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교회에 관하여-13
제6절 참교회의 표지-3
2. 참된 교회의 표지-3
2) 성례들의 바른 시행-2
바. 성찬 예식의 변화
a. 동방 정교회
초기의 성찬 예식은 성직자가 떡과 포도주를 들고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예전을 진행하고, 성도들은 뒤에서 십자가와 잔을 든 성직자의 뒷모습만 보는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성찬 순서에 따라 성직자는 성도들에게 떡과 포도주 분배할 때만 성도들을 향해서 돌아서고, 떡과 포도주 분배가 끝나면 성직자는 다시 십자가를 향하여 돌아서서 기도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b. 서방교회의 예식 변화
서방교회라는 명칭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동방 정교회의 서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서방교회는 동방 정교회의 예식에 따라서 동방 정교회가 사용하는 헬라어 예식서를 라틴어로 번역해서 사용했습니다. 성직자의 집례는 성도들보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동방교회의 예식을 따랐고, 서방교회에서는 점차 떡을 주되 포도주는 주지 않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c. 개신교회의 성찬 변화와 종교 음악
서방교회 내에서 16세기 종교개혁으로 개신교 성직자가 공동의 성찬 즉, 성직자가 성도들을 바라보고 떡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는 성찬을 집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개신교 교회는 점차 바흐, 헨델과 같은 작곡가들과 성찬식을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의 개신교회음악을 발전시켰습니다. 개신교회에서 시행하는 성찬 예식은 성직자가 성도를 향하고, 떡과 포도주를 성직자와 성도가 함께 나누는 방식으로 거행합니다.
d. 천주교회의 성찬 예식
18세기 감리교회의 매주 성찬 권고를 필두로 다른 개신교회에서도 성찬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9세기 천주교회는 1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매주 성찬을 나눌 것을 권고하였고, 1964년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천주교회에서도 성찬을 기존의 십자가를 향한 로마 전례에서 성도들을 향한 성찬 전례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현재의 천주교회의 성찬 예전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2차 바티칸공의회가 권고한 새로운 성찬 예전과 미사 방식 등을 개신교회의 영향이라고 하며 거부하는 사제들의 반대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사. 신학적 해석들
기독교 역사상 교파와 신학 사조에 따라 성찬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인 해석이 있으며, 특히 성찬 때 예수께서 함께한다는 의미에 대한 해석은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a. 화체설(로마 가톨릭):
로마 가톨릭은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가 신부의 기도에 의해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이제는 더이상 물질적인 떡과 포도주가 아니라 이것은 실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문제는 그리스도의 몸이 동시에 성찬 예식을 행하는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b. 공재설(루터교회):
이들은 로마 가톨릭처럼 그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했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매우 비슷하게 떡 안에(in), 떡 아래(under), 떡과 함께(with)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도 역시 그리스도의 몸이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게 되는 문제를 만듭니다.
c. 상징설(츠빙글리와 복음주의교회):
이들은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는 그냥 물질적인 떡과 포도주이며 다만 이것은 상징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기념하기 위한 상징이지 성찬식에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몸과 영의 만남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1506년 말 글라루스(Glarus)에서 로마 가톨릭의 신부가 된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에 대해 처음부터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는 화체설은 성경적 근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도 없었고 가톨릭의 창작이라 하여 거부하였습니다. 츠빙글리는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윤리적-비유적인 것으로 이해하였고, 성찬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츠빙글리는 성만찬은 이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이미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고 확인하는 증거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나누신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찬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주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d. 영적 임재설(개혁교회):
개혁교회는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는 그냥 물질적인 떡과 포도주로 그대로 남아 있지만, 성령의 은혜로 우리의 영혼이 하늘로 들어 올려져서 현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에 실제적으로 연합하고 만나게 되는 은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되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칼빈은 “성례전이란 외적 표징에 의해 확증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증거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을 입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례전은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는 인(印)이며,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교환되는 서약이며, 우리의 제자 됨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는 징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찬에 성령께서 공급하는 불가시적 은총이 없으면 공허한 것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과 피에 영적으로 참여한다는 이 교리를 영적 임재설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 신비를 이해한다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경험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경험한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은 성령의 은밀한 역사를 통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아. 성찬식에 참여하는 자
[고전 11:27~29]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27절의 ‘합당하다’라는 말은 ‘불손하다, 또는 가치 없다’라는 뜻입니다. 주의 떡이나 잔을 불손한 마음으로, 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의식 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그것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자입니다. 그런 자는 죄인을 구원하신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기념하지도 않고, 그를 경외하지도 않으며, 타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범죄입니다.
따라서 성찬식에 참여하는 자는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가 나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은 영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