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년"이라는 이명박과 한나라당의 논리는 <등 뒤의 비수>라는 말을 패러디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먹혀들어가 정권 장악에 성공한 것도 비슷합니다.
"
등 뒤의 비수"는 제1차 세계 대전 패전과 베르사이유 조약의 책임이 SPD를 비롯한 좌파 세력에 있다는 당시 독일 우익 세력의
논리입니다. "등 뒤의 비수" 논리는 간단한데, 전선에서 독일군은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권을 잡은 SPD가
열심히 싸우고 있는 독일군과 조국 독일을 버리고 연합군에 항복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반역자라는 것입니다.
보통 나치라 통칭하는 NSDAP 역시 그 주장을 되풀이하며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Republic) 자체를 부정하고
공격하게 됩니다. 우리로 치면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친북 좌파 빨갱이라는 주장과 별 차이없는 얘기인 셈입니다. 물론 "등 뒤의
비수"는 우익 세력이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철저히 왜곡되어 날조된 조작입니다.
제
1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독일군 참모총장은 1914년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 2개 군을 전멸에 가깝게 섬멸하여 영웅이 된
힌덴부르크 원수였으며, 역시 타넨베르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이 그대로 힌덴부르크 원수를 보좌하고 있었습니다[각주:1].
1918년 3월 ~ 5월, 루덴도르프가 입안한 작전 계획에 따라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가능한 전력을 모두 쥐어짜내어 마지막
총공세를 펼칩니다. 그러나 이 독일군의 마지막 춘계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더 이상 승산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비록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가 이탈하여 병력을 서부 전선으로 돌릴 수 있게 되었지만 1917년에
참전을 선언한 미국 군대가 유럽 전선에 대량 배치되기 시작했고,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은 바닥을 드러내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은 이 두 장군이 빌헬름 2세 황제에게 건의하여 이뤄진 것입니다. 또한, 전쟁 후반기에 사실상 독일 정부를
대신하고 있던 독일군 최고 사령부가 권력을 다시 민간 정부에 넘기기로 결정한 것도 이때입니다.
이리하여 등장한 사람이 막스 대공이지만, 그도 곧 SPD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정권을 넘기게 됩니다. 킬 수병들이 봉기를 일으키기 직전인 10월말에 군부가 그렇게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공화정 수립을 선포하는 필립 샤이데만. 1918년 11월 9일.
힌
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가 민간 정부, 특히 사회주의 세력인 SPD에 권력을 넘긴 것은 패전의 책임을 군부가 아닌 그들이 뒤집어
쓰게 하고 독일군을 온존히 보존하려는 책략이었습니다. SPD 지도부는 군부의 제안에 당황하며 고민했지만, 그들이 꿈꾸던 세상을
이루기 위해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또, 1918년 11월 3일의 킬 수병 봉기가 그러한 결정에 일정한 역할을
합니다., SPD는 러시아 볼세비키식 혁명을 거부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보기에 이제 갓 새로운 독일 공화국이 탄생하려는 순간
발생한 킬 수병 봉기가 러시아 볼세비키처럼 변질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미 그들 수병들은 러시아 볼세비키를 역할 모델로 삼고
있었습니다. 필립 샤이데만이 발코니에서 독일 공화국 수립을 외치는 사진이 남아 있는데, 러시아처럼 수병과 노동자들에게 주도권을
뺏기지 않기 위한 SPD의 고육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SPD는 멘세비키의 실패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11월 9일에 선포된 공화국이 바이마르 공화국입니다[각주:2].
당
시 독일 보수 세력이 그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전자로 의심되기는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종전때까지 동/서부 전선 어느 쪽에서도 독일 영토가 적군에 점령당하지 않았으며, 독일군은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폴란드와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고, 서부 전선에서도 벨기에와 북프랑스를 여전히 점령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독일 군부는 자신들은 전투에 진 적은 없지만, 전쟁에 졌다, 며 지금 식으로 얘기하면 물타기를 합니다. 일반
국민들은 이 점 때문에 독일군이 여전히 이기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항복한다고 하니 다수 대중이 항복을 받들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할 것입니다[각주:3].
특히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독일이 완전한 패전국이며, 전쟁 발발의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자 "등 뒤의 비수" 논리는 널리 퍼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믿을 수 없었으며, 타도의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독일 역사 최초의 민주 공화국 헌법이
수도 베를린이 아니라 바이마르(1848년 혁명의 계승을 상징한다고 했다면, 프랑크푸르트에서 헌법을 제정했을 것이다)에서 제정된
것도 이런 사정이 한 몫합니다.
결
국 독일 군부와 보수 우익 세력은 "등 뒤의 비수"라는 합작품을 만들어 실제 존재하지 않는 거짓 환상을 독일 국민에게 씌워
자신들의 책임을 모면하고 희생양을 만들어 일부러 분노를 SPD쪽으로 돌리게 하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 결과 바이마르 공화국은
처음부터 끊임없이 우익 세력의 반동 쿠데타 위협에 시달렸고[각주:4], SPD와 대립한 극좌 세력[각주:5]의 공격에도 시달리게 됩니다.
"
잃어버린 10년"의 논리도 "등 뒤의 비수"와 비슷합니다. 4년 간 계속된 광범위한 3개 전선에(알프스 산맥에서 이탈리아와
격돌)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여 내부에서 무너진 독일 군부가 패전 책임을 은폐한 것은 한나라당과 이명박은 1997년 11월
21일에 당시 김영삼 정권이 경제파탄으로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것을 감추고 지난 10년 경제가 어려웠으며 그 책임이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 있다고 하는 것이니까요. 마치 그 이전에 경제가 매우 안정 내지는 활황이었던 것처럼 얘기합니다. IMF
구제금융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닌데 말입니다. 1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런 경제구조를 만들었고, 결국
그 피해를 누가 입었는지에 대해서 한나라당과 이명박은 입을 다문 것입니다. 이명박 자신은 IMF 구제 금융이 떨어지기 전에
이라크 미수 채권으로 현대건설을 부도로 몰아갔던 장본인인데도 말입니다. 이명박과 비슷한 시기에 현대건설에 입사했던 이상백 전 미국 벡텔사 부사장은 "이명박 사장 시절 이라크와 계약을 잘못해 현대건설이 부도에 이르렀다"고 까기도 했죠.
1920년대 독일의 모습과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에서 똑같지 않으면서도 비슷함을 많이 느낍니다. "잃어버린 10년" 구호와 "등 뒤의 비수" 구호만이 아닙니다.
1920년대 독일은 좌익 정권에 대해 "등 뒤의 비수"라
며 전쟁의 패전 책임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집니다. 앞서 언급했던 독일군부는 겉으로는 그 논쟁에서 발을 빼고 조용히 입다물고
장교단 보존에만 전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뒤로는 "자유군단"(Frei Korps)같은 우익 계열의 준군사조직들에 대해 무기
및 인력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각주:6]
이런 의용군(용병대)의 사령관들은 전현직 영관급 장교들이 다수이며, 바이에른 주에 잠깐 세워졌던 사회주의 계열 정권(바이에른
소비에트라고 불림)을 무력으로 전복한 것도 정규군이 아니라 이 자유군단입니다. 군대의 정치 개입이란 측면은 당시 독일이
2008년 대한민국 군대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높습니다. 나치의 독재 정권 수립도 마지막 단계에서는 군대의 지지를
확보하면서 가능해 졌으니 말입니다.
1920년대 독일 좌우익 대립의 특징은 길거리 폭력 유혈 충돌입
니다. 1920년대 후반으로 가면 나치 돌격대와 SPD 및 KPD의 준군사조직과 거리 충돌을 거듭했습니다. 이 충돌들이 워낙
격해서 돌격대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져 히틀러는 점차 돌격대와 거리를 두게 되기도 했고, 베를린 경찰은 괴벨스와 베를린 지역당의
활동을 금지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우익계 준군사조직도 뭐 별반 차이는 없다고 보면 됩니다. 어차피 그럴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직들이니. 기관총과 소총으로 무장한 자유군단같은 조직도 좌익 세력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독일과 비슷한 듯 하지만 2008년 대한민국의 촛불 정국은 명확한 좌우익 대립은 아닙니다. 촛불을 든 자들 중에 좌익도 물론 있긴 합니다[각주:7].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죠. 대한민국에 좌익 세력이 그렇게 많은 줄은 CJD를 통해 처음 알았습니다. 강남촛불에는 당당히 박근혜 지지자임을 밝힌 분도 계시고, 골수 한나라당 지지자 였던 사람도 여럿 봤습니다. 박근혜와 한나라당이 좌익 세력의 온상이었던 모양입니다.
집권하는 그 날까지 "등 뒤의 비수"를 줄곧 되풀이 외치며, 바이마르의 반역자들을 처단하고, 볼세비키와 유대인 문제 해결을 외쳤던 히틀러는 결국 집권에 성공했고, 독재정권 수립 및 전쟁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당시 독일인들은 히틀러를 왜 지지했을까요. 그 문제는 아직도 서구
학계에서 뜨거운 논쟁거리입니다. 그 중 하나는 히틀러와 괴벨스의 천재 선전가들의 선전 활동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며,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 도피>에서 주장했던 책임을 지는 자유에 대한 부담감이라는 설도 있습니다[각주:8]. 대공황으로 몰락한 중산층과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중산층이 히틀러와 NSDAP를 지지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하여간 여러가지 학설들이 제시되었고, 숱한 논쟁이 있었지만 한동안은 속시원하게 풀리지 않을 문제이기도 합니다.[각주:9]
하지만 분명한 것은, "등 뒤의 비수" 논리가 틀렸건 틀리지 않았건, 히틀러의 과격한 주장들에 적극 지지를 했던 안했던[각주:10],
대다수 독일인들은 히틀러와 NSDAP가 하는 일을 최소한 방관했다으며, 지지했습니다. 히틀러와 NSDAP를 저지해야 할 좌익은
헛된 Marx의 5단계 역사 발전론에 매달려 상호 대립을 했다는 것입니다. 히틀러와 NSDAP를 쉽게 통제할 수 있다고 믿어
그의 손을 들어줬던 전통 보수파들은 좌익의 칼에 등을 찔리는 게 아니라 히틀러에게 찔립니다. 군대는 볼세비키 소련에 대해 그닥
적개심은 없었지만[각주:11],
독일 내에서 군대의 지위를 유지하고 독일 내 좌익 세력에 대해 더 반감이 많았습니다. 질서 유지를 최대 우선 사항으로 여기던
독일 경찰은 히틀러와 NSDAP와 심각한 대립 관계로까지 발전했었지만,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빠르게 접수되었고 궁극으로는
하인리히 힘러의 지배를 받으며 SS와 융합됩니다. 언론 및 노동조합들은 나치가 정권을 잡은 지 1년도 안되어 박살이 났고
정리됩니다.
아무래도 최대 수혜자는 대기업들
일 것입니다. I.G. 파르벤이나 크룹(Krupp)같은 대기업들 말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독일은 갈가리 찢기고 나치
관련자들이 처벌받는 와중에 대기업들은 여전히 살아남았고, 전쟁으로 꽤 돈도 벌었으니 말입니다. 당 이름에 포함된 "사회주의"란
말은 거의 폼에 가까웠던 히틀러는 대기업들에 해꼬지할 생각은 전혀 없던 인물입니다. 누구처럼 말입니다.
환상에 쫓아 히틀러를 지지했던 사람들 중에 수백만명이 전쟁으로
죽었습니다. 수백만명은 불구가 되었고, 수많은 고아가 양산되었습니다. 독일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만 수천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무의미한 환상에 눈이 멀어 지지를 보냈던 댓가요 결과입니다. 히틀러의 말처럼 천년 제국을 이루어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나라당에 표를 던졌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후회하고 있는지
여부는
모릅니다. 후회안할 수도 있죠. 한나라당이 서민과 나라를 위해 일을 할 것이라는 환상은 말 그대로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어설픈 나치들이지만, 21세기 상황에 맞게 절치부심 노력하는 무서운 녀석들이기도 합니다.
2008년 한국은 조금 다릅니다. 그때 독일처럼 전개되지는 않을 겁니다.
뉴라이트와 기득권 세력은 그걸 알기에 겉에 내세운 사람은 달라져도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굳히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나치는
겉으로 폭력으로 거칠게 독재 정권을 수립했지만, 2008년 한국의 지배 세력들과 뉴라이트는 그런 방식을 취하지는 않을 겁니다.
영화 <매트릭스>같은 체제를 만들 겁니다. 이명박은 그걸 수행하기 위한 앞잡이에 불과합니다. 이명박 정권이 필사적으로
YTN과 방송사들의 주식을 풀려는 이유는 이명박 정권 5년이 아니라 그보다 더 긴 시간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유재산으로 바뀌어
버리면 제 아무리 어떤 정권이라도 그걸 돌릴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결국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감시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2012년에 있을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국회에서 청소해야 할 것이며, 1920년~30년대 독일인들처럼 방관하고 있어서도 안됩니다. 그 피해는 그들에 돌아가지 않습니다. 방관을 했기 때문에, 그 방관의 책임에 따른 피해는 우리한테 물을 수 밖에 없으며, 우리한테 돌아갑니다.
물
론 이 두 사람이 실제로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수행한 역할은 별로 없습니다. 이 전투에서 실제 독일군의 작전 계획을 수립한 것은
막스 호프만 중령이라는 8군 사령부의 작전 참모였으며,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가 8군 사령부에 부임하기 전에 이미 8군은 호프만
중령의 작전 계획에 의거하여 기동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장군이 일개 중령의 작전 계획을 사후에 승인하고 그대로
밀어붙이도록 결정한 점은 최고 지휘관으로서 판단력과 결단력 부분에서 사줘야할 듯 싶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흐름에서 빗나가므로
생략합니다 [본문으로]
나중에 독일 공산당(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 KPD)가 됩니다. [본문으로]
나
치 돌격대 역시 군부의 비호를 받았으며, 1923년 히틀러가 뮌헨에서 쿠데타를 시도한 것도 당시 바이에른 지역 군대가 자신들을
지지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베르트 당시 대통령과 육군 참모총장 빌헬름 그뢰너 장군 간에 맺어진 조약 내용을
히틀러는 몰랐던 모양입니다 이 조약은 소위 "에베르트-그뢰너 협정"(Ebert-Groener pact)이라 불리는 것으로 군부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유지되도록 하되, SPD 정권은 군부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을 골자로 한 협졍입니다. [본문으로]
어떤 블로거는 지난 5월에 한총련이 모든 것을 주도한 것이라는 헛소리도 했지만, 경찰과 검찰 어디서도 한총련은 수사 대상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 허접데기가 알고 있는 내용을 검경이 모를리 없는데 말입니다 [본문으로]
참고로, 히틀러가 내세운 "지도자 원리"는 철저히 계층화된 구조에서 상급자에게는 철저한 복종을, 하급자에게는 철저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철저한 복종"이죠.
[본문으로]
코
민테른은 히틀러를 자본가들의 앞잡이로 간주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와 나치당의 재정 상태가 풀리기 시작하고 돈이 많이 들어온것은
1930년대 초이고, 그나마 크룹같은 대기업은 유보 상태였습니다. 코민테른의 그런 분석은 나치의 집권을 Marx의 5단계
발전론에 따라 거쳐야 할 단계로 여기게 했고, KPD는 이에 따라 나치보다 SPD를 더 견제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본문으로]
당
시 독일인들과 나치당원들 중에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완독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고참 당원들까지도.
구술인데다가 나치가 경영하는 출판사 직원들이 교정 작업을 꽤 했음에도 불구하고 문법도 엉망이고 연설체여서 읽기 힘든
책이었습니다. 과장을 좀 보태서 아마도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히틀러를 연구하기 위해 그 책을 완독한 학자들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본문으로]
그
다지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1920년대 독일군과 소련군은 많은 비밀군사교류를 했습니다. 베르사이유 조약으로 군비 확충에
어려움이 있었던 독일과 국제 무대에서 고립되어 있던 소련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무기 개발과 실험 등이 소련에서
행해진 사례가 많습니다. [본문으로]
첫댓글 역시 역사가 답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