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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blog.naver.com/mungia/220520034974
오퍼라치온 뷔펠
제2차세계대전 중 소련의 수많은 도시와 마을들이 데미얀스크전투 처럼 치열한 방어전의 중심이었다.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세바스토폴, 로스토프, 레닌그라드 등은 동부전선에서 싸웠던 수많은 병사들의 기억에 각인됐다. 이런 장소 중 볼가강 상류의 르제프가 있었다. 르제프는 천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도시로 전쟁 전 인구가 54,000명이었다. 1941년 10월부터 1943년 3월까지 이곳은 동부전선의 중요 전구였다. 수 백년 간 하류로 목재를 떠내려 보낸 볼가강 상류에 접해 있었으므로 리투아니아, 칼리닌, 모스크바의 대공들에게 가치 있는 장소였고 태고적부터 볼가강 상류와 발틱해 국가들의 경제, 군사적 목표가 됐다. 이 전략적 가치는 제2차세계대전시에도 이 도시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1941년 10월 독일 제206보병사단 보병대대와 제26보병사단 정찰대대가 모스크바로 진격 중 이곳을 점령해서 유럽에서 제일 길고 러시아의 상징인 볼가강에 도달한 첫 번째 독일 부대가 됐다.
소련군은 동계공세에서 르제프를 집중 공격했지만 독일군을 몰아내는데 실패했다. 독일군은 볼가강에 접한 칼리닌을 포기했지만 모스크바 공략의 전략적 핵심지역인 르제프는 방어했고 결정적인 저지선으로 만들었다. 1942년 초에 예레멘코 상급대장은 스탈린으로부터 직접 타격병력을 동원해서 독일 제9군의 사단을 몰아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예레멘코는 첫 번째 정면공격이 실패하자 두 번째에는 포위를 시도했다. 치열한 소모전 끝에 제9군의 연대들은 진지를 고수했다. 예레멘코의 병사들은 남쪽의 오스타쉬코프를 향해 얼어붙은 호수를 건넜다. 북쪽으로부터 공격은 중앙군집단 전선을 붕괴시킬 수 있는 위협이었다.
르제프의 볼가강 다리에 배치된 독일군 37㎜ 대공포, 다리 위에 수송대가 통과중
하지만 데미얀스크와 마찬가지로 르제프는 버텨냈고 예레멘코의 파도에 맞서는 방파제가 됐으며 파도는 벨리즈와 벨리키에 루키에서 가로 막혔다. 모델 상급대장과 제9군은 중앙부 전선의 첫 번째 동계전투의 전환점을 만들어 냈다. 그 후 네 번의 하계, 동계전투에서 르제프는 바위와 같이 버티고 있었다. 제9군의 장병들은 한계 상황에서 분투했고 모델은 뛰어난 수비전략가로서 명성을 확고히 했다. 소련의 대조국전쟁사는 스타브카가 르제프가 독일의 손아귀에 있음으로써 얼마나 조바심 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모델군은 불과 180km 떨어진 모스크바를 주먹처럼 노리고 있었다. 이 상태가 지속되는 한 소련의 수도에 대한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히틀러가 소련의 심장에 대한 공격을 재개할 기회를 잡으려는 한 르제프를 확보해야 하는 건 군사적 상식이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의 재앙 이후 모스크바를 향한 대공세의 희망은 사라졌다. 제6군 25만 대군을 상실한 후 독일 최고 사령부에는 그만한 대규모 공격을 실시할 인적자원이 없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데미얀스크에서와 마찬가지로 노출되고 엄청난 전력을 필요로 하는 500km에 달하는 방어선 포기 결정을 주저했다. 그는 육군 총사령부, 증앙군집단, 전선지휘관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고집했다. 오늘날 숨겨진 사실들이 들어나서 히틀러의 망설임에 대한 비판은 합당한 걸로 보이지만 당시에는 결정이 상당히 어려웠다. 소련에서 첫 동계전에서 전세가 역전 된 후 르제프 돌출부는 독일군이 크렘린으로 가기 위한 유일한 도약대였다. 르제프 남쪽의 뱌지마는 1941년 뱌지마와 브리얀스크의 2중 포위전으로 모스크바 전면의 소련군 마지막 저항이 분쇄되고 63만명의 포로가 획득된 곳이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이 전장의 역사적 승리는 소용없는 것이 됐다. 다시 공격을 할 것인지, 기다릴 것인지, 어떤 지도자도 이런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고 어떤 장군도 이런 요충지를 스스로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르제프를 포기하는 것은 단순히 전선에서 한 지점을 포기하는 것과 달랐다. 이것은 승리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독일군이 그 곳을 포기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의 패배에 이은 레닌그라드-하르코프-코카서스까지 모든 전선의 위기는 히틀러가 참모들의 지속적인 조언에 고집을 꺾게 만들었다. 1943년 2월 6일 그는 제9군과 제4군 일부병력에게 르제프 돌출부 보다 320km 짧은 방어선으로 후퇴를 허가했다. 이 대규모 후퇴작전 암호는 뷔펠(물소)이었다. 육군 총사령부는 제9군에 4주간 거대한 엑소더스 준비를 끝내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병력이 진흙탕의 계절이 오기 전에 새로운 방어진지에 들어가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모델 상급대장은 시체프카의 전방 사령부 지도실에 최측근들과 병과별 참모들과 앉아있었다. 참모장 폰 엘버펠트 대령, 작전참모, 수송장교 등이 허리를 숙이고 지도와 서류를 열심히 들여다봤다. 군의 선임 공병장교도 출석해있었다. 무엇 보다 먼저 새로운 방어선을 확인해야 했고 적과 접촉을 끊으면서 단계별 저지선을 만들어야 했다. 그 후 종심이 100km에 달하는 작전지역에서 적절한 후퇴가 실시돼야 했다. 차량을 위해 200km의 도로를 건설해야 했고 640km 가까운 마차와 썰매용 오솔길이 만들어졌다. 작업은 한 겨울에 실시됐고 모든 장비와 보급품을 철수시켜야 했다. 또한 가축, 곡물, 기계류 같은 경제적 가치가 있는 물자 이동을 위해 1만톤을 수송 할 수 있는 200편의 열차가 준비됐다.
모든 마차와 차량의 이동 시간표가 작성됐고 심지어 이 계획에는 소량의 물자를 운반하는 오토바이나 기병의 이동도 포함하고 있었다. 요행은 기대하지 않았다. 독일에 협력한 민간인과 그들의 가족을 남겨서 소련의 처분에 맡길 수 없었으므로 철수시키는 것은 특히 중요했다. 마지막으로 철도 수송이 완료된 후에는 1,000km의 철도와 1,300km의 전선을 파괴해야 했다. 이 거대한 퇴각작전의 핵심은 군과 29개 사단 25만 명과 모든 무기와 장비의 이동이었다. 수송과 전투준비. 후퇴와 전투는 연결돼야 했다. 이것은 거대한 기획이었다. 보안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가장 소규모 단위부대부터 모든 것이 가능한 위장돼야 했다. 하지만 모든 기밀 유지는 결국은 소용없을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2월 중순 독일 병사들이 아직 뷔펠작전에 대해 모르고 있을 때 소련 확성기에서는 이미 “장교들은 짐을 쌌다. 그들은 당신들을 버리고 가지 않는다고 한다.”라고 소리높였다. 소련 스파이조직은 베르테르를 통해 기밀을 잘 알고 있었다.
후퇴개시
독일장교들에게는 짐을 챙기는 것 보다 썰매와 차량을 철수시키는 시기가 큰 걱정거리였다. 2월 중순에 아직 눈이 두껍게 쌓여있었지만 3월초에는 어찌 될지 알 수 없었으므로 모든 상황에 대비하기로 결정됐다. 3월 1일 진흙탕이 찾아왔고 길은 물속에 잠겼다. 저녁 7시 철수가 시작되기로 했고 차량들이 먼저 움직여야 했다. 군은 거대한 무한궤도처럼 행동에 들어갔다. 전화선을 걷고 지뢰가 매설됐다. 한 밤중에 온도가 급강하하면서 모든 도로가 얼음판이 됐다. 그때 썰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쉬지않고 이동했다. 저녁 7시 정각에 모든 전방 진지는 퇴각을 시작했고 후위부대 만이 적과 접촉을 유지했다. 제6보병사단의 대대는 볼가강과 접한 진지에서 철수했다. 그들은 수류탄, 삽, 무기, 배낭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한밤중에 행군했다. 장기간 참호전이 계속됐으므로 병사들은 행군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묵 속에 마차와 썰매 옆을 느리게 걸었다. 대열은 계속 길어졌고 마침내 새벽녘에 중대는 눈 속에 구축한 첫 번째 저지선에 도착했다. 그들은 30km를 행군했다.
정찰결과를 보고하는 독일군 정찰중대장(우)
이제 볼가강의 진지에는 원래 병력의 1/3인 후위만 남아있었다. 그전 날 있었던 9개 부대에서 이제 3개 부대 뿐이었다. 병사들은 사격진지 사이를 바쁘게 오가면서 소총과 기관총을 발사해서 전 병력이 남아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뭔가 벌어지고 있다고 의심한 소련군은 사실을 알아보려 했다. 어둠이 사라지고 새벽이 되자 제58척탄병연대 제9중대 앞에 그림자들이 나타났고 병사들 앞에까지 다가와서 참호에 들어왔다. 후위병력을 지휘한 침착한 회첼 소위는 먼저 기관총을 전방에 사격해서 소련군이 더 이상 참호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참호를 양쪽에서 협공했다. 30분이 지나자 소련군은 포로를 한명도 잡지 못하고 참호에서 무인지대로 철수했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소련군 사령부는 아직 사실을 몰랐다.
볼가강에 접한 좌측 진지에서 상황은 더 위험하게 전개됐다. 그 곳 레페티하에서 독일군은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있었는데 소련군 200명이 치열한 박격포화를 앞세워서 볼가강 건너편의 하상에서 뛰어나와 얼음 위를 건너왔다. 소련군의 포화는 다행스럽게 엷게 배치된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 소련군이 강 위로 돌격해 올 때 회첼의 병사들은 그들의 보병포와 기관총 뒤에 기다리고 있었다. 회첼 소위는 소련군이 강을 건너서 개활지에 접어들어 독일군 진지까지 절반의 거리를 달려왔을 때 발사명령을 내렸다. 소련보병에게 기관총과 포화가 쏟아졌고 독일군 참호에 도달한 소수는 곧 압도돼서 항복했다. 보병화기만 보유한 소수의 대담한 후위부대 척탄병들은 주력이 떠난 24시간 후에 6km 후방의 새로운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이제 소련군이 독일군의 후퇴를 알았기 때문에 상황은 심각해졌다. 그들은 틀림없이 강력한 전력을 동원해서 퇴각하는 독일군 사단을 따라잡아 후퇴를 차단하고 최대한 포위해서 섬멸하려 할 것이다. 그런 일은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막아야 했지만 후위부대는 그런 임무를 오래 수행할 만한 전력이 부족했으므로 소련군의 추격을 둔화시키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지옥의 정원
독일군이 진격하던 시기에 후퇴하는 소련군은 모든 도로, 철도, 오솔길, 다리, 건물을 철저히 폭파했고 총통 사령부에서도 스탈린그라드의 패배 이후 남방군집단에 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 방법은 적을 오랫동안 저지하기에는 효과적이지 않았고 후위가 핵심시설을 제대로 파괴할 만한 인력과 시간을 가지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하나 있었는데 양 세계대전 동안 적을 지연시킨 지뢰가 있었다. 지뢰는 다양한 방법으로 설치될 수 있었다. 무거운 장갑차량, 트럭, 포 등이 밟으면 작동하는 대전차지뢰가 있었고 약간의 접촉만으로 즉시 폭발하던지 공중으로 1m 치솟았다가 폭발해서 머리나 몸에 타격을 입히는 대인지뢰가 있었다.
이 지옥의 계란들이 독일군이 철수한 참호, 진지, 도하지점, 도로, 교차로를 뒤덮었다. 고폭탄 뇌관은 인공적인 도로상 장애물에 교묘하게 연결됐다. 이런 전통적인 지뢰 설치는 소련군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독소전의 첫 2년간 후퇴 시에 그들은 많은 경험을 축적했고 지뢰전의 달인이 됐다.소련군이 지뢰를 설치할 만한 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문제없이 제거할지 알고 있었으므로 광대한 지역에서 그들의 진격을 지연시키는데 전통적인 지뢰 설치법은 효과적이지 않았다. 뭔가 더 효과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르제프 돌출부의 소련군 대전차총 부대
제9군의 고참 공병장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고 제1차세계대전 혹은 아프리카에서 롬멜군에 의해 시행된 취약한 사막 쪽 공간을 차단, 방어하기 위한 탁월한 지뢰사용법을 경험하고 있었다. 롬멜이 만들어 낸 지옥의 정원은 모든 세련된 방법을 동원해서 죽음의 덫인 지뢰, 폭약을 설치해서 심리적, 전술적으로 매우 효과적이었다. 적이 머뭇거리며 지옥의 정원에 들어오는 순간 즉시 공격의 추진력을 잃었다. 선두의 병사가 비산되고 전우가 다치거나 중상을 입으며 차량이 산산조각이 되고 전차가 기동불능이 되면 병사들은 탐색되지 않은 지역으로는 한발도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병사가 지뢰를 찾아내서 제거하는 순간 그 옆 혹은 또 다른 것이 참혹하게 폭발했다. 제거해 낸 첫 번째 지뢰 밑에 두 번째 지뢰가 매설돼있는 경우가 많았다. 지옥의 정원은 교묘한 방법으로 르제프에 설치됐다.
제9군의 노련한 공병은 지뢰를 위장하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다. 그들은 폭약을 가옥의 출입문에 설치했고 문이 열리면 입구에는 화염과 파편이 쏟아졌다. 숨겨진 대전차지뢰 뇌관은 가는 선으로 창문에 연결됐다. 죽음은 무해한 거 같은 사다리, 손수레, 삽, 곡괭이 뒤에 숨어있었다. 물건을 벽에서 옮기면 숨겨진 선이 뇌관을 작동시켰다. 교묘한 악마적 무기들이 계단 아래, 난로 뚜껑에 연결되어 있었고 특별히 소련군의 관심을 끌 만한 반쯤 노출된 서류가 든 상자 뚜껑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작전을 위해 훈련된 공병들은 흔히 적의 포화 아래서도 덫을 설치했다. 지뢰전의 효과는 놀랄 만 했다. 최강의 후위 전투부대가 하지 못한 것을 지뢰와 위장 폭탄은 최대한의 효과로 달성했다.
첫 24시간의 추격전 동안 소련군은 르제프의 지옥의 정원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공황 같은 게 발생했다. 소련군 통신은 “경고”, “피해발생”, “극히 주의”라는 명령들로 넘쳤다. 위장된 지뢰에 대한 두려움은 유령처럼 소련군을 사로잡아 전진을 지연시켰다. 후퇴 중인 사단들의 감청부대는 소련군이 자주 평문으로 통신했으므로 독일 지뢰의 끔찍한 효과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제206보병사단은 소련군 사단장이 그의 사단에 보낸 통신을 감청했다. “말을 마굿간에 매고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큰 폭발이 발생했다. 마굿간과 말이 사라졌다. 망할 놈의 프리츠(독일군)들은 우리가 의심하지 않을 만한 곳에는 모두 지뢰를 매설했다.” 다른 통신문은 병사들에게 어느 집에도 들어가선 안되고 지뢰제거반이 올 때 까지 어떤 귀중품을 집던지 우물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지뢰공포증이 발생해서 추격자들의 용기와 평정심, 정신력을 붕괴시켰다. 바로 모델이 노리던 바였다.
뷔펠방어선으로 후퇴
독일군은 단 21일 만에 돌출부에서 철수했다. 제9군과 제4군의 사단들은 싸우면서 약 160km를 후퇴했다. 그들은 500km가 넘는 전선에서 돌출부 시작점을 연결하는 200km로 단축된 새로운 진지로 후퇴했다. 1개 군이 필요한 320km의 전선이 단축됐다. 군사령부는 4개 군단 사령부와 3개 기갑사단을 포함하는 22개 사단을 다른 임무로 돌렸다. 이것은 결정적인 전략적 기동이었다. 중앙군집단에게는 스탈린그라드 동계전의 대 패배 후 예비병력 없이 버텨야 하는 어려운 시간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소련군의 공식전사에서는 모델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2개 소련군집단이 끊임없이 독일 돌출부를 공격해서 독일군 1.5개 군이 심각한 위협없이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소련군은 독일군 퇴각로에 한 번의 돌파도, 측면에 대한 심각한 위협도, 포위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 결과는 당시 소련군 지휘관들의 전술적 능력에 대한 중대한 비판으로 연결된다. 이게 소련의 역사가들이 이 전투결과 분석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이다. 소련군의 대조국전생사 제3권에 나오는 “칼리닌전선군과 서부전선군의 활발한 추격으로 독일군의 계획된 후퇴는 방해받았고 뒤쳐진 독일군은 병력과 장비에 큰 손실을 입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또한 “전후 서부독일의 몇 몇 역사가들이 독일군의 후퇴를 성공적인 작전상 후퇴로 포장하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후퇴 중 입은 적의 손실을 보면 그런 주장은 타당성은 의심스럽다. 적은 붉은 군대의 공격 앞에 르제프에서 조직적으로 후퇴할 기회가 없었다.”라고 한다.
뱌지마 북서쪽을 통과중인 조랑말이 끄는 소련군 포병
소련 출판물은 당시 제6보병사단장이던 그로쓰만 중장의 기록을 이 주장에 대한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그로쓰만이 남긴 마지막 순간까지 르제프에서 싸운 그의 사단의 전투와 르제프 주변 전체 전투기록은 소련의 주장과 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온전히 남아있는 제78돌격사단이나 제98보병사단의 전투일지는 또 다른 증거다. 히틀러는 다리가 적시에 파괴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재앙으로 의심을 품고 개인적으로 볼가강의 대교가 마지막 독일군이 후퇴한 후 파괴됐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히틀러는 르제프를 개인적으로 방문할 의사는 없었고 다리폭파를 원격 지휘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르제프의 다리 폭파반과 비니챠의 총통사령부 늑대굴 사이에 직통전화가 가설됐다. 히틀러는 전화를 통해 폭발음을 직접 듣고 명령이 이행됐음을 확인했다. 독일 후위부대가 르제프를 떠나고 소련 정찰대가 볼가강을 건넌 것은 몇 시간 후였다.
정확한 계획대로 모델의 사단과 하인리치의 제4군 좌익은 진흙탕의 계절이 오기 전에 스파스-데멘스크에서 부호프쉬치나로 이어지는 새로운 방어선에 -뷔펠진지- 들어갔다. 7주안에 2만 9천명의 공병과 건설부대는 철조망과 지뢰원으로 보호되고 거점과 진지로 강화된 방어선을 구축했고 병력이 자리잡고서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1942~3년의 극적인 동계전투는 끝났고 독일군 전선은 유지됐다. 르제프 돌출부에서 성공적인 철수로 중앙군집단과 북방군집단 전선의 약점은 사라졌고 남쪽의 도네츠 분지 전체가 독일군의 수중에 남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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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후퇴하는것도 간단한게 아니었구나
나중에볼것 ㄷ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