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70
8월2일[연중 제17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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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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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o9wCY6WmSLU (박상용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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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타인의 생활에 참여하고, 그들과 기쁨, 고통, 희망, 번뇌를 나눠 가지는 삶!>
‘삼대가 복을 지어야 맑게 갠 정상을 볼 수 있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내놓으라하는 최고봉들은 웬만해서는 산정(山頂)의 신비로운 자태를 세상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신앙의 진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 신앙의 가장 정점(頂點)에 위치해 있는 성사가 성체성사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가르침이 그 안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매일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가게 하는 영약이 성체성사입니다. 그런데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한없이 지루하고 따분한 예식에 불과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철저하게도 편협한 고정관념과 그릇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가련한 사람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연세들도 지긋하셔서 깨달을 때가 된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아직 인생의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삶의 질이 하등동물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추구하고 얻어야 할 인생의 긍정적인 가치나 덕목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절대자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께 귀의(歸依)하는 신앙이 있고, 인생이 가장 큰 선물인 가족과 친구가 있고, 그 관계를 풍요롭게 하는 다양한 덕목들이 있습니다. 사랑, 우정, 신의, 겸손, 온유, 친절, 배려...
그런 아름답고 의미 있는 가치들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그저 기를 쓰고 올라가려만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손에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공동선이나 이웃들의 유익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뱃속, 자기 식솔들 챙기기에 하루해가 짧습니다. 야수(野獸)의 삶과 조금도 다를 바 없으니 이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오 복음 13장 44절)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여기저기 우리 주변에 묻혀있는 인생의 보물들을 찾아 나가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게으름과 불성실로 인해 아직도 찾지 못한 인생의 깨달음, 신앙의 진리를 지속적으로 찾아 나가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생활에 참여하고 그런 생활 속에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갖가지 일들, 기쁨, 고통, 희망, 번뇌, 그 모든 것을 서로 나눠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인생의 보람이며 행복입니다.”(에디트 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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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429xs73p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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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버려도 괜찮을 행복이 딱 하나 있다>
오늘 복음은 밭에 묻힌 보물, 값진 진주의 보물 비유 말씀입니다. 결론은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이들은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판다는 내용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가진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고서는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하늘 나라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자칫 이러한 신앙이 ‘허무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 세상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으니 신앙으로 하늘 나라만 차지하자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이 세상에서 어떤 목표를 위해 고생하며 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 흐르는 대로 바람 따라 살다가 천국에만 가면 되지 이 세상 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낙관적 허무주의입니다.
낙관적 허무주의의 대표적인 영화가 ‘에브리씽 에비리웨어 올 앳 원스’입니다.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이 여인이 다중 우주에 존재하는 자신과 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며 ‘왜 사나?’를 묵상하는 우리 모두의 처지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다중 우주에는 자신의 선택이 달랐으면 살게 될 인생들이 있습니다. 훨씬 유명하고 부자이고 꿈을 이룬 인생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모두가 다 문제를 안고 있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인생은 어떻게 살던 허무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허무주의에 눈알 하나를 이마에 달아줍니다. 여기서 나와 함께 하는 남편, 자녀, 부모와 최대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도 이런 일상의 허무에 눈알 하나 달아주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허무한 인생, 곧 사라져버릴 인생에서 결국 우리는 천국에 가게 될 것이라는 눈알 하나를 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저 즐기며 사랑하며 행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그런 삶의 태도를 동조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재능으로 교회를 위해 많은 성화를 그렸던 카라바지오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에너지는 이 세상을 즐기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어차피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기에 이 세상 것들은 즐기고 버리면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그의 삶은 타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술과 돈과 여자를 즐기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가치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가치를 안다면 나의 에너지를 이 세상 것을 위해 쓸 수 없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신앙인이 된 것은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 다니다가 용서를 위해 교황님께 다윗과 골리앗 그림을 그려서 돌아올 때였습니다. 이때는 정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것 하나만 생각했습니다. 그때 자기 에너지를 용서받는 것 외에 다른 것에 쏟을 수 없었습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주인을 다시 만나기 위한 9일간의 긴 여정, 돌아온 진돗개 별이’란 사연이 있습니다. 일상 고양시에서 파주시까지 21km가 되는 길을 냄새만 맡으며 집을 찾아온 진돗개 별이 사연입니다. 이 과정에서 굶어서 영양실조가 걸렸고 얼굴에 큰 상처도 났습니다. 그런데도 집까지 돌아온 별이를 보며 주인은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이것이 밭에 묻힌 보물을 찾아낸 사람의 마음입니다.
허무주의는 없습니다. 보물을 찾으면 마치 엄마 찾아 삼만 리를 가는 사람처럼 그것을 위해 에너지를 쏟지 않는 모든 것은 용납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에너지를 그 하나의 성공을 위해 쏟은 사람들입니다.
만약 아이들에게 부모님이 고생하시는 모습을 몰래 찍어 보여준다면 어떨까요? 아이들은 어차피 부모님이 우리를 먹여주실 것이니 고생할 필요 없이 즐기며 살면 된다고 여기게 될까요? 부모님이 고생하시는 것에 대해 부모님 뜻을 따라주기 위해 자신도 피 흘리고 싶은 열정이 생길 것입니다. 바로 부모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는 것, 이것이 아이들이 찾아야 할 밭에 묻힌 보물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를 위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선교를 위해 피를 흘리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는 뜻이지, 다 마련되어 있으니 어차피 지나갈 세상 그냥 집착 없이 편안하게 즐기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재능이나 재물, 모든 에너지가 의미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모든 에너지를 하늘나라만을 위해 쏟아부을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자녀의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진정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해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려고 합니까? 그러면 하늘나라를 발견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사랑과 당신 뜻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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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44-46: 밭에 묻혀있는 보물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44절) 밭에 숨겨진 보물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이 보물을 가지려면 밭을 사야 한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라도 밭을 사야 하는 것처럼, 하늘나라의 보물은 세상의 것을 버리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 세상의 것이란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들로, 우상숭배를 버려야 한다. 밭이란 성경이나 예수 그리스도이다. 밭으로 오는 사람은 그 안에서 보물인 지혜를 찾는다. 신앙인은 성경을 알려고 노력하며, 예수님을 따르려 애쓰는 가운데 보물을 발견한다. 보물을 숨기고 있는 밭이 그리스도라면,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 즉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를 것이다. 거기서 보물을 차지하게 된다.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을 합당한 비싼 값을 치르고 살 수 있게 된다.
값진 진주는 율법과 예언서보다 더 귀한 살아계신 말씀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다른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어도 영원한 삶이라는 진주를 찾는다. 하느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이 은총으로 하느님을 알아보고는 과거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고 그분만을 따르게 된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게 되면 인간은 속된 욕망에서 돌아서게 한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하면 나머지 모두도, 즉 율법과 예언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거룩한 삶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자기가 세상에서 사랑했던 모든 것을 기쁘게 버린다. 그 진주와 비교할 때 다른 모든 것은 하찮을 뿐이다. 그 마음은 하늘의 것, 오직 값진 진주의 광채, 즉 그리스도만을 원한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아가 8,6) 한다. 영원한 삶에 대한 불타는 열망은 물질에 대한 사랑을 끊어버리게 한다. 하느님께 깊이 빠진 사람은 속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우리가 찾아야 하고 가져야 할 값진 보화란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과 천국으로 인도해 주는 보화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파헤쳐서 그 보화를 스스로 발견하고 찾아 얻는 기쁨을 가져야 한다.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그만한 희생을 해야 하는 것처럼, 구원도 우리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참 기쁨을 우리에게 주며,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임을 생각하며 노력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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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현미경으로 물을 보면서 물을 마시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사실 현미경을 통해서 물을 보면 그 안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의 시각은 그것들을 보면서 물을 마시도록 진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현대인들이 가지는 질병 중에는 지나치게 청결하기에 생기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듯이 우리의 몸은 유익한 것도, 무해한 것도, 유해한 것도 어느 정도는 함께 거주 하도록 진화 했다고 생각합니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순례 중에 짐 가방은 꼭 필요합니다. 버스에 짐을 넣고 내리는 것을 도와 드리다가 그만 왼쪽 손목에 무리가 갔습니다. 열정도 좋지만 요령이 필요한 일도 있기 마련입니다. 별 것 아니겠지 생각하며 지냈는데 손목이 점점 아파왔습니다. 왼손의 고마움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병마개를 열 때도, 옷을 입을 때도 왼손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컴퓨터의 자판을 입력하는 데도 왼손의 도움은 컸습니다.
우리의 귀도 그렇습니다. 평소에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잠들었습니다. 몸이 피곤하면 귀도 피곤한지 잘 들리지 않았나 봅니다. 손목이 아파서 일찍 자리에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전에는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렸습니다. 벽시계의 초침 돌아가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거실에 있는 냉장고의 소음도 들었습니다. 이왕 이리 된 것 잠을 뒤척이기보다는 생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차피 곧 새벽은 올 것이고 ‘이열치열’이라는 말처럼 조용한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에 몰두 했습니다. 그러니 두 가지 것이 마음에서 떠났습니다. 손목이 아픈 것에 대한 짜증이 사라졌습니다. 벽시계의 초침소리도, 냉장고의 소음도 아름답고 감미로운 음악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예전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자리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이야기하였고, 아버지의 권위를 지켜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자리에 계시지 않았어도 아버지의 물건과 아버지의 자리는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자리는 마치 ‘성소(聖所)’와 같았습니다. 신화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어쩌면 이해 못 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모세가 너울을 쓴 것도 어찌 보면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은퇴하신 원로 신부님과의 대화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찾는 것 같습니다. 들어야 할 것도 많고, 배울 것도 많습니다. 신문의 지면을 보고서 노부부가 가슴에 전대를 차고 오셨다고 합니다. 당시에도 큰 금액을 기꺼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내놓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전대를 차고 오시는 분은 별로 없지만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나눔’에 함께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매주 소개되는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을 보고 많은 분이 정성을 보내주십니다. 분기별로 소개를 하는데 상당히 많은 도움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능기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악가들이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건축가들이 홀로 사는 어르신들의 집을 새로 수리해 주기도 합니다. 치과의사들이 나환자 마을을 방문해서 치료해 주기도 합니다. 성무에서는 은퇴하였지만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주시는 신부님도 보았습니다.
이분들이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밭에 숨겨진 보물은 우리 중에 가장 굶주리고,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외로운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 해 드리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왼손목이 아파 잠 못 이룬 밤에 저도 생각의 ‘재능기부’를 잠시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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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뻐하며>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마태 13,44-46)
여기서 ‘보물’과 ‘진주’는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 또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 또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라는 말씀은, “구원의 진리를 들었을 때의 기쁨은,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비슷하다.”라는 뜻입니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라는 말씀은, “구원의 진리를 들었을 때의 기쁨은,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이 그것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비슷하다.”라는 뜻입니다.
‘밭에 숨겨진’이라는 말은 ‘기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복음이, 또는 구원의 진리가 숨겨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숨겨 두고서는’이라는 말도 ‘기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혼자서 독점하려고, 남들이 발견하지 못하게 숨겨 둔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의 기쁨’은 혼자서 독점할 수 없습니다. 널리 알려서 모든 사람이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혼자서만 기뻐하다가는 그 기쁨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라는 말씀과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전력을 다한다.”라는 뜻입니다. ‘보물’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이 비유는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19-21)
1) 모든 사람이 전부 다 똑같은 보물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와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다이아몬드를 내밀면서, 하느님 나라를 포기하면 이것을 주겠다고 말한다면? 믿음 없는 세속 사람이라면(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면) 좋아하면서 다이아몬드를 차지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아무리 비싸고 귀한 보석을 준다고 해도 하느님 나라를 포기할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다이아몬드를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다이아몬드는 그냥 예로 든 것뿐이고, 실제 상황에서는 황제나 대통령 자리일 수도 있고, 많은 재물일 수도 있고, 세속의 부귀영화와 권세와 영광일 수도 있습니다. 그 무엇이든지 간에 하느님 나라를 밀어낼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제안은 마귀나 하는 짓입니다. 마귀는 이미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유혹했었습니다.(마태 4,8-9)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마귀를 곧바로 쫓아내셨습니다.(마태 4,10)>
2)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추구한다고 해도, 모든 사람이 그 나라를 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보아도 그것이 보물인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나자렛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마태 13,54-58)
3)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추구하고, 그 나라를 알아보아도, 그 나라에 들어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재물을 포기할 수 없어서 슬퍼하며 떠났던 어떤 부자 청년이 그런 사람입니다.(마태 19,16-22)
4)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추구하고, 그 나라를 알아보고, 그 나라에 들어가려는 노력을 시작하긴 했는데, 끝까지 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루카복음 14장에 나오는,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한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루카 14,28-30)
5) 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긴 한데, 마치 남의 일을 구경하듯이 “참 좋은 말씀이다.”, 또는 “옳은 말씀이다.”라고 생각만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생각만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믿는 것을 ‘온 삶으로’ 실행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밭을 산다. 그것을 샀다.”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이 비유는 산상설교에 있는 ‘참 행복 선언’(마태 5,3-12) 말씀에 연결됩니다. ‘참 행복 선언’에 있는,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들은, ‘참 행복 선언’ 말씀이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말하자면, ‘밭에 숨겨진 보물’을 차지하는 방법입니다.>
가난을 실천하고, 죄에 대해서 슬퍼하고, 온유함을 실행하고, 의로움을 추구하고, 자비를 베풀고, 마음의 깨끗함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평화를 위해서 일하고, 박해를 감내하는 등의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신앙인들이 끝까지(죽을 때까지) 살아야 할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쁨’은 기쁘다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삶으로 누리는 것이고, 성모님처럼 영혼이 기쁨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루카 1,47) 누구든지 박물관 같은 곳에 가서 그곳에 진열되어 있는 보석들을 감상하고, 감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것’을 구경하는 것일 뿐입니다. 신앙생활을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내가 들어가서 살아야 할 ‘나의 집’입니다. 나의 목숨이고, 나의 인생이고, 나의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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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들은 보물의 비유와 진주를 찾는 상인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보물이시오. 진주이심을 환기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분을 얻고자 다른 많은 것을 과감히 버려야 함을 가르칩니다. 밭에 보물을 감추어 두는 것은 전쟁과 환난을 자주 겪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물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물을 밭에 묻고 떠난 주인이 뜻하지 않은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하여 보물이 묻힌 곳을 알 수 없게 되는 예도 있었습니다. 밭에 묻힌 보물을 합법적으로 소유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밭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처럼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 돌아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한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핵심은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단호한 결정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이러한 결정을 한 장본인들입니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모든 것(그물, 배, 아버지)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4,18-22 참조) 세리였던 마태오는 세관의 돈과 자기 탁자를 버리고, 곧 이전의 삶의 양식을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9,9 참조)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울(바오로)은 자신의 과거와 모든 신념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롭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겼습니다.(필리 3,7-8 참조)
그렇게 우리의 신앙 선조들도 예수님을 따르고자 모든 것(집, 고향, 친지, 재산, 지위 등)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 큰 기쁨을 얻었고 이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다른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기존의 것을 버리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이득이요 기쁨이라 믿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은총이자 선물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기쁨을 앗아 가는 모든 것을 경계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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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호렙산에서 모세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증언 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트립니다.(탈출기 32장 19절)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다시 이르십니다. “너는 처음 것과 같은 돌 판 두 개를 깎아라. 그러면 네가 깨뜨려 버린 그 처음 돌 판에 새겨져 있던 말을 내가 새 돌 판에 다시 써 주겠다.” (탈출기 34장 1절)
그래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르신대로 돌 판 두 개를 깎아 이른 아침에 시나이 산으로 올라갑니다. 탈출기 저자는 모세가 다시 하느님 말씀을 적은 두 개의 증언판을 손에 들고 내려오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어 자기 얼굴의 살갗이 빛나게 되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조차 잘 알지 못하는 뜨내기 모세를 부르셔서 이집트에서 백성을 불러내십니다. 그는 파라오의 손에서 도망쳐 멀고 먼 시나이 산이 있는 곳까지 와서 배회했던 것입니다. 그는 장인 히드로의 양떼를 돌보는 나그네가 되었지만 그를 호렙산에 부르시고 파라오 손아귀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서 호렙산까지 이끌고 온 것입니다.
고집 세고 드신 백성을 이끄는 데는 때로 생명의 위협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호렙산에 모여 당신을 찬미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모세는 하느님과 친구 사이가 되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얼굴을 빛나게 하셔서 절대 지도자의 자리를 굳히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약했던 모세를 그리고 불평투성이의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굳건한 지도자와 백성으로 교육시키셨던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머무르실 성막을 건축할 준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손으로 하느님의 거처를 마련하여 이동 성막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제부터 그들의 하느님으로 진지 중앙에서 모세와 함께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고 나가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사막에서 버리듯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때에 비로소 성취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을 다 팔아 보물이 있는 밭을 사고 값진 진주를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루 아침에 당신을 다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불평과 시련을 겪은 백성들이 당신이 약속하신 호렙산까지 이끄신 연후에 야훼이신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하느님을 뵙는 모세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여정도 이렇지 않을까요? 어린이의 신앙을 갖게 하시다가 거친 음식까지 소화할 수 있는 성인의 신앙을 주십니다.
그리고 지친 삶의 굽이굽이에서 비로소 당신을 드러내셔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얼마나 자비롭게 크신 분인지를 우리는 익히 배우고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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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저는 평소에 투신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몸을 내던지는 삶을 무모하다고,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그렇게 몸을 내던져 봤자 돌아오는 것은 실망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저는 투신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또한 어떻게 투신하며 살아야 할지 매번 고민합니다.
하늘 나라는 투신의 삶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하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파는 모험과 위험을 감수하는 삶,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삶을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보물의 가치는 알지만 밭의 가치는 모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보물을 얻으려고 평생을 찾아 헤매면서도, 보물이 숨겨진 밭의 가치가 너무나 보잘것없기에, 또는 너무나 두렵고 위험한 것이기에, 너무 힘들고 아픈 것이기에, 그 밭을 위하여 온 몸을 던지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평생 진주를 찾아다니는 상인은 많은 곳을 찾아 헤매는 고통과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멸시를 감수해야 진주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녀야 하며, 좋은 진주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연구하는 노고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주 상인에게 주어진 밭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늘 나라를 발견하려면 우리는 그러한 아픔과 고통, 수고와 두려움을 감수해야 합니다.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시는’(마태 14,22-33 참조) 예수님의 목소리에 베드로는 물 위로 자신을 내던집니다.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물에 빠지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풍랑 때문에 놀라고 두려운 마음인 채로 물에 뛰어듭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거기 계셨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투신, 곧 자신을 내던질 수 있었습니다.
투신의 삶을 위해서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불확실에서 기인한 두려움과 의심은 우리에게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두려움과 의심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은 믿음뿐입니다. 낭떠러지에서 몸을 내던져도 우리를 받아 안아 주실 예수님께서 계시다는 믿음,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용기와 힘을 주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내어 맡기십시오. 두려움 속에서도 투신하십시오. 하늘 나라를 위하여, 예수님의 가치를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투신하십시오. 여러분의 그 삶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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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아무리 값진 보물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의 눈에는 보이고 어떤 이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값진 진주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찾아 다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애쓰지 않는 사람이 보물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보물이고 따라서 보물을 얻기 위한 희생과 헌신이 요구됩니다.(마태13,46)
그리고 값진 보물을 발견했으면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하여 그보다 못한 것들을 처분하게 됩니다. 새 옷을 장만하면 전에 입던 옷을 정리하게 됩니다. 더 좋은 것을 얻으면 하나는 자연스럽게 정리됩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차지하면 다른 모든 것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신자들에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내가 참으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이하의 부자 청년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온 젊은이에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하셨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주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기의 재산을 포기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양다리 걸치기나 어중간은 없는 법입니다. 젊은이는 결국 주님을 차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참으로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요구됩니다. “하느님을 잃어버리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결국 하느님을 얻으면 모두를 얻은 것이요, 모든 것을 얻어도 하느님을 차지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나라를 성인들이나 가는 곳으로 어렵게만 생각한다면 아무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마태6,33)을 구하고 그리하여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러 오지 않으시고 오히려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실망과 좌절보다는 하느님의 자비를 갈망해야 합니다.
성녀 엘리사벳씨튼은 고백합니다.
“하느님만이 나에게 남은 피난처이십니다. 저는 다른 모든 피난처들을 잃어버리고 주님에게만 의존하게 되는 데서 오히려 영적인 기쁨을 느낍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사람의 마음이 머물고 세상의 어떤 것도 다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지 말고’(루카9,62) 내 삶의 자리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 보물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 정녕 당신은 저의 등불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저의 어둠을 밝혀 주십니다.”(2사무22,29)
이제 당신이 밝혀 주시는 보물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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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너 변했어.”
상대방이 인상 쓰며 변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 말을 듣는 대상인 본인은 어떻습니까? 자기는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났으니 생물학적 변화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내 마음이, 내 성격이 변했다고 말하는데, 도저히 인정하기가 힘듭니다. 사실 사랑 호르몬이라고도 부르는 도파민의 분비는 남성의 경우에 3년을 넘기기 힘들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자가 남자를 향해 “변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호르몬 분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정확하게 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 역시 계속해서 호르몬이 변합니다.
외적 변화뿐 아니라 내적 변화도 계속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잘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변화의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족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을 주님께 맞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주님의 평화에, 주님께 대한 믿음과 해방에 맞춥니다. 이런 분명한 기준에서 잘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짧지만 강력한 내용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와 같다고 하시지요. 소비를 촉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한 명품과 같은 귀하고 비싼 물건에 욕심을 내어도 괜찮다고 하시는 말씀도 아닙니다. 사실 비윤리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종이 주인의 밭에서 일하다가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물을 주인에게 갖다줘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경찰에 신고하던지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인에게도 또 경찰에게도 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삽니다. 절대 윤리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좋은 진주와 같으므로, 이 가치를 아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전혀 관심이 없었어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데 어떻게 외면하겠습니까? 그 가치를 나의 것으로 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이며, 반드시 가야 할 곳입니다. 남의 이목을 신경 쓰고, 체면을 따질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변화입니다. 하늘 나라를 최고로 여기는 마음의 변화가 가장 필요할 때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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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나라가 초대합니다>
마태오 13,44-46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하늘나라가 초대합니다>
하늘나라가
가지기보다 베푸는 사람을
따뜻하게 초대합니다
하늘나라가
다스리기보다 섬기는 사람을
애틋하게 초대합니다
하늘나라가
가르기보다 잇는 사람을
아름답게 초대합니다
하늘나라가
누르기보다 떠받치는 사람을
정성스레 초대합니다
하늘나라가
밀치기보다 보듬는 사람을
부드럽게 초대합니다
하늘나라가
부수기보다 이루는 사람을
발랄하게 초대합니다
하늘나라가
죽이기보다 살리는 사람을
간절하게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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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프란치스칸 운동회 날.>
어제로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마치며 미사와 나눔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하루의 나눔뿐 아니라 행진 전체를 아우르는 나눔을 했는데 나눔 중에 한 분이 당신의 봉사 중독에 관해 얘기했고 저는 저의 포르치운쿨라 행진 중독에 관해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제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포르치운쿨라 행진은 포르치운쿨라 축일을 앞둔 행진뿐 아니라 월 피정을 걷는 피정으로 하는 것이나 일상에서 가능하면 걷는 것까지 저의 모든 삶에 배어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포르치운쿨라 행진의 진정한 의미는 걷는 것 그 자체가 아니지요. 그것은 원천을 찾아가는 것이요 본래의 우리 삶을 찾아가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원천을 찾아가는 것은 프란치스코에게 돌아가는 것이요, 프란치스코가 처음 받은 그 은사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원천에서 벗어나 있거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프란치스코의 원천에서 벗어나 있다면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회심하고 아버지께 돌아가듯, 우리의 사부인 프란치스코에게 돌아가야 하고, 그래서 포르치운쿨라 축일과 행진의 의미는 회심과 회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천에서 벗어나지 않고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도 행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방의 차원입니다.
이빨을 뽑기 위해 의사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뽑지 않기 위해 의사에게 가듯 프란치스코가 처음 받은 은사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그 은사를 지금 우리 안에서 되살리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올림픽 성화를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불붙이듯 프란치스칸 은사의 불을 포르치운쿨라 성당에서 다시 불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 차원이기도 하지만 공동체 차원이고 그래서 운동이어야 합니다.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프란치스코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이번 포르치운쿨라 행진에 저의 수련자들도 참여했습니다. 그중 한 형제가 걷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고 그래서 자연히 뒤처지게 되었는데 제가 그 형제를 앞세우고 갔습니다.
그때 다른 행진자들이 추월하여 가고 그래서 그 형제가 다시 뒤처지게 되었을 때 우리 행진의 의미를 제가 다시 상기시켰습니다.
우리에게는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같이 가는 것이 중요하다. 혼자 빨리 가는 것보다 느려도 같이 가는 것을 선택한 우리이고, 그것은 이 길이 같이 가야만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뭐 이런 내용이었지요.
사실 가깝고 쉬운 길은 혼자 가는 것이 편하고 빨리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멀고 힘든 길은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내고 엄두를 내 출발했더라도 중도에 그만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고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고, 웬만큼 독종이 아니면 혼자 갈 수 없는 길이고 자주 길도 잃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가야 하고 그래서 프란치스칸 운동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이 축일이 프란치스칸 운동회 날이 되기를 비는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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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선물, 참보물>
-“찾으라, 발견하라, 반기라”-
얼마전 어느 자매의 안부 인사를 받고 고마움에 보라색 마가렛꽃 사진과 함께 즉시 보내드린 답신입니다.
“참 너무 덥네요. 안부 인사 감사합니다. 주님의 참보물인 자매님! 마가렛꽃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이어 어제 형수님의 방문 후 보낸 감사의 카톡 메시지입니다. 제가 수도원 입회 전 10여 년의 교편생활 중 형님댁에 머물 때 온갖 도움을 주신 분이며 수도원 입회 후 종신서원, 사제서품은 물론 지금까지 수도여정에 많은 도움을 주신 참 고마운 분입니다.
“형수님께!
오늘 방문해 주시니 힘과 격려가 됩니다. 우리 집안의 살아 있는 참보물이시니 주님의 은총 중에 만수무강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즐겨 바치며 많은 분들과 나눈 다음의 행복기도입니다. ‘선물’을 ‘보물’로 바꾸니 그대로 통해 기분이 좋습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보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유일한 최고의 참보물은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인 그리스도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참으로 눈이 열릴 때 참선물이자 참보물 그리스도의 발견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무수한 참선물이자 참보물인 형제자매들임을 깨닫습니다. 요즈음 새롭게 깨달은 참 반갑고도 고마운 깨달음입니다.
이런 참선물, 참보물 형제자매들과 도반이 되어 주님 안에서 영적우정을 나누니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형제자매들뿐 아니라 제가 지금까지 써서 나눴던 짧고 긴 울림을 줬던 무수한 시(詩)들 역시 주님을 반사하는 선물이자 보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흥미진진한, 하루하루 설렘으로 시작하는 보물찾기 행복한 인생 여정인지요!
우리가 찾는 참보물인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느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만나는 살아 계신 참보물 하느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발견하여 친교가 깊어질 때 주님을 닮아 ‘희망과 기쁨’, ‘찬미와 감사’,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 ‘평화와 행복’의 사람으로 변모되가니 얼마나 큰 축복 인생인지요!
“SH행복연구소”
기발한 명함을 받고 감탄했습니다. 이 연구소의 소장 자매의 설명을 들으니 그 샘솟는 열정이 참 사랑스러웠습니다. S(spirituality;영성)&H(healing;치유) 행복연구소, 얼마나 멋진 명칭인지요! 바로 이 연구소의 진짜 소장은 우리의 참보물이신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참보물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날 때, 영성과 치유, 행복의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영감을 줍니다. 우리의 참행복이 달린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는 참 고마운 비유입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할 하늘 나라의 행복입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처분하여 그것을 샀다.”
과연 여기 참보물, 참진주에 해당될 대상은 그리스도 예수님외에 누가 있겠는지요! 가짜 보물들이 가짝 진주들이 범람하는 세상에, 가짜 보물을, 가짜 진주를 참보물, 참진주로 착각한 인생이라면 그 얼마나 허망하고 쓸쓸하겠는지요! 그 참보물의 식별 기준은 무엇이겠는지요? 참으로 참보물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발견한 분이라면 샘솟는 참희망에 참기쁨, 참평화의 삶일 것입니다.
그러니 참 보물인 그리스도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발견하십시오, 반기십시오, 바로 지난 주일 교황님의 강론 요지이기도 합니다.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찾고 발견하고 반겨야 할 참보물, 참진주인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 바로 수도자의 정의입니다. 수도자뿐 아니라 사람 누구나의 마음 깊이에는 참행복, 참보물인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열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지금 여기 공동체가, 내 마음이 바로 주님 보물이 묻힌 보물밭입니다. 우연한 발견인 듯 하지만 은총의 발견이요 평상시 끊임없이 찾았기에 보물의 발견입니다. 결코 값싼 보물의 발견도, 진주의 발견도 없습니다.
“찾아라(seek,) 발견하라(find), 반기라(welcome)”
온힘을 다해 참보물인, 참진주인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의 발견이요 반기는 삶입니다. 오늘 시나이 산에서 참보물인 주님을 만나 모세가 우리에게는 주님 찾는 삶의 빛나는 모범이 됩니다. 주님을 만난 기쁨과 행복으로 눈이 부셔 보기 힘들 정도로 모세의 얼굴은 빛났기에 백성들은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다 합니다.
참보물인 주님을 만나 십계명의 참선물을 받은 모세입니다. 우리 역시 이 거룩한 미사중 참보물 주님을 만나,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등 온갖 필요한 선물을 받습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 마지막 대목이 은혜롭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얼굴의 살갗이 빛나는 것을 보게 되므로, 모세는 주님과 함께 이야기하러 들어갈 때까지는, 자기 얼굴을 다시 너울로 가리곤 하였다.’
저는 어제 재미있고 심오한 글을 읽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너울로 가렸듯이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은 공동체의 너울로 당신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신비스런 진리입니다. 이제 부활하시어 우리와 늘 함께 계신 참보물인 파스카의 주님은 공동체의 너울을 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 그래서 순간적인 은총의 깨달음으로 눈이 열릴 때, 공동체의 너울이 순간 벗겨지면서 발견되는 파스카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참보물인 형제자매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의 형제자매들 하나하나가 참보물인 주님의 얼굴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공동체의 너울이 벗겨지면서 형제들 하나하나가 참보물 주님의 얼굴임을 발견하는 복된 시간입니다. 주님의 성체와 하나되어 날로 참보물인 주님을 닮아가는 형제자매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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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과 같다."(마태13,44.45)
<복음과 예수!>
오늘 복음(마태13,44-46)은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값진 보물을 찾는 사람과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에 비유해 설명하십니다.
'내가 모든 것을 바쳐 찾아야 할 값진 보물이요, 좋은 진주는 무엇일까?'
오늘은 프란치스칸들의 축일인 '포르치운쿨라 천사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이기도 합니다. 이탈리아 아씨시 평화의 마을에 있는 '포르치운쿨라 성당'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작은 몫'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프란치스코는 이 작은 성당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오늘 복음 묵상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발견하고 찾은 값진 보물과 좋은 진주에 대한 묵상입니다. 프란치스코 발견하고 찾은 보물이요 좋은 진주는 바로 '복음과 예수'입니다.
회개한 이후 프란치스코의 유일한 희망이요 삶의 결정적인 목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살려고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쳤습니다. 그의 형제인 첼라노는 사부이신 성 프란치스코의 그런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장 높은 지향과 주된 바람과 최고의 결심은 복음을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하여 실행하는 것이었다. 어디에서나 그는 예수께 사로 잡혀 있었다. 마음에 예수를 품고 있었고,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모든 지체들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다."(1첼라84.115)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찾고 발견한 보물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가 찾아야 하는 값진 보물이지 않을까요?
'복음과 예수가 값진 보물인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참평화와 참기쁨과 참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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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3iFoC_Z0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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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 44)
우리의 보물은
어떠하십니까?
정성(精誠)이
곧 보물(寶物)입니다.
정성을 쏟는
그것이
우리들의
보물입니다.
정성이
가장 복된
보물의
길입니다.
정성은
십자가처럼
보물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정성이라는
스승이 있습니다.
언제나
최고의
정성으로
최고의 기쁨
최상의 사랑을
만나게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가장 값진
보물의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소중하고
귀하디귀한
우리의 보물
우리의 사랑
우리의
마음입니다.
함부로
할 수 없는
소중한
사랑입니다.
마음 밖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구하는
사랑의 참된
가치입니다.
가치있는 삶이
보물의 삶이며
진심어린
마음의 삶입니다.
우리자신이
바로 하느님을
닮은 보물이라는
것을 잊고 삽니다.
보물의 길로
안내하는
복음입니다.
복음을 통하여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새로운 시작의
마음이
모든 것을
다 팔아
밭을 사는
마음입니다.
회개와
십자가는
가장 좋은
보물입니다.
새로운 용기와
희망으로
우리의 삶을
축복하시는
하느님의 빛
보물의
여정입니다.
보물의 발걸음으로
한 걸음 힘차게
내딛는 복음의
빛나는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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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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