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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일에 개봉한 외화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이 한국에서 신드롬을 부르고 있다. 흥행 돌풍 속에 종전의 뮤지컬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개봉 한 달이 안 된 1월 1일 관객 수 480만 명의 대기록을 세우며 <맘마미아>의 450만 명을 이미 뛰어넘었다. 지금 추세라면 500만 명을 가뿐히 넘어서는 것은 물론 꿈의 기록인 1000만 관객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열기다.
이 영화는 모든 배우가 현장에서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는 무비컬(movical)이다. 음악 훈련을 받은 전문 뮤지컬 배우가 아닌 할리우드 배우가 배역을 맡았기에 촬영 당시에는 뮤지컬 영화의 완성도와 흥행 가능성에 의문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는 노래·연기·연출 등 다양한 면에서 호평을 받았으며 전 세계적인 흥행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맘마미아> 외에는 무비컬이 흥행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한 한국에서도 대성공 을 거두고 있다.
상복도 터졌다. 1월 1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베벌리 힐튼 호텔 에서 열린 제70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 등 3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올해 최다 부문 수상 기록이다. 주인공 장발장 역의 휴 잭맨은 남우주연상을, 장발장의 양녀 코제트의 어머니인 미혼모 판틴 역의 앤 해서웨이는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골든 글로브 수상에 이어 아카데미상에서도 상당한 수확을 얻을 것으로 기대된다. 작품성과 흥행성 모두에서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영화의 열기에 힘입어 심지어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1862~1885)의 소설 완역본도 여러 번역본을 합쳐 20만 권이나 팔렸다. 출판계의 어려운 사정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박이다. 대부분의 독자는 어린 시절 장발장 등의 제목이 붙은 한 권짜리 아동 청소년용 책으로 이 작품을 봤을 것이다. 한국인에겐 학창시절 휴머니즘을 배우는 교재이기도 했다.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19년간 감옥살이를 하며 24601이라는 수인번호로 불렸던 가난한 농민 장발장이 교회 촛대를 훔쳤다가 이를 감싸준 신부님께 감동하면서 개과천선한 스토리로 이해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장발장이 성공해 시장까지 됐지만 경관 자베르가 법을 집행한다며 계속 괴롭히고, 양녀 코제트를 위해 사윗감 마리우스를 지하 하수도를 통해 구출하는 정도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5권으로 이뤄진 두툼한 완역본을 본 독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는 물론 장발장이 사윗감인 마리우스를 구하기 위해 지나간 파리 하수도의 상세한 정보와 파리 시내 건축물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완역본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신선한 충격이다.
<레미제라블>의 인기는 스포츠 분야로까지 번졌다. 영화와 뮤지컬에 나오는 곡을 지난 1월 6일 한국 피겨스케이팅 대회에서 김연아 선수가 프리스케이팅을 하면서 배경음악으로 쓴 것이다. 상업적으로 대단한 성공이다. 1990년대 후반 한 신문사가 국내에 처음 들어왔던 오리지널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큰 재미를 보지 못한 것과 대조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레미제라블>이 한국 사회에서 영화 흥행은 물론 정치적인 센세이션도 함께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에서는 <레미제라블> 이야기가 연일 오르내리면서 단연 화제다. 대통령 선거와 맞물려 낙선 후보를 지지했다가 좌절과 울분에 휩싸인 48%를 위한 영화, 위안과 희망의 영화라는 칭송이 쏟아진다.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봉기한 민중이 마침내 승리하는 영화 마지막 장면을 보며 카타르시스와 대리만족을 얻는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좌절과 울분을 풀어주는 영화는 물론 1980년 광주를 떠올리는 작품이라는 평가도 있다.
언론도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 신문 칼럼은 이 영화의 성공이 오늘 우리의 현실적·시대적 분위기와 어우러진 점도 한몫했음을 무시하지 못할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함께 영화를 본 지극히 보수적인 지인이 했다는 “이 영화, 일주일만 앞서 개봉했으면 대선판 뒤집어졌겠어!”라는 말을 옮기고 있다.
다른 칼럼은 빈부격차의 완화와 불평등 해소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1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며 당시 프랑스의 젊은 지식인들과 민중은 바리케이드를 쌓고 총칼로 맞섰지만 지금은 투표로 맞서는 게 다를 뿐이라고 적고 있다. 박근혜 당선인에게 비참한 사람들, 즉 ‘레미제라블’을 따뜻한 인간애로 보듬어 안고 함께 살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이라며 이 영화를 권하기도 한다.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 않으리라는 원작소설 서문에 작가 밝힌 집필 의도 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칼럼도 있다. 기자들도 자본주의를 새롭게 통찰해보는 글, 사실주의 고전 영화 열풍 뒤에는 막장 자본주의가 있다는 등 나름대로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다.
SNS에서는 억압된 사람을 위한 노래, 억압에 항거한 민중 혁명이라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며 리트윗되고 있다. 문제는 이 가운데는 3만 명이 학살당한 파리 코뮌의 현장, 피의 프랑스 대혁명을 이토록 생생하게 그린 작품은 없었다는 식의 잘못된 정보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처럼 잘못된 정보는 역사에 대한 곡해를 부를 수 있다. 이를 통해 판단력이 흐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에 등장한 역사적 상황의 정확한 이해는 역사와 세계를 보는 눈을 한층 높일 수 있게도 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에 나오는 배경과 빅토르 위고의 문학, 그리고 이를 완전히 변형시켜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만든 뮤지컬 <레미제라블>에 대해 알아보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815년부터 1832년 사이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도, 1871년의 파리 코뮌도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더구나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은 1862년에 발간됐다. 1871년 노동자 봉기인 파리 코뮌이 발생하기 9년 전에 나온 작품이다. 파리코뮌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노동계급의 사회주의혁명 예행연습이라고 한 것처럼 사회주의 색채가 농후한 무장봉기다. 하지만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파리코뮌을 다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마오쩌둥 선집을 읽고 있는 동상처럼 한 편의 블랙 코미디다.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바리케이트 장면이 나오는 봉기는 1832년 6월봉기다. 역사에선 별로 다뤄지지 않는 사건이다. 그 시대적 배경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프랑스혁명의 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알아야 한다. 프랑스혁명은 1789년부터 1871년까지 거의 100년 동안 진행된 장구한 혁명이었다. 혁명의 시작은 국왕 루이 16세가 통치하던 부르봉 왕가의 구체제(앙샹 레짐)를 무너뜨린 1789년의 대혁명이었다. 혁명파는 1791년 루이 16세를 폐위하고 이듬해 제1공화국(1792~1804)를 열지만 나폴레옹에 의해 제1제정(1804~1814)으로 대체된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영국-프로이센군에 패배하면서 왕정복고(1814~1830)가 이뤄져 부르봉 왕가의 샤를 10세가 즉위했다. 샤를 10세는 망명귀족을 불러들이고 몰수된 재산을 돌려주고 특권을 부활하는 등 반동정치를 하다 공화파가 주도한 7월혁명으로 쫓겨난다. 그의 후임으로 부르봉 왕가의 먼 친척인 오를레앙 공작 가문 출신 루이 필립이 입헌군주에 오른다. 프랑스의 왕이 아니라 프랑스인의 왕이라는 독특한 칭호에 ‘시민의 왕’ ‘바리케이트의 왕’ 등의 별명이 붙었다. 시민들이 거리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전투를 벌인 끝에 샤를 10세를 폐위시켰기 때문이다.
오를레앙 공작가문은 1660년 부르봉 왕가의 국왕인 루이 13세의 동생 필립 1세가 세운 공작 가문이다. 국왕의 동생으로부터 내려온 집안이다. 정치적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이 많았는지 5대 오르레앙 공작인 루이 필립 2세는 왕가의 방계 혈통인데도 대혁명에 열렬히 가담해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다. ‘평등한 필립’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그는 루이 16세의 처형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그도 자코뱅당이 국민공회가 주도한 공포정치(1792~1795) 기간에 기요틴에 목이 잘렸다.
하지만 그 후광으로 그의 아들 루이 필리프가 입헌군주가 됐다. 혁명세력에겐 대혁명에 동참한 인물의 아들이라는 점을 내세우고, 왕당파에겐 혈통을 앞세우면 모두를 만족시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외려 왕당파와 공화파 모두의 공격을 받았다. 왕당파는 정통 부르봉 왕가가 아니고 루이 16세의 처형을 주도한 인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공화파는 군주라는 이유로 그를 반대했다.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보나파르트주의자들도 루이 필리프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왕당파와 공화파 모두 그를 축출하려고 폭동을 일으켰다. 대신 입헌군주파라는 새로운 세력이 그를 옹호했다. 복고왕정이 토지를 가진 귀족 중심이었다면 루이 필리프는 신흥 산업자본가, 즉 부르주아의 정권이었다. 그는 영국식 산업혁명과 입헌군주를 추종했다. 그래서 방적공장 등 산업을 진흥시켰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새롭게 노동자 계급도 출현했다. 이들의 생활은 <레미제라블>에 묘사된 대로 비참했다.
프랑스는 이 다양한 세력 간의 정치투쟁과 사회적 변화 속에서 혼란에 빠졌다. 1831년 12월에는 먹고 살기 힘든 공장 노동자들이 생계형 봉기를 일으켰다가 진압됐으며 1832년 2월에는 왕당파들이 부르봉 왕가의 부활을 노리고 반란을 획책했지만 실패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32년 6월 5~6일 공화파가 파리에서 벌인 6월봉기가 바로 <레미제라블> 후반부의 배경이다. 그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그 유명한 바리케이드신은 바로 이 6월봉기 당시 빅토르 위고가 파리에서 직접 목격한 것을 바탕으로 창작했다. 위고는 몽파르나스 근처에서 산책에 나섰다가 우연히 바리케이트 사이에 갇혀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하지만 이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다. 생메리 수도원에서의 마지막 전투에서 진압군 측은 73명이 숨지고 344명이 부상했으며 봉기세력은 93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291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는 프랑스 역사에서 거의 취급도 되지 않을 정도의 작은 사건이다. 프랑스혁명은 부르봉왕가의 구체제를 무너뜨린 1789년의 대혁명과 복고왕정을 무너뜨리고 루이 필리프를 옹립해 자유주의적인 입헌체제를 만든 1830년의 7월혁명, 그리고 루이 필리프를 몰아내고 제2공화제를 만든 2월혁명 등이 주요 분수령이다. 그 밖에 1만~5만 명의 희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되는 파리코뮌처럼 실패한 봉기와 반란이 여럿 있다. 6월봉기는 실패한 작은 봉기의 하나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게다가 성격도 정치적인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혁명이라기보다 왕당파, 보나파르트파, 입헌군주파, 공화파 간의 정치 투쟁적 성격이 큰 무장폭동이었다. 역사가들은 이를 봉기라고 부르지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혁명 대의보다 정파간 대립이 앞선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레미제라블’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이 봉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를 소재로 다룬 문학 작품도 <레미제라블> 외에는 드물다. 참고로 이 6월봉기가 벌어지던 1832년 당시 카를 마르크스는 독일 트리어의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루이 필리프의 입헌왕정은 야심가 루이 나폴레옹 등이 주도한 1848년 2월혁명으로 무너지고 루이 필리프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다. 그해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으며 5월에는 런던으로 이주해 1867년 <자본론>을 출간했다.
왕당파 빅토로 위고는 봉기의 방관자였다.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유럽 각지를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 <레미제라블> 후반부의 시대적 배경으로 나오는 입헙군주 루이 필리프의 집권을 기념하는 시 ‘1830년 7월 이후’를 발표했을 정도다. 1830년 7월은 루이 필리프가 왕위에 오른 7월혁명이 발행했던 때다. 그는 입헌군주주의자 문학가로서 정치적인 시를 쓰면서 권력의 총애를 받았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6월봉기가 일어날 당시 위고는 바리케이트 앞에서 총을 들고 봉기한 젊은이들이 무너뜨리고자 했던 입헌왕조의 지지자이자 협력자였던 것이다. 1841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고 1845년에는 상원의원에도 뽑혔다.
하지만 루이 필리프의 7월왕정은 1848년 산업자본가와 노동자가 주도하는 공화파의 2월혁명으로 무너졌다. 루이 필리프는 영국으로 망명했고 제2공화정(1848~1852)이 들어섰다.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제2공화정의 대통령에 취임했다가 친위쿠데타로 황제에 오르면서 제2제정(1852~1870)의 막이 올랐다. 하지만 위고는 쿠데타를 벌인 루이 나폴레옹과 대립하면서 1870년 루이 나폴레옹이 몰락할 때까지 19년간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공화주의자로 변신했다. <레미제라블>은 입헌군주주의자에서 반쿠데타 공화주의자로 변신한 1862년 발표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위고가 세월이 흐른 뒤 6월봉기를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꾼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 모든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박애주의적인 세계관과 희망, 그리고 구원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레미제라블>은 특정 정파를 옹호한 정치 팸플릿이 아니고 인간 구원을 이야기하는 위대한 휴머니즘 문학작품 이다. 19세기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출간 1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 작품이 생명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런 위대한 문학은 작품으로 소화하고 소비해야지, 이를 정파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것은 공감을 얻기가 힘든 일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가운데 하나는 영화 <레미제라블>은 실상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영화버전이라는 점이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원작 소설을 무대에 맞게 각색하고 흥행성 있는 부분을 강조한 수정본이다. 게다가 원작에선 볼 수 없는 노래 가사를 새롭게 다듬어냈다. 무엇보다 거기에 가슴을 찡하게 하는 곡이 붙었다. 원작과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소설 <레미제라블>로 만든 영화가 20편이 넘는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그 바탕이 소설이라기보다 소설을 바탕으로 각색한 뮤지컬을 다시 영화에 담은 3차 저작물이다. 그 감동은 당연히 휴머니즘의 걸작 원작에서도 오지만 가장 큰 힘은 뮤지컬의 엄청난 매력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소설과는 느낌과 감동이 다른 새로운 문화상품으로 보는 게 맞다. 사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서구 최대의 문화상품 중 하나다. 1985년 영국 런던의 공연가인 웨스트엔드에서 뮤지컬로 초연된 이래 27년째 전 세계에서 장기공연 중이다. 42개국에서 21개 언어로 4만3000회 이상 공연된 작품이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관객수는 5500만 명이 넘는 글로벌 문화상품이다. 그 배경에는 뮤지컬 흥행의 마술사라는 캐머런 매킨토시가 있다.
영국인 뮤지컬 제작자인 캐머런 매킨토시는 1981년 <캐츠>, 1985년 <레미제라블>, 1986년 <오페라의 유령>, 1989년 <미스사이공>을 연이어 런던 이스트엔드와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 공전의 히트를 쳤다. 어디서 비롯됐는지 모르지만 흔히 이 네 작품을 세계 4대 뮤지컬로 부르는데 뮤지컬 관계자들은 대개 공감을 한다. 매킨토시는 이 4개의 히트작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무대에 올린 인물이다. 1980년대 이후 뉴욕 브로드웨이에선 웨스트엔드산 영국 뮤지컬들에 무대가 점령됐다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다.
제조업이 몰락한 대신에 지식기반산업으로 나라를 새롭게 부흥시킨 영국에서 <레미제라블>을 비롯한 매킨토시의 뮤지컬들은 영국 문화산업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으로 통했다. 문화산업 혁신과 예술 진흥에 대한 공로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매킨토시는 현재 재산이 3억~6억 파운드(약 5150억~1조300억원)에 이르는 문화부자다. 매킨토시는 이 뮤지컬 영화에도 공동제작자로 참여했으며 홍보를 위해 한국을 직접 찾았다.
독특한 것은 뮤지컬 <레미제라블> 오리지널은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프랑스 작사가인 알랭 부빌이 부빌이 작곡가 클로드미셸 쇤베르와 함께 만들어 1980년 9월 파리의 스포츠 행사장인 팔레드스포츠에서 처음 무대에 올렸다. 프랑스판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100회 넘게 공연하면서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대관 문제로 약 3개월 동안 막을 내렸다. 부빌은 런던에서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작품 <올리버 트위스트>를 ‘올리버!’라는 뮤지컬로 만들어져 흥행에 성공하는 걸 보고 프랑스 문학 작품으로 뮤지컬을 만들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매킨토시는 프랑스판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앨범을 1983년에야 뒤늦게 들었다. 처음엔 프랑스작품이라고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이내 흥행사 기질을 발휘해 영어판 제작에 들어갔다. 그 결과 프랑스가 자랑하는 문화콘텐트가 영국 문화산업의 간판 상품이 됐다. 1985년 10월 8일 런던 바비칸 극장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극장을 옮겨가며 아직도 런던에서 공연 중이다. 2010년 1만회를 넘어섰다. <오페라의 유령>에 이어 런던에서 둘째로 장기 공연되는 작품이다. 브로드웨이에선 1987년부터 2003년까지 6680회가 공연되고 일단 막을 내렸다. 영화 흥행에 힘입어 다시 무대에 올릴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워낙 탄탄한 오리지널 소설과 프랑스판 뮤지컬의 음악에 영어판의 영롱한 노래가사, 그리고 매킨토시의 마케팅 능력이 결합됐기에 흥행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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