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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귀
황 순 원
그동안 한 마리 한 마리 없어져가던 토끼 새끼가 오늘 아침 마지막 한 마리마저 없어졌나 보다. 주인마누라가 큰 목소리로, 사마귀는 제 새끼를 잡아먹는다든지 제 어미를 잡아먹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무리 독한 짐승이기로서니 제 새끼를 네 마리씩이나 잡아먹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어미토끼를 욕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서 주인마누라는 현이 실험용으로 사온 토끼가 밤새 가슴의 털을 뽑아놓고 그 속에 네 마리의 새끼를 낳았을 때 현더러 새끼가 클 때까지 어미토끼를 그냥 두라고 했던 것을 또 후회한다. 아마 막대기를 토끼장 안에 들이밀고 어미토끼의 허리를 찌르는 모양으로, 뒈지고 말라는 소리가 들린다. 이 집 어린 계집애가, 할머니 할머니 하면서, 어미토끼의 눈알이 새끼를 잡아먹어서 새빨갛냐고 하고는, 요놈의 눈깔 요놈의 눈깔, 하는 품이 꼬챙이로 어미토끼의 눈알이라도 찌르는 눈치다.
계집애가 주인마누라보고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이 집 젊은 여인이 밖에 나가 묵는 동안만이다. 젊은 여인이 돌아온 뒤에는 할머니란 말 대신에 어머니란 말로 바뀐다. 현이 몇 살이냐고 물을 적마다 한 손 손가락을 다 펴 보이면서도 입으로는 여섯이라고 하는 이 어린 계집애가 이것만은 어겨본 적이 없다.
계집애가 언제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인형에게뿐이다. 이 인형을 계집애는 업어주는 법이 없다. 소꿉질을 하면서는 사금파리에 흙으로 만든 음식을 담아가지고 엄마 먹으라고 하며 먼저 인형의 입술에 가져다 댄다. 계집애의 이런 장난도 젊은 여인이 밖에서 묵는 동안뿐이다.
젊은 여인이 집에 돌아오는 때면 아랫방 좁은 툇마루에 낯선 남자의 구두가 놓인다. 남자의 낯선 구두는 젊은 여인이 밖에서 묵다가 돌아올 적마다 빛깔과 크고 작기가 달라진다. 남자의 낯선 구두가 새로 좁은 툇마루에 놓일 적마다 계집애나 주인마누라의 생활이 또 달라진다. 동그란 계집애의 얼굴이 새침해져서 현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온다. 주인마누라의 잔주름 많은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진다. 그리고 찬거리를 사러 바구니를 끼곤 나가는 품도 급해진다. 연기 나는 부엌문을 열고 나와 저고릿고름으로 눈을 닦으면서도 전처럼 눈이 쓰리다는 소리를 지르지 못한다. 조심히 뒷설거지까지 다하고 나서는 곧장 현이 있는 위층으로 그것도 층층다리가 소리 안 나게 조심히 기어 올라온다. 그러고는 아랫방이 조용해져야 또 조심조심 계집애를 데리고 내려가 부엌 옆에 붙은 골방으로 가 잔다.
이런 때 위층으로 올라온 주인마누라는 현에게 등을 돌려대고 한참 말없이 앉았다가 생각난 듯이 어항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계집애는 잠깐 어항과 주인마누라를 처다보고는 손톱 거스러미를 뜯기 시작한다. 주인마누라는 붕어가 헤 엄쳐 다니는 거리에 따라 어항 유리알에 비치는 봉어의 크기가 놀랄 만큼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을 지켜본다. 그러다가 계집애의 주의를 그리로 끌려는 듯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계집애는 젊은 여인이 밖에서 묵는 동안 그렇게 좋아서 들여다보던 어항으로 종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젊은 여인이 밖에서 묵는 동안 계집애는 현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오면 먼저 어항으로 간다. 그때까지 한곳에 머물러 느리게 지느러미질만 하던 붕어가 공연히 놀라서 오고 간다. 그러다가 다시 붕어가 한곳에 안정하고 있게 되면 계집애는 파리를 잡아 물에 띄운다. 현이 처음에 파리 같은 더러운 것을 먹이면 안 된다고 하였지만 붕어는 민첩하게 수면으로 내달아 풀 위에 바동거리는 파리를 주둥이로 톡톡 건드려보고, 밑으로 내려가 있다가 다시 와 건드리기만 하지 먹지는 않는다. 파리를 쪼는 동작은 파리의 바동거림이 점점 뗘갈수록 떠가다가 파리가 아주 죽으면 멎고 만다. 그러다가 계집애가 마침 어항 옆을 기고 있는 개미를 잡아넣으면 이것만은 붕어가 내달아와 단번에 삼켜버린다. 계집애는 일부러 밝에 나가 잔개미를 잡아다가 어항에 넣어준다. 그러나 개미도 살아 오무작거리는 것만 삼켜버리지 죽은 것은 와 건드리지도 않는다.
계집애는 붕어가 파리와 개미 건드리기에 싫증이 나기 전에 먼저 싫증이 나 이번에는 긴 꼬챙이를 가져다 밑에 가라앉은 비늘을 꺼내는 장난을 한다. 꼬챙이로 비늘 하나를 눌러 어항 유리에 붙여 조금씩 위로 끌어올린다. 그러나 어항 모가지에 오기 전에 꼬챙이의 누르는 힘이 잘 받지 않아 비늘을 놓쳐버린다. 그러면 계집애는 재빨리 손을 물속에 넣어 가라앉는 비늘을 집어낸다. 그리고 힐끔 현 쪽을 돌아보고는 현이 못 본 체하면 꼬챙이로 어항 속을 저어 비늘을 다 뜨게 한 뒤에 손을 넣어 건져가지고는 급히 밖으로 내려가 그것을 햇볕에 말린다.
현이 우물로 내려가 흐린 어항의 물을 갈고 있으면 계집애가 달려와 물 찌운 어항 밑바닥에서 팔딱이는 붕어 한 마리를 집어든다. 손에 쥔 채 마냥 팔딱이며 빛나는 비늘을 만족스레 들여다본다. 어항에 새 물을 넣어가지고 현이 어항을 계집애의 붕어 쥔 손 가까이 가져간다. 그제야 계집애는 어항에 붕어를 넣는다. 그런데 한번은 계집애가 어항에 붕어를 넣으려는 순간 손에서 미끄러져 하수도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현이 미처 움켜낼 새 없이 벌써 붕어는 하수관의 검고 걸쭉한 물에 둔한 한 줄기 선을 그으며 깊이 들어가버리고 만다. 계집애는 붕어가 남긴 손바닥의 비늘만 내려다보고 있다. 그곳에 좀더 서 있기만 해도 계집애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현은 짝패가 없어진 것도 모른다는,듯이 갈아준 맑은 물속을 생기 있게 꼬리치며 헤엄쳐 다니는 붕어만 들여다보면서 위층으로 올라와야 했다.
현이 아주 위층으로 다 올라간 뒤에 계집애는 곧 명랑해져서 여태까지 모은 비늘과 손바닥에 남은 새 비늘을 가지런히 손등에 펴놓는다. 그리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게끔 햇빛을 향해 손등을 움직여 맞춘다. 같은 동작을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그러다가 계집애는 생각난 듯이 비늘을 모두 자기 볼과 이마와 코에 붙이고는 붕어처럼 헤엄쳐 내닫는 시늉을 한다. 입을 자주 동그랗게 벌렸다 다물었다 하기까지 한다. 두 팔을 지느러미 놀리듯 한다. 그러나 계집애는 이 장난에도 싫증이 나면 이번에는 고양이를 잡아다가 젊은 여인이 하는 것과는 반대로 고양이의 볼을 손톱으로 할퀸다.
젊은 여인은 밖에서 묵다가 돌아와서는 고양이를 안고 고양이의 앞발을 잡고 자기의 볼을 쓸곤 한다. 발톱이 서지 않은 고양이의 발이 부드럽게 젊은 여인의 볼을 쓸어내린다. 젊은 여인은 눈을 감으며 고양이의 발에 힘을 준다. 그러면 젊은 여인의 볼에는 고양이의 발틉 자국이 차차 붉어지고, 동시에 젊은 여인의 입가에 웃음기가 떠오른다. 보조개가 파이는 왼쪽 볼. 젊은 여인의 얼굴은 정면으로는 둥근 윤곽이 얼마큼 원만해 보이나 옆얼굴은 딴판으로 코며 입이며 턱이 날카롭게 드러난다. 이와 반대로 눈은 옆으로 볼 때에는 긴 속눈썹이 약간 위로 향한 것이 매력 있게 보이지만 정면으로는 먼저 거기 깃들어 있는 피로가 눈에 띈다.
한번은 현이 툇마루의 낮선 구두가 돌아간 뒤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툇마루에서 젊은 여인이 계집애 쪽으로 두 팔을 내밀면서 웃음을 지었을 때 왼쪽 볼의 보조개가 분명히 한 개의 깊은 흠 자국으로 보여 가슴이 섬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현은 계집애에게 내민 젊은 여인의 팔에 호기심이 더 갔다. 젊은 여인이 계집애를 안으려고 팔을 내민 것을 현은 처음 보는 것이다. 계집애가 어리둥절해 젊은 여인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러다가 누가 자기 뒤에 있기나 한 것처럼 돌아다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때 계집애 뒤에서 고양이가 달려와 젊은 여인의 내민 팔에 안긴 것이다. 젊은 여인은 고양이에게 팔을 내밀었음이 틀림없었다. 젊은 여인은 고양이를 붙안으며, 오오 내 딸,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듯했다.
고양이만이 좁은 툇마루에 어떤 종류의 남자 구두가 놓이건 젊은 여인의 팔에 안기고 품에 기어들고 어깨에 기어오른다. 온통 까만 고양이는 젊은 여인에게 붙어서 귓바퀴나 화장한 볼을 핥기가 일쑤다. 그러면 젊은 여인은 부엌으로 가 자기 손으로 날고기 조각을 몇 점이고 썰어다가 손바닥에 놓아 고양이 앞에 내민다. 고양이는 입 언저리에 연지 같은 피를 묻히면서 먹는다. 그러다가 종시 고기 조각 한두 점을 남긴 채 기지개와 하품을 하고 물러나면 이번에는 젊은 여인이 양지쪽에서 비누 거품을 피우며 고양이털을 씻어준다. 익숙해져 있는 고양이는 비누 거품이 날 적마다 눈을 꿈적거릴 뿐, 계집애가 주인마누라에게 머리를 감길 때보다 얌전하다. 그러고 나서 여인에게 안겨 방으로 들어간 고양이는 거기서 꽃송이와 장난을 하게 마련이다.
꽃송이는 젊은 여인이 밖에서 묵다가 돌아올 때 함께 오는 남자의 각색 구두처럼 갖가지 꽃이다. 남자가 돌아가고 젊은 여인이 다시 밖에 묵게 된 뒤에야 계집애는 이 꽃송이를 마음대로 가진다. 계집애는 꽃가지들을 하수도 가에 꽂아놓는다. 그리고 꽃이 다 시들 때까지 한 가지도 뽑아내지 않고 그냥 둔다. 언젠가 현은 위층으로 올라온 계집애에게 화병을 준 일이 있었다. 새로 꽃이 생기면 꽂으라고 준 것이다. 계집애는 화병을 받아들고 잠시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화병을 그 자리에 도로 놓고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것이다. 좀 있다 다시 올라오는 계집애의 손에는 하수도 가에 꽂았던 꽃가지가 들려 있다. 그것을 화병에 꽂는다. 거의 시들어 늘어진 꽃잎과 찢어진 꽃잎. 찢어진 꽃잎은 고양이가 장난질하면서 발톱으로 째고 이로 물어뜯은 것이리라. 계집애는 하루에 몇 번이고 화병에 물을 갈아 넣어준다. 그러다가 고양이라도 와 꽃을 다칠라치면 계집애는 날쌔게 고양이를 잡아 둘러메친다. 그러나 살이 찐 고양이는 계집애의 메친 힘을 무시하고 다리를 바로 세워 그 자리에 서서 허리를 늘였다 꼬부리며 기지개를 켠다.
이 고양이가 젊은 여인이 밖에 나가 묵는 동안이 길어지면서 여위어갔다. 계집애가 잡아 메치면 고양이는 겨우 바로 섰다가 창문턱으로 올라간다. 그러면 계집애는 가만가만 고양이 뒤로 다가간다. 그러고는 갑자기 두 손으로 고양이를 떠밀친다. 고양이를 이층에서 아래로 떨어뜨려버리려는 것 이다. 그러나 고양이는 아래로 떨어질 듯하면서도 몸을 창문턱에 찰싹 엎드렸다가 계집애 옆으로 빠져나가면서 화병을 건드려 떨어뜨리고 만다. 화병의 모가지가 부러진다. 그러지 않아도 시들었던 꽃이 넘어지면서 꽃잎을 떨어뜨린다. 현은 물에 뜬 시든 꽃잎들을 주우며 젊은 여인의 흠 자국처럼 보인 보조개를 자꾸 눈앞에 떠올린다. 현은 주운 꽃잎과 가지를 목 부러진 화병에 넣어가지고 골목 한옆에 있는 빈터로 간다. 누구든지 소변보지 마시오, 하고 씌어 있는 집 뒷벽 아래 별별 그릇 깨어진 조각이며 똥이며 죽은 쥐가 버려져 있는 곳에 화병을 던진다.
여위어가는 고양이가 빈터에 내다버린 죽은 쥐를 물고 오기도 한다. 주인마누라는, 죽일 놈의 고양이 죽일 놈의 고양이, 하면서 어미토끼의 허리를 찌르던 막대기를 들고 고양이를 따라다닌다. 고양이는 아무래도 죽은 쥐를 놓지 않고 굴뚝으로 해서 지붕 한 구석에 올라가 숨는다. 주인마누라는 막대기로 굴뚝을 때리면서 어서 쥐를 놓고 못 내려오겠느냐고 소리 지르다가 할 수 없어 막대기를 던지고는 부엌으로 들어간다. 고양이가 입 언저리에 묻은 피를 혀로 핥으며 내려와 툇마루 아래서 해바라기를 한다. 계집애가 살금살금 고양이에게로 가 꼬챙이로 반쯤 감은 눈을 찌른다. 그러나 고양이는 어느새 앞발로 꼬챙이를 옆으로 털어버린다. 이번에는 계집애가 고양이의 볼을 할퀸다. 고양이가 계집 애의 손등을 같이 할퀸다. 계집애가 더 세게 할퀸다. 그리고 달아나려는 고양이 허리를 끌어다 흙 위에 굴린다. 고양이의 온 몸뚱이가 흙투성이가 된다. 그러고는 계집애가 이번에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고양이의 꼬리에 색헝겊을 맨다. 그러면 고양이가 그것을 물려고 허리를 둥글게 하고 돌아간다. 같이 계집애도 돈다. 계집애는 곧 몇 번이고 비틀거리다 주저앉는다. 고양이는 그냥 돈다. 계집애가 약이 오른 듯 다시 일어나 돌기 시작한다. 오래 돌기 경쟁을 함이 틀림없다. 계집애가 다시 주저앉는다. 주저앉아서도 그냥 어지러운지 윗몸을 내저으며 다시는 일어날 염을 못한다. 고양이는 그냥 꼬리의 색헝겊을 물려고 돈다. 오래 돌기 경쟁에 계집애가 어림없이 졌다. 좀 만에 계집애는 일어나면서 주인마누라가 어미토끼를 찌르던 막대기를 집어들고 고양이의 허리를 힘껏 때린다. 고양이가 켁 소리와 함께 한 번 뒹굴고는 달아나버린다.
계집애가 심심할 때 노는 동무로 주인마누라가 아핀쟁이라고 부르는 이웃집 벙어리 사내애가 있다. 부모가 아편쟁이로 죽자 지금은, 먼 친척집에 와 있는 애다. 이 애는 듣기는 하는 벙어리여서 주인마누라가, 사내자식의 코가 고렇게 발딱하니 하늘로 터졌으니 부몰 아편쟁이로 만들어 잡아먹지 않고 별수 있느냐고 하면, 이 애는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든다. 그리고 계집애와 놀 때에도 궂은일은 이 애가 도맡아 한다. 소꿉질할 때에는 이 애가 진흙을 주물러 음식을 만든다. 그러고는 그중 빛깔 곱고 큰 사금파리에다 음식을 담아 인형과 계집애 앞에 놓는다. 계집애는 한번도 이 애에게 음식을 먹게 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애는 아무 불평없이 계집애가 흙밥을 엄마 먹으라고 하면서 인형의 입술에 가져다 대곤 하는 것을 오히려 만족한 듯이 바라본다. 그러다가 그만 자기도 모르게 침을 흘리고 만다. 전에 이 애의 아버지가 아편을 맞기 시작하자 어머니 되는 사람이 한사코 쫓아다니며 말렸다. 애 아버지는 그것이 귀찮아서 억지로 아내까지 아편쟁이로 만들어놓았다. 그러고는 서로 아편을 많이 맞으려고 애쓰다가 마침내 애 아버지는 애 어머니를 팔아버렸다. 그 뒤 애 어머니는 몰래 애
를 찾아와서는 애 아버지의 아편을 홈쳐 내오게 하곤 했다. 그것을 아버지한테 들켜 애는 무수히 매를 맞고 나중에는 어머니와 말도 못하게끔 혀를 잡아당겨 벙어리가 돼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이 애는 말을 못할 뿐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새 맥없이 침을 흘리곤 하는 것이다. 계집애는 이 애가 침 흘리는 것을 볼 적마다 더럽다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홀딱 일어선다. 사내애가 깨닫고 얼른 침을 들이마신다. 그러나 계집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방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그렇게 되면 사내애도 계집애가 다시 나오기를 기다리는 법 없이 돌아간다.
다음번에 사내애는 새로 사금파리를 다듬어가지고 계집애를 찾아온다. 그리고 사내애는 그 사금파리를 아낌없이 계집애에게 준다. 계집애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것을 받는다. 그러면 사내애가 이번에는 해어진 조끼 주머니 속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사금파리를 꺼내어 돌 위에 놓고 귀를 다듬기 시작한다. 언젠가 현이 빈터에 내다버린 화병 조각이다. 사내애가 사금파리 귀난 데를 돌로 때릴 적마다 사기 부스러기가 튀어난다. 계집애는 튀는 부스러기를 피해 떨어진 곳에 물러나 서 있다. 사기 부스러기가 얼굴에 튀거나 목과 소매 사이로 튀어들거나 사내애는 손을 멈추지 않고 그냥 다듬는다. 그러다가 문득 사내애가 사금파리를 쥐었던 왼손을 든다. 그 엄지손가락에서 금방 피가 돋아난다. 손가락을 때린 거다. 손가락에 돋아난 피는 어느새 쥐고 있는 사금파리 조각을 물들인다. 계집애가 한 걸음 물러서면서 끔찍하다는 듯이 코허리를 찡그린다. 그러나 사내애는 피 나는 손을 두어 번 빠르게 털고나서 다시 사금파리를 다듬기 시작한다. 사내애의 손끝에서 사기 부스러기가 더 빠르게 튀어난다. 마침내 다 다듬었다. 사내애는 낡은 바지에다 다듬은 사금파리를 닦아서 계집애에게 내준다. 계집애는 또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 다른 사금파리 속에 섞는다.
사내애는 계집애가 사금파리 장난에 싫증이 날 듯하면 먼저 눈치 채고 이번에는 헌 조끼 주머니에서 조개껍데기를 꺼낸다. 그리고 조개껍데기를 마주 맞추어가지고 도드라진 조개눈 쪽을 장독에 갈기 시작한다. 구멍을 내어 부는 것을 만들려는 것이다. 이가 저릴 만큼 쟁그라운 소리. 계집애는 이번에는 또 두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멸찍 이 물러나서 바라본다. 주인마누라가 부엌에서 치마 앞자락에 손을 씻으며 나와 고놈의 아편쟁이는 와서 놀게 해준 것만 해도 고맙게 여기지 않고 시끄럽게까지 군다고 조개껍데기 가는 소리보다 더 큰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사내애가 손을 멈추기 전에 계집애가 날카롭게 주인마누라더러 저리 가라고 한다. 사내애는 그냥 조개껍데기를 간다. 주인마누라는 혼잣말처럼 병신 마음씨 고운 데 없다더니 맞았다고 중얼거리며 다시 부엌으로 들어간다. 사내애가 손에 맥이 풀린 것처럼 갈던 것을 멈추었을 때에는 거기 구멍이 뚫어져 있다. 사내애는 한순간 조개껍데기의 구멍 난 쪽을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그만둔다. 사내애의 입에서는 또 뜻하지 않은 침이 흘러내린다. 사내애는 울 듯한 얼굴로 조개껍데기를 계집애에게 준다. 계집애는 먼저 더럽다고 침을 뱉고 나서 조개껍데기를 받자 불어볼 생각도 않고 장독대 밑에 던져 깨버린다.
사내애는 갑자기 밖으로 뛰어나간다. 아무렇지도 않게 계집애는 깨어진 조개껍데기 중에서 맵시 있고 고운 것들을 골라 다른 사금파리 속에 섞는다. 계집 애가 혼자 인형과 소꿉질을 시작하는데 사내애가 숨이 차 들어온다. 그리고 헌 조끼 주머니에서 톱밥을 계집애 앞에 쥐어낸다. 빈터 한옆에 톱질하는 곳에서 넣어갖고 온 것이리라. 양쪽 주머니에 가득 찬 톱밥을 다 꺼낸 뒤에 사내애는 계집애 앞에서 한 손을 톱밥 속에 파묻고 다진다. 단단하게 골고루 다지고 나서 조심스럽게 묻었던 손을 뽑는다. 그러나 톱밥은 굴이 생기지 않고 무너지고 만다. 사내애는 다시 톱밥 속에 손을 파묻고 다진다. 또 무너진다. 계집애가 못 참겠다는 듯이 톱밥을 두 손으로 홱 흐트러뜨린다. 사내애의 얼굴에 톱밥이 튄다. 계집애가 재미있다는 웃음을 입가에 떠올리며 톱밥을 한 줌 쥐어 사내애의 얼굴에 뿌린다. 사내애는 앉은 채 눈만 감는다. 계집애가 또 한 줌 집어 뿌린다. 사내애는 놀라는 것처럼 머리를 흠칫한다. 계집애는 더욱 재미난다는 듯이 이번에는 두 손으로 톱밥을 움켜 뿌린다. 사내애는 더 흠칫한다. 계집애가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서까지 웃으며 연달아 두 손으로 긁어모아 톱밥을 끼얹는다. 사내애는 계집애의 웃음이 커짐에 따라 더 힘주어 머리를 흠칫거린다. 그러다가 계집애가 이 장난에도 시들해져서 웃음소리가 작아지는 듯하면 사내애는 갑작스레 만족한 웃음을 띠고 일어서 계집애를 바라보지도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만다. 그러고는 사내애가 다시는 계집애한테 놀러오지 않는다.
현은 저녁에 실험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누구든지 소변보지 마시오, 하고 써놓은 곁에 다시, 개가 아니면 소변보지 마시오, 라고 쓴 빈터 한옆에 두 늙은이가 톱질하는 밑에서 늘고 있는 사내애를 보곤 한다. 한쪽을 높게 괸 큰 통나무 밑에 앉아 톱을 당기고 미는 늙은이와 함께 사내애는 톱밥을 머리에 받으면서 톱밥으로 산 같은 것을 쌓곤 한다. 톱밥이 피우는 강한 나무 향내. 놀 낀
저녁 하늘에 둔한 선을 그은 통나무와 그 통나무 위에 올라선 늙은이의 굽은 등과 밀고 당기는 톱. 구리고 눈처럼 내리는 톱밥. 구석에 쌓인 검은 통나무들을 다 켜기 전에 참말로 톱밥보다도 흰 눈이 내리리라.
저녁에 실험실에서 돌아온 현은 피곤한 몸을 아무 데고 눕힌다. 늦여름 저녁이 점점 급하게 저문다. 갑자기 실험실에서 만지고 온 쥐 냄새가 난다. 분명히 손에서 난다. 현은 머리를 들어 손을 본다. 그러나 어둠은 벌써 손을 분간치 못하게 한다. 벽이 꽤 가까이 다가와 서 있다. 그리고 천장은 또 어느새 무던히 낮게 내려와 있다. 벽과 천장은 귀가 난 것이 아니고 둥글다. 지금 자기는 어디로 머리를 두고 누웠는지 모르겠다. 잠이 들었다 깨면서 자기가 누운 위치를 잘못 깨닫고 머리맡에 있어야 할 창이 발치 쪽에 있었다. 왼편에 있어야 할 것이 오른편에 있었다 하여 가슴을 두근거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게 이날은 잠도 들지 않고 오른편에 있어야 할 뿌우연 창이 왼편에 있는 것으로 느끼자 놀라 일어난다.
현이 미처 전등을 켜기 전에 밑에서 주인마누라의, 요놈의 고양이 요놈의 고양이 하는 성난 소리에 뒤이어 층층다리를 쿵쿵 울리면서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난다. 현이 전등을 켠다. 금방 발치 쪽에 있다고 생각한 층층다리가 머리맡 쪽에 있다. 방문을 연다. 무엇인가 입에 문 고양이가 들어오고 그 뒤로 주인마누라가 아침에 어미토끼를 찌르던 막대기를 들고 쫓아 들어온다. 고양이가 물고 있는 것은 죽은 토끼 새끼였다. 주인마누라가 주름 잡힌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며, 요놈의 고양이가 토끼 새끼를 다 잡아먹은 걸 모르고 있었다고 하면서 고양이를 움켜잡으려고 한다. 고양이가 잽싸게 피한다.
계집애가 올라와 달려들어 고양이의 허리를 잡는다. 고양이의 허리가 길어졌다가 줄어든다. 계집애가 토끼 새끼를 쥐고 잡아당기니까 고양이는 허리를 꼬부리며 적의에 찬 눈을 하고는 악문 입 새로 씨익 독기를 뿜는다. 현이 대신 쥐고 잡아당긴다. 고양이 이빨 새에서 토끼 새끼의 한 부분이 찢겨져 나온다. 계집애가 고양이를 붙안고 층층다리를 내려간다. 주인마누라는 혼잣말로, 쥐새끼 죽은 걸 안 물어들이나, 집에 있는 토끼 새끼를 안 잡아먹나 하면서 그놈의 고양이 죽여버리고 말아야겠다고 한다. 현은 죽은 토끼 새끼의 한 부분을 쥔 채 층층다리를 내려간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계집애가 고양이를 메치는 게 보인다. 고양이는 켁 소리를 지르고 토끼장 곁으로 사라진다. 현은 토끼장 앞에서 손에 쥔 토끼 새끼의 한 부분을 어미토끼한테 보인다. 짝 잃은 붕어처럼 그런 것은 모른다는 듯이 장 안은 조용하다. 현이 토끼장을 발로 찬다. 그제야 장 안에서 어미토끼가 놀라 뛴다. 내일은 실험실로 가져가리라.
현은 공원으로 가는 길가 하수구 개천까지 찢긴 토끼 새끼를 들고 간다. 하수구 개천은 아래로 갈수록 더 캄캄하다. 퀴퀴한 역한 냄새가 올라온다. 토끼 새끼를 하수구 개천으로 떨어뜨린다. 하수구 개천은 약한 소리를 한 번 낸 뒤에는 그냥 역한 냄새를 피우면서 잠잠해진다. 하숙집 하수관에서 놓쳐버린 봉어는 이런 곳까지 나오기 전에 죽어 썩어졌으리라. 현은 어둡기만 한 하수구 개천을 내려다보는 동안 이 하수구가 거꾸로 흐르는 것으로 몇 번이고 착각을 일으키다가 공원으로 향한다.
공원에 들어서자 현은 활엽수 있는 데로 가 손을 내민다. 젖은 활엽수의 잎사귀가 사늘하고도 눅눅한 체온을 옮겨준다. 현은 손을 거둔다. 그러나 다음에 현은 다시 두 손을 내밀어 잎사귀에 손을 문지르고는 벤치로 가 앉는다. 종시 구름이 걷히지 않는다. 달을 가린 하늘은 하수구 개천처럼 캄캄하다. 드문하게 켜놓은 전등불이 나무에 가려져서 더 어두운 그늘을 짓는다.
현은 공원 밖 밝은 야시터로 나갇다. 가까운 장난감 파는 곳에는 노파가 원색으로 채색을 한 장난감 속에 앉아서 장난감을 놀리고 있다. 탱크가 다른 장난감들을 밀어 넘어뜨리면서 돌아다닌다. 노파는 오뚝이를 미끄럼 대 위에서 미끄러뜨려내린다. 오뚝이는 떼굴떼굴 굴러내리다가도 밑에 와서는 바로 선다. 노파는 다시 오뚝이를 미끄럼대 위에서 굴린다. 탱크가 미끄럼대를 와 받아 넘어뜨린다. 딴 곳에 가 떼구르르 굴러떨어진 오뚝이가 또 바로 선다.
현은 다시 공원으로 들어온다. 좀 전에 앉았던 벤치에 소년 소녀가 앉아서 함께 조숙스러운 높은 웃음을 웃고 있다. 현은 돌아서고 만다. 손이 아직 끈끈하다. 무슨 배릿한 냄새까지 나는 것 같다. 다시 활엽수 있는 데로 간다. 이번에는 젖은 나뭇잎사귀를 뜯어서 두 손바닥으로 비벼 손등과 손가락 하나하나를 문지른다. 손에서 나는 냄새보다 강한 나뭇잎사귀의 청풀 냄새. 그러는데 손에 배릿한 냄새도 아니고 나뭇잎사귀의 청풀 냄새도 아닌 값싼 분가루 냄새 같은 것이 풍겨온다. 현은 담배를 붙여 문다. 아무도 없다. 다시 나뭇잎사귀로 손을 올리는데 희끄무레한 것이 현의 턱으로 나온다. 놀라 물러난다. 바로 옆에서 여자의 신경질스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담뱃불을 좀 빌리자고 한다. 현이 담배를 건네기 전에 내밀었던 여자의 손이 먼저 현의 입에서 담배를 빼간다. 그리고 담뱃불에 빨갛게 비친 여인의 코언저리에는 두꺼운 분으로도 감추지 못한 기미가 드러나 보인다. 담배 끝과 담배 끝이 떨어지자 여인의 얼굴은 담배 연기로 흐려진다. 어둠 속에서 여인은 현의 담배를 내준다. 현은 담배를 받으러 손을 내민다. 그 손을 여인의 손이 뿌리친다. 그리고 여인의 담배 쥔 손이 현의 입을 찾는다. 현은 입을 내민다. 그러나 여인은 담배의 불붙은 끝을 현의 입에 물리려고 한다. 현은 후딱 여인의 손을 쳐서 담배를 떨어뜨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떠난다. 뒤에서 여인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일어난다.
공원을 빠져나와 하수구 개천이 있는 곳을 안 지나고 구멍가게 옆골목 지름길을 잡는다. 퍽 가깝다. 집에 이르러 층층다리를 올라가니까 고양이가 방바닥을 핥고 있다. 아까 고양이에게서 토끼 새끼를 빼앗을 때 흘린 피라도 핥고 있는 모양이다. 고양이는 현을 보자 경계하는 눈을 한 번 들었으나 곧 다시 빨간 혀로 방바닥을 찬찬히 핥는다. 현은 언뜻 이 고양이를 좀 전에 공원에서 본 여인에게 가져다주리라는 생각이 든다. 현은 쓰다듬어주는 시늉을 하며 고양이에게로 가 잡는다. 고양이는 예사롭게 혀로 제 주둥이 끝을 핥아 들이다가 귀를 몇 번 날카롭게 놀리고 나서는 곧 현의 손을 핥기 시작한다. 아직 손에는 무슨 냄새가 남아 있는가 보다. 현은 수건으로 고양이의 눈을 가렸다. 고양이는 두어 번 바동거렸으나 곧 다시 현의 손등을 핥기 시작한다.
현은 고양이를 품에 넣고 몰래 집을 나선다. 하수구 개천이 있는 먼 길을 잡는다. 하수구 개천을 지나는데 갑자기 달빛이 내리비친다. 현은 고양이 넣은 품을 더 잘 감싼다. 달빛이 또 어두워진다. 공원에 들어서서는 곧 나무 밑으로 간다. 아까보다 더 젖고 냉랭한 나뭇잎사귀가 현의 귀를 차갑게 스친다. 고양이를 옆에 끼고 성냥을 그었으나 불이 젖은 나뭇잎에 닿아 꺼지고 만다. 다시 성냥을 그어 비춰보았으나 나뭇잎사귀가 거무수름히 번득일 뿐, 아무도 없다. 담배를 붙여 물고는 아까 소년 소녀가 웃던 빈 벤치로 가 앉는다. 야시도 다 파해가는가 보다. 아까보다 그쪽이 어둡다. 현은 앞 어둠 속에서 검은 것이 앞과 뒤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무슨 착각이나 아닌가 하고 자세히 지켜본다. 뒤를 맞붙인 두 마리 개가 제각기 번갈아 앞으로 움직이곤 한다. 달빛이 또 비친다. 이쪽을 향한 야윈 개가 길게 뺀 혀와 눈알을 빛내며 저쪽에 붙은 개를 몇 걸음 끈다. 그러면 저쪽 개가 곧 또 이쪽 개를 몇 걸음 끈다. 달빛 속에서 같은 동작이 몇 번이고 되풀이 된다.
달빛이 다시 가려지자 일어서는 현의 어깨에 와 실리는 것이 있다. 술 취한 여인이다. 아까의 여인인지 딴 여인인지 모르겠다. 현이 몸을 비키려는데 여인은 더 세게 목을 안으며 술 냄새 뿜는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누가 모를 줄 알고 그러느냐고, 애 내버리러 왔지 뭐냐고 한다. 고양이를 품에 넣은 것을 애로 잘못 알았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현은 더 품을 잘 감싸안는다. 여인은 현이 비켜서는 대로 쫓아오며, 사내냐 계집애냐 한다. 현이 힘껏 여인을 뿌리친다. 여인은 비틀거리다 주저앉아서는, 요맘때가 애 내버리기 꼭 좋은 때라고 하면서 자기는 사내애와 계집애 쌍둥이를 낳아서 여기 가져다 버렸노라고 하고는 별안간 속 빈 웃음을 웃기 시작한다. 현은 다시 달빛이 비치기 전에 피하듯이 그곳을 떠난다.
공원 한끝에 이른 현은 혹 아까의 여인에게 이 고양이를 준다는 것이 자기 하숙집 젊은 여인에게 주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도둑고양이라도 돼버리고 말라고 공원에다 놓아주기로 한다. 현은 고양이 눈에서 수건을 풀고는 힘껏 어둠 속으로 던진다. 그러고는 뛰어 공원을 빠져 밝은 거리로 나와 뒤를 살핀다. 따라오지 않는다. 현은 고양이를 품고 온 길과 다른 구멍가게 옆
골목길로 질러간다. 젊은 여인이 돌아오면 고양이를 찾을 테지.
그러나 층층다리를 올라와 보니 고양이가 먼저 와 구석의 어항물을 핥고 있다. 현은 전등을 끈다. 달빛이 창으로 새어 들어온다. 고양이가 그냥 물을 먹는다. 현은 쓰다듬을 듯이 가서 고양이의 허리를 찹아 어항에서 떼어낸다. 어항이 고양이의 앞발에 걸려 넘어진다. 물과 함께 봉어가 달빛 속에서 한 개의 큰 비늘처럼 팔딱이며 뛴다. 현은 봉어를 어항에 도로 넣기 전에 고양이의 목을 쥔다. 토끼 새끼를 모조리 다 잡아먹었으니 이번에는 붕어까지 잡아먹을 차례렷다. 고양이는 목을 쥔 현의 손을 혀로 핥는다. 현은 손에 힘을 준다. 죽어라. 고양이의 눈알이 달빛 속에서 파랗게 불붙는다. 고양이의 발이 현의 손을 할퀸다. 점점 더 손에 힘을 준다. 죽어라, 죽어라. 고양이의 눈알에서 불티가 튀는 순간 현은 그만 고양이의 목을 놓고 만다. 그러자 방바닥에 떨어진 고양이는 발로 허공을 몇 번 할퀴고 나서 발딱 일어나 방문의 좁디좁은 틈새로 빠져 나간다.
현이 이제는 팔딱이지도 못하는 붕어를 아직 밑에 물이 조금 남아 있는 어항에 넣어가지고 우물로 데려간다. 붕어가 등을 감추지 못할 얕은 물에서 흰 배를 옆으로 뉜 채 움직이지 않는다. 어항에 새 물을 붓고 난 현은 돌아서다 검은 하수관 구멍 가에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한다. 계집애가 꽂아놓은, 꽃잎이 다 떨어진 꽃가지 새로 돌고 있다. 현이 꽃가지를 가만히 헤치고 그것을 건져낸다. 고기 새끼다. 하수구 개천에서 하수관을 타고 올라온 고기 새끼일까. 그러면 하수구 개천에도 고기가 산단 말인가. 그렇더라도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까. 어쨌건 현은 얼른 고기 새끼를 물에 씻어 어항에 넣어가지고 위층으로 올라온다.
현은 우선 전등을 컨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하수관에서 잡은 고기 새끼는 눈알이 없다. 그리고 눈이 있어야 할 곳은 물크러진 것처럼 약간 파여 있다. 몸이 온통 검은 눈먼 고기 새끼는 막 분주히 헤엄쳐 다닌다. 그러면서 겨우 등을 바로 세우고 숨 가삐 지느러미질을 하는 어항에 남았던 붕어와 부딪치곤 한다. 그러면 어항에 남았던 붕어는 그저 몸을 잠깐 움직일 뿐으로 눈
먼 붕어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다시 한곳에 머물러 열심히 지느러미질만 한다. 눈먼 고기 새끼는 더 날뛴다. 어항을 받기도 하고 꼬리만 남기고 거의 다 물 위에 뛰어오르기도 한다. 그러다가 눈먼 고기 새끼는 갑자기 배를 모로 눕힌다. 그러고는 곧 지느러미질을 멈추고 만다. 어항에 남았던 붕어가 이때는 완전히 전처럼 회복된 듯이 활발하게 물속을 헤엄쳐 다니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 물살에 눈먼 고기 새끼는 꼬리를 위로 띄운 채 조금씩 흔들린다.
현은 눈먼 고기 새끼를 집어낸다. 눈먼 고기 새끼는 어느새 배가 부었다. 현은 창가에서 아래로 던진다. 눈먼 고기 새끼는 그대로 달빛 속에 흐린 비늘처럼 빛나면서 떨어진다. 그러자 토끼장 있는 데서 고양이가 잽싸게 달려와 눈먼 고기 새끼를 물고는 다시 토끼장 밑으로 달아난다.
어미토끼를 실험실로 가져간 날 저녁 하숙집으로 돌아오던 현은, 개가 아니면 소변보지 마시오, 라고 쓴 곁에 또, 개의 변소, 라고 쓴 벽과 썩은 쥐며 똥이며 깨어진 그릇이 마구 내버려져 있는 빈터를 지나 톱질하는 앞에 이른다. 오늘은 사내애가 톱질하는 데를 다 지난 곳에 돌아앉아 있다. 톱밥을 날라다 산이라도 만들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현은 사내애의 뒤를 지나며 뜻 없이 사내애의 앞에 눈이 가자 놀라서고 만다. 사내애의 앞에 놓여 있는 것은 토끼 새끼가 아니냐. 지금 사내애는 곱게 다듬은 사금파리에 톱밥을 담아 토끼 새끼 앞에 먹으라고 내놓는 참이다. 토끼 새끼는 그러나 꼼짝도 않는다. 죽어 있다. 사내애는 계집애와 안 노는 동안 토끼 새끼를 한 마리 한 마리 몰래 꺼내다가 이 놀음을 했단 말인가. 뒤에 자기가 서 있는 것을 사내애가 깨닫기 전에 그곳을 떠나려는 순간, 난데없이 뒤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달려오면서 사내애가 미처 손쓸 새 없이 토끼 새끼를 물고 달아난다. 현이 있는 집 고양이다. 뒤이어 사내애가 윽 소리를 지르며 저녁 그늘 속으로 고양이를 쫓아간다. 그 뒤를 현도 같이 고양이를 쫓아달리기 시작한다.
-끝-
2016년 5월 10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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