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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프로젝트 <김문홍 편>
허 은 (연극평론가/ 경성대 연극과 교수(전)
이번의 스타 프로젝트는 부산의 원로 희곡 작가 김문홍 선생의 작품 3편을 중심으로 기획되었다. 김문홍 선생은 부산연극을 위해 꼭 필요한 것 중 하나는 부산 작가가 쓴 창작 희곡이 많이 나오는 것이라 주장했고 스스로 희곡 창작에 매진 해 오고 있다. 부산의 대표적 희곡 작가로서 연극계의 원로로서 보여준 끊임없는 희곡 창작의 열정과 현장과의 소통 노력은 단지 원로연극인이라는 의미 이외에도 다양한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강성우 연출의 <안개주의보>는 희곡의 제목만으로 이미 여러 가지를 암시하고 있다. 작가는 이 사회가 점점 짙어지는 안개 속에 있음을 경고한다. 선착장에 모인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억압과 결핍은 그들이 유토섬으로 떠나는 절박한 이유다. 그들은 유토피아를 암시하는 <유토섬>으로 가기 위해 선착장에 모여든다. 그들을 옥죄고 있는 모든 것에서부터 탈출을 시도하지만, 안개가 점점 짙어지면서 또 다른 고립의 상태에 빠진다. 더 늦기 전에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에 대비하라는 주의보가 내려진다. 이 희곡이 발표된 시점을 현재로 옮기기 위한 여러 극적 장치가 동원되면서 지금 이곳이라는 현실감을 강조하는 변화를 시도한다. 각 인물의 성격은 희곡 그대로이지만 몇몇은 직업이나 환경이 원작과 다르게 설정된다. 이 공연을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없다. 연출은 충분히 설명하고 관객은 이해했지만, 공감의 폭은 제한적이었다.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명곡을 감상하고 난 후에 한 소절의 멜로디를 기억하고 흥얼거리게 되는 것 같은 공감이 없기 때문이다. 형식을 변용하면서 다양한 그림을 만들어냈지만, 개별적인 것을 전체로 아우르는 경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작고한 문학 평론가 김현은 문학의 경향을 일러 한 사회가 형성해 내고 세련시키는 것이라 했다. 그 경향은 그 사회 구조의 모순을 ‘비난하고 고려하기’ 위한 것이 아니면, 사회 구조를 현상 그대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 했다. 연극은 문학보다 더 사회 참여적 성격이 강하기에 한 사회가 소유하고 있는 연극 형태가 그 사회와 아무런 관련도 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는 법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어떠한 방식으로 든지 그 사회에서 뿌리 박을 수 있는 연극 형태는, 이미 그 사회의 묵인을 전제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장려까지 받는 것이다. 공감의 가능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그 형태는 마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다른 사회로 삼투. 확산될 가능성은 커진다.
강성우 연출의 작품들은 적어도 이제까지 내가 본 작품들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안정감이 있다. 과감하거나 실험적이기보다 조용히 흐르는 냇물 같은 작품을 만들어 왔다. 크게 욕심을 내기보다는 희곡이 구석구석의 세계를 정밀하게 해석하고 표현한다.
이번의 작품 역시 그러한 연출에 대한 나의 신뢰로부터 출발했지만 기대는 충족되지 못 한 체 관람 내내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표현 형식의 모호함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이나 그때나 작가가 마주한 현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과거의 세계를 오늘의 세계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연출은 형식적 변용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보편성, 보편적 가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윤준기 연출의 <사자의 편지>는 김문홍 선생의 희곡 가운데 드물게 추리극 형식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은 연기자의 고함과 상투적 연기로 일관된 무대를 바라본다. ‘욕망의 바벨탑이 무너졌다”라는 형사반장의 한마디를 듣기 위해 객석에 앉아 기다림의 인내심을 시험당한 연극이었다. 이 극 속에서의 등장인물들은 뒤엉킨 욕망의 본질을 보여주지 못한다. 독일의 심리학자 빌헬름 분트의 ’성격(Character)은 주어진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의지적 반응‘이라는 정의를 따른다면. 주어진 환경만 있을 뿐 극 속의 거의 모든 인물은 환경에 반응하는 인물로서의 세밀한 성격 구축은 부족했다. 의지가 있는 인간의 모습이 평면적으로만 표현되었을 뿐이다. 겉모습만 보일 뿐 내면의 인간 본성은 사라져 찾기가 쉽지 않고 불편한 무대 요소들의 뒤엉킴만 보인다. 그 가장 큰 원인은 희곡 속 인물의 성격이 배우에 의해 재창조되고 있지 못한 결과와 내면 연기의 부족이 원인이 아닐까. 주어진 환경에 대한 각 인물의 의지나 반응의 섬세함은 없고 줄거리만 머리에 남는다. 형사 3인의 연기는 통속 영화에서나 보이는 그저 그런 연기로 일관된다. 그들은 창조된 연기를 하지 않는다.
재벌 회사 대표를 중심으로 한 조직 내의 인물들 상호 관계의 역학성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 ‘아마 그럴 것이다’라는 짐작만으로 만들어냈다면 공감이 아니라 설명을 듣는 입장밖에 안 된다. 개개인이 등장인물의 캐릭터로서 부각 되지 못하고 무대 위를 떠다닌다. 그들이 지닌 인간으로서의 욕망과 행동의 심리적 해석을 기대했던 관객은 이 연극의 타자일 뿐이다.
상투적인 연기. 관념적 접근은 욕망의 끝을 향해 달리는 인간성의 본질, 현대인이 지닌 부정적 측면에서의 보편적 특성이라는 작가의 서술 외에 연출이나 배우의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대기업의 추잡한 내부가 각 등장인물에 주어진 환경이며 동시에 오늘날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이라면 이에 대한 각 등장인물의 더 섬세한 반응이 표현 돼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들의 몸짓, 표정은 인물들의 신경질적인 고함에 묻힌다. 심리적 상태를 표현해주는 다양한 요소들은 찾기 힘들고 마치 낭독극을 마주한 듯한 시간을 보냈다.
이번 스타 프로젝트의 마지막 작품인 <목련꽃 그늘 아래서>(권상우 연출)는 단편 소설 같은 작품이다. 과거든 현재든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는 가족 간의 갈등을 다룬다. 가족의 갈등을 다루는 작품들의 공통적인 결말은 늘 그렇듯이 화해와 용서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관객은 결말을 쉽게 예측할 수 있기에 진행 과정에서 갈등의 양상을 긴장감 있게 풀어나가는 극적 표현의 기법들을 적정하게 배치하는 연출력을 필요로 한다. 조명이나 무대장치, 음악이 긴장감을 높여주는 요소로써 큰 힘이 되어야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모두가 설명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을 뿐 극 흐름을 의미 있게 도와주지는 못했다. 상황을 설명하는 딸 영란의 위치는 고정되고 반복되어 긴장감보다는 단순 설명에 그친다. 물론 목련 꽃잎으로 상징화된 영란의 집이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를 지배하면서 영란 어머니 삶을 강조하긴 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정제되어 있어서 가족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는데 부담을 주기도 했다
무대 일부를 분리해 밥상 혹은 다른 용도로 활용한 것은 일견 좋은 아이디어로 보이지만 그 공간의 반복적 활용은 무대의 미적 정체성에 혼란을 준다.
관객은 무대상에서 생략된 부분을 스스로 채워놓을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다는 점을 잊은 체 필요 이상의 너무나 친절한 연극이었다. (2023.9.9./14 시민회관 소극장) 예술의 초대 원고
극작가 김문홍과 생태연극으로 다시 태어난 <안개주의보>
-<안개주의보>(부산시립극단 75회 정기공연, 김문홍 작, 강성우 연출, 시민회관소극장, 9.7-9,9)
김영희(경성대학교 미래인재교양학부 교수, 연극평론가)
1. 부산의 극작가, 김문홍
글을 쓰는 내 책상 위에는 희곡집 두 권, 『안개주의보』와 『섬섬옥수』가 놓여 있다. 『안개주의보』는 1987년도에 나온 김문홍의 첫 희곡집이고, 『섬섬옥수』는 2022년 출판된 그의 마지막 희곡집이다. 먼지와 습기로 누렇게 색이 바랜 첫 희곡집과 손을 벨 듯한 최근 희곡집. 두 권의 희곡집 사이에 거의 35년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네 권의 희곡집이 출판되었고, 36편의 희곡은 무대에 올려졌으며, 그의 희곡은 부산연극제 희곡상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긴 세월, 어디 희곡뿐일까. 그는 희곡 장르 외에도 경계를 넘나들며 썼다. 동화, 소설, 연극평론, 영화평론, 연구논문, 이론서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 글쓰기를 한 셈이다. 문홍(文弘), ‘글을 널리 세상에 알린다’가 그런 의미일까. 그리고 그는 이제, 노년의 시간 앞에 섰다.
여든을 앞두고 출판한 희곡집 <섬섬옥수>(2022)에 나오는 작가의 말은 특별히 눈길을 끈다. 40여 년 희곡을 빚어 왔으니, 이제는 창작은 접고 무대 한구석에 조용하게 앉아 무대를 느긋하고 지긋이 바라보는 관객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 눈도 침침해 오고 귀도 잘 들리지 않은 것을 보니, 이젠 좀 쉴 때도 되지 않았냐며 몸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고백이다.
눈도 귀도 어둡게 만든 세월 앞에서 그는 잠시 머뭇거린다.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감각이 어느 것보다 중요한 연극 세계에서 감각의 퇴화는 치명적일 수 있다. 어쩌면 이번 희곡집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 작가로서 그런 직감은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몸의 변화를 존중하고 자연에 순응할 줄 아는 겸허하고도 고양된 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작가나 비평가의 눈이 아닌 순수한 관객으로 극장을 지키고 싶다는 김문홍의 말은 패배 자의 모습이 아니라 현자의 모습처럼 다가온다.
인생처럼 연극도 공연되는 동시에 연기처럼 사라진다. 연극이 사라진 자리에는 희곡만 남는다. 허나 희곡은 종이 위 활자로 납작하게 누워 있지 않고 공연될 때, 비로소 참 생명을 부여받는다. 희곡과 연극이 그런 관계니 어떤 것도 소홀할 수 없이 둘은 서로 기대어 공존한다.
연극에서 희곡의 위치가 이러하기에 김문홍은 지면이나 인터뷰 혹은 SNS를 통해서 연극현장에서 극작가에 대한 소홀한 대접을 자주 언급했다. 때로는 부산에 극작가가 부재하다는 성급한 비평에 대해서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당연한 슬픔이고 이유 있는 분노이다. 평생 연극 무대를 떠나지 않고 희곡 쓰기를 멈추지 않은 그가 아닌가.
그는 관객의 한 사람으로 극장을 지키겠다고 한발 물러서면서도 희곡과 극작가를 소중하게 다루어줄 연출가가 자신의 희곡을 공연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작가의 손을 떠난 희곡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부대끼게 되는 것을 희망한다고도 했다. 이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해석으로 텍스트가 새롭게 태어나길 원하는 것이다. 한 번의 연극 공연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여러 차례에 걸쳐 다양한 개성을 가진 연출가의 손에서 희곡이 새로운 텍스트로 현장에서 거듭 태어나는 것, 이것이 그의 바람이다.
그 점에서 이번 시립극단의 스타 프로젝트에서 김문홍 희곡 세 편을 세 주에 걸쳐 세 명의 연출가의 손에 의해서 공연된다는 것은 늦었지만 반갑다. 한 작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공연하는 과정에서 김문홍이라는 작가를 생각하고 그의 작품의 면면을 살펴본다는 것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안개주의보>는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이다. 이 희곡은 1981년 창작되고 극단 예랑에서 하종찬 연출로 1988년 초연되었다. 이번 시립극단이 공연하는 세 작품 중에서 시간적으로 가장 오래된 연극이다. 또한 작가가 등단한 다음 해의 작품이니 상당히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다. 초연 이후 35년 만의 재공연은 극단 누리에 강성우 연출로 무대 위에 올라갔다.
2. 생태주의 연극으로 다시 태어난 <안개주의보>
<안개주의보>는 연안여객 터미널 대합실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단막극이지만 중년 사내, 점박이, 여인, 남자, 안경잡이, 대학생, 회사원, 사진작가, 창녀 등 인물 군상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유토섬에 가기 위해 모였지만 짙은 안개로 그만 발이 묶인다. 그들이 유토섬에 가야 하는 이유는 각자 다르지만, 배를 타야 한다는 간절함은 같다.
배는 밤 9시에 출항하고 현재 무대 전면에 걸린 시계는 현재 시각을 가리킨다. 시계는 연극이 진행되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흘러간다. 극중 시간과 공연시간이 일치하면서 기다림의 답답함과 조급함은 더욱 생생하게 전달된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결국 안개주의보가 해제되지 않아 배는 출항할 수가 없다. 매표소 직원은 아예 유토섬은 지구상에 없다는 말까지 한다. 결국, 지구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섬에 가기 위해 그들은 기다린 셈이다. 안개 때문에 갈 수 없는 섬. 존재하지도 않는 유토섬.
이번 공연에서 연출가 강성우는 40년 전 작품을 현재적으로 새롭게 해석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는 원작에 나오는 키워드 안개, 주의보, 유토섬, 기다림, 호루라기 소리, 관(棺), 새, 귀 어둡고, 눈 어두운 사람들 등 등장인물의 상처와 그들이 찾고자 하는 유토피아를 오늘날 전 세계적 공통문제인 환경에 초점을 맞춰 풀어내고자 했다. 이로써 원작에서 ‘뿌리뽑힌 존재의 본향에 대한 그리움’이 생태주의적 관점으로 새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일찍이 녹색평론 발행인이었던 고(故) 김종철 선생은 문학 하는 자는 기본적으로 생태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다. 문학이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생명의 자리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라면 모든 예술가는 기본적으로 생태주의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극과 생태 혹은 환경의 결합은 인간의 예측에서 벗어난 자연재해와 그로 인해 고통받는, 특히 제 3세계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시급하고도 절박한 문제이다. 이런 측면에서 강성우가 원작을 생태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연출작업이다.
생태연극으로서 <안개주의보>는등장인물의 ‘차이’에서부터 출발한다. 연출가는 원작의 안경잡이를 학자로, 회사원을 환경운동가로, 중년 사내를 양봉업자로 바꾼다. 원작에 없는 사업가를 등장시킨 것도 주목된다. 연극에서 등장인물이 사건을 만들어 나간다는 점에서 등장인물이 원작과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 차이를 살펴보는 일은 그래서 필요하다.
원작에서 회사원은 ‘목을 뒤로 젖힌 채’ 주로 잠들어 있다. 꿈을 꾸다 그는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는 물에 떠내려오는 관(棺)을 본다든지 새소리를 듣는다.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는 그는 기다림에 지친 그들에게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간암에 걸린 회사원은 연극에서 환경경운동가로 설정돼 있는데 그도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고 있다. 그의 이런 증세는 회사원처럼 개인의 병 때문이 아니라 환경운동가로서 생태적인 예민함과 더불어 지구적 위기의식을 불안하게 보여주는 감각적 징후 때문이다.
희귀식물 종자를 유토섬에 심고자 하는 식물학자나 양봉업자의 존재도 연극의 메시지를 부각시키는 인물이다. 사라져가는 희귀식물 종자를 지키려고 하는 그는 단순히 학자로서가 아닌 생태적 인간으로서 소명을 보여준다. 기후위기 시대 사라져 가는 벌을 생각할 때 양봉업자의 존재도 같은 맥락이다.
이들 인물과 가장 다른 느낌의 인물이 사업가다. 사업가는 유토섬을 개발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돈벌이의 수단으로서만 유토섬을 생각한다. 잘 차려입은 그의 양복은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데, 이는 그의 자본주의적 야욕을 드러내는 의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환경운동가, 식물학자, 양봉업자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사업가라는 인물 구도는 연극의 주제를 쉽게 전달해주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의 변화뿐만 아니라 인물이 놓인 상황 차이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작에서 말을 더듬는 여인은 과거 술집 작부였다가 유토섬을 가기 위해 대합실에 앉아 있다. 심하게 말을 더듬는 그 여자는 우울하고도 폐쇄적인 분위기이다. 그런데 원작과 달리 연극에서는 여인을 임산부로 설정한다. 연극 결말에서 그녀는 화장실에서 아이를 출산하지만, 비정상적인 아이를 출산하는데 아이는 출산 도중 죽으면서 갑자기 극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배의 기다림이라는 수동적인 행위로 이어지는 연극에서 이 사건은 순간적으로 관객을 극 중에 몰입시키면서 드라마틱한 상황을 만든다. 무엇보다 그녀가 낳은 아이가 괴물이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생명이 살 수 없는 지구에 대한 위기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극의 결말에서 새들의 습격으로 사람들이 위기에 처한다는 설정은 원작과 가장 다른 부분이다. 원작에서 새는 불길함을 고조시키는 소리로만 등장한다. 반면 연극은 새들이 사람들을 습격하고 인물들이 혼돈과 무질서에 빠지게 된다. 새는 환경운동가를 죽이고 괴물로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리면서 마침내 극은 마무리된다. 원작에서는 계속되는 기다림의 순환적인 극의 구조를 취하지만, 연극은 종말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3. 주제의식의 과잉과 개연성의 문제
아쉽게도 연극은 과잉된 주제의식이 곳곳에 등장한다. 무엇보다 등장인물의 상투적인 설정에서 연출가의 의도가 너무 쉽게 드러난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미적 구조를 통해서 전달되어야 하는 주제가 쉽게 노출되면서 연극은 극적 긴장감이 사라진다.
대사는 등장인물이 하는 말인데 마치 연출가가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배우는 자신의 신체적 특징이나 목소리로 자기를 연기해서는 안 되고 등장인물의 연기를 해야 하듯이 작가나 연출가는 자기 말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그럴듯한 언어를 통해서 말해야 한다.
무엇보다 환경운동가의 인물 표현이 모호하다. 회사원에서 환경운동가로 인물이 변화했지만, 원작에서 회사원의 말과 환경운동가로서의 말에는 차이가 나지 않는다. 굳이 환경운동가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기에, 환경운동가의 상황이나 입장에 쉽게 몰입할 수가 없다. 따라서 마지막 장면 환경운동가가 왜 새에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연극 곳곳에 드러나는 부족한 개연성도 아쉽다. 여자가 낳은 아이는 왜 괴물일까. 의도된 주제를 떠올린다면 환경오염으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만, 작품 속에서 논리적인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다. 마지막 장면도 마찬가지다. 새가 데리고 간 아이가 새의 둥지 안에서 허공 속에 떠 있는 장면, 그 의미가 무엇인가 상상해보면 전혀 모를 바는 아니지만, 작품 안에서 개연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40여 년 전 서랍 속 희곡을 꺼내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무대 위에 공연하는 일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더구나 그 작업이 생태주의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메시지를 미학적으로 숨기면서 연극적으로 형상화될 때 관객에게 더 깊이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될 것이다.(『예술부산』 2023년 10월호 개재 재수록)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허은 평론보다 김영희 평론이 좀 더 중립적입니다.
극작가는 연출가를 잘 만나야 빛나는 무대가 펼쳐지겠어요.
예전 글을 생태학적으로 풀어내다 보니 허점이 있을 수 있어요.
무대는 사라져도 희곡은 남는다.
언제든 다른 연출가가 다른 형식으로 또 무대에 올릴 수 있으니
힘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히 읽고 감사히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