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의 기도
다니 9,4ㄴ-10; 루카 6,36-38 / 사순 제2주간 월요일; 2025.3.17.
세상은 강자들이 약자들을 괴롭히는 죄 때문에 어지럽습니다. 약자들도 먹고 살기 위해서 또는 살아 남기 위해서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약한 이들에게 갑질을 해 대기 때문에 가장 힘 없는 약자들은 지옥스러운 삶을 삽니다. 이것이 세상의 죄라는 인간 현실의 본질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제2의 원죄 이래로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 왔습니다. 문명의 한계입니다. 복음 선포의 영역이기도 하지요.
세상은 언제까지나 세상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할까요? 또 이 세상의 죄는 어떻게 해야 없어질까요? 오늘의 말씀은 이 물음에 대한 성경의 답변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대속의 세례이면서 또한 중보의 기도입니다. 도저히 적대시할 수 없고 공존해서 살아야 하는 동족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노력과 그리고 죄를 저지른 자들도 이 노력에 동참하게 하려는 중개의 기도입니다. 다니엘 예언자가 그 노력과 기도의 선각자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 예언자는 동족이 걸어온 역사를 하느님 앞에서 회고하며 참회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조상들을 해방시켜 주신 후에 하느님과 그 백성으로서의 쌍무계약을 맺으셨는데,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성실하게 이끌어 주셨지만 조상과 동족들이 계약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율법을 정해 주셨고, 예언자들을 통해서는 그 법을 끊임없이 상기시키셨는데도 이스라엘은 그 법을 어기고 예언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이 점을 상기하면서 다니엘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는 뜻은 용서를 청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죄의 고백을 통한 하느님의 심판을 자청하면서 부디 자비로운 심판으로 다시금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를 새로이 하자는 청원입니다.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에는 계약이 맺어져 있으므로 그 계약 내용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준수하느냐에 따라 심판과 고백이 오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만, 하느님 백성 사이에서는 하느님의 법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를 연결 고리로 한 연대를 해야 하므로 서로 간에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야말로 대동소이(大同小異)에 바탕한 구동존이(求同存異)의 행동질서가 필요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받아들이며 서로 협동하고 서로 연대하는 공동체 윤리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고 우선입니다.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에는 심판과 고백의 관계가 성립하듯이, 하느님 백성과 하느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그 심판은 윤리적으로 단죄하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을 드러내는 사랑의 심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백성의 삶이 드러내는 하느님의 빛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감화를 받고 매력을 느껴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 백성을 통해 받아야 하는 감화와 느껴야 하는 매력, 그리고 이를 통한 회개야말로 고백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순 시기에 요청되는 회개의 내용은 세 가지로 모아집니다. 첫째, 하느님께 우리는 무엇을 고백할 것인가? 우리가 하느님의 법을 어긴 죄는 무엇인가? 둘째,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교회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서로 용서하고 어떻게 협동하며 누구와 먼저 연대할 것인가? 셋째, 교회 바깥의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 두 번째 회개의 내용으로 비추어질 것이고 되도록 감화와 매력을 줄 수 있도록 믿는 이들 안에서의 용서와 협동과 연대를 이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 윤리가 확립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미 그 조짐이 뚜렷이 보이듯이, 모래알 같이 흩어져 있는 신자들 사이에서는 신앙의 사사화(私事化) 현상과 개인주의 윤리가 자리잡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복신앙으로 귀결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사도직 활동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선한 지향으로 신앙인들이 함께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현존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보여주는 행실과 처신에 대해서는 그것이 윤리적 악이라면 우리가 물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단죄할 수 밖에 없고 저항할 수 밖에 없겠지만, 그저 하느님을 알지 못해서 나오는 처신이라면 단죄하기보다는 관용을 베푸는 것이 낫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게 해 주고 믿을 수 있을 만큼 동기를 제공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한 믿는 이들의 처신이 심판이라면 그 심판은 윤리적 심판이 아니라 사랑의 심판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중세 유럽 가톨릭 교회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교회가 세상 안에서 고립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신론자를 자처하게 되고 세상은 무신론 천지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세상에는 분명히 악이 판을 치고 있고 그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신기하고 또 이상한 일은 정작 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그게 악인지도 모르는 수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우리가 그 악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나 그 악으로 인해 희생당하고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 저항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것으로 그 악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악을 없애는 선이 믿는 이들 안에서 생겨나야 그 선을 빛의 도구로 해서 하느님께서 그 악을 없애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의 편에 선다 하더라도 우리 힘으로만 악을 없앨 수 없음을 겸손되이 인정하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의 도구로 쓰실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악을 직접 마주쳐서 대결하려고 들기보다 하느님을 가운데에 모시고 그분의 선에 충실하려고 집중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선이 점차로, 그러나 거역할 수 없이 커다란 위력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쯤해서 저는 개인적인 묵상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민족과 우리 교회의 역사를 알고 나서 저는 여느 천주교 신자들이 바쳐 오던 전통적인 묵주 기도의 신비 – 환희, 빛, 고통, 영광의 신비 - 대신에 ‘민족 파스카의 신비’로 바꾸어서 바쳐 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과 우리 교회를 이끄신 바를 잊지 않고 묵상함으로써 다가올 복음화의 미래에 재현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민족과 교회의 역사를 이끄신 뚜렷한 징표들은 아래 다섯 가지입니다.
- 하느님께서 한민족을 아시아의 동방으로 불러내심을 묵상합시다.
- 하느님께서 조선의 선비 이벽으로 하여금 천주교 교리를 통해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교회를 세우게 하심을 묵상합시다.
- 하느님께서 이벽의 동료 선비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시고 뜨거운 성사적 열망으로 놀라운 선교적 성과를 거두게 하셨음을 묵상합시다.
- 하느님께서 박해받던 천주교 신자들로 하여금 신앙의 자유를 지킬 용기와 기운을 주시어 전국에 교우촌을 세우게 하심을 묵상합시다.
- 하느님께서 ‘입술 배교자’와 치명자 후손들로 하여금 순교자를 현양하고 순교 정신을 계승하게 하심을 묵상합시다.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 예언자가 환시를 통해 하느님께 동족이 지은 죄를 참회하며 기도를 바친 지향을 따르자면, 지난 2백여 년 간에 우리 민족이 겪은 근현대사의 고난은 하느님을 믿겠다는 백성을 무참히 박해한 죄과에 따른 벌입니다. 첫 백 년의 박해는 조정과 유림이 저지른 죄의 역사였고, 두 번째 백 년의 고난은 박해에 대한 벌의 역사였습니다.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맹자의 말씀이나 역대기와 열왕기를 비롯한 구약 성경의 역사 신학에 비추어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와 분단, 동족 상잔의 전쟁, 독재와 가난이 그 벌의 내용이었습니다. 게다가 미국과 일본의 간섭과 간접 지배, 중국과 러시아의 견제가 민족의 통합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분단 후 7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부단히 노력한 덕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가까스로 이루어 냈지만, 민족 통합의 목표에는 아직도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친일 청산을 말끔하게 해 내지 못한 탓으로 극우 세력으로 변신한 친일파들이 대한민국의 앞날을 어지럽히고 있기도 합니다. 이들은 다른 민족과 국가의 극우 세력들이 자기 민족을 앞세우는 것과는 반대로 친일 매국적인 색채를 띠고 있어서 민족의 공동선에 대단히 해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과 추세마저도 우리가 함께 극복해야 할 민족의 죄입니다. 그들을 어떻게 해서든 설득해 내고 회개시켜서 함께 대동단결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북녘의 동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념이 다르고 살아온 세월이 달라도 그들은 적이 아니라 반만년 역사를 함께 해 온 핏줄입니다. 5천 년을 함께 살았고 겨우 70여 년만 따로 살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남녘의 극우 세력과 북녘의 동포들을 함께 아우를 기도를 바쳐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바라시는 섭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섭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평화와 공동 번영 그리고 진리의 빛을 그 내용으로 하는 홍익인간의 복음적 가치관으로 이 민족을 이끄신 하느님의 섭리와, 가톨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진리를 추구하던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우게 하신 기적입니다. 이에 비추어 보면, 성사와 말씀에 대한 열망으로 전국에 교우촌을 세우게 하신 기적이나 ‘입술 배교자’들과 치명자 후손들이 순교 정신을 계승하게 하신 기적은 가까운 미래에 또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로,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서 대동소이(大同小異)에 바탕한 구동존이(求同存異)의 행동질서가 필요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받아들이며 서로 협동하고 서로 연대하는 공동체 윤리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고 우선입니다.
교우 여러분!
불법적인 비상계엄령으로 국민을 적으로 돌리고 내란죄를 범한 윤석열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하는 헌법 심판이 임박한 지금에도, “아, 주님! 저희는 당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다니 9,5.10) 하고 동족의 죄를 고백하며 절절하게 하느님께 바친 다니엘의 기도는 우리 민족에게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의 진리는 자기자신의 구원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고, 더욱이 동족을 비롯한 이웃과 만민의 구원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신앙의 정통 노선을 회복하고, 천주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