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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상
대마도(對馬島)
일본 나가사키현에 속한 섬. 행정구역상 쓰시마시 1시(市)로 이루어져 있다. 한글로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쓰시마'라고 표기한다. 흔히 '対馬島'의 정자 '對馬島'를 한국식 독음 그대로 읽어 대마도라고도 부른다.
'대마'를 '쓰시마(つしま)'라고 읽는 것은 통상적인 일본어 한자 독음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표기로, 지명(地名) 특유의 불규칙 독법이다. 고사기에서는 津島라고 적기도 했는데, 이건 津(つ)+島(しま)라 현대 훈독과 맞는 표기이다. 대마도에서 한자 對는 "마주하다", "대조하다", "상대", "배우자", "짝", "쌍(한 짝으로 이루어 진 것의 단위)"이라는 뜻인데, 그래서인지 대마도(쓰시마)가 한국어 '두 섬' 또는 짝을 이룬 '쌍둥이 섬', '쌍 섬'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반면 한국어 "두 섬"이 변하여 쓰시마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낭설로 보기도 한다. 쓰시마섬은 원래는 좁은 지협으로 이어진 하나의 섬이었다. 지금처럼 두 섬으로 나누어진 것은 근대에 운하를 팠기 때문이다.
한국의 여러 섬들 사이에 넣어 비교해도 제주도 바로 다음 2위가 되는 작지 않은 섬이고, 일본의 여러 섬들 중에서 면적으로 따지면 10위권에 들지만, 대부분이 해발고도 400 m 이상 산지이기 때문에 가용할 수 있는 토지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이다. 역사에서 해적의 근거지가 되었고 한일간 교역 거점을 맡았던 요인 중 하나다. 가용 면적이 낮아 인구가 적은 탓에 지역적 특색이 옅고 그렇다고 석유나 가스같은 자원이 펑펑 나오는 것도 아니니 일본 내에서의 존재감도 별로 없는 촌동네이다. 위치는커녕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그나마 가까운 큐슈나 야마구치 사람이면 섬 이름 정도는 아는 수준이다.
면적은 총 695.9 ㎢로 제주도 면적의 약 38%, 거제도 면적의 2배 정도이다. 크기는 큰 주제에 인구수는 진도군과 같다. 인구는 저출산+젊은 층의 유출로 1970년대 이래로 계속 감소 중이다. 연 평균 500명 정도씩 줄고 있다. 한국의 섬과 비교하자면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고, 일본 인구가 한국 인구의 2.5배 정도 되는 것을 감안하면, 울릉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원래 하나의 큰 섬이었으나 1672년 오후나코시 운하, 1900년 만제키 운하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며 3개의 섬으로 나뉘었다. 쓰시마는 아소 만과 만제키 운하로 섬이 양분되는 지형이기 때문에, 크게 북쪽을 가미지마(上島), 남쪽을 시모지마(下島)로 부른다. 마을은 해안 지대를 둘러가며 띄엄띄엄 자리하고 있다. 이즈하라, 미쓰시마, 도요타마, 미네, 가미아가타, 가미쓰시마 등 6개의 정(町)이 있었는데 2004년 모두 합병하여 통합 쓰시마 시로 개편되었다. 6개 정이 통합되었고, 지형이 복잡하기 때문에 좁은 시가지가 분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인데, 한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가는 곳은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에서 직항편이 있는 남쪽의 이즈하라와 북쪽의 가미쓰시마의 히타카쓰이다. 그 외에 유인도 5곳을 포함해 부속도서 100여 곳이 있다.
큐슈 본토 사가현 가라쓰시 하도 곶 에서 북서쪽으로 82 km 떨어져 있으며, 남동쪽에 위치한 이키 섬까지의 거리는 47.5 km이고, 한반도와의 거리는 약 49.5 km이다. 섬 크기는 남북으로 82 km, 동서로 18 km이다. 섬 넓이는 약 700 km²이며, 섬의 인구는 2017년 기준으로 35,115명이다. 농경지는 전면적의 3.3%이며, 섬전체 면적의 대부분인 80~90%가 산지이다.
거리상으로 나가사키 시보다는 후쿠오카시와 더 가깝고 교통 등을 감안하면 실제 생활권도 후쿠오카 시에 더 가까운 편이지만 행정구역상 나가사키 현 쓰시마 시에 속한다. 하지만 현청이 있는 '시'단위가 아니라 '현' 전체 단위로 본다면 나가사키 현에서 더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도 나가사키의 방송이 나오며, 만약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면 후쿠오카가 아닌 나가사키의 최저 시급을 적용받는다.
예로부터 산지가 많고 농지가 좁아 농업보다는 어업이나 중개무역, 혹은 해적질이 발달했으며, 전통적으로 광산업 또한 발달해서 은, 아연 등이 났으나 지금은 전부 폐광되었다. 현재는 관광업이 번성해 주로 대한민국 관광객을 받았다. 이외에도 소수지만 일본 본토, 중국 등에서도 관광객이 방문한다. 자세한 사항은 산업 부분을 볼 것.
쓰시마 공항이 있으며 여기서 후쿠오카 공항과 나가사키 공항으로 가는 항공편도 있다. 오리엔탈 에어 브릿지 항공에서 운행하는 나가사키행 항공편과 전일본공수의 후쿠오카 노선이 있다.
후쿠야마 마사하루와 쓰시마
3. 한반도와 가까운 섬
한반도(부산광역시)와의 최단거리는 약 49.5 km,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이키 섬과의 거리는 약 47.5 km, 일본 본토 중 하나인 큐슈(사가현 가라쓰 시 하도 곶)까지의 최단거리는 82 km로 일본 본토보다 한반도와 더 가깝다.
여담으로 일본 영토 중에서 북한과도 가장 가까운 지역이기도 하다. 북한까지 최단거리가 420km정도가 나온다. 남한과의 최단거리는 위에서 언급한 49.5km정도.
한반도 본토에서도 보이고 일본 본토 큐슈에서도 보이는 섬이다. 북한을 제외하면 대한민국 내에서 보이는 유일한 외국 영토로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거제도, 통영 미륵산 전망대, 창원해양공원 전망대 등에서는 날씨가 좋거나 미세먼지가 적은 날 육안으로도 확인 가능하다. 이 섬이 한국에서 보이는 게 일종의 신기루 현상이라는 설도 있는데, 대마도 신기루설은 부경대학교 대기환경학과 변희룡 교수의 가설로서 정설로 인정되진 않고 있다.
물론 반대로 쓰시마 섬에서도 부산이 잘 보인다. 쓰시마 상도의 한국전망대 등지에서 부산에서 하는 불꽃놀이를 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대한민국에서는 쓰시마 섬을 사실상 낮에만 볼 수 있다. 쓰시마 섬은 인구밀도가 희박한 시골이기 때문에 야경도 어둡다. 그러나 반대로 부산은 밤에도 불빛으로 환한 대도시이기 때문에 날씨만 괜찮다면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얼마든지 쓰시마 섬에서 부산이 보인다고 한다.
부산 장산에서 본 대마도. 맑은날에는 생각보다 잘 보인다.
부산불꽃축제 시즌에는 광안대교까지 육안으로 보인다. 부산광역시 영도구 인근에서 안개가 껴도 희미하게 보이며, 맑은 날은 꽤 잘보인다. 한반도에서는 부산, 거제, 울산 등지에서 육안으로 보이는 점을 근거로 들어 고대에는 왜가 아닌 신라의 영토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지리적 거리가 역사적 영유권을 실증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는 일본 본토지역인 나가사키현, 사가현 북부 해안지역 가라쓰 마쓰우라 히라도 등지에서도 보이는 데다가 고대에는 일본이 해상진출이 빨랐던 탓에 삼국시대부터 이미 왜인들의 거점이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에서 대아고속해운과 미래고속, JR 큐슈고속선의 여객선을 이용해서 갈 수 있다. 코리아익스프레스에어에서 2019년 7월 3일부터 김포국제공항과 쓰시마 공항를 잇는 정기편 노선이 취항한다. 또한 동일 항공사에서 잠깐 운영했던 PUS-TSJ 노선의 운항 거리는 66마일로, 한국에서 운행하는 모든 항공노선 중 최단거리 노선이다. 무안국제공항-제주국제공항 노선이나 여수공항-제주국제공항 노선도 110마일은 나온다. 이렇게 짧은 거리로 인해 성능이 좋은 라디오의 경우 일부 지역에서 KNN도 잡힌다. 한국과 가장 가까운 한국전망대 근처 북쪽 해안가에서는 대한민국 이동통신 신호가 잡혀 로밍없이 음성통화 연결에 성공한 사례도 있었다. KBS 스펀지에서도 실험에 성공했다. 그래서 현지인도 한국 통신사 신호가 잡혀버리는 바람에 로밍이 되어버리는 해프닝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반대로 부산에서도 일본 방송이 잡혀서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방송국 PD들이 일본 방송을 표절하러 수시로 부산에 단체 출장을 갔다는 일화나 일본프로야구 중계를 야매로 시청하며 시청각 교육을 받은 덕분에(...) 우수한 야구선수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이야기 등은 이미 유명하고 태종대와 이기대 전망대에서 일본 이동통신사인 NTT 도코모, KDDI 신호가 잡히는 경우가 있다. 로밍 부가서비스가 설정되어 있는 경우 자동으로 요금이 청구되는 경우도 있으나, 고객센터를 통해 국내에 있었음을 소명하면 환불해 준다고 한다.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섬은 미쓰시마 섬이며 그 다음은 우니 섬이다.
동해의 입구 격으로 대한해협(Korea Strait) 한가운데에 있다. 북쪽으로는 부산 해협(서수로西水路, Western Strait, 조선해협) 남쪽으로는 쓰시마 해협(현해탄/玄界灘/겐카이나다)이 지난다. 일본에서는 남북 해협을 통틀어 쓰시마 해협이 정식 이름이고 부산해협(서수로)를 조선해협으로 부른다.
우리 쪽(부산-쓰시마)은 부산 해협, 일본 편(쓰시마-큐슈)은 쓰시마 해협(현해탄), 전체를 부르거나 양국간의 해협을 편하게 부를 때는 대한해협이라고 쓰고 현해탄이란 표현은 일본 입장의 북쪽을 의미하므로 지양하는 것이 좋다.
한국인 관광객 대상 산업이 크기 때문에 일본치고는 한국어가 간판에 적혀있는 건물이 많은 편이다. 다만 불매와 코로나로 한국인 관광객이 끊긴 2019~2020 이후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왜의 북안(北岸)에 있는 구야한국(狗邪韓國)에 도착한다. ( 대방군에서) 여기까지 7,000여 리이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바다를 건너 1,000여 리에 대마국(對馬國)에 이른다. 그 대관(大官)을 비구(卑拘)라고 하고 부관(副官)을 비노모리(卑奴母離)라고 한다. 이 나라는 홀로 있는 섬으로 사방 400여 리쯤 된다. 땅과 산이 험하고 못과 숲이 많다. 도로는 짐승과 사슴이 다니는 길과 같다. 1,000여 호 정도가 있으나 좋은 밭은 없다. 해산물을 먹고 스스로 생활[自活]하고 있으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쌀을 사온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왜국의 일부로 나온다. 그때도 이름은 대마국(對馬國). 현재의 부산 동래구 혹은 경남 거제시로 추정되는 독로국과 김해로 확실시되는 구야국(금관국, 금관가야)에서 바닷길로 접해있다고 나온다. 3세기에 이미 중국인에게도 쓰시마 섬은 왜국으로 분류될 정도로, 이미 이 땅은 왜인들의 땅이었다.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 조정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일본 열도 역습을 대비해 서쪽 각지에 쌓은 이른바 조선식 산성 가운데 하나인 가네다 성(金田城)이 있다. 신라구가 활발하던 시절에 큐슈와 함께 털리기도 했다. 전진기지에 가까운 지리적 특성 탓이다. 나중에 가면 여진족 해적들까지 쓰시마를 공격한다(도이의 입구). 안습. 고려 시대 원나라가 주도한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때는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친 곳이 여기다. 쓰시마의 어휘 가운데 간고(ガンゴー)란 말이 있는데 간은 원나라를 뜻하고 고는 고마, 즉 고려를 뜻한다. 이는 옛날에 어린 아이가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 식으로 쓰던 말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쓰시마는 산이 너무 많아 농업생산성이 떨어졌고 인구도 별로 없기에 전근대에는 어느 나라에서도 욕심을 내지 않았다. 일단은 일본인들이 살고는 있었지만 일본 본토에서도 봉건제도 하의 느슨한 복속관계만 맺고 사실상 자치를 하고 있었고, 한반도와 가까이 있었기에 마음만 먹었으면 한반도 국가의 영토로 편입될수 있었지만 끝내 조선이 쓰시마 섬을 직할통치 하지 않았던데에는 농업생산성이 떨어지고 광업으로 보충하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일본에서도 드물게 전란에 휘말리지 않고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다. 가마쿠라 막부 때부터 영주였던 쓰시마 소(宗) 씨가 하극상의 시대 센고쿠 시대를 거쳐서 메이지 덴노 시대까지 별 문제 없이 집권하고 있었을 정도이다. 사실상 조선 시대 초기 이후로는 쓰시마가 직접적으로 군사 공격을 받은 일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도 무사하게 벗어난 편으로 세계사적으로 보아 양국 사이에 있는 섬 치고는 굉장히 평온하게 지낸 편이다.
쓰시마 도주인 소(宗)씨가 사실은 한국 부산의 송(宋)씨가 건너가 된 것이란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1740년 동래부지(東萊府志)라는, 부산을 다룬 책에 처음 나오는 것이다. 아마 宗과 宋이 글자가 비슷한 것 때문에 이런 주장이 나온 듯 한데 부산에 살던 송씨가 건너가 쓰시마 섬에서 아비루(阿比留)를 물리치고 쓰시마 도주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빙성은 낮다. 조선 후기에도 재야의 양반들은 독자연구를 행했다. 부산에 이들 조상의 무덤이 있다는 주장인데 울산에도 비슷한 전설이 내려오는 것으로 볼 때 한반도와 가까운 지리적 특성 탓에 나온 전설인 것으로 보인다.
소씨의 기원은 헤이안 시대의 호족인 고레무네(惟宗)이다. 한국에도 종(宗) 씨가 있긴 한데 항왜 출신이다. 소씨가 한반도 출신은 아니지만 외부(일본열도)에서 쓰시마 섬으로 들어와서 기존의 세력이었던 아비루 씨를 누르고 섬의 권력을 장악했다는 역사 자체는 사실이다. 아비루 씨도 소 씨와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 유입된 세력들인데,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가즈사(上總)의 아비루 군(畔蒜郡)에서 쓰시마로 건너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소 씨가 권력을 잡게 된 뒤에도 아비루 씨를 아주 없앤 것이 아니라서 아비루 씨는 그대로 계속 섬의 유력자로 남았고, 지금도 쓰시마에서 가장 많은 성씨다.
헤이안 시대 중기에 쓰시마의 카미(守, 태수)로 부임해 있던 미나모토노 요시치카(源義親)가 쓰시마 현지에서 관물을 횡령하고 백성들을 약탈하고 다닌다는 고발을 받았는데, 이 요시치카의 아버지가 바로 당시 무사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으며 하치만타로(八幡太郞)라고 불리던 가와치 겐지의 수장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였다. 요시치카는 요시이에의 둘째 아들로써 아버지 못지 않은 무력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조정에서는 요시치카 회유를 위해 요시이에의 가신이었던 후지와라노 스케미치(藤原資道)를 보냈지만 스케미치는 그대로 눌러앉아 요시치카와 함께 관리를 죽이는 등의 범죄를 저지른다. 결국 요시치카는 소환 및 오키(隠岐) 유배라는 처벌을 당했는데, 유배지로 가지도 않고 이즈모(出雲)로 건너가서는 현지 지방관을 죽이고 관물을 약탈하는 등의 악행을 일삼았다. 결국 일본 조정은 이세 헤이시의 다이라노 마사모리(平正盛)를 시켜 요시치카를 토벌하게 했는데, 이 마사모리가 바로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할아버지. 무사들의 신망을 얻고 있던 하치만타로 요시이에의 아들이자 천하 제일의 무용을 가진 것으로 이름높던 요시치카가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한 것은 가와치 겐지의 체면을 구기는 것이었고 세력이 꺾인 겐지를 제치고 헤이시가 무사 가문으로써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사와의 관계와 왜구의 활동
왕은 왜인이 쓰시마 섬(對馬島)에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고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군사를 뽑아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삼국사기 실성 마립간 조
기록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3세기부터다. 쓰시마 섬은 산이 많고 농토가 적어 이곳의 주민들은 주변 지역에서 식량을 조달해 생활했다. 야마토가 급속히 성장하고 신라와 대립이 심해진 5세기 초에는 군사적인 전진 기지 역할을 한 적도 있었으나, 실성 마립간 시기에 풍도 해전에서 왜군이 박살나면서 소강 상태에 들어간 듯하다. 단 고대의 왜군은 후대 왜구가 임진왜란을 제외하면 좀 큰 해적이었던 것과 달리 일본 관군의 성격을 띤 경우도 많았다.
조선시대의 동사강목에서는 태종 무열왕이 이곳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무열왕의 대마도 공격은 고려 이전의 기록에서 교차검증되는 부분이 아니라 큰 주목을 받진 못하고 있고 아무튼 조선시대에 그런 전승이 전해지고 있었다는 근거는 된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 참조. 이 때 무열왕이 중간 진지로 쌓고 주필(駐蹕)한 곳이 부산의 태종대라고 되어있다.
통일신라 말기~후삼국시대 전반부의 신라구가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에는 일본 본토까지도 신라인 해적이 쳐들어갔지만 역시 가장 많이 털린 곳은 한반도와 가까운 쓰시마였다. 후백제의 사절단이 쓰시마에서 문전박대당하기도 했는데, 이처럼 쓰시마는 일본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같은 역할을 했다.
한국 기록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사건이나, 일본삼대실록에서는 경문왕 치세인 870년, 쓰시마 섬 사람 우라베노 오토쿠소마로(卜部乙屎麿呂)가 신라 바다 근처에 가마우지를 잡으러 갔다가 신라국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그가 살펴보니 당시 신라에서는 큰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고 있었고, 신라인에게 물어보니 신라가 쓰시마 섬을 정벌하기 위한 준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겨우 탈옥해 일본 본국에 이 사실을 전하고 본국의 지원을 요청, 대비했다고 한다.
다만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라 신라에서 국가적으로 진지하게 그런 준비를 했는지는 불확실하며, 당시 신라구 해적이 일본 연안을 약탈하는 일이 잦았다는 점이나 이후 점점 신라구의 규모가 수천 단위로 커진다는 점을 볼 때 오토쿠소마로가 붙잡혔고 봤던 것은 정식 신라 해군이 아닌 대규모 신라인 해적 기지였을 수도 있다. 훗날 수백 척의 함대로 쓰시마를 공격했다 붙잡힌 신라 해적 현춘도 자신은 신라 왕이 명령해 출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려 시대에는 진봉무역으로 고려와 교역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무역량이 감소하면서 먹고 살 식량이 없었다. 그래서 호구지책으로 삼은게 노략질.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왜구의 선봉 역할을 했다. 왜구가 가장 들끓었던 시기는 여몽연합군이 쓰시마 섬을 침공했었던 때 이후로 여몽연합군의 쓰시마 섬 침공은 쓰시마 섬의 농토를 초토화 시켰다. 그리고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고려 정부는 일방적으로 쓰시마 섬에 대한 곡물 수출을 끊어 버렸다.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왜구가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되었다.
아무튼 여몽연합군에게 호되게 당했는지 현지에서는 어린 아이들을 어를 때 간고(ガンゴー)란 말이 있는데 간은 원나라(元)를 뜻하고 고는 고려를 뜻한다. 영국에서 보나파르트란 말의 어감과 비슷하다.
이 왜구들 때문에 한반도 국가들도 바다를 건너 원정길에 나서기도 했다. 그것도 3차례나. 1차는 고려말 1389년(창왕 2년), 2차는 조선개국 직후 1396년(태조 5년), 3차는 1419년(세종 1년)의 토벌작전. 3차 토벌은 간지(干支)를 따서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 한다. '쓰시마 섬 원정'은 조선의 군사력을 보여주어 왜구의 재발을 방지하려는 것이 제 1 목적이었다.
또한 명나라 역시 왜구의 피해가 막심해 일본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려 했는데, 이 경우 자연스레 조선이 선봉장 역할을 하게 될 수밖에 없고 이는 원이 고려를 이용해 일본을 공격한 것과 같은 꼴이 되어 조선은 내정간섭을 받을 위험이 컸다. 따라서 명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기에 앞서 쓰시마를 공격한 것이다. 이를 통해 쓰시마 섬에 잡혀 있는 중국인 포로를 명에 귀환시키는 한편 왜구에 대한 경계는 조선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조선시대 기록인 국조정토록에 기록된 쓰시마 섬 전투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6월 임진일, 두지포에 상륙하여 왜구 50여 명과 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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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를 추격하여 배 129척을 빼앗아 20척을 남기고 불사름, 가옥 1939호를 불사름, 왜구 114명을 참하고 21명을 사로잡음, 한인(중국인) 132명을 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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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내곶에 목책을 치고 주둔
편장을 보내 가옥 68호, 배 15척을 불사름, 왜구 9명을 참수, 한인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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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군(두지포의 맞은 편 해안 추정)으로 진격
좌군절제사 박실이 매복에 당하여 선상으로 퇴각, 편장 박홍신, 박무양, 김해, 김회와 군사 180명(실록기록)이 전사/추락사
편장 김효성이 추격에 저항하자 추격군이 물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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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병오일, 거제로 귀환
쓰시마 섬 원정은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막판에 좌군절제사 박실(朴實)이 쓰시마 도주가 이끄는 군대와 조우해서 180명 사상이라는 피해를 입었다. 전투, 비전투병력 모두 합쳐 2만에 달하는 전체적인 병력 규모로 보면 참패라고 하기는 어려운 피해다. 박실의 패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상륙 후 줄곧 왜구를 상대하면서 승승장구하면서 방심했던 것, 그리고 줄곧 패배하던 쓰시마 섬의 왜구는 사실상 정규군이나 다름 없었지만, 쓰시마 도주와 무사들이 개입하면서 태세를 재정비하고 지리에 익숙한 장점을 살려 방어전을 전개한 것에 패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패전은 조선군 퇴각의 결정적인 원인이 아니었다. 방어에 주력하는 적을 상대하면 자연스럽게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 때는 태풍이 올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사상자가 제법 발생한 상태에서 자칫하면 지원군, 보급, 퇴로가 전부 끊길 수가 있으니 퇴각한 것이다.
사실 이때 쓰시마 섬 정벌은 사실상 원정…이라는 이름으로 약탈 나간 왜구들의 빈집털이가 되었다. 이 왜구들은 충청도에 있는 수군 진영을 기습, 각종 물자와 함선을 약탈하고 귀환하는 것을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왜구들이 쓰시마 섬에 도달하기 전에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군은 임무를 완수하고 이미 거제에 도착한 상태였다. 그런데 군사들이 지쳐 있었고, 마침 태풍이 오는 듯한 날씨여서 신하들은 일단 군사를 재정비 할 것을 요청했다. 태종의 새로운 명령을 받은 사자가 거제에 도착했을 때 마침 군사들이 쓰시마로 출발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풍랑이 몰아쳐 전함이 일부 파손되고 유실되었으며 군사 일부가 사망했다.
그러자 상왕 태종은 병조판서를 시켜 글을 지어 항복한 왜인들에게 들려서 쓰시마로 보냈다. 전체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쓰시마 섬주에게 회유책을 쓴 것이다. 글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을 참고.
이 원정의 성공과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안정으로 왜구의 수는 이전에 비해 격감하여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조선의 물질적 양보 하에 왜와 조선간의 평화적 교류가 활발해졌다. 당장 조선왕조실록을 뒤져봐도, 세종실록 이후로는 성종 때까지 왜구 관련 기사가 씨가 마른다. 모두가 쓰시마 섬 정벌의 효과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크게 영향을 끼쳤을 건 분명하다.
유럽의 역사와 비교해보면, 르네상스 시기 지중해를 횡행했던 바르바리 해적을 토벌하기 위해 유럽 각 나라들은 몇 차례고 토벌을 했지만 오스만 제국에서 은근히 밀어주는 통에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심지어 본거지였던 튀니스나 알제 같은 곳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긴 했지만 오히려 비용만 막대하게 들 뿐, 약탈 자체는 계속되었다. 덕분에 모로코의 술탄 같은 경우 수십만의 유럽인 노예들을 거느리고 베르샤유 궁전 못지 않은 호화로운 궁전을 건립하며 오스만 제국 못지 않은 하렘을 거느렸다고 한다. 이 해적들이 겨우 토벌된 게 산업혁명기였던 19세기 초였다.
게다가 남중국해의 베트남/중국계 해적 같은 경우 중국 황제들이 해적 두목들에게 벼슬 주는 식으로 무마한 경우도 상당히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정일수. 이와 비교하면 조선은 나름대로 왜구 소탕에 성공한 셈이었다.
근세 변경으로서의 역사
어쨌건 그 이후 쓰시마 섬의 영주는 조선 왕의 신하이면서 동시에 막부의 다이묘라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투잡을 뛰게 된다. 교과서적인 변방사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이 원정의 성공 이후로, 조선에서는 강경책 대신 회유책을 써서 무역을 허가했다. 쓰시마가 일본과 조선 두 나라 사이를 무역하면서 조일무역의 중개지가 되었고 그 때문에 많은 쓰시마 도민들이 조선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는데, 외국인이 조선 땅에 들어와서 사는 걸 조선 정부가 곱게 볼리가 없었고 이에 경상도 해안 인근에 삼포를 신설하여 무역량을 줄였다. 그러나 16세기까지 쓰시마는 조선의 목면과 곡물 등을 수입하고 은, 동, 물소 뿔, 유황, 후추 등을 제공하면서 중개인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곡물생산량이 1만 석 정도에 불과하던 쓰시마는 조선과의 무역(밀무역이 다수였지만)으로 수입을 2배 이상 뻥튀기할 수 있었다.
한편, 쓰시마 섬의 영주는 쓰시마 슈고를 몇 차례 지낸 규슈 북부의 다이묘 쇼니(少弍)씨와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 쇼니씨는 무로마치 시대 내내 오우치씨와 맞싸웠으나 열세에 놓여 몇 번씩 다이묘가 전사하고 영지가 털렸는데, 이때 쓰시마 섬으로 튀었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자기 본거지를 회복해서 오우치씨와 싸움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쇼니씨는 오우치씨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전국시대에 가신 류조지씨의 하극상으로 멸망했고, 쇼니씨와의 관계를 통해 규슈에 진출하려던 쓰시마 섬의 공작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오닌의 난 이후 무로마치 막부의 통제가 무너지고, 일본 상인들은 무역의 확장을 요구하며 중종 5년(1510년) 부산포, 내이포, 염포의 삼포에 사는 일본인들이 쓰시마 도주의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다(삼포왜란). 삼포왜란은 15일 만에 진압되었고 외교는 단절되었다. 이에 일본에서 직접 중개를 하여서 2년 만에 관계를 회복하는데, 이것이 임신약조다. 그러나 이럴 때마다 무역에 대한 통제는 강화되었고 이에 쓰시마 도민들은 다시 반발하는 구조가 반복되어 30차례 정도의 왜변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비변사가 설치되기도 했다. 실록을 보면 꾸준히 쓰시마를 간사하고 교활하다고 평가하는데 이러한 경험으로 주요했을 거라 생각된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단순한 노략질 차원을 넘어 정규군의 전면적 침략전쟁에서 선봉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히데요시의 압박으로 인해 쓰시마가 말려들어간 것인데,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였으며, 만약 쓰시마가 원정 참가를 거부하면 쓰시마 섬부터 결단난다.
실제로 쓰시마 도주의 입장에서 두 나라가 전쟁나서 좋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쓰시마는 조선-쓰시마-일본의 중개무역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입장이었는데 조선이 일본에게 져서 망하면 그게 그대로 무너지고, 조선이 이겨도 일본과 교역을 할 리가 없으니 이 무역은 무너지고, 회복에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결국 이겨도 져도 쓰시마에겐 전혀 득 없는 전쟁이었다. 거기에 일본에서도 가장 농업생산량이 딸리던 쓰시마 입장에서는 전쟁을 하러 오는 엄청난 수의 일본군에게 머무를 숙영지를 제공하고 군량을 제공해야 하는게 아예 어려웠다. 그래서 쓰시마는 전쟁을 막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기도 했다. 1590년에는 일본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도주 소 요시토시는 선조에게 조총 몇 점을 진상하였다. 그러나 이미 화포 무기를 지닌 조선은 총통에 비해 위력이 약한 조총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당시 조총은 연사력이 떨어지고 위력이 약했다. 그래서 본토에서 전쟁할 일이 없었던 조선은 오다 노부나가가 개발한 교대 사격술 등을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차라리 익숙한 활이 더 연사력이 좋다고 판단해 도입을 안했다. 대신 매일이 전쟁이던 일본은 연사력이 떨어지는 조총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3교대 사격술등을 개발해 조총의 약점을 극복했다. 결국 조선은 전쟁이 일어난 이후에야 조총의 장점을 인식하고 도입하게 된다.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에 조선 통신사를 요청하기도 했는데, 이 통신사가 바로 황윤길과 김성일의 통신사다.
또 그 유명한 '명으로 가고자 하니 길을 빌려 달라(假道入明)'라는 문구도 쓰시마 섬에서 조작한 것으로, 원래 문구는 '명을 정벌하려 하니 길을 안내하라(征明嚮導)'였다. 쓰시마 도주가 택도 없는 무례한 요구를 조선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다소 완화된 표현으로 조작했던 것이다. 현대라면 전쟁특수라도 누렸겠지만 그딴 건 없고 뱃길 안내를 위해 끌려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한 일도 비일비재. 거기다 식량이 부족하여 기아에 시달리면서 쓰시마 섬은 7년 전쟁 동안 상당한 고생을 한다. 그래서인지 당시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는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점령할 경우 농사가 가능한 거제도를 영지로 받기로 했다고 한다.
아무튼 강항의 《간양록》을 보면 저 투잡을 뛰면서 그 사이에서 이익을 취하는 쓰시마 섬의 어쩔 수 없는 삶이 한일 양국 모두에게는 안 좋게 보였는지, 쓰시마 섬 관련된 부분에서는 결코 좋은 소리가 안 나온다. 간양록에 실린 일본 승려의 증언에 따르면, 평시에 조선에 오는 일본 사절들 상당수는 실제로는 쓰시마 도주 개인이 보낸 것이고, 왜국의 국서(倭國書)란 것도 다 쓰시마 도주의 거짓 수작이라고 한다. 심지어 임란 이전 김성일 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승려가 조선 통역에게 사정을 듣고 쓰시마 도주의 속임수를 다 알려 주려다 쓰시마 섬 통역에게 제지당한 일도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도의 각 지역별 영주들이 상경해 묵는 수도의 집마저도 쓰시마 도주는 없어, 당시 소 요시토시는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집 근처 여관에서 잠시 유숙해야 했고, "일본 본토 사람은 악착스럽지만 교활하지는 않은데, 쓰시마 놈들은 악착스럽기는 덜 하나 간사스러운 꾀는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등의 안 좋은 대우와 시선에 대한 기록들이 넘친다. 하지만 쓰시마 도민들 입장에서는 저렇게 하지 못하면 살 수가 없는 것이 현실. 한국 기록에서 아무리 쓰시마를 두고 간사하다, 교활하다, 이중적이다 이래봐야 쓰시마 도민들에게는 그런 말은 귓등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굶어죽게 생겼는데 그럼 뭐 어쩌라고.
위에서 말한 국서를 자세히 설명하자면 왜란 이후 먹고 살기 위해 조선에 무역 재개를 요청하는데, 조선이 그래줄 리가 없다. 그렇지만 북방의 여진족이 흥하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쇄환해야 했기 때문에, 국교 재개에 의지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불구대천의 원수들이라 욕하면서도 '쓰시마 섬만은 허락할 수도?'라고 말을 흘리면서 쓰시마를 설레게 했다. 쓰시마가 포로 일부를 석방하면서 징징대니까 조선은 일단 조선은 사명당 유정을 '탐적사(探賊使)'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파견하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접견한다.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조공 책봉체제에 편입시키려고 쇼군의 칭호를 '국왕'으로 해야 한다고 했고,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고,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쪽이 아쉬운 쪽, 즉 국서를 먼저 보내는 쪽이 지고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니들이 먼저 국서 보내렴" 하는 입장을 취했다. 일본은 당연히 거부하고, "국교 재개하려면 니네가 먼저 국서 보내라"라고 요구. 서로 기싸움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속 타는 건 쓰시마 섬.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국서 위조였다.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낸 것처럼 문서를 쓰고 조선의 요구사항 중에 "왕릉 도굴한 자를 잡아서 보내라"는 항목을 만족시키려고 다른 죄를 지은 죄인을 보내서 '얘가 바로 조선 왕릉 도굴한 놈임여'라고 하니, 조선은 일본이 먼저 보낸 줄 알고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을 파견. 이들이 가져온 국서에 '국서에 답한다'는 표현이 있자 쓰시마 도주는 이 국서마저 국서를 보낸다는 문장으로 조작. 결국 국교가 회복되고 무역도 제한되긴 했지만 재개된다. 이것이 기유약조이다.
그런데 1635년 이 국서 위조가 밝혀지면서 쓰시마가 털릴 위기에 처하지만 에도 막부는 이를 묵인해줬고 다른 다이묘들과 로주가 합의하여 대신 감독관을 파견하면서 양속적 성격이 강했던 쓰시마는 일본에 편입되어 대조선외교의 창구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2000년 이후 16~18세기 동아시아 은 교역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쇠퇴했던 중국 - 일본의 은 교역을 대체하는 창구로서 쓰시마 섬의 은 무역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대체로 17세기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조선은 중국의 생사, 비단, 약재 등을 중개하고 인삼 등을 판매하며 수익을 누렸다. 특히 인삼은 일본인들의 수요가 매우 높아 1695년 일본이 수출용 은화의 은 함량을 80%에서 64%로 깎았을 때도 유일하게 80% 은을 줘가면서 사갔던 물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18세기 초반 인삼의 일본 내 국산화가 진행되고, 북아메리카산 백삼이 유입되면서 인삼 교역은 쇠퇴하고 중개 무역은 청과 일본이 무역 조약을 맺는 18세기 후반 경에 거의 단절된다. 하지만 교역이 단절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해삼 등 해산물이나 쇠가죽 등의 판매가 쓰시마를 경유해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조선은 반면에 꾸준히 은, 동 등 귀금속과 유황 등을 수입하는 경로로 쓰시마 섬 무역을 이용했다.
1861년에 러시아 제국이 통상조약과 개항 요구란 이유로 쓰시마섬 점령 사건을 벌었다. 반년 간 주둔하다가 영국의 개입으로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