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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김준이란 인물에 대해
1258년 3월 최씨 무신정권의 4대 계승자 최의가 유경, 김인준, 임연 등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고려 무신정권은 전환기를 맞는다. 60여 년간 지속되던 최씨 일가의 권력 독점이 종결되고
형식적이나마 정권이 왕에게 돌아가면서 무신정권은 말기적 경향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80년 이상 지속되던 무신정권의 틀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실세로 등장한 유경, 김인준 등이 여전히 무신정권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무신정권은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으로 이어지던 제1기 형성기와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로 세습된 제2기 심화기를 지나 제3기 해체기로 접어든 것이다.제3기
무신정권을 주도한 사람은 유경과 김인준이었다. 물론 초기에는 대사성으로 있던
유경이 제1등 공신에 올랐고 별장 출신인 김인준은 그 아래 있었다.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난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김인준의 힘이 강해졌고 결국 1260년
6월에 공신 1위였던 유경이 제5위로 전락하고 김인준이 제1위로 되면서 정권은 김인준의
차지가 되었다.김인준은 최충헌의 노비 김윤성의 아들이다. 김윤성에게는 인준과 승준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인준은 기골이 장대하고 궁술에 능한 인물이었다. 최이의
측근 박송비와 송길유는 김인준의
이 같은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최이에게 그를 추천하였다. 그 후부터 김인준은 최이의
충실한 심복으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김인준이 최이의 애첩 안심과 간통하는 바람에 고성으로 유배되는 처지가 된다,
그는 고성에서 수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다시 최이의 부름을 받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개경으로 돌아온 그는 최이의 서자 최항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리고 최이가 후계자를
결정할 때 최항을 적극 추천하였다. 이 공로로 최항이 권좌에 오른 후 장군 바로 아래
직위인 별장에 임명된다.
그러나 최항이 죽고 그의 아들 최의가 권력을 세습한 후에는 찬밥신세가 된다. 최의는
최양백, 유능 등을 신임하고 김인준은 멀리 했던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인준은
1258년 6월 유경, 박송비 등과 모의하여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왕에게 넘겨준다.
이렇게 해서 최씨 무신정권을 몰락시킨 김인준은 장군직에 제수되고 위사공신 칭호도 받는다
. 하지만 그의 공훈은 제2위였다. 대사성으로 있던 유경이 일등공신으로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은 그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최의 제거를 실질적으로 주도했고 무장 세력을
움직일 힘도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그는 1260년에 유경을 5등
공신으로 밀어내고 일등공신에 오르게 된다.
이때부터 이름도 김준으로 개명한다. 또한 그의 아우 김승준도 권신의 반열에 끼면서
이름을 김충으로 개명한다. 권력을 장악한 김준은 그 후 1264년에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군권 및 감찰권을 손아귀에 넣게 되고 1265년에는 문하시중에 오르면서 동시에 해양후에
책봉된다.
실로 최씨 무신정권의 권력을 능가하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정사의
결정권은 왕에게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곧잘 원종과 팽팽한 의견대립을 보여야 했다. 특히
개경환도 문제에서는 정치 생명을 건 한판 승부를 예고하고 있었다.
원종은 태자시절에 몽고를 방문한 이후 줄곧 친몽 정책을 펴며 몽고의 요구대로 적극적으로
개경환도를 추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준은 개경환도 이후에 몽고의 입김이 강해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입지가 좁아진다는 판단에 따라 되도록 개경환도를 늦추고 있었다.
하지만 김준의 그 같은 계획에도 한계는 있었다. 이미 조정에 대한 몽고의 압력이 극도에 달해
있었고 조정 대신들 역시 태반이 친몽 세력으로 교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의를 제거한 직후 자신이 직접 몽고에게 출륙환도를 약속한 마당이기에 강화도를
고수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게 환도 문제를 놓고 원종과 치열한 대립을 하고 있는 가운데
원에서 그와 아우 김충에 대한 호출명령이 떨어졌다.
쿠빌라이는 양자강을 버팀목으로 삼고 끝까지 항전하고 있던 남송을 몰락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 중이었고 고려에 대해서도 송나라 공략을 위한 원군을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김준과 김충은 바로 그 고려 원군을 이끌고 가야 할 입장이었다. 하지만 김준은 몽고에 입조할
생각이 없었다. 몽고 내부에는 고려에서 귀화한 세력이 많았는데, 그들은 대부분 고려의 무신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이 때문에 자칫하면 김준은 몽고 입조 중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굳이 몽고 입조를 감행할 그가 아니었다. 그는 차라리 자신의 입조 명령서를 들고 온 몽고 사신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원종에게 몽고 사신을 죽이고 다시 한 번 몽고와 항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원종은 그의 의견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때 장군 차송우가 그에게 원종을 제거하고 새로운 왕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내심 원종을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그런 건의를 받자 김준은 앞뒤 가리지 않고
단번에 국왕 폐립 모의를 세웠다. 김준은 우선 녹사 엄수안을 시켜 아우 김충에게 모의 사실을
통보했다. 그런데 엄수안은 오히려 김충을 설득하여 국왕 폐립 모의를 중지하도록 하였다.
이 바람에 김준은 하는 수 없이 병력을 이끌고 몽고에 입조했다가 다행히 별탈없이 돌아왔다.
그러나 몽고에서 돌아온 김준은 그 후부터 몽고사신을 지나치게 냉대하여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키는가 하면 걸핏하면 몽고사신을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곤 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원종은 드디어 김준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원종은 낭장 강윤소를 불러 김준
제거에 앞장설 인물을 물색했고 임연을 적임자로 삼았다. 그후 강윤소는 임연을 찾아가 원종의
뜻을 전하고 김준을 제거할 것을 종용했다.
임연은 한때 김준을 무척 따랐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임연을 김준의 양자라고 말할
정도였다. 임연은 최의를 죽일 때도 많은 공을 세웠고 김준과 함께 위사공신 칭호도 받았다.
또한 그 공으로 추밀원 부사에까지 올랐는데, 이때부터 김준과 틀어지기 시작했다. 김준은 권력을
독식하게 되자 정사를 너무 함부로 다루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임연은 그를 싫어했다.
원종도 임연이 김준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관계를 이용하여 김준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김준을 죽이라는 원종의 밀명을 받은 임연은 1269년 6월 환관 김경, 최은 등과 힘을 합쳐
김준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임연은 큰 몽둥이를 만들어 궤 속에 감추고 마치 대단한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꾸며서 궁중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그리고 거사일을 잡은 다음 김준이 입궐하기를 기다렸다.
거사일은 왕이 몽고사신을 영접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 날 김준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원종과 임연은 거사계획이 누설된 줄 알고 무척 당황하였다.
거사예정일 다음 날도 김준은 등청하지 않았다. 이에 원종은 대담하게도 김경을 시켜 왕명이라
하고 김준을 입궐토록 하였다. 그런데 그때 김준의 처족인 환관 박문기가 거사계획을 눈치 채고
김준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김준의 집으로 달려가던 도중 김준을 만났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호위병들이
너무 많아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김준이 입궐하자 환관 최은은 김준을 편전으로 안내하다가
그 앞에 이르자 다시 왕이 병중이라고 말하면서 정당으로 방향을 바꿨다. 이때 영초 김상이 몽둥이로
김준을 내려쳤다. 그리고 김준이 비명을 내지르자 다시 칼로 찔러 죽였다. 그 다음엔 김충이 내전으로
안내되었는데, 김충은 핏자국을 보고 모의를 눈치 채고 달아나려 하였다. 하지만 환관 김자정이 보낸
김자후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김준 형제가 피살됐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들의 추종자들이 합문으로 밀려들었다. 하지만 환관
김자정이 문을 닫고 김준 형제가 이미 죽었음을 선포하자 그들 역시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 임연은 야별초를 풀어서 김준의 자식들과 측근들을 잡아들여 살해하고 있었다. 이에 김준의
아들 김주가 도당들을 이끌고 항전했으나 야별초에게 밀려 쫓겨 가다가 결국 죽었다.
이렇게 하여 김준 시대는 끝이 나고 임연 시대가 도래했다. 그는 정권을 잡자 곧 교정별감에 올라
거사에 함께 한 김경, 최은 등을 죽이고 권력을 독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임연 역시 개경환도 문제로 원종과 부딪친다. 그러자 정권을 잡은지 5개월 만인 1269년
11월 조정 대신들과 의논하여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왕으로 세운다.
그리고 원종이 병으로 인하여 스스로 물러난 것처럼 조서를 꾸며 곽여필로 하여금 원나라에
다녀오도록 한다. 그런데 당시 원에 머물던 태자 심이 원종의 선위소식을 듣고 돌아오던 중에
정주의 관노로부터 임연이 원종을 폐위하였음을 전해 듣고 원 세조에게 고발하는 바람에 임연은
난처한 처지에 놓인다.
이 일로 쿠빌라이는 임연을 비롯한 원종, 안경공 창 등을 원나라로 소환하였다. 이에 임연은
재추들과 의논하여 먼저 원종을 복위시키고 자신은 병을 핑계로 하여 원나라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그의 아들 임유간이 원으로 떠났다. 임유간은 원에 도착하자 쿠빌라이로부터 직접 심문을
받았고 결국 임연이 원종을 폐위했음이 드러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임연은 각 지역에 야별초를 보내 백성들을 산성과 섬으로 이주시키고 몽고와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고민이 너무 지나쳤던 탓인지 그는 병으로 드러누웠고, 1270년
등창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임연이 사망하자 원종을 대신해 왕위를 지키고 있던 순안공 왕종은 임연의 둘째아들 임유무를
교정별감에 임명했다. 이때 원종은 임유간을 포박한 채 귀국길에 올라 있었다.
그는 강화도로 가지 않고 바로 개경으로 환도할 생각이었고, 이 소식을 들은 임유무는 월종의
개경환도를 막기 위해 야별초를 움직여 경상도 주민들을 섬과 산성으로 이주시키려 했다.
하지만 안찰사 최간과 동경부유수 주열, 판관 엄수안 등이 합의하여 경상도로 진출한 야별초를
모두 체포함으로써 이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그 후 원종이 고려에 당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임유무는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어가는 개성에 임박해 있었고 대세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한 홍문계와 송송례에
의해 임유무가 살해됨으로써 1백 년간 지속되던 무신정권시대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자겸과 묘청의 난 이후 정중부에 의해 의종이 살해되면서 시작된 무신정권은 고려왕실의
권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후 무신들에 의한 권력 독점으로 정치가 사라지고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고려사회는 민란과 반란 행렬에 휘말려 몰락으로 치닫는다.
그런 와중에도 최씨 무신정권으로 정치권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났던
문신들이 일부 등용되는 등 정치 회복의 기미가 보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무신정권은 여전히 일인 독재정치를 구축했고 그런 상황에서 북쪽에서 원이 일어나
내침을 감행하여 고려는 결국 몽고에 복속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몽고의 내정간섭으로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왕정이 회복되면서 고려는 급기야 몽고의 부마국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신들의 마지막 보루인 삼별초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삼별초의
항쟁은 오히려 몽고의 내정간섭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이후 고려사회는 약 백 년 동안
원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다. 무신정권의 독재적 권력이 결국 고려를 몰락으로 이끈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2003년 2월 ~ 2004년 8월에 걸쳐 KBS 1 채널에서 방송되었던 대하사극 '무인시대' 를
기억하시지요?
1170년 보현원에서 일어난 무신들의 정변으로 시작하여 1219년 최충헌의 죽음으로
마무리지어진 '무인시대' 의 여러 장면들과 거기서 등장한 인물들을 여러분들은 아마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붓을 든 문신 대신 집권한 칼을 든 무신들,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한 무신들간의 숨막히는
대결, 그 가운데서 펼쳐지는 여러가지 다양한 성격을 지닌 인물들의 이야기 ......
고려의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 무신정변은 1170년 의종 24년
일어났습니다.
당시는 918년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운 지 252년 후였고 1392년 공양왕이 폐위되어 고려가
망하기 222년 전이었습니다.
이처럼 시기적으로도 475년 고려의 역사에서 대략 중간 시점에서 일어난 이 무신정변으로
고려의 문벌귀족 중심 정치 체제는 붕괴하고 100년간에 걸친 무인정권시대가 열립니다.
고려 초기 광종 황제 ('제국의 아침' 에 등장한 황제) 시대에 과거제도가 시행되고 이후
성종대를 지나면서 고려는 유교 중심 문치(文治)주의를 지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문무신 모두 고려의 지배층을 이루기는 했으나 문신의 지위가 무신에 비해
높아졌습니다.
군 편제에서도 군의 최고 지휘관은 문신이 맡았고 무신은 단지 싸우는 기술을 가진
기술꾼 정도로 대우받았다고 합니다.
거란족의 대군을 무찌른 강감찬 장군이나 여진족과 싸워 동북 9성을 쌓은 윤관 장군, 그리고
묘청이 서경에서 봉기하자 진압군을 이끌었던 김부식은 모두 문과에 급제한 문신 출신
이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무신은 문신에 비해 낮은 대우를 받았으니 전시과(田柴科)체제에서
무신은 문신보다 낮은 품계에 해당되었습니다.
또한 무신은 제도적으로 정3품(정3품 상장군이 무신으로서는 최고의 품계)까지만 승진이
가능하여 재상(종2품 이상 관직자)의 반열에 들지 못했고 그리하여 재추회의
(고려 최고의 국정 회의,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추밀원의 추신으로 구성됨)에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문종 황제 시절을 절정으로 하여 번영을 누리던 고려 문벌귀족사회는 점차 그 모순과
문제점을 드러내어 지배층 내부에서의 갈등이 두드러지게 일어났습니다.
어린 헌종(문종의 손자)이 등극하자 계림공 희(문종의 아들)를 중심으로 한 황실세력과
이자의(이자연의 손자)를 중심으로 한 인주이씨 외척세력(여러 대에 걸쳐서 황실과
혼인관계를 맺음)과의 갈등이 벌어져 결국 이자의는 살해되고 계림공 희가 등극하니 그가
바로 숙종 황제입니다.
그리고 예종 황제는 한안인 등 신진관료세력을 등용하여 중히 쓰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종 황제가 승하하고 어린 인종 황제가 등극하자 예종의 장인이자 인종의 외조부인
이자겸은 한안인 등 신진세력을 제거하고 막강한 권력을 장악합니다.
게다가 이자겸은 두 딸을 외손자인 인종에게 시집보내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합니다.
급기야 이자겸은 한때 손을 잡았던 척준경이 그에게 등을 돌려 몰락하기에 이릅니다.
인종 대에 발생했던 소위 '이자겸의 난' 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개경 세력과 서경(평양)
세력 간의 대결)' 은 고려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드러내는 사례였습니다.
인종이 승하한 후 의종이 뒤를 이었고 의종은 자주 유흥을 위해 잔치와 시회를 열고
이궁과 정자 등을 지어 그곳에 문신들을 거느리고 놀러다녔습니다.
이러한 유연 행락(遊宴行樂) 속에서 무신들은 점심까지 굶어가며, 심지어는 비를 맞아가며
보초를 서기 마련이었고 여러 건축물을 짓는 공역에도 동원되었습니다.
문신들이 쏟아지는 비를 소재로 하여 편안히 시를 지으며 즐길때 무신들은 밖에서 그 비를
맞아가며 보초를 섰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에 전해집니다.
그리고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문신 김돈중(김부식의 아들)의 이야기와 늙은 무신
이소응의 뺨을 때린 문신 한뢰의 이야기는 문신이 무신을 천대하고 얕잡아보는 사회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례입니다.
아뭏든 이러한 문무신 간의 차별과 갈등 속에서 쌓이고 쌓인 무신들의 불만은 마침내
1170년 8월 보현원에서 터졌습니다.
'문신의 관을 쓴 자는 일개 서리라 할지라도 모조리 죽여서 그 씨를 남기지 말라' 는
무시무시한 구호를 외치고 다니면서 무신들과 군졸들은 닥치는 대로 문신들을 살해했다고
전해집니다.
경인년에 일어난 이 정변 이후 이의방(李義方) - 정중부(鄭仲夫) - 경대승(慶大升)
- 이의민(李義旼) 정권이 1170년부터 1196년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의민을 제거하여 집권한 최충헌,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최우(崔瑀 ; 최충헌의 아들),
최항(崔沆 ; 최충헌의 손자), 최의(崔誼 ; 최충헌의 증손자) 등의 집권자들...
최충헌 집권기는(1196-1219) 아시다시피 KBS 대하사극 '무인시대' 에서 소재로
다루어졌습니다. 기억나시죠?
최씨 정권은 4대 60여년간에 걸쳐 이어지다가 강화도 천도 이후 몽골의 압박과 사회, 경제적
피폐, 돌아선 민심 속에서 최의가 김준(金俊)과 유경(柳璥) 등에 의해 살해되어 최씨 무신
정권은 무너집니다.
그리고 김준이 정권을 잡았다가 임연(林衍)에게 제거되고 임연이 병사한 후 그 아들
임유무(林惟茂)가 아버지의 권력을 물려받았으나 그도 역시 원종의 명을 받은 송송례와
홍문계에 의해 살해됩니다.
이로써 100년간에 걸친 무신정권은 막을 내립니다.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무신집권자들은 개경환도를
거부하고 전쟁, 화친 양면 작전으로 몽골에 대응했습니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붕괴한 이후 고려 조정은 몽골과 화친하여 개경으로 환도했고
무신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는 이에 반발하여 고려조정과 몽골에 대항합니다.
이상 무신정변의 발생 배경과 무신정권의 성립, 붕괴 등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100년간의 무신정권 기간인만큼 이 시기에도 역시 여러가지 다양한 성격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져갔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고려인들의 면모를 '고려사 열전' 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유교적인 사관에서 씌어진 고려사 열전에 무신집권자들은 모두 반역열전에 실려
있습니다. 단 경대승만은 예외로 제신열전에 실려있습니다. 경대승은 고려 조정을 무신정변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복고의 뜻을 지니고 있었기에 반역열전에 실리지는 않았습니다.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김준, 임연, 임유무 등은 모두 반역열전에
실려있습니다.
자 이제 무신정권 시대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나러 여행을 떠나 보실까요?
이의방(?~1174)
정중부(1106~1179)
경대승(1154-1183)
이의민(?~1196)
최충헌(1149~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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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 편의 고려사 무인열전이군요 잘 봤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