 어데 갔나
여기 사흘 머문 후에 어디가 또 머무는 고
선유담 영랑호 거기나 가 있는가”
옛날 신라 화랑 네 사람
영랑 술랑 남랑 안상이 와서
머물다 갔다고 하여 사선정
정자에 오르면
달처럼 둥근 호수에 비치는
일만 이천 봉우리와 끊없이 펼쳐진 바다
호수에 담긴 섬인
와우도와 무선대와 송도
난초가 자라는 삼일포 주변 기슭 바위 언덕에는
장군대라는 전망대가 있고
호반에는
향토 음식점인 단풍관
단풍관에서 내려다보이는 호수
맑고 오묘하며 그윽하고 밝아
복숭아꽃 피는 봄날엔 신선 세계의 경지라고 한다
영랑호, 화랑 영랑이 다녀간
해금강 남강 하구 남쪽
저녁노을에 비단 펼친 듯 아름다운
영랑호
새와 바람과 구름이 노는 영랑호는
개펄 한쪽에 모랫둑이 쌓여서 생긴
바닷물이 드나드는 호수
신라 화랑
영랑이 다녀간 호수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여기서 바닷가로 육백여 걸음을 가면
작은 언덕 위에
커다란 통바위
월자국에서 온 53부처들이
이곳에 종을 걸어놓고
도착을 알렸다는 현종암이 있다
총석정, 다발을 이룬 주상절리
삼일포에서 북쪽으로 가면 총석리
총석리 앞바다
정자는 사라지고 바위 총석정만 남아 있다
영랑 남석 안상 술랑
네 화랑이
낭도 삼천과 뱃놀이를 즐겼다는 곳
분출한 용암이 식어
팔각 육각 오각 사각을 이룬 돌기둥들
다발을 이룬 현무암 주상절리
돌기둥들은 파도에 부딪혀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고
그래서 기이하고 아슬아슬하다
서고 눕고
무너져 주저앉은 총석 가운데
가장 빼어난 사선암四仙巖
네 돌기둥 꼭대기에서
화랑 네 명이
놀다가 갔다고 해서 사선봉
화랑들은 놀았던 기념으로
동쪽 언덕에 기념지를 세웠으나
글자가 마멸되어 판독하기 어렵다고 한다
고려 때 안축이 와서 「관동별곡」을
기철이 와서 「총석정가」를
송강 정철이 다시「관동별곡」을 지었다
옛 시인 송강 정철은
이 고장 사람들이 통천금강이라 부르는 총석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금란굴 돌아들어 총석정 올라가니
백옥루 남은 기둥 다만 넷이 서있구나
공수의 솜씨련가 귀부로 다듬었나
구태여 육면은 무엇을 상떴든고”
해돋이와 달이 뜨는 광경이 장엄하여
해돋이 구경과 달맞이를 하지 않고는
총석정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니
총석정을 보지 않고는
금강산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니
어느 보름 밤낮 하루 여기서 보내고 싶다
금강산을 나오며
1.
금강산에서 나오는 길
멀어지는 금강산을 되돌아보며
옛사람 시를 떠올린다
“바다 위에 푸른 노을 자색 안개 사이로
동쪽을 바라보며 신선에게 절하고
삼신산을 물어보았다
호화로운 저택에서 사는 사람도
잠시 머물다 가는데
오랜 세월 영원토록
만물은 한가로이 지내는도다”
우리 할아버지 말대로
금강산을 보고 나니
그동안 보았던 산들은 모두 흙더미다
바윗덩어리이고
돌무더기이고
도랑의 흙탕물이다
서라벌에서 관동 해변을 거쳐
해변과 호수와 놀다
금강산 봉우리 곳곳에 올랐던 화랑과 승려
봉우리마다 이름을 붙이고
계곡마다 절을 세우고 산천만다라로 숭앙하던
현세의 불국 정토를 꿈꾸었던 통일신라인
개경에서 내금강을 넘어 외금강으로
외금강에서 해금강을 돌아
관동을 유람했던 고려의 문인 묵객
왜란과 호란을 거친 후
조선의 자존심을 세우려
수없이 금강산을 향해 갔던 유가 지식인
말을 타고 나와
평구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치악을 거쳐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던 한글 정신
중국의 그림을 때려치우고
금강산을 수묵으로 담은
조선 그림
쇠락해 가는 조선을 일으켜 보고자
금강산을 찾아갔던
경화사족들의 화젯거리였던 순례길
사천칠백오십 리 백이십칠 일간
조선의 경치를 신바람 나게 다녀온 후
묘향산으로 향한
세상만사가 쓸데없는 일이니
하루아침에 뿌리치고
금강산 찾아가서 경치를 다 본 후에
아미타불 염불하며 일생을 보내라는
안동 어느 절에 살았던
이름 모를 스님의 『금강산가』
일제 강점기 국토의 아름다움을 되찾고
민족 기상의 근원을 확인하고자 갔던
지식인과 학생들의 수학여행
민족상잔으로 찢어진 가족이
수십 년 만에 늙어버린 얼굴로 향하던
이산가족 상봉 장소
정주영이 소를 몰고 가고
남한의 대중이 관광버스를 타고
남북 작가들이 만나 정서 통일을 확인하던 곳
2.
철책과 장애물로 뒤엉킨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을 지나고
송도진리 통일전망대에 올라
지나온 북녘을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는 금강산 연봉의
금빛 바위와 장엄한 봉우리들
파란 하늘 아래
아침 햇살에 은빛
저녁 햇살에 금빛으로 반짝이는 황홀함
여기서 해금강은 십 리 반이 안 되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말무리 반도 끝 해만물상 바위들
저건 남쪽을 향해 갈기를 세운 사자바위고
종을 걸어놓았다는 현종암이고
그 옆에는 부처바위
갈매기 똥으로 덮여 백바위가 된 사공바위
낙타 등처럼 생긴 바위산 낙타봉을
구선봉이라고 부르는데
아파라, 구선봉 능선에 지나가는 철책과
구선봉 아래 숲에 둘러싸인 감호
그리고 그 뒤로 미륵봉 일출봉 채하봉
일출봉과 채하봉 사이에
아련히 떠있는
맑은 날에만 볼 수 있다는 비로롱
채하봉 옆 육선봉과 집선봉과 세존봉이 보이고
그 옆으로 나무꾼을 보고 놀란 선녀가
젖가슴 하나 두고 갔다는 옥녀봉
옥녀봉 옆에는 신선대와 그보다 조금 높은 관음봉
문주봉과 수정봉 능선이 끝나며
해만물상을 놓아둔 삼천리 금수강산 방점
통일전망대를 나와
6․25전쟁체험관과 DMZ 박물관 거쳐
북녘행 철도 역사가 세워질 제진리를 떠난다
마차진을 떠나며
침대에 누워서도 눈에 선한
언제 또 가볼 수 있을지 모르는
금강산 생각과 외국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자는 둥 마는 둥
어느새 잠이 들었나
동해의 파도가 와서 다독여 주었나
아침 창이 밝아
창문을 여니 눈부신 햇살이
금강산 골짜기 장쾌한 폭포처럼 방 안으로 쏟아진다
바다 위를
멀리 둥글게 휘어진 수평선에서 건너오는
금빛 은빛 물별들
검은 어선들이
흰 꼬리를 끌고 다니며
아침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
여행객들이 밤늦게까지 고기를 굽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왁자지껄 말을 섞던 나무 탁자는 비어있고
달빛이 내리던 언덕에는
루드베키아와 패랭이와 메꽃
개망초로아 접시꽃과 시누대가 흔들리고
검푸른 해송이 무성한 바닷가에는
맑은 파도와 흰 거품
깨끗한 모래가 아름답다
젖은 모래밭에서
할아버지와 손녀가
모래성 쌓기 놀이를 하고 있다
이념을 분단을 잊어버린 모습
평화롭다
내가 바라는 평화
소나무가 빽빽한 섬
바위를 거느린 우람한 소나무 한 그루가
춤추는 무송정
섬과 바위 주변으로만 모여드는 파도
파도 위에 앉아
반빡이는 햇빛
흰 거품을 물고
육지를 향해
벼랑을 향해 돌진하는 파도
바달르 향해 멀리 뻗어 나온
푸른 곶에 서있는
몸이 하얀 거진등대
등대를 보며
파란 바다에 가득한 햇살과
물별들을 보며
저 활기찬 아이들과
건장한 어른들을 보며
민족의 희망을 본다
수평선 너머에서 퐁퐁 피어오르는 붕게구름
폭포처럼 바다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데리고
나를 향해 국토를 향해 달려오는 파도
반짝이는 파도가 모랫둑을 무너뜨리는 것에서
깊은 민족 사랑의 불이 분단의 철책을 녹이는 것을
동족 간 대결 없는 평화와 통일을 나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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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
이 시집을
분단의 희생자들과 그 유족들
민족 화해와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북남 대준들
그리고
민족 식물생태학자 차종환 박사님과
「I’m gonna pray for Korea」를 부른
생면부지의 스웨덴 아티스트 Adahl에게
■ 시인의 말
2004년 7월에 금강산 외금강과 해금강을 한 번 다녀왔다. 일부러 맨발로 걸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여행 기억이 많이 감퇴하였다. 그간 비무장지대 평화 손잡기 행사와 철책을 따라서 걷는 통일 걷기에 참가해 보고, 파주는 물론 금강산과 가까운 고성 일대를 둘러보았다.
금강산과 지척인 건봉사와 철원에 가보고, 남북 노동자 축구 대회 응원을 가보고, 서울 평양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서 뛰어보았다. 금강산 관광 재개를 촉구하는 토론회에 참석하고, 남북한 시에서 어휘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토론회 발제를 하였다. 나름 통일에 대한 관심과 실천 행위였다.
이 시집의 집필과 출판 의도는 남북, 북남 대중들의 정서와 정신의 근원이 같음을 금강산을 통해 확인하려는 것이다. 민족 화해와 평화 통일을 기원하며 정서 통일을 시작으로 정치 경제의 통일 시기를 조금이라도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루어졌다.
시집 구성은 1부 금강산에 가며, 2부 내금강, 3부 외금강, 4부 해금강, 5부 금강산을 나오며로 구성하였다. 남북, 북남 간에 아무런 제약 없이 금강산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다린다.
시집을 내면서 홍용희, 권성훈 평론가, 정원도, 김경식, 김윤환, 채상근, 서미숙 시인의 크고 작은 훈수가 있었다.
2019년 12월
강원도 고성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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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詩集 [※서사시 금강산※]
[ 발문 ] -
그리움, 화해와 통일을 견인하는 힘
윤일현 시인. 대구시인협회 회장
11월 중순 한밤, 뜻밖에 카톡 문자가 왔다. “형님, 주무시는지요?”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내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공 시인과는 그동안 이런 문자를 교환한 적이 없었다. “이번 시집 발문은 형님이 해주세요. 인생에 빚도 있고, 형님과 추억을 기록으로 남기고픈 마음도 있고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숨을 한번 들여 마시고는 쓰겠다고 했다. 공광규의 시집에 내가 덧붙여야 하는 말, 그 말이 무엇일지 내가 먼저 궁금해서 승낙을 했다.
1985년 6월 어느 날, 국가안전기획부 포항 분실, 분실장은 작은 책자 《삶과 문화》를 내 앞에 내밀었다. 포항에 거주하는 노동자, 교사, 민주화 운동가의 글이 실린 조악한 프린트물이었다. 분실장은 대구지부에서 대학 담당관을 지낸 사람이라 나를 잘 알고 있었다.
“자네는 나와 무슨 악연이지. 가는 곳마다 만나는가. 조용히 선생만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이게 또 뭔가. 자네가 쓴 「다시 4․19를 생각하며」도 문제가 많은데, 공광규라는 인간의 글은 도저히…도대체 어떤 놈인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르는, 간이 배 밖에 나온 놈이네”
그만두세요/큰일 낼 거예요/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려요/ 물러가세요/그렇지 않으면 무너뜨리겠어요/참혹한 모습으로/끌어내리겠어요/아무리 성경을 뒤적거려도/영원한 용서는 나오지 않을 거예요/일곱 번을 일흔 번씩 칠백번씩 칠천 번씩…/이렇게 용서하지는 않았을 거예요/좋은 말할 때/중국집 주인으로 물러나 앉으세요/안사람을 요정 마담으로 보내세요/그것이 싫다면/좋아요 좋아요 기회를 드리겠어요/깜깜한 밤중에 비행기 타고 도망가다가/태평양 상공에서 어떻게 되거나 말거나 하세요/더 이상 장난치지 마세요/흐르는 강물을 삽으로 막는다고 소용이 있나요/솟는 샘물에 구정물이 핀들 소용이 있나요/불어오는 계절품을/입김으로 막는다고 소용이 있나요/어서 사라지기나 하세요/지구를 아주 떠나세요/그렇지 않으면 큰일 낼 거예요/제발 제발 좋은 말 할 때/그만두세요 참혹하게 끌려 내려오기 전에/충고하겠어요/한 민중의 이름으로 경고하겠어요
-공광규,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요」 전문, 『삶과 문학』 창간호, 1985
분실장은 밑줄 친 부분을 읽어보라고 했다. 당시에도 등골이 오싹했다. 절대 권력자 전두환을 참혹하게 끌어내리겠다고 협박한 것도 모자라 영부인을 술집 마담으로 보내라고 하는 20대 노동자 공광규의 절규. 이 청년을 어찌할 것인가. 나는 아무 말 없이 분실장을 바라보았다.
“공광규를 구속하기로 했어 자네도 더 이상 선생을 할 수 없을 것이네”
그의 말에 가슴이 서늘해지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스무 살 무렵의 공광규는 간혹 내 자취방에 와서 읽은 책을 두고 새벽까지 나와 끝없는 토론을 하곤 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를 때는 끝까지 질문을 되풀이했다. 그는 문장을 잘근잘근 씹어 진액을 빨아먹어야 하는 철저한 독서가였다. 그때 그의 시는 저토록 거칠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공광규는 여리고 섬세한 내면을 가진 문청이었다.
오랜 투병의 지친 생활 위에 덧붙여진 연행과 추방 등으로 점철된 나의 낭인 생활이 그와 자주 겹친다. 고립과 단절의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는가. 저 여린 친구가 해직과 투옥의 고통을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했다. 나는 분실장에게 말했다.
“배후가 있고, 거대한 음모가 있는 친구라면 저런 가당찮은 표현을 하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노동자일 따름입니다. 공광규를 구속하지 말고 포철에서 쫓아내지도 마십시오. 저 친구를 잡아넣으면 테러리스트 하나를 키우게 됩미다. 저 친구가 옥살이하고 나오면 과격한 투사가 되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그냥 한 번 눈감아 주세요. 공광규를 살려 준다면 저도 『삶과 문화』를 폐간하고 앞으로 조용히 살겠습니다. 각서도 쓰겠습니다.
“자네는 각서 전문가 아닌가. 또 각서를 쓰겠다고? 자네 말은 믿을 수도 없고, 믿기도 싫네.”
나는 교사로 임용되고 나서 정보기관이 신임 교사의 사상을 검증하는 ‘보안심사위원회’에서 대학 시절의 시위와 투옥 전력 때문에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나는 안기부에 가서 조용히 교사만 하겠다는 각서를 썼다. 그래서 분실장이 나더러 각서 전문가라고 비아냥거렸던 것이다.
그날 두 시간 가까이 공광규를 구속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나는 진심으로 설명했다. 믿을 수 없게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을 공광규에게 말하지 않았다. 불덩어리 같은 그가 가만히 안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김종인 시인한테만 있었던 일으 간단하게 설명했다.
1987년 6월 항쟁 때 우리는 포항 민주화운동연합 등과 함께 포항 지역의 시위를 주도했다. 그해 11월 중순, 포항 죽도 성당에서 경찰의 저지 속에 민주교육전국교사협의회 포항지부 결성식이 있었다. 김종인 시인과 내가 창립 공동회장이 되었다. 나는 그 일로 88년 1월 해직되어 동지들과 작별 인사도 못하고 대구로 와야 했다.
공광규와도 그렇게 헤어졌다. 그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포항을 떠나기 전 이미 공광규도 포항을 떠났다는 소문이 들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정안면, 정원도, 공광규 등 죽도성당 시낭송회 관련자들이 다른 도시로 전출을 당하거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공광규는 이후 왕성하게 활동하며 주목받는 시인으로 성장했다. 나는 공광규의 시집과 작품을 빠짐없이 챙겨 읽으며 그의 성취를 멀리서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의 작품에 늘 나를 투영했던 건 젊은 날의 공광규 속에 내가 겹쳤거나 내가 그를 잘 이해했기 때문이겠다.
2017년 12월 분단시대 동인인 정원도 시인한테 전화가 왔다. 『실천문학』에서 공광규의『파주에게』와 정원도의『마부』가 나왔으니 80년대 같이 활동했던 사람들이 포항에서 한번 모이자는 사발통문이었다. 그날 나는 ‘다시 80년대를 회상한다’를 소재로 이야기를 했다. 공광규와는 30여 년 만의 해후였다.
“나는 공광규가 85년 ≪삶과 문화≫에 실었던 「더 이상 말하지 않겠어요」처럼 여전히 원색적이고 거친 시를 썼다면 이 자리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공광규의 시를 늘 챙겨서 읽었습니다. 「별 닦는 나무」같은 시로 수많은 사람들을 적셔줄 수 있는 시인이기에 여기에 왔습니다. 내가 겪어보니 민중문학가라고 큰소리 내는 사람치고 삶과 문학이 일치되거나, 서민정치하겠다며 표 달라고 읍소하는 사람치고 자기 삶이 서민적인 사람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7,80년대 우리가 소중히 여겼던 가치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억압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을 위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는 왜 저항문학, 순수문학이라는 프레임을 미리 정해 놓고 글을 써야 합니까. 교사든 공무원이든 노동자든 학원 강사든 목욕탕 세신사든 자기가 활동하는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경험을 진실하게 표현하면 됩니다. 그 기록물이 때로 순수문학이 되고 때로 참여문학이 되는 것 아닙니까. 입에 저항이라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매달았던 사람치고 정말 저항이 필요할 때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민중시라는 것이 거창한 것인가요. 그들을 가르치려들지 말고 먼저 그들을 적셔주었다는 점에서 이제 공광규를 시인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진보나 보수 모두 자기 패거리의 이익을 위해 투쟁할 뿐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적셔주고 위로하며, 그들의 권익을 지켜주기 위한 행동은 적극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이쪽 진영에 있는 사람도 잘못하면 혹독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 편은 무조건 옹호해야 합니까. 시인은 그런 자들과 궤를 달리해야 합니다.”
예의 공광규의 답례는 겸손하고 진지했다. 30년이 지났건만 조용한 목소리와 공손한 태도도 여전했다. 어제 본 듯이 반갑고 미더웠다. 뒤풀이 시간에 그가 다가왔다.
“그런 큰일이 있었는데 왜 여태 제게 말하지 않았는가요? 형님,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그때 구속되었다면 제 삶이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그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앞날을 누가 알 수 있으랴. 운명의 파도와 마주칠 때 그게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나중에야 할 수 있는 법. 그때 어린 나이로 구속이 되었더라면 그가 고통을 통해 나라와 민족의 다 큰 인물이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혹독한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완전히 망가졌다면 아름다운 서정시를 쓰면서, 투철한 역사의식에 근거한 민중시를 동시에 쓸 수 있는 시인 공광규는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렇게 합리화하는 수밖에 없다.
시집 『금강산』초고를 받기 전에 그의 시가 외세와 반통일 세력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구호나 통일의 당위성을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기를 소망했다. 초고를 꼼꼼하게 읽으며 안심했다. 어렵고 복잡한 구절이 거의 없어 특별히 설명하거나 해설할 필요가 없었다. 간단한 메모지와 마음의 준비만 하고 밥 먹고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그의 목소리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산속 깊이 들어갈수록 금강산의 수려한 풍광과 그 하나하나에 얽힌 이야기에 편안하게 몰입할 수 있었다.
공광류의 안내를 받으며 시집 속의 ‘금강산’과 내가 생각하던 금강산을 오르다가 “나는 청산이 좋아 들어가는데, 녹수야 너는 어이하여 내려오느냐”라고 일갈하는 김삿갓을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금강산 유람 과정에서 원효, 의상, 신라 화랑, 나옹, 서산, 사명, 왕건, 마의태자, 김시습, 임춘, 허균, 표훈, 정철, 추사와 초의선사, 소월, 정지용, 효봉과 법정과 고은 등 무수한 시인묵객, 고승대덕, 문장가를 만날 수 있었다.
아픈 누나를 위해 약초를 구하러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동생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죽은 누나. 그 누나가 들고 있던 초롱불이 금강초롱이 되었다는 전설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지상에 내려왔던 선녀가 나무꾼의 두 아이를 데리고 하늘에 올라갔다가 하늘나라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을 잊을 수 없어 나무꾼과 함께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게 한 금강산, 지주에게 수탈당한 민중의 마음이 새겨져 있는 메바위 전설을 알게 되었다.
노총각의 아쉬움과 화가 서려있는 절부암, 불로장생의 망장천 샘물, 발 디디는 모든 곳에 민중의 애환이 서려있고 산신령이 거주하는 민족의 영산 금강산. 조금씩 더 알게 될수록 가슴 가득 그리움이 차올랐다. 공광규는 금강산 시편 속에서 민초들을 가르치지 않고, 설득하지 않고, 주장하지 않는다. 순한 그의 성품과 맞춤한 시편들이다. 비로봉과 만물상 등 일만 이천 봉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온갖 전설과 이야기는 거부감 없이 남북, 북남 민초의 가슴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공광규이기도 하고 공광규가 아닌 시적 화자와 가설의 북녘 여성 해설원의 안내에 따라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을 돌아다니며 기암괴석과 봉우리, 계곡과 폭포, 절과 절터 곳곳에 가득한 수많은 전설과 일화에 귀 기울이다 보면 머리가 맑아진다. 어느 순간 나 자신이 우화등선의 즐거운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는 금강산 시편들이 주는 감동이 민족의 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견인하는 힘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워야 화해의 마음이 생기고, 뼈에 사무쳐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금강산 시편들은 정서적 공감을 통해 남북이 하나임을 깨닫게 해준다. 절절하게 보고 싶고 간절하게 그리운 마음이 생기면 ‘반외세 자주 통일의 당위성’은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공광규는『금강산』속의 그리운 금강산을 통해 남북과 북남 민중의 ‘정서와 정신의 근원’이 서로 다르지 않고 같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나는 남북과 북남의 모든 민중, 정치가와 지도자. 특히 남한의 보수와 진보 세결 모두에게 이 금강산 시편들을 같이 읽자고 제안하고 싶다. 금강산이 간절하게 그립다면 서로 손잡고 어떤 난관이나 외세의 방해도 물리치고, 우리의 성지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환경을 우리 스스로 만들자고 호소하고 싶다.
이 시집의 출간으로 남북의 시인들이 더욱 자주 왕래하는 계기가 마련되길 소망한다. 남쪽의 시인들은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북한산 등을 노래하는 시집을 발간하면 좋겠다. 남북의 모든 사람들이 남과 북의 산하를 간절히 보고 싶게 해야 한다. 공광규의 말대로 정서가 통일되면 의식과 생각의 통일은 보다 쉬워질 것이다.
통일이 되면 암울한 시대를 함께한 동지들과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보고 싶다. 해를 거듭할수록 내용이 더 추가된 증보 개정판이 나와 언젠가는 방대한 대 서사시 『금강산』이 완성되길 기원한다. 이 시집을 위해 애쓴 그의 열정과 변치 않는 민중 사랑과 민족 사랑, 국토 사랑에 다시 한 번 뜨거운 공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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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누가 금강산의 비경을 제대로 노래할 수 있을까? 이 점은 예부터 내려오는 이 땅의 질문이고 과제였다. 18세기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기억이 아득할 따름인데, 마침내 우리의 시인 공광규가 서사시 『금강산』을 탄생시켰다.
그로 인해 금강산의 절경은 물론 해와 달의 영겁 아래 화석처럼 바래고 스며든 수많은 설화와 역사의 곡절들이 생생하게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은 이 땅의 현묘한 정신사의 봉우리이기도 했던 것이다. 예부터 금강산 그늘이 관동 팔십 리를 간다고 했다.
공광규의 서사시 『금강산』의 메아리가 한반도 전역으로 울려 퍼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홍용희. 문학평론가
그리워야 화해의 마음이 생기고, 뼈에 사무쳐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금강산 시편들은 정서적 공감을 통해 남북이 하나임을 깨닫게 해 준다. 절절하게 보고 싶고 간절하게 그리운 마음이 생기면 ‘반외세 자주 통일의 당위성’은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공광규는 『금강산』 속의 그리운 금강산을 통해 남북과 북남 민중의 ‘정서와 정신의 근원’이 서로 다르지 않고 같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 윤일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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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광규 시인∥
∙ 1960년 서울 돈암동에서 태어나 충남 청양에서 성장.
∙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문학박사).
∙ 1986년 월간 『동서문학』으로 등단.
∙ 시집 『대학일기』『마른잎 다시 살아나』『지독한 불륜』『소주병』『말똥 한 덩이』『담장을 허물다』『파주에게』,
∙ 시선집 『얼굴 반찬』 인도네시아어 번역시집『Pesan Sang Mentari 햇살의 말씀』이 있음.
∙ 윤동주상문학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신석정문학상 등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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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 보도 자료 / 출판사 서평❚
등단 초기부터 생활 일상을 맑고 투명한 언어로 서정화하는 것은 물론 민중 민족 현실을 시로 담아내는 걸 놓치지 않는 공광규 시인의 8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 전체 5부 129편으로 구성된 1만여 행에 달하는 서사시 『금강산』이다. 공 시인은 금강산 관광이 가능했던 2004년 7월 금강산 외금강과 해금강을 다녀온 적이 있다. 시집은 ‘제1부 금강산에 가며’ ‘제2부 내금강’ ‘제3부 외금강’ ‘제4부 해금강’ ‘제5부 금강산을 나오며’로 구성하였다.
이 시집은 주인공인 남한의 남성 시인이,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 해설원의 금강산 탐승 안내를 받으며, 금강산의 봉우리와 계곡, 폭포와 담소, 내려오는 전설과 일화, 수목과 화초 등을 이야기하며 금강산 전체를 둘러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시집의 전후, 그리고 이야기의 중간중간 남북의 현실과 평화와 통일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시인은 “젖은 모래밭에서/ 할아버지와 손녀가” 세대를 건너 “모래성 쌓기 놀이를 하”듯, “이념을 분단을 잊어버린 모습”의 평화를 표현하며 “동족 간 대결 없는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것으로 시집을 마무리한다.
금강산 여행 노정은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서 비무장지대 철책 길을 맨발로 걸어 철원에서 금강산에 들어가 탐승을 한 뒤 강원도 고성 명파리와 마차진으로 돌아 나온다. 금강산에서는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순서로 예부터 상례화된 탐승 경로를 따라 다닌다. 1950년 6・25 상잔 때 폭격으로 대부분 불탄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 신계사 등 금강산 내 많은 사찰과 페허 속에 남아있는 불상과 부도 등 문화유산들, 금강산을 방문하고 시를 쓴 율곡 이이와 송강 정철, 김삿갓 등 문인과 겸재 정선 등 화가, 나옹화상,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승려, 황진이, 김금원 등 금강산을 방문했던 여성 인물, 소를 몰고 가서 금강산 길을 연 정주영 등 현대 인물까지 등장한다.
시집은 각 부가 시작되기 전에 ‘주인공의 말’ ‘해설원의 말’ ‘해설원의 마지막 말’을 통해 금강산의 지리적 특징과 탐승 범위를 제시하고, 인용 부분을 제외한 모든 시행을 3행으로 통일하여 가독성을 높이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북에 대한 유엔 제재와 미국 제재를 언급하고 자주성 없는 남북 정치지도자와 민중을 질타하는가 하면, “천진한 남북의 아들들이 서로/ 조국의 심장을 향해/ 겨누고 있는 총구”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민간인 통제선 안에서 만났던 미군을 묘사하고, 호국 투쟁을 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구한말 의병 투쟁의 거점 유점사, 남북경제협력을 꾀하다 자살한 정몽헌의 미스터리한 죽음 등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서사시 『금강산』에 대해 홍용희 문학평론가(경희대)는 “누가 금강산의 비경을 제대로 노래할 수 있을까? 이 점은 예부터 내려오는 이 땅의 질문이고 과제였다”며 “18세기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기억이 아득할 따름인데, 마침내 우리의 시인 공광규가 서사시 『금강산』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아울러 홍용희 문학평론가는 공광규로 인해 “금강산의 절경은 물론 해와 달의 영겁 아래 화석처럼 바래고 스며든 수많은 설화와 역사의 곡절들이 생생하게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며, “공광규의 서사시 『금강산』의 메아리가 한반도 전역으로 울려 퍼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한다.
윤일현 시인(현재 대구시인협회장)은 발문에서 “공광규는 『금강산』 속의 그리운 금강산을 통해 남북과 북남 민중의 ‘정서와 정신의 근원’이 서로 다르지 않고 같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며, “남북과 북남의 모든 민중, 정치가와 지도자, 특히 남한의 보수와 진보 세력 모두에게 이 금강산 시편들을 같이 읽자고 제안하고 싶다”고 한다. 또 “금강산이 간절하게 그립다면 서로 손잡고 어떤 난관이나 외세의 방해도 물리치고, 우리의 성지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환경을 우리 스스로 만들자고 호소하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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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2000봉 금강산, 129편 1만행 서사시로
공광규 시집 ‘서사시 금강산’
머니투데이 /배성민 기자, / 2020.02.04 09:40
1만2000봉이라는 명산 금강산이 1만행이 넘는 서사시로 탄생했다.
생활 일상을 맑고 투명한 언어로 서정화하고 민족 현실을 시로 담아내온 공광규 시인의 시집 ‘서사시 금강산’(천년의 시작 펴냄)을 통해서다.
5부 129편으로 구성된 금강산은 주인공인 남한의 남성 시인이, 여성 해설원의 금강산 탐승 안내를 받으며, 금강산의 봉우리와 계곡, 폭포와 담소, 내려오는 전설과 일화, 수목과 화초 등을 이야기하며 금강산 전체를 둘러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금강산 관광이 가능했던 2004년 7월 금강산 외금강과 해금강을 다녀온 적이 있는 기행문처럼 금강산의 절경을 묘사하고 역사 속 인물들도 노래한다. 금강산을 잊을세라 시인은 그뒤로 남북 노동자 축구대회 응원을 가보기도 하고 서울 평양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뛰어보기도 했다. 휴전선 철책을 따라서 걷는 통일 걷기 행사도 빼놓을 수 없다.
시인은 남북, 북남 대중들의 정서와 정신이 근원이 같음을 금강산을 통해 확인해 보고 싶었다고 했다.
시인이 금강산을 통해 조명하는 역사 속 인물들에는 경순왕부터 마의태자, 나옹 화상, 양사언, 서산대사, 사명대사, 정철, 김소월 등 고금을 넘나든다.
현대사의 인물들 중에는 금강산 관광과 인연이 깊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부자를 빼놓을 수 없다. 정주영 회장과 관련해 공 시인은 ‘정주영이 소를 몰고 가고/남한의 대중이 관광버스를 타고/남북 작가들이 만나 정서 통일을 확인하던 곳’이라고 썼다. 정몽헌 회장에 대해서는 ‘겸손한 평화주의자이자 금강산 관광 문을 연 사람’, ‘역사의 비밀을 안고/먼저 간 분단정치의 희생자’라고 했다.
공 시인은 금강산 봉우리와 그 속에 스며든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하고 싶은 얘기는 결국 하나였다.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통일 시기를 조금이라도 앞당기고 아무런 제약없이 금강산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다린다는 것.
시인은 시를 이렇게 끝맺는다. ‘반짝이는 파도가 모랫둑을 무너뜨리는 것에서/깊은 민족 사랑의 불이 분단의 철책을 녹이는 것을/동족 간 대결 없는 평화와 통일을 나는 보았다’ 통일을 보았다는 시인은 금강산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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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달빛자락 / 명상음악
*출처: 이동활의 음악정원(http://cafe.daum.net/musicgarden/5r73/4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