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가 미끄러지다
박숲
따라 들어왔지
발자국을 찍으며
거실 바닥으로 이국의 언어가
모래처럼 흩어졌지
통하지 않는 말 대신 좀 더 많은
웃음을 제조하려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헛웃음
창 너머 여름이 저 혼자
뜨거운 언어를 쏟아내는 동안
우리는 이해라는 것이
좀 더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지
틈새는 점점 교묘해지고
우리는 외출에서 돌아 올 때마다
낯선 풍경을 매달고 왔지
식탁에도 욕실에도 침실에도
여름이 몰고 온 눅눅한 바람이
메마른 모래를 흩뿌렸지
주인의 품에 안긴 고양이의
지루한 표정이
내 얼굴로 건너왔고
나는 서둘러 떨어진 꽃이 되었지
캐리어 뚜껑을 열고
달궈진 열도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집어넣었지
창문 너머로 백 일 동안 꽃을 피울
배롱나무 가지가 흔들렸고
바닥에는 분홍색 꽃잎이 수북했는데
내가 아는 유일한 이해였지
이국의 원숭이가 된 우리는
나뭇가지 틈새로 자꾸만 미끄러졌고
찢긴 얼굴들이 바닥으로
수북하게 쌓였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온도가 대치했고
어긋난 주파수가 지직거렸지
사루 스베리!
창밖 꽃나무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깔깔 소리 내어 웃었지
단절된 언어가 나뭇가지 아래로
혀를 빼고 미끄러졌지
꽃나무 아래 분홍빛으로
흩어진 마음을 주섬주섬 챙겨
문을 나섰지
주인의 고양이에게 손을 흔들었지
그제야 만개한 주인의 표정
처음 만났을 때 지었던 웃음이
가볍게 치솟아
배롱나무를 흔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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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가 미끄러지다 / 박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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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숲 시인
2023년 계간 《시와 산문》 시부문에 당선 되어 등단.
2023년 현대경제 신춘문예 장편소설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