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과 나] '노나메기 세상'을 향한 치열했던 한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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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딱 한 마리 ‘장산곶매’이셨던 선생님께
어느새 3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날(2021년 2월 15일) 아침 “백선생님이 가셨네”라는 아내의 말에 가슴이 쿠웅 내려앉았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해도 온종일 억장이 막힌 듯, 가슴이 먹먹하고 아팠습니다. 백두산호랑이 같던, 아니 황해도 구월산의 장산곶매 그 자신이었던 선생님이. 이 땅에 남북통일, 민주화, 진보 노동자 세상이 아직도 오지 않았는데 가셨다니요? 소식을 듣자마자 맨 먼저 떠오른 것이 1987년 겨울 대학로를 가득 메운 ‘니나(민중)’ 앞에서 포효하시던 선생님의 진정한 사자후였습니다. 이제 어디에서도 다시는 듣지 못할 진정한 울림이었지요. 전국에서 모인 수천여명의 인파와 함께 광화문까지 큰길 행진을 하는데 감격과 감동의 도가니였습니다.
그리고 떠오른 것은 당시 대통령후보 방송연설 장면이었습니다. 평생 트레이드 마크인 말 갈깃머리를 선생님은 손으로 쓰윽쓰윽 몇 번 쓸어올리더니, 형형한 눈빛으로 고개를 흔드시며 “국민 여러분,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절대로 속으면 안됩니다. 그들은 81kg 거구인 저를 고문으로 38kg로 만든 흉악범입니다. 손톱 밑에 못을 찔러댔습니다”라고 포문을 연 후, 민중대통령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정치상황을 조목조목 설명하셨지요. 대본원고도 없고 리허설 한번 하지 않았으나 방송시간 20분을 정확히 지켰다지요. 민중이 십시일반 보내준 5천만원이 없었다면 방송연설이 불가능했다지요.
현재의 나라꼴 때문에라도 선생님이 너무 그립습니다. 그 무지막지한 고문도 이겨내셨는데, 달구름(세월)의 병마는 끝내 물리치지 못하셨습니다. 우리 나이 89세. 혹자는 천수를 누렸다 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뒤틀린 현대사와 함께해 오며 육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더 이상 추스를 수 없게 피폐해지셨지요. 이제 그만 이승의 일, 조국, 통일, 민주화, 진보, 노동자세상, 백범, 장준하, 문익환, 전태일, 김진숙, 자본주의, 지구촌 일 등 잊어버리고 평생 처음으로 온전히 등 눕히시고 편히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신께 주어진 ‘90년간의 숙제’는 하실 만큼 다 하셨습니다.
1999년인가 통일문제연구소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당시에는 드문, 인터넷신문(동아닷컴) 동영상 인터뷰였지요. “한 컷이라도 편집할 거면 하지 않겠다”는 말씀에 한 장면도 자르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다음해인가 평양에서 반세기 만에 누님을 만나 눈물로 얼룩진 손수건을 보여주셨지요. 죽는 날까지 빨지 않겠다고 했지요. 한 달에 한번 선생님의 멋들어진 시를 대문 앞에 자필로 써놓으셨던 통일문제연구소는 이제 곧 선생님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선보이려 단장을 하고 있습니다.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며,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노나메기 세상’을 꿈꾸며 만든 잡지에 졸문을 실어주셔 황홀해 했던 기억이 뚜렷합니다. 굶어 죽어가는 북한 인민들을 살려야 한다는 대의명분에 동참하고자 쌀 한 가마 값을 보내 드릴 때에는 또 얼마나 뿌듯했던지요. 고향의 대봉시를 조금 보내드리자 “뭘 이럴 걸 다”고마움을 표시하던 선생님, 고향집에 꼭 한번 모셔, 이 땅의 니나, 1927년생 농부 아버지와 말씀을 나누게 해드려 했는데, 이제 꿈이 되어버렸습니다.
얼마 전에는 선생님의 『버선발 이야기』를 새로 읽었습니다. 어릴 적 덧이름(별명) ‘부심이’와 ‘버선발’은 선생님 자신이지요. 흔히 선생님을 방배추, 황석영과 ‘재야 구라 3인방’이라 한다지만 선생님의 구라는 스케일부터 달랐지요. 제 둥지를 부수고 만주벌판으로 날아가는 장산곶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 시대 최고의 이야깃꾼이었습니다. 어릴 적 할머니와 어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들을 어찌 그리 하나도 잊지 않고 고스란히 재현해 놓으셨는지요. 이런 귀중한 구전문학은 유례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한자어를 비롯해 외국어가 전혀 없는 순우리말을 자유자재로 쓰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은 도시빈민들이 사는 산동네를 달동네라고 하셨지요. 동아리라는 좋은 우리말을 두고 서클이나 클럽이라고 하다니요. 터널도 선생님 제안처럼 ‘맞뚫레’나 ‘판굴’이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새뚝이도 선생님이 즐겨 쓰는 바람에 굳어졌지요. 특히를 땅불쑥허니로, 파이팅을 ‘아리아리’라고 쓴 글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요. 땅별(지구) 벗나래(세상) 한살매(한평생) 옛살라비(고향) 등 좋은 말들을 수백, 수천 개 선보이셨지요. 『버선발 이야기』책 말미에 있듯이 <백기완 낱말사전>이 만들어져 불티나게 팔리면 좋겠어요. 호수에 퍼지는 물무늬처럼 널리 널리 퍼져 쓰였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의 어머니는 ‘어린 싹수’를 보고 알고 계셨을 거예요. 아들의 한 살매가 얼마나 고달플지, 개똥같이 구르며 무수한 실패의 삶을 살게 될지, 그래서 그 숱한 역경을 이겨내라고 그때마다 딱 필요로 한, 목숨처럼 여겨야 할 말뜸(화두)를 주셨겠지요.
언론에서는 <님을 위한 행진곡>의 작사가로 선생님을 추모했지요. 그 시가 나온 피맺힌 이야기에는 별 관심도 없이 말입니다. 어찌 노래 구절 하나로 선생님의 온뉘(일평생)를 짐작 하겠습니까. 흔히 영원한 재야투사, 민중운동가, 원로라는 수식어를 붙이지만, 선생님은 입원하기 직전에도 노동자대회에 참석한 ‘영원한 현역’이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을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택한 만해 한용운이나 심산 김창숙 선생님처럼 백절불굴의 혁명투사이자 영원한 로맨티스트로 기억합니다. 히딩크와 인천공항에서 졸지에 만나 “축구를 하려면 딱 이렇게 해라”고‘한 수’ 가르쳐줬다는 말을 듣고 박수를 쳤습니다. 맹자의 ‘호연지기’나 ‘대장부’는 바로 선생님을 두고 한 듯합니다. 백척간두 나뭇가지에 매달렸을 때 손을 놓아버릴 줄 아는 그 마음 말입니다. 그 각오가 아니었다면 농민운동, 빈민운동, 노동운동 등 그 험한 길들을 어찌 다 헤쳐 나오셨겠습니까? 최소한 사람이라면, 선생님이 열변을 토하던 ‘통일적 인간’이 돼야지, ‘반통일적 인간’이 돼서야 되겠습니까? 살아 있는 한, 기어이 노력하겠습니다. 선생님 부디 영면하소서.
2024년 1월 선생님의 3주기를 앞두고 울면서 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