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읽다
황진숙
선을 읽는다. 선이 불러일으키는 무수한 감각이 돌올하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햇발에서부터 하루의 끝을 몰고 오는 어둑발까지, 아니 홀로 깨어 있는 새벽녘까지 선은 그네들에게 깃든 기운을 드러내며 풍경을 이룬다. 말이 없는 사물의 내면을 시각화하며 의미를 발화한다.
오랜만에 지인을 방문했다. 주인장이 반갑다며 차를 내온다.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케모마일 차를 권한다.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는데 찻잔이 예사롭지 않다. 입술을 맞대는 부분부터 바닥까지 금이 그어져 있다. 그로부터 파생된 몇 줄기의 선들이 넝쿨처럼 뻗어나갔다. 흘러내리는 물줄기 같기도 한 선들은 금분으로 치장되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주인장이 설거지하다가 놓쳤다며 깨진 부위를 접합했다고 말해준다. 애장하는 잔이라 차마 버릴 수 없었단다.
찻잔도 수선이 되는구나. 신기한 마음에 잔을 들여다본다. 부서지는 순간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선의 기세가 거침없다. 순식간에 그의 상처에 가 닿는다. 떨어지는 찰나의 파열음과 충격이 손끝에 감지된다. 숱하게 맞닿은 입술의 촉각, 감싸 쥔 손길의 체온 등 제 몸에 와 닿던 감각들은 조각조각 바닥에 나뒹군다. 온기와 냉기를 머금은 잔의 기억이 파편으로 남을 뿐이다.
쓸모를 다한 한탄과 비애로 자포자기했다면 되살아나지 못했을 터이다. 서슬 퍼런 상처를 딛고 일어선 찻잔이 당당하다. 산산조각이 난 순간이, 아물린 흔적으로 견고하다. 부서진 파편을 모아 이어붙인 궤적이 고스란히 감촉된다. 함부로 저를 대하지 말라는 듯 자의식을 표출하는 서사가 맹렬하다. 깨짐과 복원을 오가며 응축된 힘으로 자기 존재를 증거하고 있음이다. 파동치는 기운을 오롯이 전하는 선의 자취로 평범했던 잔은 비로소 그만의 무늬로 완성된다.
얼마 전엔 부장품인 옛날 잔을 봤다. 어떤 꾸밈도 치레도 없이 구연부를 둘러친 한 줄의 돌대가 모양새 전부였다. 땅속에 박혀 있느라 마모되고 거칠어진 잔의 살갗과는 달리 지하의 어두침침한 시간을 견딘 선은 단호했다. 두루뭉술하게 원형을 이루지만, 망자를 지키기 위한 굳은 결의가 각인되어 생동했다. 선을 쫓다 보면 물레를 돌리던 도공의 모습이 떠오르고 차를 나눠 마시며 한유한 시간을 누리던 옛사람들의 풍경도 스쳐 간다. 이름 모를 이들의 정서가 까마득한 시간을 넘어와 가슴을 두드린다. 무덤의 주인은 썩어서 진즉에 흙으로 돌아갔건만, 살아남아 먼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곡선의 숨결이 고적하다. 저승과 이승의 시간을 잇대고 있음이다.
그런가 하면 제멋대로의 선들에선 정감이 느껴진다. 허술하게 둘러친 돌담을 거닐 적엔 잠시 멈춰 선다. 엉성한 생김새가 주는 빈틈을 엿보기 위해서다. 모양이나 격식에 얽매지 않는 돌담의 자유가 여유롭다. 크고 작은 막돌의 불규칙한 선들이 이웃하며 질서를 이루어내니 흥겹기까지 하다. 굴뚝 위에 얹어진, 모양이 일그러진 항아리와 조우했을 적에는 웃음이 나왔다. 온전한 배불뚝이가 아니라고 항아리가 아닌 건 아니잖은가. 그게 뭐 대수냐는 듯 무너진 허리선을 부여잡고 태연히 먼산바라기를 하는 자태가 능청스럽다. 재주라곤 부릴 줄 모르는 숫배기처럼 기교 없는 선들이 정답기만 하다.
흘러가는 물줄기나 끝없이 이어진 길에선 유유자적하는 선이, 방치된 폐선이나 갈 곳이 없어진 정물에선 고독한 선이, 낮게 내려앉는 이내나 야트막한 산의 능선에선 푸근한 선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배경으로 존재한다.
제각각인 선들과 얽히고설켜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도 선을 이룬다. 사물의 선이 몸태이자 깃든 사연이라면 사람의 선은 살아가는 행적이다. 에스 라인의 곡선미나 역삼각형의 단단한 체형을 지닌 젊음의 몸 선은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갈 꿈과 이상으로 탄탄하다. 돌고 돌아 소멸의 끄트머리에 들어선 경직된 몸은 애잔하다. 삼동의 추위에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물기 하나 없이 말라가는 덕장의 목숨처럼, 인생살이의 담금질로 구부정해진 육신은 바짝 말라 펴질 줄 모른다. 직선같이 내리꽂히던 치기 어린 시절이 가고, 곡선같이 완만한 타협의 시기를 건너 주름선같이 겹쳐질 대로 오그라든 실루엣이 서글프다.
이고 진 짐으로 허우적거리느라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쏠린 내 모습은 어떤 모양일까. 가풀막을 오르느라 굽은 등이 수북하다. 길을 찾지 못해 제자리를 빙빙 돌기도 하고,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서성거리던 발걸음이 어지럽다.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직립의 의지를 다지건만, 까부라지기 일쑤다. 바닥을 기며 시들어가는 화분 속 줄기처럼 선의 동세가 미약하기만 하다.
생성과 소멸의 이치처럼 무수하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선. 사물의 주체로, 역사로, 배경으로 이쪽저쪽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존재하는 선이 묵직하다. 공간과 시간을 채우고 세상을 응시하며 인간사를 비추는 내재된 기운으로 약동한다.
살아가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마주하는 선에 깃든 의미를 찾아 헤아리는 일일 게다. 처처에 자리 잡은 선을 완만히 읽어내길. 느긋하게 아우르길.
선을 읽으며 사색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