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cla in love - 우리 제발 이대로
출처: 여성시대 선바람
예전에 살던 집에서 갑자기 싱크대 수도꼭지가 고장이 난 적이 있었다.
밥을 하려고 물을 트는데 여기저기 사방으로 물이 튀어버렸다고.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오는 가족들 마다 한명씩 붙잡고 누가 물어보기도 전에 저리되버린 수도꼭지의 모양새를 일일이 설명했다.
그래서 내가 테이프로 저렇게 꽁꽁 싸맸어야.
할머니 손 끝에 가리켜진 수도꼭지는 청록색 테이프로 똘똘 감겨져있었다.
아빠는 늘 그랫듯 한번 시선을 흘낏 하는걸로 답을 대신했고 엄마는 낙담했다.
어머니 사람을 불렀어야죠.
엄마는 할머니가 힘껏 동여매놓은 테이프를 뜯어보려다가 결국 더 지저분해진 수도꼭지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워쩐다냐 우선은 밥을 해야하는디.......
할머니는 어떻게든 해결해보려던 자신의 방법이 못내 멋쩍었는지 쪼그라든 손으로 수도꼭지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빠의 무신경한 시선이, 엄마의 잠깐 스쳐지나간 한숨이.
그리고 거기에 한층 더 굽어진 듯 한 할머니 뒷모습이 그랬다.
바로 다음날 수도꼭지는 고쳐졌다.
이제 제대로 나올 곳에서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덕분에 더더욱 볼품이 없어져버린 청록색테이프는
온통 하얀색인 주방에 갑자기 튀어나온 모난 이끼같았다.
얼마나 꽁꽁 싸멨는지 테이프는 뜯어나가는 소리부터가 커다란 마찰음을 냈다.
매끄러웠던 수도꼭지에는 본드가 잔여물마냥 덕지덕지 남아있었다.
정말 딱 손 네 마디 만한 면적이었는데도 본드는 잘 지워지지 않았다.
수세미로 닦아보고, 로션도 묻혀보고 없는 손톱으로도 긁어보기까지한 할머니의 노고는 소용이없었다.
희뿌옇게 더 퍼져가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찐덕한 본드위에 손 때와 물 때까지 묻어 더욱 지져분해진 수도꼭지를 엄마는 아예 새걸로 바꿔버렸다.
옅게 긁힌 스크래치 하나 없이 매끄러운 새 수도꼭지를 설치하는 날,
할머니는 전처럼 쪼그라든 손으로 수도꼭지를 만지작 거리지않았다.
대신에 아무말 하지않고 매끄러운 수도꼭지를 한참동안 바라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날,
엄마가 그렇게 말려도 집에 있으면 뭐하냐며 하나둘씩 모아다가 팔았던 페지를 싹 다 내다버렸다.
다용도실에 늘 쌓여있는 박스며 찌그러든 냄비가 없어지자 엄마는 뭔일이냐며 좋아했다.
할머니에게 깔끔하니 얼마나 보기좋냐며 이제 편하게좀 사시라는 말도 했다.
할머니가 페지를 줍지않는건 나도 내심 바란일이었다.
그런데 이 텅 비어버린 다용도실과 그 것을 등지고 앉아있는 할머니의 모습은 이상하게 내 마음을 더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매끄럽고 광이나는 새 것, 깔끔한 다용도실, 새 수도꼭지.
모르겠다. 다 빛나보이는 그 사이에서 할머니는 왜이렇게 외로워보였는지.
아니 어쩌면 알고싶어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 또한 불편한 마음을 어느샌가 잊어버린 방관자였으므로.
그런 내가 고작 했던 말이라고는 이제 내 용돈은 누가주나 라는 괜한 능청과 함께,
힘 없는 할머니 다리만 열심히 주물러댔을 뿐이었다.
일년이 지난 지금도 할머니를 생각하거나, 가끔 길을가다 멈칫 서게 되는 것들,
그러니까 대부분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
구겨진 청록색테이프, 본드가 묻어 희뿌애진 수도꼭지, 낡아 찢어진 박스, 밑바닥이 다 타버린 냄비등이 불쑥불쑥 튀어오를때가 있다.
그러면 마음 한켠이 씁쓸해져 그리워지다 또 한편으로는 내 마음을 채우고 있는게 이런 것들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래고 바래 빛나지않아도 순간순간의 자국들이 켜켜이 묻어 있는게 좋다.
깔끔하게 잘 정렬되있어 멋드러진것보다는, 조금은 너저분해도 편해 보이고 싶다.
사람도,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는 내 삶도, 그리고 내 자신까지.
- 이제 내일이면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딱 일년되는 날인데,
정말 울고불고했던 그 날도 시간이 지나니까 되게 멀게만 느껴지네ㅎㅎ
긴 글 읽어준 여시들 고마워 ^-^
첫댓글 여시야 글이 너무 이쁘고 멋잇다..
아..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질 않을 거 같아. 그래도 여시만큼 할머니 생각해 주던 사람 없을거야 잘이겨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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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6.15 20:17
왜에에에 나를 울려ㅠㅠㅠ 아 정말ㅠㅠㅠㅠㅠ
ㅠㅠ나도 할머니랑 같이 사는데... 정말, 같은 상황을 겪은 것도 아닌데 왜이리 공감가는지ㅠㅠㅠ가슴이 먹먹하다ㅠㅠ 솔직해서 더 그런 거 같아. 정말 잘봤어ㅠㅠ 고마워 여시!
여시 글 진짜 좋다...ㅜㅜ처음부터 끝까지 하나 하나 다 곱씹으며 읽었어...ㅡ♥
아이고ㅠㅠ우리 할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우리 할머니 손이랑 할머니 냄새 목소리 아 눈물나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