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향교는 고려 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하여 창건되었다. 당시의 위치는 현재 경기전(慶基殿) 근처였으나 태조(太祖) 이성계의 수용(晬容)을 봉안하기 위하여 경기전이 준공되자 1410년(태종 10년) 전주성의 서쪽 황화대(黃華臺) 아래로 이전하였다. 그 뒤 1603년(선조 36년) 순찰사 장만(張晩)이 좌사우묘지제(左社右廟之制)에 어긋난다 하여 조정에 보고, 왕의 재가를 받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654년(효종 5년), 1832년(순조 32년), 1879년(고종 16년), 1904년에 중수하였다.
전주향교 만화루.
전주향교 일월문.
전주향교 은행나무와 배롱나무(백일홍나무). 오래된 은행나무 수령은 400년 이상으로 향교 이전당시 심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전주향교 대성전.
전주향교 대성전은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한무제가 유학을 본격적으로 진흥하기 시작한 이래 공자는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만세의 스승으로 하늘같이 떠받든 존재였다. "사마천"은 "사기(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역사서)"를 집필할 때 공자를 제후와 동급인 세가문서에 서술했고, 그 후 역대 왕조는 공자에게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왕의 작위를 내렸으며 이러한 융숭한 대접은 공자의 후손들 중에서도 공자의 직계 가문에게 계속 이어졌는데, 후(侯)나 공(公)의 작위를 내리고 대대로 공자의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삼국지에서 조조의 책사였던 사마의는 사마천의 후손으로 8형제 였는데 이들 모두 자에 달(達)이 들어가 재능이 뛰어나 훗날 "사마팔달"이라 불렀다.
전주향교 대성전 공자 초상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는 기원전 551년경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공자의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다. 세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자라 관리가 된 공자는 55세 무렵 관직을 버리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10여년간 중국 각지를 돌아다녔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기원전 479년 세상을 떠났다. 공자의 이상은 주나라의 문물제도, 특히 예(禮)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그러려면 인(仁)을 실천해야 하는데 "인" 이란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효(孝), 동생의 형에 대한 제(悌)에 잘 나타나 있고, "효"와 "제"를 가족, 사회, 국가로 넓혀나가면 "예"를 회복하고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자의 이런 사상은 이후 종교화가 되어 "유교"가 되었다.
전주향교 명륜당. 명륜당은 성균관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성균관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장소이다. 성균관 학생들은 아침 저녁으로 식당에 가서 꼭 이름을 적어야 했는데 이는 원점 1점을 받기 위해서였다. 원점이란 출석부 같은 것으로 원점 300점 이상을 받은 유생만이 벼슬에 나갈 수 있는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원점 300점이란 곧 성균관에서 300일을 공부했다는 뜻이다. 성균관은 요즘의 국립대학 같은 곳으로 고려말에 국자감이 성균관으로 바뀌었다. 성균관 유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거나 밥을 굶는 등의 방법으로 임금과 벼슬아치들에게 자신들의 뜻을 알리고자 했는데 이를 "권당(捲堂)"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학생 운동과 비슷하다. 제주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권당(眷黨, 자기의 혈족과, 혼인 관계를 통해 혈연적으로 관계가 있는 일정한 범위의 사람들)"과는 한자가 다르다.
전주향교 동재. 지금의 학생 기숙사이다.
전주향교 서재. 지금의 학생 기숙사이다.
전주향교 계성사. 계성사는 5성위 인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아버지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공자의 아버지 제국공 공숙량흘, 안자의 아버지 곡부후 안무유, 증자의 아버지 내무후 증점, 자사의 아버지 사수후 공리, 맹자의 아버지 주국공 맹격을 모셨다.1741년(영조 17년) 건립했으며 계성사는 전국 234개 향교중에서 유일하게 전주향교와 제주향교에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