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재발견
김주선
섬마을의 정오, 함박눈 내리는 날, 귀향, 언덕 위의 빨간 집, 독거촌의 만설, 노인과 바다, 그리고 남과 여. 이 모두가 수석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 이름이다. 크게는 산수경석과 형상석이지만, 고가의 작품이라고 할 정도로 지방자치단체에서 보호하고 관리하는 수석이다.
어느 애석인의 석실을 탐방하는 유튜브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푹 빠져들었다. 자연이 그린 그림이라고 하기엔 그 문양이 경이로움과 신비 자체였다. 처음 수석을 보았을 때는 그저 돌덩어리일 뿐, 별다른 감흥을 못 느끼던 차에 유난히 눈에 띄는 문양석에 그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언뜻 보기에는 갈색빛 모암母岩에 차돌이 박힌 거북이 문양처럼 보이지만, 수석 전문가가 말하길 ‘애로석’이란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에 버금가는 관능적인 작품이라나. 설명을 듣고 보니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긴 했다. 제목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데다가 아기 얼굴만 한 크기의 돌에 한 편의 명화를 새긴 듯 수천 명의 구독자가 감탄을 자아냈다.
초등학교 동창밴드에서 6학년 때 담임이었던 선생님의 소식을 듣고 그가 진행하는 인터넷TV ‘애석인 탐방’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일흔이 넘은 선생은 한평생 돌과 연을 맺고, 산이며 강이며 바다로 나가 탐석探石을 하며 지냈다. 취미가 낚시, 바둑, 서예라는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을 만큼 수석 또한 흥미롭지 않은 분야였기에 내 관심 밖이었다.
처음에는 매직아이 그림을 보는 듯했다.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봐도 해독이 불가능한 그림 패턴이었기에 숨은 그림을 찾기보다는 그저 쓰잘떼기없는 돌이라 생각했다. 오랜 세월 풍화작용을 견뎌낸 두 석질石質의 결합일뿐, 모암에 박힌 광물질의 문양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분무기로 물을 뿌려 돌을 적시니 그제야 한 점 그림이 나타났다. 모호했다.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어린왕자』의 여우처럼 나는 마음의 눈을 부릅뜨고 돌을 보았다. 본디 ‘추상석’이란 보는 것과 믿는 것이 달라 개개인의 심미안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지도 모른다.
봇짐을 지고 어디론가 떠나는 나그네의 뒷모습 같다는 둥, 꼬부랑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걷는 것 같다는 둥, 수석 전문가인 그는 마치 현대 미술관에 걸린 추상화를 설명하는 큐레이터 같았다. 듣고 보니 또 그런 듯하였다.
진귀한 돌을 흠모하고 기품있는 돌을 애완하는 시대라지만, 여전히 나는 난독증에 빠진 환자처럼 수석을 감상할 줄 모르다가 최근 글 소재를 찾던 중 놀랍게도 돌을 재발견했다. 돌도 수필처럼 테마가 있고 스토리가 있는 예술작품이라는 것을. 조가비를 품고 있는 화석처럼 억겁의 세월을 건너온 돌이 품고 있었던 수많은 사연을 볼 수 있었다. 물고기, 새, 꽃, 달, 동물, 얼굴, 산수, 초가집 등. 한 소절의 아포리즘 문장을 보는 듯 기분이 짜릿짜릿했다.
대게의 수석인이 탐석을 나가면 자연이 빚은 예술작품 한 점 한 점을 들춰보면서 집으로 데리고 와 씻기고 보듬을 것인지, 현장에서 감상만 하고 버리고 올 것인지를 결정한다. 모암이 좋고 수마가 매끈하게 형성된 것이 좋고, 소재를 찾을 수 있는 짙은 색채의 문양이면 더욱 좋다. 모암이 적당하게 둥글고 잘생겼다 해도 석질이 약하거나 파(균열)가 나 있으면 현장에서 감상만 하고 두고 오는 게 수석인의 바른 자세다.
돌의 크기와 그림의 비율이 잘 어우러져야 구도가 좋은 작품이며 만고풍상을 겪어온 내력이 돋보인다면 그것은 돌이 아니라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보석일 것이다. 가공이 아닌 자연석에서 이 같은 작품을 발견하기란 엔간한 발품을 팔지 않고는 다다를 수 없는 도의 경지일 게다.
원주에 사는 올해 65세 된 김정순 씨는 수필가였지만 지금은 수석 수집가가 되었다. 그녀는 한동안 절필했었다. 며느리 첫인상에 대한 수필을 썼다가 아들 내외와 사이가 틀어져 관계가 소원疏遠해지자 분가시켰다. 내세울 거 없는 집안에 인물도 없고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착한 심성에 끌려 받아들였다고 썼다던가. 아무튼 그 일로 당신 손을 떠나는 글이나 당신 입을 떠나는 말에 두려움이 생겨 펜을 놓고 전국을 쏘다녔다. 지금은 며느리도 나이가 들어 서로 마음을 비벼대고 살지만, 한동안 괴로웠다고 언젠가 수필에 소회所懷했었다.
사오월이 지나면 영월 주천강에 금어기가 풀리고 쏘가리를 잡을 수 있는 계절이었다. 마음 둘 곳 없어 강으로 산으로 바람 쐬러 다니다가, 주천강 섶다리 부근에서 명석을 하나 주운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도 주말이면 빈 가방을 둘러매고 집을 나선다. 그녀가 주운 것은 흰 수건을 쓰고 포대기를 대서 아기를 업은 문양석으로 전형적인 모자상이었다. 물때가 낀 돌인지라 그림이 선명하지 않았지만 흐르는 물에 담그고 문질러 씻었더니 마치 자기 모습처럼 선명하게 보여 울컥하더란다.
정순 씨는 아마추어 시절에 모든 돌이 다 사연 있어 보이고 길가의 돌 하나도 허투루 보이지 않아 가방 한가득 주워 오곤 했다. 어느 날, 수석 전문가가 보더니 있던 자리에 다 돌려놓고 오라고 했다. 다시 무거운 돌 가방을 지고 가 물고기알이라도 품는 돌이 되라고 물속에 담그고 오기를 수없이 반복, 어느 날 보니 그녀는 돌보다는 도를 닦는 수행자처럼 보였다.
수석은 물속에 있으면 여느 돌과 별 차이가 없지만, 물 밖으로 나오면서 부富가 되고 욕망이 된다. 한 예로 영화 「기생충」이 그랬다. 초반부에 고급상자에 담겨 나올 때 핵심적인 소재라는 걸 나는 눈치챘다. 결말에 가서 수석을 다시 냇물에 되돌려 주는 장면은 영화의 주제와 맞물려 아직도 생생하다.
어쩌면 모자석은 정순 씨 눈에만 보이고 그녀만 해석이 가능한 회화적 문양이었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한 점도 못 줍고 공치는 날도 있다고 하니 그녀는 돌을 줍는 게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오는 게 아닐까. 빈 가방으로 돌아오는 날이 훨씬 많아졌다.
진정한 수석인은 돈벌이의 수단이 되기보다는 자연이 남긴 예술품을 잘 관리하고 보존하는 사명감을 가져주면 좋겠다. 10년 전만 해도 문제가 없었지만, 요즘은 일부 지역에서 돌 반출이 통제되고 자연보호라 하여 함부로 돌을 줍는 일이 어려워졌다. 무더기로 돌을 캐내어 상업적으로 파는 몰지각한 사람들 때문에 정순 씨 같은 수석인이 욕을 먹기도 한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차피 풍화작용으로 부서지는 게 돌이기에 가장 아름답고 멋스러울 때 탐석하여 전시관에 보존해 주는 것도 자연보호라 생각했다.
한번은 다슬기를 잡는다는 핑계로 그녀를 따라갔다가 나도 손에 잡히는 둥근 돌 하나를 주워왔다. 의미는 없었다. 그냥 돌 절굿공이처럼 견고하고 오돌토돌 주름이 진 돌의 살갗이 예뻐 보였는지 주방에 놓고 싶었다. 마늘을 찧고 생강을 찧고 홍고추를 찧을 때마다 그날의 강가를 생각했다. 비록 돌확에 넣고 양념이나 으깨는 도구일지라도 마음만은 호피 문양의 쏘가리 한 마리를 새겨넣었다. 언젠가는 강으로 돌아가 물고기를 품는 돌이 되겠지만 말이다.
2023.3월호<한국산문>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