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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의 약속이 깨지면서 이어진 트럼프의 부활
뒤늦게 사퇴한 바이든과 차별화도 포기한 해리스
공화당에서 빼내 오기에 매달려 온 해리스의 패착
두려움과 원한 감정을 부추긴 트럼프의 혐오 정치
더욱 위험한 공격과 탄압이 예고되는 트럼프 2기
극우 정치의 대안으로는 부족한 민주당을 바꿔야
민주당 해리스 후보의 패배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 사람들도 이렇게까지 참패할 것을 예상한 경우는 많지 않아 보인다. 트럼프는 선거인단도 훌쩍 앞서는 결과를 보이고 있지만 총득표수에서도 해리스를 꽤 뛰어넘었다. 이제 행정부, 상·하원, 대법원 등을 모두 틀어쥐게 된 트럼프 2기 정부가 다가오고 있다.
이 결과 앞에서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부와 퇴행적 대자본가 일론 머스크 등이 기뻐하는 반면, 이민자와 무슬림, 트랜스젠더 등 소수자들의 절망을 지켜보고 있는 우리의 기분은 매우 우울하고 참담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것은 국제적 차원에서 곳곳에서 벌어지는 반동적 극우정치의 득세를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이것은 그 대안이나 경쟁 상대가 되기 어려운 중도적 자유주의 정치의 쇠퇴 과정이기도 하다. 자유주의적 중도정당들은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서 갈수록 약화하면서 더 왼쪽이나 더 오른쪽의 정당들에 자리를 내주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라는 게 이번에 드러난 셈이다.
미국 폭스뉴스는 6일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선거인단 538명 중 과반인 277명을 확보해 226명을 확보 중인 민주당의 카멀라 해리스 후보를 누르고 승리할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2024. 11. 06 [폭스뉴스 캡처]
미국 민주당의 주류는 8년 전에는 사실 트럼프를 막는 것보다 '민주적 사회주의'를 내건 버니 샌더스의 돌풍을 차단하는 데 더 열심이었다. 샌더스의 '좌파적 포퓰리즘'은 트럼프의 '우파적 포퓰리즘'을 막을 수 있는 카드였지만, 민주당 주류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버니 샌더스를 주저앉히고 민주당 후보가 된 힐러리 클린턴은 결국 트럼프에게 패배했다.
집권한 트럼프는 경제적 민족주의, 극우적 복음주의, 소수자 혐오 선동을 바탕으로 미국 사회를 뒤흔들면서 강력한 분노와 반감을 일으켜냈다. 그래서 4년 전 대선에서 바이든은 반트럼프 정서에 의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바이든은 버니 샌더스의 진보적 정책과 공약들을 일부 흡수해서 힐러리의 패배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바이든이 집권한 후에 샌더스는 상원 예산위원장이 되는 등 힘이 커지고 더 중요한 위치로 올라갔다. 그런데 바이든은 그로부터 4년 동안 다시 원래 민주당의 한계로 돌아왔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고 일자리를 늘리고 복지를 확대하겠다는 바이든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공화당도 막아섰지만, 민주당 내부에서도 발목을 잡았다.
결국 경기침체와 인플레 속에서 4년이 지난 지금 미국 대중 대다수는 트럼프 정부 때보다 '더 살기가 힘들어졌다'라고 말하고 있다. 최근 CNN의 여론조사에서도 45%가 "4년 전보다 상황이 나빠졌다"라고 했고, "나아졌다"라는 응답은 24%에 불과했다. 이것이 4년 전에 패배하고 사라질 줄 알았던 트럼프가 다시 부활하게 된 배경이 됐다.
바이든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며 인기가 추락했고, 특히 이스라엘 학살 지원으로 '제노사이드 조'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미국 반전운동가들이 만든 포스터
따라서 필요한 것은 이런 상황과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그게 아니라 각종 불법과 범죄 혐의를 이용해 트럼프를 사법적으로 제거하는 것에 매달렸다. 그것은 실패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역풍을 낳았다. 트럼프는 더욱더 목소리가 커졌고, 노쇠하고 무능력한 바이든은 그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갈수록 모두에게 분명해졌다.
바이든은 빨리 물러나고, 경선을 통해서 누가 바이든의 약점과 한계를 뛰어넘어서 트럼프를 이길 수 있는 후보인지를 가려내야 했다. 그 과정 자체가 새로운 희망을 불러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기득권 주류세력은 자신들의 요구와 이해를 대변한 바이든을 쉽게 버리지 못했고, 바이든도 미련과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결국, 바이든은 대선 후보 TV 토론에서 자신의 무기력과 무능력이 적나라하게 공개된 후에도 더 버티다가 뒤늦게 마지못해 물러났다. 이제는 너무 늦어서 내부 경선을 통해 후보를 가려낼 수도 없었다. 바이든의 말 잘 듣는 부통령이고 충성스러운 부하이던 해리스가 그냥 지목됐다. 무색무취한 해리스는 ‘바이든과 선 긋기’에 나서지도 않았지만 준비할 시간도 없었다.
인터뷰에서 사회자가 '바이든과 무엇이 다른가?' 물어보면 아무 답을 못하다가 '내각에 공화당 인사를 받아들이겠다'라고 답할 뿐이었다. 그나마 4년 전에 바이든은 ‘최저임금 15달러, 그린뉴딜, 학자금 탕감’ 같은 진보적 공약이라도 있었다. 해리스는?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 세액 공제를 확대하거나 주택 구매 시 선불금을 지원하겠다는 '소확행' 같은 공약 정도만 있었다.
4년 전보다 나빠진 보통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획기적 공약은 없었다. '모두를 위한 공공의료, 저렴한 주택 공급, 공공 일자리 보장, 노조 지원 강화, 기업과 부유층 과세' 등의 공약으로 트럼프에게 흔들리는 저학력 저소득 노동자들을 잡아야 한다는 조언들이 많았지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트럼프를 막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인가, 바이든의 뒤를 따를 것인가에서 해리스는 후자를 선택했다고 풍자하는 만평/ 출처 X
민주당의 정치적 기반일 뿐 아니라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기득권 주류, 민주당을 지지하는 메이저 언론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남은 것은 '다시 트럼프가 되면 큰일난다'라는 공포 마케팅이었다. 덧붙여서 민주당과 해리스가 주력한 핵심적 선거 전략은 '공화당에서 트럼프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빼내 오기'였다.
그래서 해리스 선거 유세의 단골손님은 공화당 전 하원의원 리즈 체니였다. 리즈 체니는 이라크 전쟁의 책임자인 악명높은 네오콘 딕 체니의 딸이었고 부녀가 모두 해리스를 지지한다는 것이 강조됐다. 8월 전당대회 때 내세우던 버니 샌더스나 자동차노조 위원장 숀 페인 등은 지지 유세에서 뒷전으로 물러났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 문제는 철저히 무시했다.
전쟁에 반대하고 사회정의를 바라는 진보적 유권자층을 민주당의 지지 기반으로 다지고 그들을 중심으로 지지를 확대하는 것은 과제가 아니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이민, 낙태, 물가 등에 더 관심이 많다'라고 했다. 그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이스라엘 학살에 무기를 공급하는 모습을 보고 실망한 활동가와 청년들이 민주당에서 가장 진취적인 활동가들이었다는 데 있다.
이들은 해리스를 원망하면서 민주당 선거운동에 나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발을 뺐다. 그중에서 일부 사람들은 트럼프가 너무 싫어서 ‘그래도 해리스를 상대로 무기 금수를 요구하며 싸우기가 더 낫지 않겠냐’라며 떠나는 주변 동료들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한 표가 아쉬운 선거 시기에도 약속하지 않는 것을 나중에 할 것이라는 말은 믿음을 주지 못했다. 이렇게 지지층의 활성화와 외연 확대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아랍계 미국인들은 민주당의 이스라엘 정책에 분노해 대거 이탈한 것으로 드러났다/ KBS '세계는 지금'에서 화면 갈무리
반면 트럼프의 극우적 포퓰리즘과 반이민 인종주의는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단순한 답처럼 보였다. '우리는 먹고살기 힘든데 우리 것을 빼앗은 무임승차자들이 우리를 위험하게 만들고 우리의 가치와 문화를 더럽힌다', '민주당의 엘리트 정치인과 억만장자 후원자들은 우리보다 이민자나 트렌스젠더들을 더 챙긴다.' 트럼프는 이런 식으로 두려움과 원한 감정을 부추기면서 기반을 확대해 갔다.
복음주의 교회의 영향력이 크고 극우 라디오 방송이나 유튜브가 인기인 농촌과 도시 변두리에서는 이게 더욱 잘 먹혔다. 리즈 체니와 함께 해리스 유세에 자주 등장하던 억만장자 암호화폐 투자자 마크 큐반, 소수자나 이민자 출신이지만 이제는 어마어마한 인기와 부를 누리는 셀럽들이 해리스 유세에 앞장서는 모습은 이런 악선동을 더욱 그럴듯하게 들리게 했다.
트럼프는 지지 기반을 인종적으로도 확대해 갔다. 올해 트럼프 선출 공화당 전당대회 때는 4년 전과 달리 주요 연설자로 여성, 흑인, 라틴계도 있었다. 트럼프의 주된 표적은 이민자, 무슬림, 트랜스젠더이기에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와 불평등은 이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줬고, 그것은 우파적 대안의 자양분이 돼 버렸다.
물론 트럼프를 지지하는 저학력, 저소득의 노동계층을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로 찌든 한심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절망과 냉소 속에서 반동적 대안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결국 이번 미국 대선은 최악과 차악(또는 차선)의 대결이 아니라 '노골적 최악'과 '위선적 최악'의 대결처럼 됐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대량학살과 민주당의 지원에 분노하던 소수의 사람들과 상당수 아랍계 미국인들은 제3의 후보인 녹색당의 질 스타인 후보를 택했다. 결선투표제가 없는 현실에서 그것은 거꾸로 트럼프에게 도움이 됐다. 하지만, 스타인의 존재감과 목소리를 키워 준 장본인은 바로 이스라엘 무기 금수 조치나 공약을 끝까지 거부한 해리스였다.
이제 곧 시작될 트럼프 2기에는 더 위험한 공격과 탄압이 예고되고 있다. 혐오와 폭력, 극우 무장민병대까지 부추기던 트럼프 1기의 더 극단적 버전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유세 기간에 트럼프는 여성의 권리 박탈, 트랜스젠더의 존재와 권리 축소, 재생 에너지 연구 개발 자금 삭감, 탄소 감축 목표 폐기 등을 시사했다.
트럼프 2기를 위한 집권 시나리오로 알려진 <프로젝트 2025> 보고서에는 대규모 감세, 불법 이민자 추방뿐 아니라 노조, LGBTQ, 사회보장 제도들에 대한 광범한 공격 계획들이 담겨 있었다. 또 트럼프 싱크탱크가 ‘미국 내부의 반유대주의에 대응’한다며 구상한 <프로젝트 에스더>에는 버니 샌더스나 민주당 진보파들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글로벌 하마스 지원 네트워크”로 규정하고 "타격"하고 "해체"한다는 내용도 있다.
따라서 미국의 진보세력은 당분간 힘겨운 방어적 투쟁에 주력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트럼프 1기는 충격과 공포의 시기만은 아니었다. 최근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투쟁들인 여성 대행진, 미투 운동,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은 모두 그때 폭발했었다. 즉, 더욱 우경화한 공화당이 권력을 잡고 폭주하는 것은 강력한 반발과 분노를 낳을 수 있다.
그러면 공화당은 지지를 잃게 되고 그 반사이익으로 민주당이 다시 희망과 개혁을 약속하며 성장하게 된다. 중간선거에서 패배한 공화당은 멋대로 개악을 추진하기 어려워진다. 이어서 민주당은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고 다시 권력을 잡게 된다. 집권한 민주당은 다시 공화당과 민주당 보수파들에 가로막혀 약속을 어긴다. 이 모든 것은 너무 익숙하게 반복되는 그림이다.
이 무한 반복의 악순환을 끝낼 필요가 있다. 이번에 미국에서 트럼프주의적 극우를 이기려면 민주당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더 분명해졌다. 늙은 백인 남성인 바이든이 사퇴하고 흑인이며 여성인 해리스가 후보로 나섰지만, 형식만 달라진 것이고 내용은 달라진 게 없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이라는 게 확인됐다.
다만 그 대안이 민주당의 성격과 구조를 탈바꿈하는 것일지, 민주당이 깨지면서 밖에서 새로운 대안이 만들어지는 과정일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8년 전에 민주당 내부 경선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내걸고 도전했던 버니 샌더스는, 4년 전에는 바이든과 손잡았다. 하지만 바이든 정부에서 왼쪽 날개가 된 버니 샌더스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번에 버니 샌더스와 민주당계 좌파적 여성 하원의원들(스쿼드)은 해리스의 대선 운동이 실패로 들어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팔레스타인 연대나 해리스 후보 지지에서 분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던 이들은 대부분 이번에 다시 상·하원 의원으로 재선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방향을 택할지는 알 수 없고, 무엇이 최선인지는 결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민주당이 대안이 아니라고 확인하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실질적인 힘과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한국에서도 비슷하다. 윤석열 정권의 퇴진을 외치고 싸울 뿐 아니라, 민주당이 과연 진보적 희망과 대안을 제시하고 건설할 수 있을지, 그렇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한계를 채워나갈 것인지 같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누가 백악관에 앉아 있느냐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누가 거리에, 카페에, 정부청사 홀에, 공장에 ‘앉아 있느냐’다. 누가 투쟁하고, 누가 사무실을 점거하고, 누가 시위에 나서느냐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결정할 것이다"(<미국 민중사>를 쓴 역사학자 하워드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