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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5. 묵상글 ( 대림 제2주간 금요일. - 사랑의 장단에 춤 추는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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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5. 대림 제2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의 장단에 춤 추는
대림 2주 금요일-2022
오늘 주님께서는 짧은 비유를 드시는데
당신 세대가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 같다고 하십니다.
당신 세대가 아이들처럼 미성숙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어떻게 미성숙하냐 하면
자기가 반주해주는 대로 춤추지 않고
장송곡을 연주해도 같이 애도하지 않는다고 서로를 탓합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나의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면서
정작 자기는 남의 장단에 춤추지 않는 완전히 자기중심의 미성숙이지요.
그런데 이런 미성숙도 있습니다.
남의 장단에 놀아나고
아무 장단에 춤추는 미성숙입니다.
이런 미성숙도 또 있습니다.
남의 장단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아예 어느 장단에도 꿈쩍 않는.
이는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못하고 어느 것에도 공감하지 못하며
완전히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이고 혼자 웅크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미성숙이 있습니다.
미성숙 1: 내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는 자기중심의 미성숙.
미성숙 2: 아무 장단에나 놀아나는 줏대 없는 미성숙.
미성숙 3: 어느 장단에도 꿈쩍 않는 경직되고 자폐적인 미성숙.
그러므로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란
나의 장단에 남이 춤추기를 바라지도,
남의 장단에 내가 놀아나지도 않으며,
아무 장단에나 춤추지 않지만,
어느 장단에는 춤추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성숙한 사람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출까요?
사랑의 장단에는 춤을 추고,
신앙적으로는 하느님 장단에는 춤을 춥니다.
자기 사랑,
이웃 사랑,
하느님 사랑에 어긋나는 장단에는 놀아나지 않고,
사랑의 장단에는 어울려서 춤추고 신명 나게 춤을 춥니다.
쓸데없는 말이나 남을 해치거나 흉보는 말은 듣지 않고,
하소연과 도움이나 동감을 얻으려는 말은 귀담아들으며,
하느님의 말씀은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그런데 예수님 당대의 사람들은
요한의 말도 듣지 않고 주님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요한은 굶는다고 비난하고
주님은 먹는다고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거부하면 그 사람의 어떤 말도 거부하기 마련이지요.
반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하느님의 계명을 들을 것이고,
그 사람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함께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이 대림 시기에 귀담아들어야겠습니다.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9장)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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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5.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우리가 피리를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6-17)
이 비유의 뜻은 명료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의 놀이는, 요한의 “회개의 세례의 선포”(마르 1,4;루카 3,3)에도 회개의 가슴을 치지 않고, 예수님의 “하늘나라의 복음의 선포”(마태 4,23;9,35)에도 기뻐 춤추지 않는 세대를 말해줍니다. 혹 우리도 뉘우침의 눈물도, 복음의 기쁨도 없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폐쇄와 계시에 대한 배척의 뿌리에는 무관심과 영적무지와 완고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완고함’이란 마치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보고 입이 없다고 투덜거리거나 바닥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바로 세워놓고 보면 입도 있고 바닥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 뿌리에는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지진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완고함’이란 사실을 바로 보고자 하지 않는 비뚤어진 마음 때문에 ‘목이 뻣뻣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외침을 듣고도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먹보요, 술꾼이요, 죄인들의 친구’라고 조롱합니다. 사실, 이쯤 되면, 예수님의 사랑은 안타까움과 비탄을 넘어 아픔입니다. 결국, 당신의 사랑은 춤추지도 곡하지도 않는 냉대와 완고함이라는 가시에 찔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됩니다. 사랑이 거부당한 아픔입니다. 내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냉대할 때, 바로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완고할 때, 그렇게 당신의 눈에는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내가 내 형제를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은 그렇게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하신 일은 십자가에 달리시어 자신을 ‘깨뜨려’ 찢고 나누어 건네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을 먹고 자신도 ‘부서져’ 쪼개고 나누어져 다른 이에게 건네주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실 때 벌리시는 일은 우리를 ‘깨뜨리고 부수는’ 일이요, 진정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가 ‘찢기어지고 나누어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살아 있으며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영께서 오시어 벌리시는 일은 우리와의 교제와 친교로 진리를 깨닫게 하고 새롭게 하여, 변화와 성화로 주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성령께 응답한다면, 다윗이 주님의 계약 궤 앞에서 춤추었던 것처럼 우리도 춤추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과 영을 제 마음에 들게 맞추기보다 제가 꺾이고 부서져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마태 11,17)
주님!
제 마음이 무디어 져 있습니다.
빛보다 어둠에 치우쳐 있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진리를 보고도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제가 당신의 말씀을 냉대할 때, 당신의 가슴은 가시에 찔리셨을 것입니다.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할 때, 당신의 눈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이제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울고, 함께 웃게 하소서!
완고함의 벽을 헐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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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5.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어주고
자기주장을 펴고 그것만이 옳다고 우기는 세상이 되어갑니다. 자기 뜻대로 하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틀렸다고 말합니다. 다름을 인정하기보다 서로를 비난합니다. 정치 현실을 보면, 여당과 야당은 옳고 그름, 더 큰 선을 지향하는 정책과는 상관없이 갈라져 싸웁니다. 세대 간의 갈등도 만만찮습니다. 마음 한 번 굽으면 모든 것이 굽어 보이게 마련입니다. 거짓은 거짓을 키워가고 결국 악은 악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결코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넉넉함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성숙함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장터에 앉아“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11,17).고 말하는 아이들의 비유를 통해 제 뜻대로 하자고 우기는 세상을 드러내 줍니다. 제 입맛에 맞지 않으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틀렸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어찌 제대로 통하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면 하하거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덜대는 세상에서 누구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아주 엄격한 속죄의 생활을 하였던 요한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고, 버림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리끼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굽어서 이것도 저것도 다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는 것이요,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비위를 맞출 이유도 없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요한의 시대나 마음이 굽어있는 이상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눈이 뜨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누구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봐줄 줄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것은 인정하고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함께 피리를 불 줄 알아야 하고, 함께 장례 놀이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 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 너의 온몸이 환하여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이 그 밝은 빛으로 너를 비출 때처럼, 네 몸이 온통 환할 것이다”(루카11,34-3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우리 영혼을 환하게 비추어 언제나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서로를 존중하고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뜻을 알고 행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느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이 무엇을 바랄 것인지 또 성도들과 함께 여러분이 물려받을 축복이 얼마나 놀랍고 큰 것인지를 알게 하여주시기 바랍니다.”(에페1,18).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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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5.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끔 미사를 봉헌하는 ‘꿈’을 꾸지만, 며칠 전에는 아주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미국에서 사목하는 선배 신부님의 서품 4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신부님들이 10명 이상 모였고, 교우들도 많이 왔습니다. 신부님 중에 한분이 몸이 불편하신 장애인이었습니다. 불편한 몸으로 주례 사제 옆에서 복사를 서는데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였지만 제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미사에 함께하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제의를 깜빡하고 놓고 와서 다시 제의를 가지러 갔습니다. 교구청에서 5년, 미국의 가톨릭평화신문에서 5년째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10년 가까이 본당을 떠나있었기에 그런 꿈을 꾼 것 같았습니다. 물고기는 물에 살아야 하듯이, 사제는 교우들과 함께 지낼 때가 가장 보람 있고, 행복한 것 같습니다. 황량한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어서 먼 길 가는 나그네에게 위로가 되는 것처럼, 매 주일 함께 하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미사는 제게는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지난 10월 한국에 휴가 갔을 때입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내던 동창신부님이 20년 만에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사제생활 32년 중에 10년은 유학 갔었고, 20년은 학생들을 가르쳤고, 드디어 첫 본당의 주임신부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SNS에 교우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사진과 글을 통해서 공유하고 있습니다. 참기름이 고소한 것처럼, 신부님의 첫 본당 생활에 깨가 쏟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본당의 외벽을 도색한 이야기, 사목위원 연수 이야기, 시니어 아카데미 학생들의 공연 이야기, 레지오 단원들 훈화 이야기, 장례 미사 이야기, 혼배 주례 이야기, 주일학교 학생들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신부님의 행복한 모습을 보니, 마치 먼 여행을 마치고 그리운 가족들의 품으로 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행복은 거창한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모든 것이 충족되면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은 작은 것들에서도 감사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해야 할 것들을 마땅히 사랑할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불행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불행은 결핍과 가난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불편할 수 있지만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결핍과 가난 속에서도 행복은 씨를 뿌리고 꽃이 피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불행은 어디에서 시작될까요? 오늘 제1 독서는 불행의 시작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에서 멀어지면 불행은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잊어버리면 불행은 불쑥 찾아옵니다. 그렇습니다. 불행은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멀리하면서 찾아옵니다. 행복은 작은 일에 감사하고, 해야 할 일을 사랑할 때 찾아옵니다.
오늘 화답송은 그래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비록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고 하여도 아쉽지 않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불행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사랑하며 행복한 날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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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5.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이 말들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기준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우리 주님보다 먼저 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요한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미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러한 요한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세상 종말이 막 닥칠 것처럼 말하는 미치광이라고 이야기했을지 모릅니다.
그런 후 우리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회개하라고 외치며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웃고, 사람들 속에서 사랑과 치유를 베푸시는 주님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자는 가짜입니다. 저자는 먹고, 마시고, 사람들과 늘 어울립니다. 거룩함이란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저런 사람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이 보여 준 모습은 광야와 같은 곳, 즉 모든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향해 기도하는 영적인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여 주신 모습은 인간들 안에서 사랑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이 두 모습 모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이 옳다며 어느 한쪽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안에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절제하고 절제하며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모습 말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랑의 모습도 우리가 지니기를 기도합니다.
새로운 별명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제 별명은 이정도였습니다.
1. 주장 (피구왕 통키에 등장하는 주장과 비슷하게 생김)
2. 요리왕 비룡 (처음 동기들에게 손칼국수를 만들어 준 날 생김)
3. 민쉐프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한 날 생김)
4. 요리공주 민키 (동기모임날 장난치다 생김)
그리고 하나가 더 생겼습니다.
한 자매님께서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이곳에 기도쪽지를 써놓고 갔는데... 그리고 신부님께서 그 기도쪽지의 기도를 함께 기도해주신다고 하셨는데, 정말고 기적처럼 기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신부님은 ‘민기적’ 신부님이십니다.
이렇게 생겼습니다. 새로운 별명.....
민기적, 민기적, 밍기적, 밍기적......... 밍기적, 흐느적, 민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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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5.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본당에 어떤 행사를 계획하면 꼼꼼하게 챙겨야 할 것이 많아집니다. 다가오는 성탄 자정 미사를 위한 준비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전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성가는 무엇이 좋을지, 미사 후의 뒤풀이는 어떻게 할지, 그날의 봉사자는 어떤 단체가 해야 할지 등등…. 신경 쓸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매일 하는 것이 아닌 일 년에 딱 한 번 맞이하는 예수님의 기쁜 성탄이기에 특히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성탄을 기억하면서 잘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일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중요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 24,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하나도 없습니다. 분명히 중요한 일인데도 말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무계획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무계획은 주님을 오롯이 따르겠다는 고백을 통해, 즉 주님께 바치는 기도에 의해 채워지는 것이었습니다. 당신께 대한 믿음, 당신 뜻을 따르는 사랑 실천을 통해 하느님의 무계획이 조금씩 채워져 구원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라는 말씀만 보고서 아직도 그날이 멀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삶으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것이기에 아직 무계획처럼 보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으로 채워지는 계획이기에 지금은 무계획처럼 보이지만, 계속 미루다가는 커다란 후회만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세대를 장터에서 노는 아이에 비유하십니다. 피리를 불면 함께 춤을 추면서 즐겨야 하고, 곡을 하면 함께 가슴을 치면서 아파해야 하는데, 지금 세대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만 현세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귀를 막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마귀가 들렸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드시고 마시자 먹보요 술꾼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 또 받아들이지 않으니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도 불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의 뜻에 함께하면서 하느님의 무계획을 채워야 하는데, 예수님을 오히려 반대하면서 하느님의 계획에 동참하지 못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뒤로 미루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도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 세상 것을 모두 채우고 나서야 하느님의 일을 따르겠다는 안일하고 자기 편한 마음을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크게 후회할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오늘의 명언: 사람은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하다(에이브러햄 링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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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5.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배움의 여정(旅程)
-우리는 모두가 주님의 평생(平生) 학인(學人)이다-
“주님이 오시니 마중나가자. 주님은 평화의 임금이시다.”(복음 환호송)
대림시기 매일미사 전례문이 참 아름답고 깊습니다. 본기도부터 영성체후 기도까지 내용이 주옥처럼 빛납니다. 지난 12월12일은 멕시코의 과달루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날 87세 노령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터뷰 기사중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과의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고 싶습니다. 선종한지 오래된 느낌인데 작년 2022년 12월31일에 선종한 전임 교황입니다.
“나의 건강은 좋아지고 있다. 나는 사임할 계획은 갖고 있지 않다”라는 제하에 계속된 다음 전임 교황과의 이어지는 우정에 대한 고백입니다.
“나와 교황 베네딕도와의 관계는 매우 가까웠다. 때때로 나는 그분께 상의하러갔다. 위대한 지혜를 지닌 그분은 나에게 그분의 의견을 주곤 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나에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너는 네가 생각한 것을 안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을 나의 손에 남겨 주셨다.
그분은 언제나 나를 도왔으며, 이점에 있어 참 관대하셨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모습도 잊지 못한다. 그분의 의식이 또렸했으나(lucid) 더 이상 말씀하시지 못했고 나의 손을 꼭 잡았다.
그것은 아름다운 작별이었다. 3일후 그분은 돌아가셨다. 교황 베네딕도는 위대한 분이셨고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을 때 ‘충분하다(enough)’ 말할 용기를 지녔던 참으로 겸손하고 단순한 분이셨다. 나는 이분을 숭배한다(admire).”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참 진솔한 고백입니다. 얼마나 교황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우정의 관계, 우정의 여정인지 깨닫습니다. 우리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두분의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우정을 통해서 우리는 또 우정을 배웁니다. 평생 주님의 섬김의 배움터인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평생 학인인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배움과 섬김”, 제가 좋아하는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이런 평생 배움의 학인들에게 경청과 겸손은 필수덕목입니다. 수도자의 두 특질(特質)은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이란 아름다운 정의도 잊지 못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들의 공통적 자질일 것입니다. 어제 어느 유명한 물리학자의 인텨뷰 기사도 생각납니다.
“생명은 우주에서 가장 흔한 원자로 되어있지만 우주는 죽음으로 충만하다. 생명은 지구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것이니, 지금까지 지구밖에서 생명이 발견되지 않았다. 우주 전체를 통해 보면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생명이야말로 부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물리학자의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면 생명은 더없이 경이(驚異)롭고 삶은 더욱 소중(所重)하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생명은 참으로 경이롭고 신비롭고 소중합니다. 한편 하느님을, 파스카의 신비를, 생명의 신비를 모르는 무지에 눈먼 물리학자의 그 많은 지식이 참 허무하고 빈약하게 느껴집니다. 새삼 하느님 믿음의 은총이 얼마나 고마운지 깨닫습니다. 그러니 더욱 하루하루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배움의 여정에 충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배움중의 배움이 하느님 공부요 참나의 공부요 평생 과정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탄식하는 세대는 말그대로 무지한 세대입니다. 배움의 여정에 참으로 소홀했을 때 살아있는 사람이라 볼 수 없는, 편견으로 굳어진 완고한 사람, 공감과 배려 감각이 사라져 반응할줄 모르는 무감각한 사람이 됩니다. 예나 이제나 반복되는 무지한 세대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편견으로 굳어져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제멋대로 마귀들렸다 하며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자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며 굳어진 편견의 확증편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또한 무지의 병입니다. 깨어 배움의 여정에 소홀할 때 누구나 이런 무지한 꼰대가 될 가능성입니다. 그러니 희노애락 온 감정을 담아 깨어 찬미감사 기도를 바치는 공동전례은총이 무지의 병에 대한 참 좋은 치유제이자 예방제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말씀이 오늘 복음에 빛을 던집니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지혜인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전생애가 하늘나라의 실현이자 지혜의 발현입니다. 지혜의 빛이자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관계가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 말씀은 그대로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영원한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 말씀처럼 들리는 다음 말씀이 참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습니다.
“나는 주 너의 하느님, 너에게 유익하도록 너를 가르치고, 네가 가야할 길로 너를 인도하는 이다. 아, 네가 내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너의 평화가 강물처럼, 너의 의로움이 바다 물결처럼 넘실 거렸을 것을. 네 후손들이 모래처럼, 네 몸의 소생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을 것을, 그들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을 것을.”
작금의 한국 현실에 대한 비판같기도 합니다. 저출산이 한국보다 심각한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후손들이 모래알처럼 많아지기는커녕 지금같은 추세라며 현재 5171만명 인구는 50년후 2072년에는 2천만이 감소한 3017만. 100년후에는 4천만이 감소한 1085만명에 불과할 것으로 통계청은 내다 봤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대한민국의 소멸입니다. 성소자가 없어 사라져가는, 문닫는 수도원의 이치와 똑같습니다.
말 그대로 희망이자 꿈이요, 길이자 빛이요, 생명이자 진리인 하느님을 잊고 무지와 탐욕의 늪에 빠진, 깊이 병든 사회 현실을 반영합니다. 기후위기와 더불어 총체적 위기에 처한 세계요 저출산의 대한민국은 특히 그러합니다. 일본은 세자녀 이상 둔 가정의 아이들은 나라에서 대학까지 완전 무상 교육시켜 준다 합니다. 새삼 깨어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배움의 여정에 충실한 경청과 겸손, 배움과 섬김의 평생학인으로 정진해야 할 대림시기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지혜의 빛이신 주님을 모심으로 우리 모두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배움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시편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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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5. 대림 제2주간 금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뜻 이루는 지혜>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마태오 11,19)
하느님의 뜻 이루려
비워야 할 때에
비우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채워야 할 때에
채우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물러나야 할 때에
물러나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나아가야 할 때에
나아가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부숴야 할 때에
부수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이뤄야 할 때에
이루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끊어야 할 때에
끊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이어야 할 때에
잇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침묵해야 할 때에
침묵하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외쳐야 할 때에
외치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슬퍼해야 할 때에
슬퍼하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기뻐해야 할 때에
기뻐하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일해야 할 때에
일하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쉬어야 할 때에
쉬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삼가야 할 때에
삼가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즐겨야 할 때에
즐기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없어야 할 때에
없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있어야 할 때에
있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죽어야 할 때에
죽는 지혜
하느님의 뜻 이루려
살아야 할 때에
사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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