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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수영 영리(左水營營吏)의 고목(告目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
“수사(水使)는 지난 5월 29일 영을 떠나 곧장 남해(南海) 경내의 노량(露梁)으로 가서 경상 우수사와 만났습니
다. 같은 날 사천(泗川) 선창(船滄)의 왜인 4백여 명이 산에 올라 진을 치고 흰 기치(旗幟)를 세웠고, 누각 같은
적선이 13척이었는데 종일 접전하여 그 배들을 다 격파하였습니다. 화살에 맞고 죽은 왜적이 부지기수였고,
1급(級)을 목 베었습니다. 이달 2일에 당포(唐浦) 선창의 왜인 3백여 명이 포구에 들어와 분탕질하고 험준한
곳에 기대서 포를 쏘는데 왜선 9척의 크기가 판자집 같았습니다. 그중 한 척의 큰 배에는 층루(層樓)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층루 위에는 왜장이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추락하매 그를 목 베었고,
또 9급을 목 베고 그 배들을 깡그리 격파하였으며, 화살을 맞아 죽은 자들 역시 많았습니다.
5일에는 고성(固城)의 당항포(唐項浦)에 왜의 큰 배가 다수 숨어서 정박하고 있으므로 곧장 그곳으로 향하였고
본도 우수사가 뒤이어 구원하려 달려와서 그와 함께 같이 그 포구로 갔는데, 왜의 큰 배 12척, 작은 배 22척
이 바다에 분산되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한 척의 큰 배에는 층루가 우뚝 솟아 있고 그 누 위에는 왜장이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추락하매 또 그 자를 목 베었습니다. 그 배에서 얻은 분군(分軍)
한 서류 7축(軸)에 기재된 왜인의 수효는 5천여 명인데 각각 자기 이름 밑에 피로 물들인 서명이 있으니, 틀림
없이 삽혈동맹(歃血同盟)일 것입니다. 그 배를 다 격파하고 43급을 목 베었습니다.
8일에는 거제 땅 율포(栗浦) 앞 바다에서 왜의 큰 배 6척을 추격 나포하고 또 37급을 목 베었으니 도합 89급
을 목 베었습니다. 본도 우수사와 경상 우수사가 합해서 2백여 급을 목 베었고, 가덕(加德)ㆍ천성(天城)ㆍ몰운
대(沒雲臺) 등지를 연 이틀 동안 샅샅이 뒤졌으나 전혀 왜적의 종적이 없었습니다. 10일에 영에 돌아왔을 때에
야 겨우 아뢰었습니다. ” 하였다.
17일. 손인갑(孫仁甲)이 사원동(蛇院洞)성주(星州) 남쪽 20리에 있다. 에 복병을 매설했다가 불리하여 퇴각하고,
박응성(朴應星)이 용사(勇士) 장호(張浩)와 같이 적군에 달려가 죽다. 처음에 성주(星州)와 현풍(玄風)의 왜적이
강줄기를 따라 연달아 널리 목책(木柵)을 시설해서 짐바리를 운반하다 떠내려보냈다. 그러자 손인갑이 말하기
를, “사원동ㆍ안언(安彦) 등지에 복병을 매설하면 되겠다.” 하고, 마침내 사군(射軍) 수백을 골라서 저녁을 이용
해 떠났다. 김면(金沔)에게 지원군을 청했으나 김면 휘하의 장병들이 대부분 가려 하지 않자, 김면이 사람을
시켜 복병 작전을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나 손인갑이 듣지 않고 사동(蛇洞) 길에다 복병을 매설하였다.
이날 왜적 3백여 명이 성주에서부터 짐을 운반하다 흘러 내려 왔는데, 손인갑이 약정하기를, “주장이 포 쏘기
를 기다려서 발사하라.” 하였다. 유격장 박응성이 약정을 어기고 돌출했는데 왜적의 무리가 많고 정예해서
아군이 패배하였다. 박응성 등은 힘을 내어 싸우다 죽었다. 박응성은 맨 먼저 응모하여 용감하게 힘내어 싸웠
고 늘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적을 경시하다가 죽으니 전군이 그를 아까워 하였다. 이 거사에
있어서 손인갑은 매복할 곳은 많은데 사군(射軍)이 적어서 김면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김면이 구원해 주지
않아 일을 그르치게 되었으므로 자못 불만스러운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일. 김면(金沔)이 군사를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돌아가다. 그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거창에 있었는데,
김산(金山)과 지례(知禮)에 있던 왜적의 기세가 창궐하여 장차 거창으로 마구 들어올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합천(陜川)과 고령(高靈)의 군대에게 영을 내려 우마현(牛馬峴)을 막으러 오게 하였다.
손인갑이 그 영을 듣고 곧 행장을 차리자, 정인홍이 말하기를, “김산의 왜적이 급하기는 하나 무계(茂溪)의
왜적 역시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된다. 지금 만약 군사를 철수하여 그곳으로 옮겨 간다면 고령과 합천은 장차
왜적의 소굴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가서 김공의 거동을 탐지해 보는 것만 못하다. 그가 만약 군사
를 끌고 돌아오면 우리는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때 초유사의 전령을 가진 자가 김산의 진에서 나와
그것을 김면에게 내보이자, 김면이 답서를 쓰기를, “거창 현감(居昌縣監)이 문서로 운운한 것은 손인갑이 여러
사람의 의론을 어기고 복병을 매설했다가 패전하여 왜적이 반드시 충돌해 올 것이므로 사세가 돌아가기 어렵
소.” 하니, 손인갑이 대노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군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구원
해 주지 않고 나한테 허물을 돌리니 이것이 과연 군자의 생각인가. 그가 가지 않는 바에는 나는 불가불 초유
사의 명령에 따라야 하겠다.” 하고, 곧 군사를 이끌고 권빈역(勸賓驛)까지 가서 말에 먹이를 먹이는데 그때
김면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곳을 달려 지나므로 손인갑이 더욱 그를 의심하였다.
그때 마침 초유사의 전령이 또 와서 영을 내리기를 오지 말라고 하여, 손인갑은 마침내 돌아와 버리고 정인홍
이 혼자서 김성일을 가 만나보고 돌아왔다. 김면은 거창으로 간 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정인홍ㆍ김면 두 사람의 군사가 두 갈래로 갈라져, 김면은 거창을 진수(鎭守)해서 우마현(牛馬峴)을 방어하고
정인홍은 고령을 진수해서 성주와 무계의 왜적을 방어하였다. 전치원(全致遠)과 이대기(李大期)는 초계(草溪)에
진을 치고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에 진을 쳐 강우(江右) 일대가 그 덕분으로 보전되었다. 《경상 순영록》
에 나온다.
○ 낙동강에서 왜적의 배가 위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다가 두 척은 침몰하고 한 척은 노를 풀어 놓고 내려갔는
데, 곽재우가 배를 고스란히 나포하여 27급을 목 베었다. 그 배에 실려있는 것은 다 궁중의 보물들이었는데,
태조가 착용했던 목화[靴]도 들어 있었다. 곧 그 보물들을 초유사에게 보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성주의 주부(主簿) 배설(裵楔)이 본 주의 가장(假將)이 되어 군사 수백 명을 모아 복병을 매설하여 왜적의
통로를 차단하고 목 벤 수효가 퍽 많아 포상되어 합천 군수로 승진하였다. 그의 부친 전 군수 배덕문(裵德文)
역시 왜적에 붙좇은 중[僧] 찬희(贊熙)를 잡아 목 베어 상으로 판사(判事)의 직을 받았다. 그때 찬희는 성주의
왜적에 붙좇아 들어가서 판관(判官)이라 가칭하고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꾀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곽재우가 왜적 안국사(安國寺)와 정진(鼎津)으로부터 강을 격해서 서로 맞서 있으므로, 왜적이 강을 건너오
지 못하고 강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곽재우 역시 서로 바라보며 좇아 올라가 성주 안언 역로(安彦驛路)에 이르
러 정병을 거느리고 가만히 나가서 교전했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겨우 몇 급의 목만을 얻어가지고 퇴각
하였다.
○ 곽재우는 김수(金睟)가 도(道)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히 슬퍼하여 말하기를, “처음에 왜적이 왔을
때는 조금도 방어할 계획이 없었고 근왕하기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의리를 몰랐으니, 우리
도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얼굴을 들고 다시 온 것이구나. 나는 군사를 옮겨 먼저 그를 쳐야 하겠다.”
하였는데, 김성일이 준책해서 그만두고 마침내 김수에게 아래와 같이 격문을 보냈다.
가슴 아프다. 우리 온 도를 무너져 흩어지게 만들었고 우리 서울을 함락하게 하였으며, 우리 성상을 파천하게
만들고 우리 온 나라 백성들의 간과 골을 땅바닥에 으깨지게 만든 것은 다 네가 한 것이다. 너의 죄악이 천지
에 가득 찼는데도 네가 스스로 모른다면 이것은 우매한 인간이다. 네가 과연 우매한 인간인가. 너는 우매한
인간이 아니라, 재앙과 변란을 양성(釀成)하여 이 같은 극단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온 천하의 토끼털[필(筆)]
을 다 모지라지게 해도 네 죄를 다 써내기에는 부족하고, 온 천하의 대[竹 옛날에는 대를 엮어 종이를 대신하
였음]를 다 없앤다 해도 네 악을 다 써내기에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모두들, 기한을 정해서 성을 쌓게 해서 백성들을 학대한 것이 혹심했던 것을 너의 죄라고 하고, 군사
를 절제(節制)하는 데 방법이 없어서 왜적으로 하여금 마구 들어오게 한 것을 너의 죄라고 하는데, 이것은 모
르는 사람들의 말이다. 내지(內地)에 성을 쌓는 것은 비록 인심을 잃었다고는 하나 마음은 적을 방어하는 데
있었은즉 그것은 네 죄가 아니다. 군사를 절제하는 데 전도(顚倒)한 것은 비록 군사의 기밀을 패하게 하였다고
는 하나 재주가 병란을 대응하는 데 모자라서 그랬은즉 역시 너의 죄는 아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너를 죄 준다면 어떻게 네 마음을 굴복시키겠느냐. 그러나 네 죄가 하나 있으니, 왜적을
환영한 일이다. 왜적을 환영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너는 온 도의 정병과 용사 5, 6백 명을 뽑아 인솔하
고서 동래(東萊)가 함락되자 먼저 밀양(密陽)으로 달아났고, 밀양이 패하게 되자 또 가야(伽倻)로 도망쳤으며,
왜적이 상주(尙州)를 지나가자 거창(居昌)으로 물러나 숨었다. 한 번도 장병을 권면해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왜적을 치도록 한 적이 없어 마침내 왜적으로 하여금 무인지경에 들어가는 것같이 하여, 종내는 열흘 안에
수도가 함락되게 하였다.
자기 몸 붙일 곳이 없음을 스스로 알고 근왕을 칭탁하고 도망쳐 운봉(雲峯)을 넘어 갔으니, 사람을 속일 수
있겠느냐. 하늘을 속일 수 있겠느냐. 네 죄의 둘째가 있으니, 패전을 기뻐하는 것이다. 패전을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늙은 겁장이 조대곤(曹大坤)은 본래 책망할 게 못 된다. 그러나 한 도의 원수(元帥)로 김해
(金海)의 함락을 구해내지 못한데다가 왜적을 보기도 전에 먼저 있던 곳[主鎭]을 버리고 정진(鼎津)으로 퇴각해
서 진을 쳤고, 정진은 왜적이 있는 곳에서 몇 백 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헛되이 놀라 무너져 회산서원(晦山書
院)으로 도망쳐 들어가 마침내 여러 진(陣)과 각 읍들이 풍문만을 듣고 무너져 도망치게 만들었은즉, 조대곤의
죄는 주살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도 너는 그 자를 목 베어 내걸어 사람들의 마음을 경각시키지 않았으니, 너는
과연 성(城)을 버리고 패전한 군율을 모르는가.
네 죄의 셋째가 있으니, 나라의 은혜를 잊은 것이다. 은혜를 잊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듣건대, 네 조상
은 10대의 주불(朱紱)이요 7대의 은장(銀章)이라고 하니, 녹도 후했고 은총 또한 융숭하였다. 그러니 의리상
마땅히 나라와 휴척(休戚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고 사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 만약 충의의 기운을 분발하고
강개한 마음을 발동하여 자신이 사졸에 앞서 죽겠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무릇 우리 영남의 2 백여 년을 두고
배양해 온 사람들이 어찌 몸을 잊고 죽음을 무릅써서 나라의 치욕을 씻어버리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너는
군부(君父)의 파천을 기뻐하고 수도의 함락을 달갑게 여겼으니, 너는 과연 군부의 곤란을 서둘러 구해낼 줄
모르는 자인가.
네 죄의 넷째가 있으니, 불효다. 불효란 무엇을 말하는가? 듣건대, 네 아비는 비록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났
으나 참으로 강개하고 충의로운 선비이었다. 만약 네 아비로 하여금 지금의 변란을 당하게 했다면, 반드시
의병을 권장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았을 것이다. 땅속에 들어간 영령이 생각건대, 반드시 어두운 가운데에서
너의 한 짓을 가슴 아파하고 너의 불궤(不軌)함을 분해하며, “임금을 무시하고 어버이를 잊은 일이 내 자식한
테서 나올 줄이야 어찌 생각했으랴.” 하고 말할 것이다.
네 죄의 다섯째가 있으니, 세상을 속인 것이다. 세상을 속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가 조정에 출사할
때 조정에서는 강과경직(剛果耿直)하다고 지목하였고, 영남에 절(節)을 갖고 내려왔을 때 영남에서는 너를 총명
재예(聰明才藝)하다고 일컬었다. 강과 경직하고 총명 재예한 사람이 정말로 절충(折衝)하고 어모(禦侮)할 마음
이 있었다면 험준한 곳에 거점을 두고 견고하게 진지를 지켜서 멀리 몰고 들어오는 적을 막는 것이 고리를
굴리는 것[轉環]같이 쉬웠을 터이다. 그런데 너는 수수방관(袖手傍觀)하면서 한 가지 계책도 획책하지 않고
한 가지 모의도 시행하는 일이 없이 왜적이 도륙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은즉, 전일의 강과와 재예는 좋은 작위
를 낚으려는 것이었으나 오늘의 우매한듯 겁내는듯 하는 것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냐.
네 죄의 여섯째가 있으니, 무치(無恥)한 것이다. 무치란 무엇을 말하는가? 너는 영남을 왜적에게 버려 두고
운봉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가서 근왕군에 몸을 기탁했다가, 근왕군이 용인(龍仁)에 도달했을 때 왜적 6명을
보고는 군량을 버리고 군기(軍器)를 내던지고 금관자(金貫子)를 잃어버리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것은 미리 금관
자를 버리고 군사 중에 섞여 왜적으로 하여금 알아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구차하게나마 살아 보자는 마음은
평소에 정해졌던 것이고, 구차하게 살아나는 꾀는 못하는 짓이 없었던 것이다.
네 죄의 일곱째가 있으니, 남의 성공을 꺼리는 것이다. 성공을 꺼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가 도내에
있으면서 네가 왜적을 토벌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들의 마음이 저상해서, 앞장서서 적에게 나가는 자가
없게 되었다. 다행히 초유사가 충성심을 격발하고 의기(義氣)를 고무하여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만들어
동지들이 목숨을 내놓게 된 덕분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좀 가라앉고 성세가 자연 커져서 지역 내의 왜적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거가를 받들어 돌아오는 날을 가리키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런데 너는 부끄러움을
잊고 치욕을 참고서 얼굴을 들고 다시 와서 호령을 하고 지휘권을 발동해서 의병들로 하여금 흩어져 버리려는
마음을 갖게 하고 초유사로 하여금 다 이룩하게 된 공을 망치게 만들었은즉, 전의 악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하더라도 지금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
아아! 북쪽 하늘은 멀고 도로는 막혀서 왕법(王法)이 시행되지 않아 네 목이 아직도 온전한 것이다. 너의 가짜
기운과 떠도는 혼이 비록 천지 사이에서 보고 숨쉬고 있다고는 하지만, 너는 사실 머리 없는 시체다. 네가 만
약 신하의 분수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네 군관을 시켜 네 머리를 베어 버리도록 하여 천하와 후세에 사과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내가 네 머리를 베어서 귀신과 사람의 분을 풀도록 할 것이다. 너는 알아 두라.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당초에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사의 위세가 날로 성해 가고 왜적을 죽인 것이 퍽 많았다. 우병사
조대곤이 그의 성공을 꺼려 계사(啓辭) 안에 의심하는 말을 써 넣었고 감사 김수(金睟) 역시 계문 안에 불측한
말을 꾸며 넣었다. 이에 이르러 곽재우 역시 앞의 격문에 든 김수의 죄목을 들어 상소하였다.
경상도 의령(宜寧)의 유학(幼學) 신 곽재우는 진실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백 차례 큰절을
하고 주상전하께 말씀을 드리나이다. 엎드려 듣건대, 수도가 함락되고 거가 파천했다 하니, 북쪽을 바라보며
가슴이 미어지고 통곡을 억제하지 못하나이다. 왜적이 오자 씩씩한 사나이와 건장한 장수가 누구나 다 빠짐없
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난 것은 무기가 견고하고 예리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성지(城池)가 높고 깊지 않아
서가 아니며, 단지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져서 흙같이 무너지는 탈이 있었기 때문이었나이다. 대저 사람들의
마음을 흩어지게 한 자는 바로 김수입니다. 김수는 두 차례에 걸쳐 이 도의 감사를 지냈는데 정치를 하는
것이 맹호보다 더 포학하여 성군의 은택이 막혀서 내려오지 않아 흙같이 무너질 형세가 이미 일이 생기기
전에 나타났습니다.
왜적이 오기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먼저 퇴각해 숨어버리고 온 도의 수장(守將)으로 하여금 한 번도 무기를
맞대고 싸우지 않고 성문을 열고 큰 적을 맞아 들여 혹시나 뒤떨어질까 두려워하게 만든 것이 마치 저 왜적이
우리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으니, 김수의 죄는 비록 머리털을 잡아쥐고서 주살한다 해도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신이 김수에게 격문을 보내 이르기를, “가슴 아프다. 운운.
너는 알아 두라.” 하였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혹 도주(道主)의 과오를 말한 것을 잘못한 짓이라고도 합니다. 평상시 무사한 날에 있어서는
물론 자기 도주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마는, 이같이 위급하여 존망이 우려되는 때에 만약 다들 잠자코 있다
면 그것은 단지 도주가 있는 것만 알고 전하가 계신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경상도 전체의 모든 사람이 전하
의 신하라면 어찌 김수의 죄를 용인하고 이 나라가 망해가는 때에 전하를 저버리겠습니까.
송(宋) 나라의 고종(高宗)이 호전(胡銓)의 상소를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 후세의 원한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꼴 베고 나무하는 자의 말이라도 채납하여 주신다면 중흥의 공은 곧 이룩할 수 있게
될 것이니, 종묘 사직이 매우 다행할 것이고 신민들이 심히 다행할 것입니다. 신은 진실로 노둔(駑鈍)하여
강호(江湖)에 자취를 감추고 있었으나 이제 왜적의 변을 당해 종료 사직이 위태로우니, 스스로 조상 3대에
조정에서 벼슬 한 일을 생각할 때 신비한 모의와 계략은 비록 자방(子房 한 고조를 도운 군략가인 장량(張良))
에 미치지 못하나 복수하겠다는 마음은 신이 정녕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 번 죽을 각오로 4월 22일에 의병을 모집하고 일어나서 왜적을 막아 왔던 것으로, 다행히 전하의
위령(威靈)에 힘입어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힘을 다해서 죽은 후에야 그만둘 것을 마음으로 맹서하거니와
이 하찮은 신의 심정은 전연 딴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신의 광기와 참람함을 용서하시
고 신의 어리석은 충정을 살피소서.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의령의 의병장 곽재우가 온 도의 의병 여러 군자에게 널리 고한다. 김수는 나라를 망하게 한 큰 역적이다.
《춘추(春秋)》의 대의를 가지고 논하자면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를 주살할 수 있다. 따지는 사람은, 혹 도주(道
主)의 과오조차도 말할 수 없는 노릇인데 하물며 그 목을 베겠다고 말하는 것이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나, 이것은 단지 도주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임금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왜적을 영접하여 서울에
들여놓고 임금으로 하여금 파천하게 한 자를 도주라고 해서 되겠는가. 수수 방관하며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를 신하라고 해서 되겠는가. 온 도의 사람들이 다 김수의 신하가 된다면 김수의 죄를 말하거나
김수의 머리를 베어서는 안 되겠지만, 온 도의 사람이 주상 전하의 신하 아닌 자가 없다면 나라를 망하게 한
역적을 사람들이 다 죽일 수 있고 패망을 기뻐하는 간악한 인간을 다들 목 벨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하는 사람은 혹 김수를 목 베는 것이 일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한다. 나라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역적을 치면 그것이 이른바 일의 체통이다. 김수가 일의 체통을 멸실한 지 오래되니 일의 체통이 어울
리고 안 어울리는 것은 본래 따져서는 안 될 것이나, 먼저 간악한 인간을 목 베어 군대를 돌아가게 하라는
조서가 없게 만든 연후에 거가를 받들어 돌아와 중흥의 공을 세운다면 그것은 일의 체통에 크게 어울린다.
엎드려 원하건대, 의병으로 나선 여러 군자들은 격문을 자세히 보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김수가 있는 곳에
모여 그 목을 베어 행재소에 바치라. 그렇게 하면 공(功)이 수길(秀吉)의 목을 바치는 것보다 갑절이 될 것이니
의사들은 이 점을 알아두라. 혹시 수령들이 나라가 망할 것과 임금에 대한 대의(大義)를 생각하지 않고 도적
김수에 부회(傅會)하여 그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의거를 못하게 한다면 김수와 함께 같이 주살할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그때 김 수는 거창으로부터 산음(山陰)으로 옮겨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홀연히 위의 격문을 보게 되어 분하
고 놀라움을 견디지 못했다. 김경근(金景謹)이 또 치고(馳告)하기를, “곽재우가 영공(令公)을 해치려고 대군을
거느리고 오니 속히 피해야 하오,” 하여, 김수가 그날로 밤중에 함양으로 달려가 군수를 시켜 성을 지키고
계엄을 펴고 봉화(烽火)를 늘어놓고 기다리게 하고, 또 막하의 장수와 보좌관들에게 말하기를, “곽재우가 오면
응전하여 이를 방어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이어 군관 김경눌(金景訥)을 시켜 곽재우에게 격문을 전하게
하였는데 그 격문에 이르기를,
역적 곽재우에게 격문을 보낸다. 곽재우야, 너는 네가 역적임을 아느냐. 의병을 일으킨다고 가탁(假托)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음모하다가 흉악한 모략이 실패하고 탄로가 나서 억만 년 후에까지 그 추악한 냄새를 남긴
자가 동탁(董卓)의 역적질이 아니었느냐. 옛 기록에 이르기를, “형벌은 대부에게는 올라가지 않는다.” 하였고,
또, “대부를 독단적으로 죽이지 말라.” 하였은즉, 서열이 높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비록 죽어야 할 법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임금의 생살지권(生殺之權)을 함부로 가하지 않는 것은 중신(重臣)을 대우하는 도리인 것이다.
본도의 순찰사는 일찍이 육경(六卿)을 지내고 두 차례나 옥절(玉節)을 잡았으며, 하물며 한 도의 도순찰사의
직책을 받았음에랴. 설사 순찰사가 직접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임금으로부터 그 죄를 물어야 하지 조정에
서도 처치할 것이 아닌데 하물며 본도의 사람이 그 어찌 법으로 처치할 수 있겠는가. 너 역적이 난리의 틈을
타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죄를 나열하여 격문을 전한 것은 의거를 가탁하여 불궤한 짓을 음모하다가 흉악한
모략이 깨져서 탄로날 때를 위해 미리 자기를 보전하기 위한 계략이었음에 불과하다.
지금 왜적의 기세가 굳세고 거침없어 이미 수도를 함락시키고 거가가 파천하였으며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으
니 조금이라도 강개한 뜻을 가진 자라면 비록 녹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마땅히 창을 베고 자며 적개
심으로 나라의 치욕을 씻어야 할 것이어늘 하물며 본도와 같이 병화를 면한 고을 사람들이겠는가. 낙동강
동쪽은 몇 번이나 함락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하여 근처의 주현(州縣)이 단지 7, 8군데가 남았을 뿐이다.
소수의 왜적이 모여서 주둔하고 있는데 지금 고성ㆍ성주ㆍ김산(金山)에 버티고 있으며, 또 금산(錦山)을 함락시
키고 장차 거창을 함락시키려 하고 있으니, 나머지 7, 8개 읍도 마치 죽어가는 사람이 기식(氣息)이 엄엄(奄奄)
하여 약이 넘어가지 않고 호흡이 불통하고 혈색이 단지 입술에만 남아 있어 살 길은 10분의 1밖에 없는 것과
도 같다. 너 역적의 마음이 만약에 의기에 격동되어 나왔다면 마땅히 순찰사ㆍ초유사와 김송암(金松庵 김면)ㆍ
정내암(鄭箂嵒 정인홍) 두 선생과 힘을 다해 왜적을 토벌하느라 여가가 없을 것인데, 오직 반역할 마음만으로
먼저 한 도의 대장을 제거하려고 죄를 늘어놓고 격문을 전해 그로 하여금 정벌하는 책모에 전심하지 못하게
하여, 남아 있는 7, 8개의 읍이 장차 승냥이와 범 같은 왜적이 횡행하는 데 직면하여 자매와 처첩이 깡그리
사로잡혀 가고 부자 형제가 다 어육이 되어 비참하게 도륙되었으니 부모 처자가 있는 자들이 어찌 네 몸뚱아
리를 난도질하고 네 살을 씹으려 들지 않겠느냐.
너 역적이 감히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전후로 낭패(狼狽)하여 진퇴유곡으로 어찌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
다. 왜냐하면, 너 역적이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 네 마음속에 작정하기로는, 국가가 공허할 때에 무뢰한
무리들을 많이 모아서 개인적인 은혜로 이들을 묶어 심복을 만들어 작은 왜적을 약탈하여 군의 성세를 크게
떨쳐 불행히 일이 가라앉으면 일대(一代)의 원훈(元勳)이 될 기회를 잃지 않을 것이고, 만약 요행히 나라가
망하면 또 새 왕조를 창립하는 대공을 이룩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화심(禍心)을 품고 의병을 가탁하여
초계(草溪)의 관곡(官穀)을 점취하고 진주(晉州)의 전세(田稅)를 탈취하는 등 공공연히 도적질을 자행했다.
네 도당 정대성(鄭大成)이 주살될 때, 순찰사가 역적인 네가 장수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음을 의심하고 막하에
자세히 캐어 물었었는데, 만약 안세희(安世熙)ㆍ김경눌(金景訥) 두 사람이 네가 역적이 아님을 힘써 진술하지
않았더라면 너의 머리와 발은 벌써 각각 따로 떨어졌을 것이고, 너 역적의 혼 역시 동탁과 지하에서 뉘우치고
있게 되었을 것이다.
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순찰사는 한 도의 방백에 불과했고, 방백이 거느린 것은 5, 6인에 불과하여서, 절제
(節制 지휘권)가 병사와 수사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왜란이 일어나 버린 후에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로부터 밀양으로 달려갔고, 밀양ㆍ청도(淸道) 등 5, 6개 지방이 2, 3일 내에 연달아 함락되어
왜적이 성주를 범하게 되자 고령으로 달려갔으며, 왜적이 김산(金山)으로 향하자 달려서 지례(知禮)로 향했다.
도중에 성주 가천리(伽川里)를 지나 마을 가에 말을 멈추고 유생 등 4, 5인을 초치하여 의병을 일으킬 뜻을
타일러 주고서는 가야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지례까지 갔는데, 그때에 비로소 도순찰사(都巡察使)의 임명을
받았으나 거느린 것이 역시 막하의 사람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도주한 패군 이유검(李惟儉)을 초치하여 목
베어 장대에 내걸고 죄를 청했고, 김해의 조대곤이 백의종군하는 것을 구원해 주지 않았으나 조대곤은 김산에
서 독전(督戰)하여 수백 급을 목 베었고, 여러 읍에 장수를 정해서 포로와 수급을 많이 올리게 하였으니,
이것들은 다 순찰사의 절제가 탁월했음에 연유한 것이다. 이제 왜적이 이미 고개를 넘어갔고 서울이 이미
함락되어 버리자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하겠다는 뜻을 행재소에 치계(馳啓)하고 겨우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운봉(雲峯)까지 갔는데, 이어 초유사가 전라 순찰사가 공주로부터 돌아 내려오고 전주에서는 아직 군사를 조달
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또 초유사의 강력한 만류에 따라 돌아와 안음(安陰)에 머물렀다.
급히 와서 구원하라는 교지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고 마음에 맹서하여 홀로 1백 명을 거느리고 수원까지
나가서 머물렀는데, 도중에서 소수의 왜적들을 만났으나 목 베어 죽인 것이 퍽 많아 왜적은 퇴각해 가 버렸다.
그 이튿날에 이르러 왜적의 무리가 진으로 돌격해 왔는데 양호의 순찰사들은 다 이미 달아나 버렸고 본도의
순찰사 막하의 장병은 이미 전투에 나가게 했으므로 단지 수삼 명이 남아 있을 뿐이었으나, 조금도 겁을 내지
않고 차고 있던 검을 뽑아서 퇴각하는 장수를 목 베이려고까지 하며 혼자서 후퇴하는 군대의 뒤를 따라가
우리 군대를 손상 없이 온전히 돌려왔으니 이런 것들이 충분(忠憤)의 분발이 아니겠느냐.
너 역적이 비록 살해하려고 가슴속의 흉악한 모략을 실제로 자행하기는 하나, 조정의 명령이 아직 팔방에
행해지고 대장의 명령 역시 한 도에 행해지고 있다. 한 도와 팔방의 사람들이 다 고개를 숙여 너 역적의 수하
에 복종하고 순찰사가 해를 입는 것을 내버려 두겠는가. 극성스러운 왜적이 충돌해 오던 초기에 큰 진(鎭)을
연속하여 함락시키고 분탕하고 도륙하였으므로 태평시대의 백성들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흩어졌으니 장수된
자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수풀을 찍듯[樧]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곧장 찌르고 유린해 들어와 도성
에 마구 들어왔으니 이것은 순찰사가 절제하지 못한 소치는 아니다. 너 역적이 비록 ‘죄를 씌우려면 어찌
말 없는 것을 근심하랴’ 하여 감히 흉악 처참한 일을 하고 이미 막하의 사람들에게 격문을 전해 자객(刺客)의
일을 하도록 위협하였으나, 순찰사는 미치광이의 말로 버려 두고 일소에 부쳤을 따름이다.
너 역적은 또 순찰사에게 격문을 냈는데 거기에 지적한 말을 보니 다 거짓되고 사실이 없으나, 그 가운데
충의기절(忠義氣節)로 순찰사의 선인(先人)에 허락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천리(天理)가 민멸(民滅)하지 않은
곳이라 이를 수 있다. 옛부터 지금까지 충의기절을 지닌 사람은 이러한 때에 의를 제창하고 근왕하되 처음
부터 끝까지 하는 바가 한결같이 정대하고 거짓 없는 도리에서 나오기 때문에 남이 이간하지 못하고 행하는
일이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다. 송조(宋朝)의 여러 충성스러운 신하에 비길 인물은 당대의 김ㆍ정 두 선생이
다.
너 역적은 본래 볼 만한 행실이 없었으면서도 의병을 칭탁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몰래 꾸몄고, 도당과 우익
(羽翼)은 다 음험 무상하고 흉악 무도한 사람들인즉 지금이 흉악하고 참혹한 말은 너 역적만이 한 짓이 아니
다. 네가 반역한 상황을 순찰사가 행조(行朝)에 치계하였고, 곰과 범 같은 장수와, 산을 뽑아낼 인재가 다 순찰
사의 막하에서 서로 다투어 너를 잡아오겠다고 자청하고, 가슴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어 격문을 내어 여러
장수들을 불러 원문(轅門)에 묶어 오게 하여 불궤한 너를 효시(梟示)하자 한다. 네가 지금 와서 항복하면 멸족
하는 화를 면할 수 있으니 길흉 화복 사이에서 너 역적 도당은 각각 거취를 살펴라. 또 너 역적이 평소에
행한 패역 무도한 정상은 말할 수는 있겠으나 말하면 추악해지니 잠시 내버려두고 거론하지 않는다. 잘 알아
두어라.
○ 경상도 순찰사 막하의 김경로(金敬老) 등이 곽 의사의 진중에 격문을 내어 다음과 같이 이르다.
곽재우의 도당에게 격문을 전한다. 무릇 천하의 일 중에 그 기미가 드러나지 않은 것은 지혜로운 자라도
혹 모르지마는, 기미가 이미 드러난 것은 비록 지극히 우매하다 하더라도 모르는 자가 없다. 이제 곽재우의
평소의 패악한 행실과, 기회를 이용하여 흉악한 짓을 자행하는 정상은 명백하여 보기 쉬우니 지혜로운 자를
기다린 연후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내의 사람들이 혹 다 알지 못해서 같이 도당에 들어가 함께 무도한
지경에 빠졌으니 남 몰래 제군을 아깝게 생각하는 터이다. 잠시 그중에서 여럿이 다 아는 것을 들어서 말할
터이니 제공(諸公)은 자세히 듣고 그 정상을 알아서 거취를 정하고 향배를 결정하라.
곽재우는 본래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으로 부모의 세도를 믿어 오로지 할경(割耕 남의 밭을 침범해서 자기
농사를 짓는 일)을 일삼고 남의 소와 말을 빼앗으며, 그가 사귀는 것은 다 흉악한 이지(李旨) 같은 도배(徒輩)
들인즉 그 마음이 바르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덕수(文德粹)가 토주(土主)를 모략하여 죽이고 방백을
질책해 욕하며 병사를 고소한 것은 다 곽재우가 도와 주지 않은 것이 없은즉 그 마음의 음흉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왜적의 변란이 생긴 뒤 의병에 가탁하여 무뢰한 무리를 꾀어 모아서 먼저 초계의 창고를 파괴하
고 군량ㆍ청밀(淸蜜) 및 군기(軍器)ㆍ잡물을 전부 훔쳐 갔으며, 또 의령현 창고의 곡식을 약탈하고 또 진주의
전세(田稅) 4백여 석을 개인 창고에 옮겨 넣고서, 인근의 무뢰한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은혜를 베푸는
거리로 삼았다. 그리하여 왜적을 쫓아내기 전에 흉계를 꾸며 표면으로는 왜적을 치는 것으로 보이고 속으로는
신하 노릇 하지 않을 모략을 간직하고 있었다.
먼저 방백을 제거하려고 군현(郡縣)에 격문을 전하고 읍재(邑宰)를 모략을 써서 죽여 위아래의 인민들을 공갈
하고 말하기를, “방백은 백성을 독촉하여 성을 쌓느라고 생령(生靈)을 못살게 굴었고 방어를 하지 않아 왜적으
로 하여금 마구 들어오게 만들었으니, 그 죄가 크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모해할 것이다.” 하니 멍청하고 우매
한 백성들과 강(講)에 낙방한 유생(儒生)들은 날로 흉악하고 패란한 술수 속에 빠져 들어감을 모르고 충의의
고장으로 하여금 난폭한 곳으로 변하게 만들어 장차 온 도를 옥석이 함께 타게[俱焚] 하려고 하니, 천년 후에
까지 악명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제공이 깊이 부끄러워 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또 곽재우가 애당초 거병한 것이 진정한 의거였던가. 만약 그것이 의거였다면 왜적이 막 성할 때에 직면하여
서는 자기의 사적인 유감을 버리고 왜적 토벌에 전심하여 생령을 편안해지도록 구제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한
것에는 힘쓰지 않고 개인의 원한을 보복하고 윗사람을 무시하는 계략을 행했으니, 이 점으로 해서 곽재우의
마음 먹음을 사람들이 다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제공이 유독 그를 의심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이노(李魯)가 마음 쓰는 것은 천고에 찾아볼 수 없이 악한데 곽재우는 그의 재물을 탐내 그의 딸을 데려다
첩을 삼았으니, 곽재우의 마음 쓰는 것이 실로 개돼지 같아서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자라면 멀리서 바라보
고는 되돌아 가 버리고 더럽혀질까 겁낼 터인데, 제공은 다 그에게 부동하여 오직 그 명령에만 복종하니 제공
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설사 곽재우가 흉계를 실행할 수 있어서 우리 읍재를 죽이고 우리 방백을 해치며
마침내는 불궤한 짓을 꾸미는 날에 이르게 된다면, 제공은 그래 어떻게 처신하겠는가.
곽재우가 하는 일에 따라서 스스로 난동 반역의 죄에 빠지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곽재우가 하는 일에 따르지
않고 충신 열사가 되겠는가. 시비 이해와 길흉 화복은 오늘 하는 일에 판연하게 가름되는 것이다. 바라건대,
제공은 일찍이 반역과 충순의 이치를 분별하여 먼저 곽재우의 머리를 베어서 원문(轅門)에 가지고 와 바치면
모든 백성이 그 사기(士氣)를 기뻐할 것이고, 국가에서는 그 충의를 가상히 여겨서 꽃다운 이름을 영원토록
남기고 작록을 무궁토록 누릴 것이니 어찌 아름답고 좋지 않겠는가. 의를 사모하는 무리들이 그 모함하는
말을 가슴 아파하여 감히 그 거짓됨을 신변하여 이르기를, “초계와 의령에서 양곡을 취한 것 등의 일은 이미
초유사의 계사에 상세하므로 잠시 내버려 두고 변론하지 않겠거니와, 진주의 전세(田稅)에 관한 일인즉 평시
본주의 세미는 남강(南江)으로부터 배가 기강(岐江)으로 해서 가는데 이때에 와서는 배가 기강에 이르자 적병
이 돌연히 닥쳐 와서 격군(格軍 : 뱃군 즉 선박의 승무원)이 배를 버리고 흩어져 쌀 실은 배만 빈 강에 홀로
떠 있은 것이 10여 일 되었다. 그러므로 도둑에게 줄 우려가 있어 의사가 거두어서 군량으로 한 것이다. 그러
므로 앞에 이른바 기강에 버려진 배의 세미라 한 것이 이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이 죄를 씌우려고 정당한
물건을 탈취했다고 하였으니 통탄할 일이다.
○ 삼가(三嘉)의 진사 윤언례(尹彦禮),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 등이 위의 격문을 보고는 곧 여러 읍에
통문(通文)을 내어 김경로 등이 의사를 모함한 죄를 폭로하여 다음과 같이 이르다.
요사이 순찰사의 군관배가 곽 의사에게 보낸 글 두 가지를 보니 하나는 “역적 곽재우에게 격문을 보낸다.”
하였고, 하나는 “곽재우의 도당에게 격문을 보낸다.” 하였다. 의사가 과연 역적이고 도당을 가진 자인가.
그 가운데 말한 것은 다 부회하고 날조한 말들로 단지 자기네들의 음흉하고 사특하며 정의를 해치는 마음을
드러내기에 족할 뿐이지, 곽 의사의 병폐를 만들어 내기에는 부족하다. 충의를 가리켜 역적이라 하니 그것은
진회(秦檜)의 흉악하고 교활한 묵은 술수다. 진회 하나로도 악비의 군대를 돌림으로 분을 풀기에 족했거늘,
하물며 여러 진회가 순찰사의 막하에 모였음에랴. 의병에 앞장서 일한 이가 어찌 그 때문에 한심해지지 않겠
는가. 곽 의사가 여러 군대가 달아나고 무너질 때를 당해서 백 번 죽어도 돌아보지 않는 계책을 결행하여
충의가 과격하고 절실하며 이름이 올바르고 말이 순리함은 사람들이 이목이 있는 이상 췌언할 필요가 없거니
와, 강회(江淮)를 차단하여 군현의 울타리 구실을 하였는데, 아! 충성이 곽 같고 의기가 곽 같은데도 역시 역적
의 이름을 면치 못하니, 그 자들이 의사를 해치는 것은 바로 의병을 해치는 것으로 그 자들의 마음에 간직하
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의사가 근자에 낸 격문에는 사실 경솔하게 움직인 점이 있기는 하지마는 그래도 충의에 분격한 지나친 행동에
불과한 것이니, 하필 그것을 깊이 허물해서 무엇하랴. 저 군관배는 한갓 왜적을 환영한 순찰사가 있는 것만
알았지 왜적을 토벌하는 의사가 있는 것은 모르고 곽에게 격문을 전해서 사적인 유감을 마음대로 부리려고
한다. 그 사적인 유감이라는 것은 이러하다. 김경눌(金景訥)과 이노(李魯)는 사이가 나빠진 지가 오래되어 여러
해 동안 이노를 모함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이 변을 만나 자기 가슴
속의 흉계를 실행하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던 차에 의사의 격문(檄文)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곽의 첩은 이의 딸이니 이노를 죽일 구실은 여기에 있을 게다.” 하고, 이노를 뒤에서 사주한 괴수로 만들고
곽을 사주당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김경눌 역시 사람이니 어찌 곽공이 의사이고 충신임을 모르기야 하랴마는, 자기 원수를 갚으려고 의사를 가리
켜 역적이라고 한 것이다. 이 뜻을 임금[宸聽]께 앙달(仰達)하고 싶으나 북쪽 하늘은 아득히 멀어 소리내어
외쳐도 도달하지 않는다. 엎드려 원하건대, 여러 곳의 의병소(義兵所)에서 각각 통문을 내어 의사의 명백한
마음으로 하여금 참소하고 모함하는 자에게 희생되지 않게 한다면 천만 다행한 일이다. 아! 올바른 도리를
지닌 타고난 본성은 사람이면 다 가지고 있고 역순(逆順)과 시비는 본래 공론(公論)이 있는데도 감히 대악
무도한 이름을 충신 의사의 위에 덮어 씌우려고 하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은가. 맹자가 이르기를, “정의를
해치는 자를 도적[賊]이라 한다[賊義者謂之賊].” 하였는데, 대의(大義)를 제창한 자를 역적이라고 하겠는가.
무죄한 자를 무고한 자를 역적이라고 하겠는가? 제군은 이 점을 깊이 살피라.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김경근(金景謹)이 거창에 갔는데 김성일(金誠一)이 막 자고 있었다. 김경근이 말씀드리기를, “곽재우가 순찰
사를 살해하려고 합니다. 저 김경근이 이미 고하여 피하게 하였사오니 영공(令公)께서도 선처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김성일이 병을 핑계하여 면회를 거절하고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네가 산음(山陰)에서 나를 만났을 때
팔뚝을 걷어 올리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김수(金睟)를 목 베지 않으면 천지에 대의를 펼 길이 없다.’ 하였고,
곽재우는 어리석은 사내이니 너희들이 부탁한 게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하고 전하니, 김경근은 부끄럽고
겁이 나서 물러갔다. 김수는 격문을 전해 곽재우를 크게 꺾어 놓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무척 두려워하는 마음
이 들어 비밀리에 김성일에게 내통하여 곽재우를 타이르게 하였다. 김성일 역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김수를
원망하는 것이 매우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로 말미암아 불의의 변고를 초래하게 될까 두려워져 곧 곽재
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의병장은 왜적의 변란이 일어난 시초부터 재산을 탕진해서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분발하여 자신은 돌보지
않고 한결같이 나라를 위해 왜적을 토벌하는 것만으로 마음을 먹고 살아왔으니 비록 옛날의 열사라 한들 어찌
그보다 더했겠습니까. 본관이 임지에 도착하자 곧 글을 보내 초청하였던 바 의병장은 늙고 졸렬한 본관을
함께 할 자가 못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단성(丹城)으로 와서 만나 주었고, 한 번 읍하는 사이에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을 뜻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후 고립 무원한 군사를 이끌고 낙동강 가를 횡행하여 먼저
나서서 왜적을 토벌하여 전후로 목을 베인 것이 퍽 많아, 왜적이 말을 몰고 전진하여 마구 들어오지 못해
그 일대의 여러 성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보존되었고, 뛰어난 명성이 사방으로 빨리 퍼져 듣는 사람 치고
감동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원근에서 호응해 와서 왜적을 토벌해 버릴 공훈을 손꼽아 기대
하였으니, 의병장의 영웅적인 풍도와 의열은 비단 한 대에 떨치고 빛날 뿐 아니라 또한 죽백(竹帛)에 기록되어
도 부끄러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홀지(忽地)에 의병장이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을 보내 감히 패만(悖慢)한 말을 마구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방백이 어떠한 관직이고 의병장이 어떠한 인물인데 감히 그러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방백
이 비록 실제로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래 조정이 있어 처치할 것이고 도민이 손을 쓸 것이 아닙니다. 그런
데 의사는 충의의 가문에서 태어나 왜적을 토벌하는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이 이룩되려고 하는데, 스스로 함정
에 빠져 일족을 멸망시킬 곳으로 빠져 들어가리라고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당(唐) 나라의 반역한 병졸이 주장(主將)을 쫓아 내고서 □ 패란을 초래한 것이 무릇 몇 사람이었습니까. 전복
한 수레의 전철을 그대로 밟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미혹했다가 되돌아 온다는 경계는 태역(大易)에서 교훈한
바이거니와 앙화를 바꿔 복으로 만드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취하는 것이니, 나의 충고를 따른다면 순조로워
복이 많아질 것이고 따르지 않으면 거슬러서 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기미는 사이에 머리털도 안 들어갈
정도로 미묘하니 의병장은 이 점을 생각하십시오.
○ 김해에 주둔해 있는 왜적 1천여 명이 고성(固城)으로 옮겨 들어가다. 왜장이 은가마를 타고 감사를 자칭하
고 진주를 범하려 하여 진주성 내의 장병이 본도 여러 진(鎭)에 구원을 청하였다. 곽재우 역시 군사를 거느리
고 구원하러 달려갔는데 도중에 초유사의 글을 보고는 말을 세우고 답서를 다음과 같이 썼다.
곽재우는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초유사 합하(閤下)께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타이르시는 글을
보고 극도로 감격하여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간곡하신 가르치심과 친절하신 타이르심은 다 저 곽재우로 하여
금 장래 닥쳐올 앙화를 모면하고 막대한 공을 이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어찌 합하의 지극한 인애로우심으
로 저 곽재우를 자식같이 보신 데서 그렇게 하신 것일 뿐이겠습니까. 또한 나라를 위한 마음이 지성에서 발하
여 사람들로 하여금 왜적을 토벌하는 데 자기 몸을 잊게 하시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는 하나 내리신
말씀은 억양이 너무 지나쳐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뻐하고 두려워하게 할 것이나, 저 곽재우는 그 때
문에 기뻐하지도 않고 또 그 때문에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아! 합하가 순찰사를 위하여 꾀하시는 것은 충성스러우십니다. 다만 두렵기는 순찰사가 합하를 위해 꾀하는
것은 그렇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순찰사 역시 사람입니다. 어찌 자기 죄를 자기가 모르기야 하겠습니까.
순찰사가 말하는 것은 합하께서 고치게 만들 수 있으십니다. 순찰사가 하는 일은 합하께서 고치게 만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순찰사의 마음을 합하께서 고치실 수 있으시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비록 합하의 지성(至
誠)과 후덕으로도 끝내 순찰사의 마음을 고치시지 못하신다면, 저 곽재우가 두려운 것은 합하를 모함하는 말이
반드시 순찰사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는 점입니다. 합하께서는 저 곽재우가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처지에
빠질 것을 근심하였으나 저 곽 재우는 합하께서도 끝내는 그렇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하실까 두려워합니다.
합하께서 저를 아끼시는 마음으로도 저를 비륜(非倫)하고 불궤(不軌)하다고 의심하시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순찰사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저 곽재우와 공을 다투는 자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저 곽재우가 자신을 죽이고 일족을 멸망시키는 앙화가 반드시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만두지
않는 것은, 천성에서 우러나 졸지에 고칠 수 없고 울분에 찬 마음을 급히 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합하는 임금이 보내신 분인즉 합하의 가르치심은 곧 왕의 말씀과 같으니, 어찌 감히 한낱 자기의 소견을 고집
하고 합하의 가르치심을 어기겠습니까. 진주에서 긴급을 고해 와 군사를 거느리고 개금원(介金院)에 왔습니다.
군무가 복잡하여 만의 하나도 사뢰지 못하고 줄입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김수가 의병장 김면(金沔)에게 글을 보내 곽재우를 진정시켜 달라고 하니, 김면 역시 곽재우가 분에 못
견뎌 하는 마음을 알고 있어 의외의 환난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곧 곽재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다.
막부(幕府)의 이름을 듣고 늘 흠앙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더운 날씨에 거느리신 군사들에게 도움이 있고 지휘
가 만안하시길 바랍니다. 저 김면은 일개의 썩은 선비로 애써 군에 있으니 어찌 도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갓 스스로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다만 사람의 책모가 좋지 않아서 왜적이 고개를 넘어가게
놓아주어 수도를 지키지 못해 어가[大駕]가 몽진(蒙塵)하기에까지 이르렀은즉 그 책임은 돌아갈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께서는 조정의 명령이 아닌데도 백면서생으로 의병을 일으키셨습니다. 근심할 것은 의기(義氣)가
부족한 데 있지 않고 오직 처사가 마땅함을 잃을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지금 행재(行在)가 멀리 떨어져 있어
주청이 통하지 않으니, 우리 민간에서 거사한 사람들은 의뢰할 데가 없어 부득이 왕이 임명한 사람한테서
명령을 받은 연후에야 이름이 바르고 말이 순조로워 왜적을 공격할 수 있게 되고 근왕(勤王)할 수 있게 되며,
체통에 질서가 있게 되고 일을 해가는 데 조리가 있게 됩니다. 만약 일을 그르친 사람을 죄를 주어야 한다고
운운(云云)하는 바가 있다면, 의기가 당당한 점은 있지마는 순리로 공을 이룩하는 방법에는 아마도 미진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귀하께서 충성심을 떨쳐 한바탕 외치심에 천백 명이 그림자같
이 따라 나서서 물에서 공격하고 뭍에서 전투하여 흉악한 왜적이 도망쳐 흩어졌으니, 낙동강 우안(右岸) 일대
를 안도하고 근심없이 지내게 만든 것은 실로 의사의 공입니다. 이른바 강회(江淮)를 차단하여 그 기세를 막은
것은, 지금에도 역시 그 사람이 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여 마지않게 합니다.
오직 원컨대 귀하께서 다행히 하찮은 말이라고 버리지 마시고 일에 임해서는 반드시 그것의 순리를 생각하셔
서 그 이미 자란 것은 누루시고 그 지극하지 못한 것은 증진시키셔서 의를 모아 멀리 뻗어나가게 하여 결함이
없게 하신다면, 일대에 솟구쳐 나오고 만고에 빛나게 되실 것에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마침 곽시리(郭是理)
가 돌아가는 편을 인해서 구구하나마 사모하는 마음을 대략 적었습니다. 이만 줄이며 삼가 글월을 올립니다.
면배(沔拜).
○ 김수가 다음과 같이 치계하다.
소신(小臣)이 위로 성명(聖明)의 명철하심을 믿고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방비하는 제구를 만약 충분히 조치해
둘 수 있다면 왜적이 충돌해 오는 환난에 대해 막아낼 보탬이 거의 있으리라고 여겨, 임지에 도착한 초기에
방어하는 한 가지 일을 조금도 소홀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지에 성을 구축하는 데 교생(校生)들을
일시에 많이 징발해다 쓴 것이 신이 원한을 모은 근원이었으니, 사람들의 말을 돌아보지 않고 일을 이룩할 수
있기를 기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우병사 신할(申硈)이 마침 신과 뜻이 맞아 비록 날쌘 군사에게 지나치게
엄히 한 폐단이 있기는 하나, 그가 나랏일에 마음을 다한 정성은 실로 가상한 것이어서 그와 더불어 일을
같이 하여 무릇 군무에 관련된 일은 다 함께 의논하여 처치하였던 것이 □□□ 물정을 격하게 한 것입니다.
문덕수(文德粹)의 상서(上書)는 온 도의 사람들이 대부분 이성(異姓)의 삼촌질(三寸姪) 전 직장(前直長) 이노(李
魯)의 조종이었다고 생각하여, 또 신이 전에 장계(狀啓)에서 약간 그 뜻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이노가 소신
을 해치려고 하는 생각을 어찌 잠시라도 잊었겠습니까. 국운이 불행하여 왜적의 기세가 창궐하였으니 이 지경
에 이르러서는 신의 죄가 죽어야 마땅하겠으나,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백방으로 날조하고 모함하는 일은 더욱
못하는 짓이 없을 만큼 성해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딸을 첩으로 삼아 사위가 된 의령에 사는 곽재우는 시초에 의병을 일으켰을 때 곽월(郭越)의
아들이라 자칭하고 무뢰한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수종하게 하였으며, 나장(羅將 고을의 장교)들을
엄연히 대동하고 초계(草溪)의 남쪽 대로로부터 행군하여 관청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지키는 자와
관가 사람을 묶고 관의 창고를 쳐부수었으며, 쌀과 밀가루 및 기름ㆍ꿀ㆍ찹쌀가루[眞末] 등 잡물까지 전부
훔쳤습니다. 또 사창(司倉)의 창고 문을 부수고 군량과 곡물을 깡그리 훑어내서 자기의 도당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고을의 삼공형(三公兄) 등이 문서[文狀]로 보고해 왔으나 신이 생각하기는, 곽월은 세족(世族)인데 세족의
아들이 어찌 도적질을 감행하는 일이 있겠는가. 틀림없이 무뢰한 육지의 도적들이 곽월의 아들을 가칭한 것이
라고 생각하여, 다시 듣고 보아서 보고하라 하여 역시 회송한 뒤에 병사 조대곤(曹大坤)이 이미 치계하였고 신
역시 공형의 문서만을 낱낱이 들어 계달(啓達)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또 듣건대, 의령의 신반현(新反縣)의
창곡(倉穀)을 초계에서 한 것같이 훔쳐 가졌고, 진주의 전세선(田稅船) 4척을 공공연하게 약탈해서 개인 창고에
옮겨 넣어가지고 근방의 못된 도배들에게 나눠 주어 은혜를 갚을 밑천으로 삼았습니다. 곽재우가 정말로 국가
의 위급한 난국을 위해 의병을 이끌고 왜적을 공격하려는데 군량이 없었다면 마땅히 수령에게 고하거나 혹은
신이 있는 곳에 보고하여 법에 따라 받아 내다가 먹여야 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 겁탈을 자행하여
극악한 왜적이 하는 짓과 같은 점이 있으므로 신은 그가 패역(悖逆)스러운 마음을 가졌음을 뚜렷이 알고 있었
습니다.
그러나 왜적을 토벌하는 데 급했고 또 그가 마음을 고치고 선에 따르게 되기를 바라 각 관원에 통유(通諭)하
여 그로 하여금 와서 나타나게 하고 서서히 그 끝장을 보고서 다시 치계할 요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곽재우가 병사(兵使)의 체포령을 신이 시킨 것이라고 잘못 듣고는 흉악하고 참혹한 말을 공공연히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있는 곳에서 발설하였고, 신이 보낸 영리(營吏)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는데 김성일이 극력 말려
서 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미신(微臣)의 구구한 생각은 그를 진정시키는 데 있으므로 불쾌한 감정을
안색이나 언사에 나타내지 않고 도리어 그를 위해 장계를 올려 그의 군공을 보고하여 그를 가장(嘉獎)하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분노와 원한이 가시지 않아 시험에 떨어진 유생들을 꼬여내어 도당을 매일같이 많이
모아 이름을 위병이라고 칭해서, 겉으로는 왜적을 토벌하는 흔적을 나타내고 속으로는 불측한 계략을 품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은 의병이라고 생각하지마는 아는 사람은 그가 틀림없이 예측하기 어려운 환난을 빛어낼
것이라고 근심하여, 자제들에게 엄명을 내려 그들 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사람까지도 있었고 무도한 말을
지껄이는 것을 들은 사람도 많습니다.
신이 일찍 처치해 버리지 않은 것은 사세에 난처한 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먼저 소신 막하의
장병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자객의 짓을 하게 강요하였고, 또 신의 죄를 늘어놓아 여러 읍에 통문을 내어 군사
를 일으켜 난동을 꾸미라고 권고하였는데, 수령 중에 고을 사람을 그것에 따르지 못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수령까지도 함께 죽이겠다는 뜻도 역시 그 통문 중에 언급하였습니다.
또 소신이 있는 곳에 격문을 보내왔는데 그 흉악한 말은 입으로 말할 수 없으나, 기한을 굳게 작정하여서
성을 구축하는 데 백성들을 못살게 학대하고 절제(節制)에 방법을 어겨 왜적이 마구 들어오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신의 죄입니다. 성을 구축한 일은 신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적이 마구 들어오게 만든
것은 과연 신의 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태평 시절 백 년에 사람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니, 군졸들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나고, 변방의 장수
들은 죽기가 아까워 퇴각한 것이 어찌 다 신의 절제가 올바른 방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변란이 발생한 후 각 항의 절제의 득실(得失)은 다 어람(御覽)을 거쳤거니와, 한 도의 정병 용사 5, 6백 명을
뽑아서 거느리고 다니면서 동래가 함락되는데 먼저 밀양으로 달아나고 밀양이 함락되는데 또 가야로 도망갔으
며, 왜적이 상주를 지나자 거창으로 퇴각해 숨었고 한 번 장병을 권면해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왜적을 공격하
게 하지 않았으므로 그 자신이 몸둘 곳을 몰라 근왕을 칭탁하여 도망쳐 운봉을 넘어갔다고 지적하면서 신의
죄라고 합니다.
당초 신은 순찰사의 임무를 겸하고 있지 않아 원래 거느리고 다니는 군관이 없었습니다. 계청하여 8인을 보탠
가운데 홍윤관(洪允寬)과 김경로(金敬老)는 조방장을 겸했기 때문에 이미 좌ㆍ우도로 각각 파견하였고 이응성
(李應星)은 변란이 생기기 전에 당포(唐浦)의 조전장(助戰將)으로 보냈으며, 강만남(姜晩男)과 장처문(張處文)은
변란이 생긴 후에 즉시 동래 등지로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구원하는 일을 맡게 하였고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
元)이 있는 곳에 전령하여 정병 각 30명씩을 뽑아서 주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신의 수하에는 본래 군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구전(口傳)으로 군관 6인과 안세희(安世熙) 등을 특명으로 치송(馳送)한 것을 추가한 것과 도내의 가솔군
관(假率軍官) 약간 명 및 가덕 첨사(加德僉使) 최몽성(崔夢聖)ㆍ양산 군수(梁山郡守) 변몽룡(邊夢龍) 등을 다
합해도 단지 50인에도 차지 않았으니, 이른바 5, 6백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다닌다고 한 것은 거짓으로 모함하
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지난 4월 15일 아침 신이 진주에서 왜적이 경내를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갖추어 치계하고 오후에 출동하
였는데, 도중에서 부산과 동래 두 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없이 길을 재촉하여 16일 저녁에 밀양
까지 달려갔으니, 이는 동래의 함락을 듣고 서둘러서 밀양으로 달려 들어간 것이지 동래로부터 퇴각해 달아난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성을 지키고서 변란을 기다리려고 하였으나, 본부(本府)의 성이 빗물에 태반이 무너졌
는데 채 수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본부의 군사는 부사 박진(朴晉)이 능사창군(能事槍軍) 세 부대와 아울러 남은 군사 전부를 거느리고 동래ㆍ
양산 등지를 구원하러 달려갔고, 성을 지키는 나머지의 사람은 노약자 겨우 백여 명뿐이었습니다. 인근에 있던
청도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의 군사들 역시 가야 할 곳으로 가버렸으므로, 합세하여 함께 지킬 도리가 전연
없었습니다. 신이 만약 그 성에서 포위된다면 동서로 책응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지기 때문에, 왜적이 본부의
작원(鵲院)을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퇴각하여 영산을 지켰고 밀양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또 초계로 퇴각하였으며, 왜적이 또 김해를 함락시키고 초계의 길로 향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합천으로
옮겨가서 주둔하였고 왜적이 성주를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령으로 달려갔으며, 왜적이 김산(金山)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례로 달려갔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가까이에 있으면서 책응하기 위한 계획이었으
며, 각처에 무너져 흩어진 졸병 겨우 4백여 명을 얻어 방어사 조경(趙儆)과 조방장 양사준(梁士俊)에게 나눠주
어 그들로 하여금 달려가 김산을 구원하게 하였습니다.
조경ㆍ양사준 등이 한 차례 김산에서 접전한 후부터 군졸들이 다 흩어져 이때부터 비록 각 관원을 독려하여
수령으로 하여금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거느리고 오게 하였으나, 도망간 군졸들이 죄책을 받을까 겁을 내어
깊은 산에 들어가 있으면서 오직 자기가 있는 곳이 깊지 않을까 두려워할 뿐이었습니다. 다시 생원ㆍ진사 및
유식한 품관(品官)을 시켜 흩어진 군졸을 소집하게 하였으나 생원ㆍ진사 역시 깊은 산으로 들어가 버려 급작
스레 군졸을 모을 길이 없어졌고 방어사는 이미 군졸이 없는 장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적이 지례의 땅을
범하자 비로소 거창으로 왔는데 그때 왜적이 이미 의령ㆍ삼가(三嘉) 등지를 범했으므로 거창은 사실상 왜적이
침범한 복판에 있는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위아래로 책응하기 위한 계책에서였고, 변란이 발생한 후에 가야까지는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도망했던 군졸 중에는 신이 직접 전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자진해서 신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자가 많았으나, 그들을 혹은 병사에게 보내고 혹은 방어사에게 보내고 하였더니 곧 도망가
버렸고 또 그렇게 나눠서 보냈기 때문에 역시 신이 있는 곳에도 자진해서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병사ㆍ
방어사 등은 단지 군관만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신은 그래도 힘을 내어 싸우지 않는다고 누차 글을 보내서
신칙(申飭)하고 군관을 잡아다가 엄하게 교훈을 하였습니다. 곽영(郭嶸)ㆍ이지시(李之詩) 등이 호남에서 정병을
거느리고 지례에 와서 2일 동안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경 등이 한군데 같이 있으면서 곧 전투하러 나가지
않았으므로 신이 그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신의 군관인 손인갑(孫仁甲)ㆍ강만남(姜晩男)ㆍ장처문(張處文) 등에
게 전령을 발급하여 양사준(梁士俊) 등을 형벌 집행차 그곳으로 보내니, 곽영 등이 김산으로 달려가 왜적 20여
급을 목베었습니다.
이른바 밀양이 패전하자 또 가야로 도망갔고 왜적이 상주를 지나자 거창으로 퇴각하여 숨어버리고 한 번도
장병을 권면하여 왜적을 공격하게 한 일이 없다고 한 것이 또 거짓으로 모함한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왜적이
영로(嶺路)를 넘었는데 충청도의 여러 장병 역시 패해 왜적이 곧장 서울로 들어갈 앙화가 조석으로 박두하였
으니, 이 일을 생각하면 울음 소리와 눈물이 다같이 나와 다른 일의 계획을 생각할 경황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타고남은 것들을 수습하여 호남 감사 이광(李洸)과 합세하여 근왕할 뜻으로 절차에 따라 장계로
올리고 군사 1천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전라도 운봉까지 갔습니다. 김성일(金誠一)을 통하여 비로소 어가가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시어 서울이 이미 비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광 역시 전주로 군사를 철수해 버리고
정병을 더 뽑느라고 아직 출동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고군(孤軍)을 거느리고 혼자 가기에는 사세가
퍽 어렵고, 김성일이 강력하게 권하기를 군대를 돌리고 흩어진 군졸을 불러 모아 주부(州府)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을 토멸하여 군현(郡縣)을 수복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다시 근왕하는 군대를 일으키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군량이 단지 20일분뿐이어서 도중에 낭패할 근심이 생길까 두려워 잠시 본도를 돌아왔으니, 도망쳐 넘어가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도리어 근왕을 칭탁한 것으로 신의 죄를 삼는 것입니다.
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한 것은 급히 서둘러 경내의 왜적을 소탕하고 구원하러 오라 하신 □ 교지를 삼가
따른 것인데, 왜적에게 영남을 버려 두고 운봉을 넘어 전라도에 들어가 근왕을 칭탁하였다고 죄를 삼는 것은
또한 사실과 다르지 않습니까. 부끄러움을 잊고 치욕을 참으며 얼굴을 들고 다시 와서 호령을 내고 지휘권을
발동하여 의병으로 하여금 풀어져 흩어지려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초유사로 하여금 이룩되어가는 공을 무너뜨
리게 하였다는 것으로 신의 죄를 삼았습니다.
대저 정인홍(鄭仁弘)ㆍ김면(金沔) 등이 의병을 일으킬 모의를 할 때에는 열 가지 책략을 조목조목 진술해서
신과 왕복하며 상의하였고, 군량ㆍ군기(軍器)의 준비와 문서류의 처리는 다 신에게 문의해서 시행하였습니다.
합천의 의병장 손인갑은 바로 신이 정해서 보낸 사람이니, 그 처사의 온건함은 진실로 곽재우의 황당함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신이 본도로 돌아온 후 온갖 대소사를 일일이 문서로 보고하였고 다른 곳의 의병 역시
다들 그렇게 하였으니, 만약 의병이 일호(一毫)라도 흩어져 버리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이 그렇게 하려 들
었겠습니까. 의병들의 일은 다 초유사 김성일과 의논해서 처치하였고 조금도 독자적으로 막은 일은 없었으며,
두 사람 사이(즉 김수와 김성일 사이를 말함)에 장병이 오가는 말은 믿거나 의심하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친절하게 만나서 약속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른바 이룩되려 하는 공을 깨뜨렸다고 한 것 역시 거짓입니다.
하물며 현존하는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군현을 수복해서 곤경에 빠진 나라를 구하라는
성지(聖旨)가 간절하셨으니, 이른바 의병이라는 것을 신이 어찌 호령하고 지휘할 수 없겠나이까. 그런데 저렇
게 운운(云云)하니 그 마음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가령 그가 전해지는 말로 인하여 오해해서 무지하게 망령
되이 굴었다 하더라도 반역한 백성이 된 결과를 면치 못하고 그가 왜적을 토벌한 공이 끝내 그 죄를 보상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이노(李魯)ㆍ문덕수(文德粹) 등이 다 한 집안에서 연결된 사람으로 세 사람의 유감이 위세를
빙자하고 있습니다.
이노는 매일 곽재우 곁에 있으면서 모해를 가르치고 꾀느라 있는 힘을 다하고 흉계를 실행하기를 바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초유사 김성일이 이러한 해괴한 소식을 듣고는 누차 글을 보내서 화복(禍福)
을 진술하여 극력 타일러 진정하기를 바랐고, 김면ㆍ정인홍 및 다른 의병 역시 다들 그를 책하였습니다. 그가
혹시 그의 악한 마음을 뉘우치는 수가 있고 또 종내 진정한다면 그것이 신의 본뜻이니, 그가 정말로 얼굴을
고쳐서 깨닫는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를 처음같이 대우해서 그의 공을 완성하게 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앙화의 기틀이 이미 발동하였으니, 신의 생사는 아마도 열흘 안에 결정될까 염려하나이다. 신의 죄는
본래 조정에서 처치할 것이 있을 터인데 이렇게 진달하는 것은 스스로 변명하는 데 가까우니, 온당하지 못한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거짓으로 모함하는 정상을 죽기 전에 내내 생각하여 다 진술하면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될까 합니다. 초유사 김성일에게 자초지종을 통문하여 그로 하여금 선처토록 하겠습니다만, 이미
변고를 당하고서도 다시 얼굴을 억지로 들고 그대로 머무르며 온 도에 호령할 수 없으니 속히 처치하여서 한
지방을 진정시키도록 하소서.
ⓒ 한국고전번역원 | 차주환 신호열 (공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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