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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s://blog.naver.com/mungia
피해규모의 진실
몇몇 역사가들은 독일이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으므로 치타델레작전을 전쟁의 전환점이었다고 한다. 소련측 기록에 의하면 국방군은 티거 700대를 포함한 전차 3,572대, 포 10,844문, 항공기 1,392기, 8만∼10만의 병력을 잃었다. 동부전선 전체에 전차 3,524대를 보유하고 2,465대를 치타델레작전에 투입한 독일군이 섬멸당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소련측 선전과 독일문서는 크게 차이가 난다. 전차 실제 손실은 252대였다. 7월 14일까지 중앙군집단은 전차 41, 돌격포 17, 구축전차 19대를 잃었고 16일까지 남방군집단의 손실은 전차 161, 돌격포 14대이다. 치타델레작전 전체 기간 중 티거 손실은 10대였다. 가장 유명한 책 중 하나인 '불타는 티거'는 없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오랜기간 동안 소련군의 피해는 국가기밀이었지만 소련 해체 후 밝혀진 기밀해제 자료에 의하면 독일 공세시에 소련전차, 자주포의 완전손실은 1,614대라고 한다. 이 자료는 제2차대전사의 기념비적인 연구에서 밝혀졌지만 여러 부분에서 피해규모가 지나치게 낮다. 러시아 문서에서는 15일까지 손실이 중앙전선군 526대, 26일까지 보로네시전선군 1,420대로 파악되므로 총 1,614~1,956대이다. 소련은 3,929문의 포와 다연장로켓을 잃었다고 인정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독일측 포의 피해는 남아있지 않다. 루프트바페 기록에 의한 항공기 손실은 소련이 주장한 1,392기가 아니고 159기다. 러시아의 기밀해제 연구자료에는 소련기 손실이 429기라고 했는데 공식전사에서 항공전에서만 1,000여기를 잃었다는 것보다 지나치게 적다. 러시아 기록에는 대공포, 사고손실이 빠져있어서 남아있는 믿을만한 자료는 7월 1일부터 15일까지 루프트바페가 계산한 1,961기이다.
프로호로프카의 전승기념비
독일군의 실제 병력손실은 소련측 자료보다 적지만 심각했다. 7월 5일부터 15일까지 제9군은 23,345명(전사 4,064, 부상 18,414, 실종 867), 16일까지 남방군집단은 30,837명(전사 9,063, 부상 43,159, 실종 1,960)이다. 이는 전체 급량대상의 2.51%로 부대가 해체될 정도로 타격을 입은 경우는 없었다. 포병이 몇 배나 강한 적의 잘 준비된 진지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놀라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16년 영국군은 솜므전투에서 전투 첫날 독일군 진지를 공격하면서 12만병력 중 절반을 잃었다. 견고한 진지에서 수비중이던 소련군의 손실이 공격하는 독일군보다 훨씬 높았다는 것은 충격적 사실이다. 소련 공식전사는 수비기간 중 병력손실이 전사, 실종 70,330명을 포함한 177, 847명이라고 한다. 견고한 요새에 있던 수비측이 공격측보다 7배의 손해를 입었다.
독일군의 피해를 놓고 보면 치타델레작전을 분수령 혹은 결정적 전투라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치타델레작전에서 병력손실 43,159명에 대해 7월에 도착한 보충병력은 89,480명이었다. 상실한 전차가 252대인데 그달 독일 전차 생산량은 817대였다. 그 후 후퇴전에서도 독일기갑부대가 쇠퇴했다는 수치는 찾을 수 없으며 1943년 하반기 월별 평균 전차 생산량은 908대이고 티거와 판터의 비율이 증가해서 독일기갑부대는 어느 때보다 강한 전투력을 가졌다. 사상최대의 전차전이 독일기갑부대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오히려 쿠르스크전투는 독일기갑부대가 기술적 우위에 선 전투였다.
맹수 시리즈
독일기갑부대는 소련의 도움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다. 바이마르공화국은 베르사이유조약의 규제로 전차생산이 불가했으므로 라팔로 우호조약을 통해 소련 내에서 비밀리에 전차시험을 실시했다. 1935년 히틀러는 급히 전차 생산계획을 수립했지만 주변국들보다 1~2세대 뒤쳐진 기술적 장벽을 극복해야했다. 서부전역에서 독일전차들은 영국, 프랑스의 중(heavy)전차들과 대항할 수 없는 것이 명백했지만 혁명적 전술로 제1차대전시 전술을 사용한 연합군 전차대를 극복했다.
소련에 대한 전격전에서 히틀러는 3,350대의 전차로 수년간 생산된 거대한 규모의 전차대와 충돌했다. 붉은군대는 22,600대의 전차를 보유했음은 물론 기술적으로 진보된 전차의 개발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는 이상적인 공격, 방어, 기동력을 가진 T-34였다. 서방연합군과의 승리에 우쭐했던 독일전차장교들에게 소련전차는 충격이었다. 1대1 대결로는 독일전차가 뒤졌지만 소련전차병들은 기술적 우위를 승리로 바꿀 수 있는 전술적 능력이 부족했다.
쿠르스크전투에서는 독일이 기술적 열세를 따라잡았을 뿐 아니라 앞섰다. 그 가운데 티거가 있었다. 수량은 128대 뿐이었지만 당황한 소련의 전투보고서가 다른 독일전차를 티거로 오인하는 일이 벌어졌다. 8.8㎝ 주포와 100㎜ 장갑을 가진 57톤의 괴수는 소련전차병에게 악몽이었다. T-34/76의 전면장갑을 2,000m가 넘는 거리에서 관통할 수 있었고 소련의 76.2㎜포는 근거리에서도 티거 정면장갑 격파가 어려웠다. 티거의 측면이나 후면은 격파할 수 있었지만 쿠르스크에서 전차전은 장거리에서 정면대결로 벌어졌다. 티거의 출현은 소련전차병들에게 심리적 충격과 공황을 일으켰다. 7월 12일 하루동안 티거 15대가 적전차 120대를 격파했다. 소련전차병들이 티거를 보고 T-34에서 뛰어내려 달아난 사건도 벌어졌다.
전진하는 제654중전차구축대대의 페르디난트
판터는 아직 실전투입 준비가 되지 못했다. 히틀러는 전차전문가 구데리안과 군수상 슈페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실전투입을 명령했다. 그뿐 아니라 이 기적의 병기 투입을 위해 작전을 몇주 연기하기 까지했다. 이 전차는 기술적 결함으로 적과 싸워보지도 못했다. 7월 9일 당초의 200대 중 19대만 가동 중이었고 13일에는 43대가 됐다. 하지만 얼마돼지 않는 가동 판터는 소련전차 268대를 격파했다. 이 숫자는 제48장갑군단 나머지 모든 전차와 돌격포의 전과와 비슷했다.
판터는 기계적 문제점을 극복한 후 뛰어난 병기가 됐다. 많은 전사가들이 판터를 제2차대전 최우수전차로 인정한다. 티거가 중(heavy) 전차인데 대해 중(medium)전차로 분류되지만 정면장갑은 티거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양 전차는 같은 엔진을 사용했는데 더 가벼워서 독일전차 중 가장 빨랐다. 형태는 T-34를 참조한 것이지만 여러면에서 압도적 성능을 발휘했다. 가장 뛰어난 것은 티거의 8.8㎝포보다도 우수한 장포신 7.5㎝포였다. T-34의 정면장갑을 2,000m가 넘는 거리에서 쉽게 관통했고 자신의 정면장갑은 근거리에서도 T-34의 76.2㎜포로 격파가 어려웠다. 판터는 소련전차의 측면장갑을 4,000m에서 관통했다. 위압적인 형태의 티거처럼 전설을 남기지 못했지만 사실상 더 효과적인 전차였다.
페르디난트구축전차는 쿠르스크에서 독일기갑부대 붕괴의 상징처럼 말해진다. 68톤의 강철괴수는 거대한 것을 선호한 독일의 잘못된 설계라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진실과 신화는 구분해야한다. 페르디난트구축전차는 설계자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이름을 딴 임시적 병기였다. 포르쉐는 중(重)전차개발 경쟁에서 헨셀에게 패했다. 그래서 남은 90개의 차대를 본격적 구축전차가 개발될 때까지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주무장인 71구경 8.8㎝포는 T-34의 정면장갑을 3,500m에서 관통가능했으며 후에 유명한 쾨니히스 티거에 장비됐다. 방어력은 소련전차포에 불사신이었다. 이런 우수성에도 임시적 개발의 한계로 고장이 빈발했고 소수만 생산돼서 부품이 부족하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페르디난트는 첫 전투에서 설계목적인 수비가 아닌 공격 최일선에 나섰다. 거대한 차체는 곧 집중포격을 받았지만 끄덕없었다. 하지만 보병은 물론 다른 차량들은 동반이 불가능해졌고 페르디난트는 고립돼서 폭약을 든 적 육박공격조에 포위됐다. 기관총이 없었으므로 보병 개개인에게 거대한 포를 발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기 위해서 차체를 움직여야 했다. 반복되는 그런 괴이한 광경에서 페르디난트가 잘못된 설계라는 말이 나오게됐다. 하지만 설계가 아닌 사용방법의 문제였다. 구축전차로 운용시 전과는 뛰어났다. 주포의 위력은 유례없이 강력했다. 어느날 아침 2,000~3,000m 거리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지나던 소련전차 22대가 차례로 파괴됐다. 7월 5일부터 27일까지 페르디난트를 장비한 제653중전차구축대대는 13대를 잃고 320대를 격파했다. 임시적으로 개발된 페르디난트는 잘못된 설계가 아니었다.
독일기갑부대의 주력전차들
치타델레작전시 대부분의 독일 기갑부대는 IV호와 생산이 중단된 III호 전차로 구성됐다. 최신형 IV호전차의 48구경 7.5㎝포는 1,000m에서 T-34 정면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지만 T-34는 IV호전차의 정면장갑을 격파하기 위해 접근해야 했다. 개량된 독일군 주력전차는 동시기의 소련 주력전차보다 우수했다.
장포신 Ⅳ호전차는 상당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IV호전차의 실루엣은 티거와 비슷했으므로 소련군은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다. 쿠르스크에서 첫교전 후 소련측은 T-34가 근접하면 티거를 격파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포로호로프카에서 로트미스트로프는 전차병들에게 적이 유리한 장거리전투를 피하기 위해 최고속도로 거리를 좁히라고 명령했다. 티거의 전면장갑은 근거리에서도 격파가 어려웠는데 소련전차들이 자발적으로 티거의 포화에 노출하는 치명적인 실책이 됐다. 티거로 오인된 IV호전차 부대에도 소련전차의 정면돌격은 정확한 사격기회가 됐다. 소련전차의 돌격은 반복해서 무질서한 혼란으로 끝났다.
1941년 여름에 T-34는 독일전차병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후 소련은 별다른 기술적 진보가 없었고 쿠르스크전투시 소련전차는 질적인 면에서 답보상태였다. 성능이 개선된 T-34/85는 아직 개발중이었다. 반면에 독일은 철저히 전차부대를 개편했고 1943년 여름에 극한의 성능을 발휘하는 새로운 전차로 붉은군대를 놀라게했다.
소련군은 자주포와 대전차포 분야에서 막 개발한 소수의 신형 SU-152를 보유했디. 고정식으로 장착된 152㎜포는 근접거리에서 독일전차에 상당한 위협이었다. 하지만 평원지대에서는 고속전차포를 가진 독일전차에게 대항하기 힘들었고 포탄과 장약이 분리된 주포는 발사속도가 느렸다. 대부분 SU-152는 잘 위장돼서 배치됐고 승리를 위해 첫발을 명중시켜야 했다. 하지만 소련전차 조준기의 성능은 독일제 차이스처럼 고도로 정밀하지 못했다. 전차전에서 첫발 명중률은 결정적이었고 그것이 독일전차의 장점이었다. 쿠르스크전투 첫날 독일전차의 피해 원인은 대부분 지뢰였고 그후에는 포였다. 포병은 소련의 최선호병기로서 최근 러시아 기록은 쿠르스크전투에서 진짜영웅은 포병이었다고 바르게 표현하고 있다.
지상공격기
쿠르스크전투에서는 처음으로 전차에 대한 항공기의 대규모 공격이 실시됐다. 가장 큰 위협은 주익에 3.7㎝포를 각 1문 장비한 Ju 87G였다. 가장 큰 전과를 올린 StG 2 제1비행대장 한스 울리히 루델 대위는 종전시까지 총 519대를 격파해서 독일 최고훈장을 받았다. 또한 루프트바페는 3㎝기관포를 장비한 Hs 129를 운용했다. 7월 8일 벨고로드북쪽 숲에서 소련전차여단이 제2SS장갑군단과 제3장갑군단의 틈으로 침투했다. 육군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을 때 각 16기로 구성된 Hs 129 4개 중대가 출격해서 전차 84대를 격파하고 21대에 손상을 입혔다. 루프트바페만으로 소련전차의 위협을 격퇴한 사건이었다.
소련에서는 Il-2 슈트르모빅을 지상공격기로 대량 사용했다. 제2차대전 중 가장 대량생산된 기종이기도 했다. 이 기종은 23㎜기관포, 성형작약폭탄, 로켓을 전차공격에 사용했다. 엄청난 탄약 소모량은 전과와 비례하지 못하고 소수의 독일전차만 격파했다. 1941년 이래 소련공군이 독일육군저지에 거둔 역할은 미미했다. 쿠르스크전투에서 독일의 기술이 소련을 앞지름에 따라 기술적 우위를 누려온 소련전차부대는 충격을 받았다.
전차운용전술
붉은군대의 공식기록에 의하면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체 전쟁기긴 중 96,500대의 전차를 상실했다. 물량전을 펼친 소련 지휘부에게 전차는 소모품이었고 인력이 그에 종속된 역할을 했다. 자원이 항상 부족했던 독일은 전혀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구데리안은 항상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우수한 전술을 통한 우위확립을 위해 기동전의 전차 사용법을 개발했다.
쿠르스크 전투 시 판터 극초기형, 전차장 전망탑과 포탄적재공이 특징이다.
전차포탑은 양군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43년에 소련이 포탑을 '장갑화된 포 발사대'라고 생각한 반면에 독일은 '전차를 통제하는 두뇌'라고 생각했다. 양측의 크게 다른 점은 독일전차장에게 부여된 우월한 지위였다. 독일전차장에게는 기술적 임무가 없었다. 독일전차들이 3명 포탑을 운용하는데 T-34/76은 2명이었다. 전투 중에 포수 역할도 해야하는 소련전차장은 바빴다. 그는 주변을 살펴야하고 부하들에게 명령해야 했으며 중대장이라면 다른 전차도 지휘했고 포도 발사해야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소련전차장은 어떤 임무도 몰입할 수 없었다. 독일전차에서 포수는 사격에 전념할 수 있고 전차장은 포수에게 목표를 지시하는 등의 전술적 임무에만 집중했다. 독일군 기록에서 소련전차의 사격이 형편없다고 한 이유이다. 이런 이유들과 우수한 포, 조준경이 결합한 독일전차는 가장 결정적인 초탄명중율이 높았다.
독일기갑부대의 아버지 구데리안 상급대장이 제1차대전시 통신병과였던 것은 중요하다. 그는 무전기를 장비해야만 개개 전차들이 모여서 작전 혹은 더나가 전술장비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중대장급 전차까지만 무전기를 장비하고 있었다. 상황이 갑자기 변해도 빠르고 유연하게 전달할 방법이 없었던 소련전차부대는 사전계획에 의해서만 움직였다. 결과는 재앙이었다. 집중된 소련전차부대는 준비된 독일군 화망으로 유도됐다. 전차전이 벌어지면 항상 독일전차중대장은 소련중대장전차에 포격을 집중했고 지휘관이 사라진 소련전차부대는 핸들없는 자동차였다.
임무형 전술
독일군이 유연한 임무형 전술을 사용한데 대해 소련군은 사전에 세밀한 부분까지 명령을 받고 움직였다. 독일군에게 허용된 행동과 판단의 재량은 프로호로프카 같은 대혼란 속에서 유용했다. 7월 12일 양군의 고위지휘부는 일시적으로 통제능력을 상실했고 전차전은 하급 지휘관의 지휘아래 벌어졌다. 자율적 작전을 하도록 훈련된 독일전차장교와 하사관들에게 알맞는 상황이었다.
전차부대의 장거리 통신용인 지휘전차. 좌측 전차병은 소매에 전차육박격파장을 달고있다.
독일과 소련의 임무부여방식은 매우 달랐다. 붉은군대는 기존의 조직에 독립부대 -자주포연대, 전차여단, 포병사단 등- 가 지원하는 구조였다. 이를 통해 소련지휘관은 특히 포병에서 대규모 조직을 운용할 수 있었다. 사전에 준비된 돌파공격시에는 효과적이지만 전투가 계획과 달라지고 유동적이 되면 삐걱거렸다. 반면에 독일사단은 조직 내에 협동작전에 필요한 병과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여러병과의 장교들은 서로 잘알고 협동작전에 익숙했으므로 붉은군대가 가진 문제점은 발생하지 않았다.
스탈린 통치기간 중 소련군은 인간의 능력을 경시하고 물량에 의존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짧은훈련만 마치고 전투에 투입됐다. 목표가 달성 된다면 피해는 걱정하지 않았다. 훈련수준이 매우 낮은 병사를 전장에 투입하는 것이 독일군에게는 놀라움이었다. 25시간이 필요한 전차 운전병 교육은 1942년말까지 흔히 5~10시간만 실시됐다. 전쟁 기간 중 소련의 업적 중 하나는 전차의 대량생산이었다. 부정적 측면으로는 전차생산속도가 승무원과 장교훈련 속도보다 빨랐다. 그 결과 서툰작전과 대책없이 높은 피해가 반복됐다.
국방군은 수적열세를 보완하기 위해 훈련의 질에 대한 우선순위가 높았다. 하위조직의 능력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 붉은군대와 달리 피해는 즉시 보충이 불가능했다. 부대는 거의 소모될 때까지 전선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전투력이 최소한도로 내려갔을 때만 후퇴해서 보충됐다. 통합훈련으로 이들이 필요한 조직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다시 전선으로 보내졌다. 전쟁후기에는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못했지만 '훈련을 통한 질의 향상'이라는 양군 사이의 시각 차이는 전차 같은 정예부대에는 결정적이었다. 1년전의 서방연합군처럼 1941년에 붉은군대는 대규모 전차부대를 운용하면서도 조직적인 독일전차부대를 당하지 못했다. 붉은군대 지휘관들은 프랑스 전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소련전차의 우수성을 확신해서 그 결과를 경시한 걸로 보인다. 1941년 몇달간 20,500대의 전차를 상실한 충격은 컸다.
그 후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보여준 것처럼 소련전차전술은 개선됐다. 하지만 만족감의 환상에서 깨어나는 사건이 곧 벌어졌다. 소련전차군은 서쪽으로 진격하다가 폰 만슈타인에게 허를 찔렸고 함정에 빠졌다. 소련군의 피해는 스탈린그라드 독일군 피해보다 훨씬 높았다. 그 후 소련군은 전차부대의 재편성을 단행했고 대규모 독립 전차, 기계화군단과 전차여단, 전차연대의 지원을 받는 전차군을 편성했다.
야지를 돌파하는 기갑척탄병의 Sd. kfz. 251. 소련에는 이런 병기가 없었다.
가장 하위 통합전술제대인 기갑사단은 독일전차부대 전술 성공의 열쇠였다. 기갑사단의 지휘는 최대한의 유연성과 독립성이 요구됐다. 스타브카는 그런 실험의 위험을 피하려 전차사단을 편성하지 않은 걸로 보인다. 소련전차군단 조직은 동질성에서 독일기갑사단과 달랐다. 다른 병종들이 통합되지 못하고 각각 싸웠다. 결정적으로는 기계화보병이 결여됐다. 소련은 서방연합국이 제공해준 수십만대의 트럭을 수송에 사용하고 있었지만 독일이 성공적으로 사용한 보병용 반궤도장갑차는 생산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정적 돌파시기에 포화에 저지된 보병이 수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대착오적인 기병돌격처럼 보병의 지원을 받지 못한 소련전차부대의 잦은 돌격은 프로호로프카에서 피해의 알려지지 않은 원인이었다.
대조적으로 독일기갑척탄병은 공격시 신속하게 수반해서 전차를 보호했다. 독일은 기갑전투에서 중요한 중하급 장교 수준에서 전쟁 끝까지 우세했다. 그런 기술적 우수성은 계속 적의 수적 우세를 상쇄시켰다. 최근 러시아의 쿠르스크전투에 대한 저술조차 반드시 소련전쟁기술의 성공이라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대조국전쟁사 개정판은 냉정하게 '2년간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소련 지휘관, 참모, 병사들이 아직 전투에 필요한 능력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소련군 전투전술은 일년 후인 1944년 여름이 되서야 향상됐다. 하지만 전쟁의 승패가 결정된 후에 너무 늦은 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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