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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완전한 복음 앞에 서다
♣ 오직 십자가뿐
영이라고 다 믿어서는 안 됩니다. 미혹당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초월적이라고 해서 무조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 외에는 부러워하지도 궁금해하지도 마십시오. 그 밖의 것은 모두 귀신 장난입니다. 두 번 생가할 것도 없이 정확하게 귀신 장난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도 '불 파' 출신입니다. '보수 정통 진리 말씀' 중심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너무 '불 관리'에 소홀했던 바람에, 저 혼자서 이른바 '뜨겁다는' 기도원을 여기저기 부지런히 쫓아다녔습니다. 그게 1970-1980년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손바닥에 피가 날 정도로 손뼉 치고 기도해야 성령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죽어라 박수를 쳤습니다. 하지만 어딘가에 긁히거나 베이지 않는 이상, 피는 절대로 나지 않았습니다. 가슴과 등이 뜨거워지면 성령이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목이 완전히 쉴 때까지 소리를 지르면서 떼굴떼굴 굴러다닌 적도 있습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다양하게 요란을 떨며 여기저기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습니다. 성령이 직접 말씀해 주셨다고 하면서 요상한 짓거리를 하는 것도 많이 봤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의 결말이 어떠했는지도 지켜보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살펴본 뒤에 제가 내린 결론은, '십자가의 도 외에는 부러워할 것도 없고 궁금해할 것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계뿐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영적 세계까지 지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에도 한눈팔지 말고 철저하게 모든 것의 중심에 십자가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에서 십자가의 도는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의 삶을 통째로 바꿔 놓았습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한 가지만 빼놓고는 모든 부분에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늘 예수 그리스도라는 결론을 갖고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 누구보다 양심적이고 모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죄인 '장아찌'였던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고 지금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 사시는데, 구태여 도덕과 윤리를 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성경말씀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윤리이자 가장 높은 차원의 도덕입니다. 감히 따를 수 없을 만큼 수준이 높은 나머지, 우리의 기가 꺾인다는 게 문제일 뿐입니다. 내용 면에서는 정말 최고의 도덕이자 예법이며 교훈입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시작되는 산상수훈을 아십니까? 읽는 그 순간 곧바로 좌절감이 밀려옵니다. 그대로 따라 살기에는 수준이 너무 높으니까요.
자, 누가 여러분에게 "거 참, 되게 촌스럽게 생겼네"라고 말하면서 따귀를 올려붙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끝까지 쫓아가서 그놈의 코를 확 물어뜯어라"라고 얘기한다면, 적어도 우리네 정서로 이해하기가 너무 쉬울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 되기도 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말씀은 우리의 비위를 맞춰 주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추구합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누가 따귀를 때리면, 성경은 이에 맞받아치지 말고 "제게 왜 그러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직도 분이 덜 풀리셨다면 다른 쪽 뺨도 이용해 주세요"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솔직히 이런 얘기 들으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어던 못된 녀석이 내 겉옷을 들고 도망치거들랑 냉큼 쫓아가서 "혹시 속옷은 안 필요하십니까?"라고 말하며 속옷까지 주라고 합니다. "아니,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그런 식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라고요?"
이게 바로 기독교 정신입니다. 보육원, 양로원, 아동과 여성의 인권 운동 같은 세상의 모든 선한 일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모두 성경과 기독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성경이나 기독교를 윤리 도덕 따위와 비교하는 유치한 짓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삼강오륜이 아니라 삼강오륜 할아버지라 해도, 성경말씀을 따라올 수 없습니다. 그 정도로 초대교회가 도덕적으로 완벽했다면, 도대체 그들은 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가 십자가를 빼고서 예배하고 설교했다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와 부활만 빼고 전도했다면, 기독교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여론은 '예수와 십자가만 빼면 기독교도 괜찮은 종교라'라는 분위기였습니다. 사탄도 이 점을 놓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도덕 수준도 높고 사회봉사도 많이 하고 정말 훌륭합니다. 다만, 현실성 떨어지는 십자가와 부활 얘기만 안 한다면, 더 영향력 있는 종교로 성장할 수 있을 텐데요."
이 제안을 받아들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럽의 기독교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원리를 지키면 사회 수준이 높아지고 삶의 질도 향상됩니다. 십자가와 관련된 부분을 제외한 성경의 나머지 말씀을 사회규범이나 행동강령으로 삼으면 정말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나 남에게 신경 안 쓰고 자기들끼리 지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겁니다. "우리끼리, 우리 식구끼리 잘 살 테니 예수님은 살짝 빠져 주세요"라고 고백하는 와중에 "십자가처럼 부담스럽거나 부활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사절입니다"라고 말하게 된 겁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가정의 주인이시라고요? 안 그래도 바쁘실 텐데 너무 신경 쓰고 그러지 마세요. 주님은 원래 성전 체질이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쭉 교회에만 계시다가 주일예배 시간에나 주인 대접받으세요." 유럽의 교회들이 이런 식으로 가는 바람에, 지금 많은 교회가 텅텅 비거나 모스크가 되고 술집이 된 게 아니냐는 말입니다.
한국 교회도 이미 그렇게 흘러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훈련을 얼마나 잘 받았는지 이런 건 귀신같이 잘 따라합니다. 일주일에 딱 한 번 교회 나오면서, 목사님의 축도 시간에는 자기도 속으로 같이 축도합니다. '하나님은 성전 체질이시니 앞으로도 계속 성전에 계시고, 제발 저를 따라오지 마소서. 다음 주일에도 교회 올 테니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꼭 나옵니다. 그리고 제가 알아서 잘 살 테니 다른 일에는 아무 걱정하지 마소서.'
나이트클럽이나 카바레에 가서 신나게 춤추고 있는데, 주님이 그 앞에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속삭이시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도박장에서 호기롭게 한 판 즐기고 있는데, 주님이 그 옆에서 "내가 널 위해 죽었다"라고 속삭이시면 될 일도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은 성전 체질이시고 저는 세상 체질이니, 주여 제발 교회에만 계시옵소서. 다음 주일예배에는 기필코 나올 테니까 제발 저 좀 따라다니지 마옵소서. 육두문자 써 가며 화끈하게 부부 싸움하고 있는 데 나타나셔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내가 너희를 한 몸으로 빚었다'라고 하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주여! 그러니 제발 제 곁에 오지 마소서"라고 열심히 기도하는 겁니다.
주님이 자기를 따라다니실까 봐 두려워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자기 맘대로 사고 싶은데 주님이 따라다니면 부담된다는 겁니다. 따라다니지 말아 달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교회에만 계시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주인 노릇하지 말라는 겁니다. 주인이 되시려는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말라는 겁니다. 교회에 나와 줄 테니, 예배 드려 줄 테니, 헌금 해 줄 테니, 교회 봉사해 줄 테니 나중에 지옥 안 가는 도장이나 확실하게 찍어 달라는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 맘대로 사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천국 아니겠습니까? 천국 가면 뭐 별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하고 찬양하면서도, 속으로는 '흥! 기도 안 해도 일만 잘 되더라. 저렇게 질질 짜면서 기도하고 금식해서 해결된 경우를 본 적이 없어요'라고 생각하며 앉아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분들이 쓴맛을 보게 될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높은 데로 올라가는 건 힘이 듭니다. 애써야 되고 노력해야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절로 가는 건 쉽습니다.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내 발이 저절로 움직여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손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브레이크 없이 그대로 비탈길을 내려가면 됩니다. "기도 안 해도 잘 사는데요? 신앙생활에 관심 없어도 먹고사는 데 아무 지장 없던데요? 주일 성수 안 해도 출세만 잘 하던데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건 잘 됩니다. 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일까요? 죄악의 짐을 가득 싣고 지옥행 비탈길을 일사천리로 뛰어 내려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삼가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곧 쓴맛을 보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으셨습니다.
'죽는다는 점에서 모든 인생은 똑같다'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만, 모든 죽음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차원이 다른 죽음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죽는다면 부끄러운 죽음 혹은 개죽음일 뿐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곳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죽어야 자유케 될 수 있습니다.
♣ 십자가는 변화의 열쇠
초대교회는 당시 사회로부터 타협을 요청받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다른 것은 모두 인정해 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대신 선지자나 선생님, 아니면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인 기독교의 창시자로 바꿔 부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습니다.
기독교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무슬림도 예수님을 '이사'라고 부르며 그분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합니다. 특히 힌두교 신자들은 예수님을 '신'으로 믿는 데 더더욱 어려움이 없습니다. 힌두교는 지나가는 강아지까지 신으로 떠받드는 다신교입니다. 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들은 총 3억 3천 개의 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게나 신이 많은데 기독교의 신 하나 더 추가하는 게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종교 지도자들이 회의를 통해 "이제부터 우리는 모두 예수를 신으로 인정한다. 우리 각자 믿는 신을 뭐라고 부르던 간에 호칭만 다를 뿐 모두 같은 신이라고 하자. 뭐라고 부르든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제발 십자가 얘기만은 빼다오"라고 결의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처럼 사탄은 무엇을 어떻게 노려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복음은 더 이상 복음일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기독교가 존재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십자가 생명과 십자가 부활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빼 버리면,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종교로 전락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큰 죄악을 저지른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인, 특히 모태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를 만나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교회사를 살펴봐도 기독교에 해악을 끼친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진화론을 주장해서 교회를 어지럽힌 찰스 다윈도 원래는 신학도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없다'는 인본주의, 성경의 공동체 원리에서 예수님만 쏙 빼 버린 공산주의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십자가 생명을 잃고, 예수 그리스도 없이 썩을 대로 썩어버린 기독교에 대한 반발로부터 생겨났습니다. 이 모든 기가 막힌 음모의 초점은 십자가에 맞춰져 있습니다. 사탄은 십자가를 제거한 기독교, 십자가를 만나지 못한 그리스도인을 통해 놀라운 영광의 복음을 가리고 숨겨 왔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십시오. 단순한 메시지를 선포하는데도 청중을 매우 힘 있게 뒤흔드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달변에 의지하지도 않았고, 지식이나 정보나부랭이를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교회 건물도 없었고 조직도 없었고, 재력가나 권력자도 없었습니다. 천하고 소외받는 계층의 사람들이 전부였습니다. 열두 제자 형님들 역시 고기나 잡아먹던 어부 출신, 몸으로 뛰어서 먹고살던 분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십자가의 복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 복음은 그것을 받은 사람의 삶을 통째로 뒤집었고, 당대를 주름잡던 로마 제국의 권세와 헬라 철학을 흔들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천하에 퍼진 염병, 세상을 소란케 하는 자들'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처음 접할 때는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대부분의 것이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가치관이 바뀌고 사람이 달라진 것입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내려놓지 못해 벌벌 떨었던 세상의 가치를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상의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말도 안 되는 하늘의 가치로 세상을 뒤집었습니다. 지금도 복음의 능력이 임할 때마다 깡패가 변해서 목사가 되고, 사기꾼이 변해서 자선 사업가가 되고, 저처럼 망해 버린 술집 아들이 선교사로 변화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과연 여러분을 어떤 자리로 이끄실까요? 이 부분을 온전히 깨달아야 합니다.
♣ 십자가는 정죄가 아니라 은혜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십자가를 주로 죄책감을 떨어내는 데에 사용합니다. 너무도 자주 십자가를 하나님 앞에서 찝찝하고 답답한, 떳떳하지 못한 마음을 처리하는 쓰레기 하치장 정도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만, 이것만으로는 반쪽짜리 복음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로 말미암는 참된 자유는 어떤 것으로부터 건짐 받는 것뿐 아니라, 그 존재답게 살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구원이란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 주는 것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이끌고 도와주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복음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는 세 단계로 나눠집니다. 첫 번째는 바로의 권세를 꺾고 애굽에서 건져 낸 것이고, 두 번째는 광야에서 사십 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것, 마지막 세 번째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기만 하시고는 "이제부터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너희 힘으로 살아 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주님이 그러셨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끝까지 애굽에 머물러 있었을 겁니다. 일이 고되고 자유도 없지만, 그래도 먹고 잘 걱정은 없으니까 훨씬 나은 거죠. 아무런 대책도 없이 끌어내서 "너희가 알아서 살아라"고 말하면 모두 굶어 죽습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 반쪽짜리 구원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무엇으로부터 건져 냈다는 것과 무엇으로까지 나아갈 것인가 하는 내용을 모두 포함합니다.
바로의 권세에서 건져 내는 출애굽 사건의 첫 단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구원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얼마나 엄청나고 끔찍한 운명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인지, 어디에서 구원받았고 얼마나 어마어마한 복음을 받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삶의 주인이 누구냐는 겁니다. 내 삶에서 실제로 주인 노릇을 하는 게 도대체 뭐냐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죄가 우리 인생의 주인 노릇을 했습니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고 자유하고 싶어도 자유할 수 없는 죄의 문제에 고뇌하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겪은 채찍질 , 가난, 고통, 괴로움, 억압 같은 모든 비극의 뿌리는, 그들을 노예 삼아 억압하고 채찍질 하던 바로였습니다. 악한 주인을 만나면 악한 일을 저지르게 되고, 무서운 주인을 만나면 무서운 일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여기에서 바로는 사탄을 상징합니다. 그는 피를 짜내듯 완벽하게 무임금으로 이스라엘을 착취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그냥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 소모품 정도로 취급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10:10)
사탄은 인간성을 도적질하고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것을 빼앗아 가는 자입니다. 오로지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혹사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한편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조금씩 던져 주는 극악무도한 지혜도 갖고 있습니다. 채찍과 당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영리한 자이지만, 그의 목적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 덕분에 구원받았다 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 구원이 진정으로 내 것이 되려면, 완전한 구원을 담은 복음을 '살아 있고 생생한' 믿음으로 내 안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