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71
8월3일[연중 제17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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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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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6AIpURECGgg
(이창현 비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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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경고와 질타의 목소리는 무엇입니까?>
형제들이나 피정객들을 위한 식자재 마련차 가끔 밤낚시를 나갑니다. 작년 늦가을 10만원 내고 타는 배낚시 가서나 잡을 수 있는 팔뚝만한 녀석들이 폭풍처럼 입질하던 순간을 기억하며, 낚싯대를 드리웁니다.
아직 사이즈가 제대로 안 나옵니다. 손바닥 미만이 대부분이라, 조심스레 바늘을 빼고 놓아주며, 한 마디씩 외칩니다. “더 자라서 오거라.” “다음에는 엄마 데리고 와라!”
그러다가 가끔 후두둑 하는 손맛과 함께 월척이 올라올 때면, 얼굴이 환해집니다.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입니다. 갑자기 목소리가 커지고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그리고는 녀석을 조심스레 어망에 담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 47-49)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끔찍한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과 자비로 똘똘 뭉친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어떻게 이렇게 소름이 끼칠 정도인가,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묵상해보니, 이런 스타일의 말씀조차 그 배경에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과 자비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녀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부모가 있다면, 언제나 칭찬과 격려만 늘어놓지 않습니다.
자녀가 그른 길을 걸어갈 때, 죽음을 향해서 뛰어들 때, 아무리 경고하고 부르짖어도 들은 척 만 척할 때, 부모는 눈물을 머금고 강력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강력한 진노와 경고성 발언조차도 우리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담겨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경고의 말씀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건네집니다. 때로 형제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때로 엄청난 자연재해를 통해서, 나와 결코 맞지 않는 이웃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전혀 원치 않았던 크고 작은 사건 사고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경고와 질타의 목소리는 무엇인지? 어디에서 오는지, 잘 한번 살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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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pnFersfp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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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이 비유에 약한 이유>
오늘 복음으로 하늘 나라의 길고 긴 비유 말씀이 끝을 맺습니다. 결국 하늘 나라를 받아들인 이들만 그물에 걸려 어부의 집으로 가는 물고기처럼 구원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늘 비유의 특징입니다.
하늘 나라 비유의 목적은 하늘 나라이기에 마지막에 천국과 지옥의 명확한 심판이 드러납니다. 또한 이것으로 사탄의 유혹을 구분해낼 수 있습니다. 사탄은 지금의 행복만을 말하지 끝은 흐립니다. 사탄이 제일 두려워하는 질문은 “그래서 끝은 어떻게 되는데?”입니다. 사탄은 구체적인 질문을 제일 싫어합니다.
글로리아 폴로 오르티츠(Gloria Polo Ortiz)는 콜롬비아의 치과의사이자 저서 『벼락을 맞았습니다』를 썼습니다. 그녀는 성당에 다니기는 하였지만, 미사 시간에도 껌을 씹고 가정에서는 사제를 비판하며 자신의 다리와 가슴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속세의 사람이었습니다.
글로리아는 박사논문을 위해 남편과 같은 의사인 조카와 함께 의대쪽으로 책을 가지러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벼락이 쳐서 사촌은 즉사하고 자신도 겉과 속이 완전히 타버렸습니다. 몇 시간의 심정지가 있고 난 뒤 간신히 심장이 뛰기는 하였지만, 간과 폐와 신장, 그리고 내장기관이 완전히 타버려서 회생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반면 즉사한 사촌 동생은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고 특별히 아기 예수님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글로리아의 모든 장기가 정상으로 돌아왔고 몇 시간 동안 심정지로 있었지만, 뇌 손상도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녀가 회복될 때 다리는 신경이 돌아오지 않아 절단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수술이 다가오자 자신이 얼마나 외모에만 치중하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가슴은 젖꼭지가 사라지거나 움푹 들어가 버렸고 아름다운 다리를 가지기 위해 굶기를 밥 먹듯이 했던 그 다리에는 감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그동안 두 다리로 걷게 해주신 것에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리까지 치유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랬더니 신경이 돌아왔고 의사들은 두 발로 서 있는 그녀를 보고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체험을 간증합니다.
하늘 나라의 비유는 다 이런 식입니다. 밭에 씨가 뿌려지고, 그 진주의 가치를 알게 된 이는 이전의 자신을 죽이게 만들며, 다른 이들이 쉴 수 있는 겨자나무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마치 좋은 물고기나 밀처럼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가 담긴 비유를 할 수 있다면 이제 하늘 나라 신비를 깨달은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면 그도 비유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누구나 하늘나라를 체험한 사람은 예수님의 비유를 또 다른 비유로 설명할 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사탄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탄은 지금 당장의 쾌락을 보게 만들지만, 하느님은 장시간, 그리고 마지막을 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 비유에 반드시 부활의 결말이 있는 이유입니다. 사탄에겐 그런 것이 없습니다.
무당을 하기 위해 신내림을 받으면 당장은 돈도 들어오고 신병도 낫지만, 결국엔 이용당하고 버려집니다. 이것이 사탄이 속이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비유도 잘 쓰지 않지만, 굳이 행복의 사례를 댈 때 전 생애나 내세에 어떻게 되는지는 절대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비유는 다릅니다. 항상 끝은 심판이 있습니다.
사탄의 옷 벗기는 법은 단순합니다. 사탄이 원하는 대로 해서 잘 된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라”라고 하면 됩니다. 그놈은 직설법밖에 쓰지 못합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면 행복할 것이라느니, 자신에게 절하면 많은 돈을 벌 것이라느니, 뛰어내리면 주님께서 바쳐주셔서 사람들이 믿게 될 것이라는 유혹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으로 그의 유혹을 받아치지만, 사실 사탄도 성경 말씀으로 유혹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으로 싸워봐야 우리는 승산이 없습니다. 서로 자기주장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 사례를 댈 수도 없겠지만, 만약 비유를 든다면 그 끝을 물어보십시오. “그래서 어떻게 끝나는데?” 제가 군대에 갔더니 거기서는 여자와 잠을 자본 것이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래서 다들 휴가를 다녀오면 그런 것들을 자랑하고 여자친구가 면회하러 와서 외박을 다녀오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인 예가 될 수 없습니다.
인생 전반을 살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가 필요합니다. 누가 성적으로 치우쳐서 행복한 사람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아무도 대지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 그런 삶을 산 사람들의 운명은 좋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장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이러저러하면 행복할 것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행복을 말하되 여러 비유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끝이 다 좋으면 그대로 하면 됩니다. 저는 이것 때문에 강론도 비유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유에는 항상 끝이 있어야 합니다.
부활로 끝나지 않는 비유는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비유도 싫어하고 그 끝까지 좋은 비유는 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끝을 감추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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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3,47-53: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47절)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라는 그물 안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다 들어 있으며, 온갖 고기가 들어 있다는 것은 모든 민족이 다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물은 세상이라는 바다의 파도 속으로 던져진다. 파도는 세상이라는 바닷속에 있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뒤흔들고 있다. 그물은 복음서와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안에 사는 이들을 그물처럼 모아들이셨다. 그물은 물속에 사는 온갖 고기들을 모아 물 밖으로 끌어내듯이, 우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어 참 빛이신 주님 안에 데려다 놓는다. 빛 속에서 좋은 것은 남기고 나쁜 것은 버림으로써 심판이 이루어진다.
교회는 그물에 비유된다. 교회가 어부에게 맡겨졌고, 모든 이가 세상이라는 거친 물속에서 그물에 담겨 영원한 나라로 끌어 올려진다. 그물에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모아들인다. 모든 사람을 죄의 용서로 부르기 때문이다. 그물은 마지막 때, 모든 인류를 모아들일 때, 가득 차고, 어부들은 그물을 끌어 올리고 물가에 앉는다. 현세를 바다라고 하면 물가는 현세의 종말이고 심판의 장이다. 이 그물은 종말까지 모든 물고기를 모아들일 것이다. 그때 하느님께서 지명하신 천사들이 모든 것을 끌어올려 놓고, 의인과 악인을 가려낼 것이다. 바다에 던져진 그물을 살피는 이들은 그물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와 천사들이다. 현세의 종말에 좋은 고기는 바구니에 담기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48절) 버려진다. 그물에 모아들여져 물가에서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항상 변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여기서 밖은 예수께서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49-50절) 하신 불구덩이를 말한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52절) 하신다. 그 사람은 하늘나라의 기쁨에 관한 새로운 것을 꺼내올 줄 알고, 구약성경의 가르침도 이야기할 수 있는 박식한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자신의 삶으로써 그것들을 꺼내오는 것이다. 마음의 곳간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신의 직무에서 그것들을 꺼내온다. 그가 꺼내오는 옛것들은 새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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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2년 동안 열심히 나오던 형제님께서 2달 정도 성당에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모두들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기타 반에서 활동하였고, 본당 행사에 기타연주 봉사를 하였습니다. 사진에도 조예가 있어서 본당 행사에 사진을 많이 찍어 주었습니다. 저를 위해서도 사진을 찍어 주었고, 가끔은 액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형제님이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추측들도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보내는 문자를 확인하지만 답변은 없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단톡 방에서도 나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걱정이 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문자를 보냈습니다. 형제님의 답변은 교우들의 추측과는 달랐습니다. 5월부터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지만 별 이상은 없다고 하는데 몸은 계속 안 좋아서 치료를 받는다고 합니다. 건강이 좋아지면 다시 나오겠다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사는 맛과 사는 멋’이 있다면 그런 것 같습니다. 걱정하고, 공감하고, 이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사는 맛과 멋입니다. 저의 문자에 답장을 보내준 형제님이 건강을 회복하여 밝은 모습으로 공동체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안식년 중인 후배 사제가 신문사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냉장고에 보니 과일이 가득 있어서 물어보았습니다. ‘웬 과일이야?’ 후배 신부님에게 과일의 사연을 들었습니다. 작년에 사랑하는 딸을 먼저 세상에 보낸 부부가 있었습니다. 사목회장으로 봉사하였고, 매일 아침미사에 참례하였는데 딸을 먼저 하느님 품으로 보낸 후에는 상심이 크셨는지 한동안 두문불출하였습니다. 후배신부님은 어찌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부부의 집을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조카 이야기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조카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몸의 반이 마비가 와서 재활치료 중이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처럼 신부님은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부부는 신부님의 방문에 큰 위로를 얻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부부를 알았지만 제가 미사를 도와주는 성당의 교우분도 아니고, 직접 찾아가서 위로할 수 있는 성격도 못 되었기에 걱정의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안식년 중임에도, 전혀 연고가 없음에도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공감하였고, 직접 찾아가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사는 맛과 사는 멋’이 있다면 그런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그분들이 하느님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서 아들을 얻었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이웃을 위로하고 과일을 받았습니다. 선한 일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행하고, 악한 것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행하지 말라는 말이 제 마음에 죽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우리는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지만 그 신앙은 교회의 것이지 아직 나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많은 분들이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할 때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신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막상 성당 문을 나서면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는 신앙이 ‘교회의 것’으로 머물러 아직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성직자와 수도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의 신앙을 자신의 것으로 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믿거나 미사 참례와 기도의 의무 등을 준수하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며, 공동체가 공유하는 삶의 비전과 가치관에 동의하는 것이고, 공동체가 제시하는 윤리적인 삶을 자기 것으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이란 과거의 삶과의 결별을, 과거에 쫓았던 이념과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냉담을 접고 다시금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주일 미사에 다시 참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새로운 삶이며, 과거와 결별하는 고통을 동반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오늘 나의 신앙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천사들에 의해서 의로운 삶을 인정받아 하느님의 대전으로 초대되는 삶인지, 쭉정이 삶이 되어서 마지막 날에 버려지는 신앙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하느님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사옵니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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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물의 비유>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7-50)
종말의 심판에 초점을 맞추면, ‘그물의 비유’는 ‘가라지의 비유’와 뜻이 같은 비유입니다.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는 말씀은 ‘가라지의 비유’에도 있습니다.(마태 13,42)>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낸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 말은, 심판은 의인들과 악인들을,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사람들과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분리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심판은 지극히 공정하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억울하게 탈락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고, 반대로 자격이 없는데도 부당하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또 그 심판은 절대적인 일이기 때문에, 재심, 삼심 제도 같은 것은 없고, 한 번 선고가 내려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의인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 또는 못 들어가는 악인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 모릅니다. 바로 그 질문이 루카복음 13장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3-24)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받을 사람의 수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면서도 노력하지 않아서 못 들어가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답변입니다.
<수가 얼마나 될지 궁금해 하지 말고, 너 자신이 들어가려고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좁은 문’이라는 말 때문에, 하느님 나라는 들어가기가 굉장히 어려운 곳이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살면서 작은 선행을 한 번이라도 실천했다면, 그 선행 덕분에 지옥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늘나라로 직행할 수는 없을 테니, 연옥이라는 곳이 필요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그렇다면 ‘심판’은 한 사람이라도 더 잘라내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한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옥으로 떨어뜨릴 이유를 하나라도 더 찾아내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로 받아들일 이유를 하나라도 더 찾아내기 위한 심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끝까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만이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 멸망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구원받기를 희망하면서 어떻게든 회개와 보속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비록 그 회개가 불완전하고, 보속이 많이 부족하더라도, 주님께서 그를 지옥으로 떨어뜨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그물의 비유’는 ‘혼인잔치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 종들이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2,10-13)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라는 말은, 복음은, 또는 주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선포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악한 사람’이라는 말은, 죄인이었지만 회개한 사람, 또는 사회적으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채로 살고 있지만 회개한 사람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으면서도, 또는 부르심에 응답했으면서도 신앙인답게 살지 않은 사람입니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았는데도, 예복을 안 입었다고 꾸짖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은 하나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았든지, 아니면 집에서 여유 있게 초대를 받았든지 간에 그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은 붙잡혀서 끌려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복으로 갈아입을 시간이 모두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갑자기 닥치겠지만, 그 전에 ‘회개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집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들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요한 3,17) 그런데 그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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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성경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낚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만나실 때도 세리였던 자캐오와 식사하실 때도 니코데모와 대화하실 때도 수많은 이들을 가르치실 때도 그분께서는 그물을 던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셨습니다.(4,19 참조) 고기 잡는 방법 가운데 그물을 던지는 것은 가장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어부는 자기가 잡고 싶은 물고기만 잡을 수도, 잡고 싶지 않는 물고기를 그물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을 수도 없습니다. 그저 그물에 걸리는 대로 물고기를 잡아야 합니다.
교회는 어부이신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아 그물을 던지고 복음을 선포할 뿐입니다. 최종적으로 물고기를 가리는 일은 하느님과 그분의 천사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분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같은 그물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을 가리고 판단하고 외면하고 손가락질한다는 것이 정녕 어리석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불완전합니다. 교회에는 성인도 있고 죄인도 있습니다. 성인도 죄지을 수 있고 죄인도 회개할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어떤 이들인지를 놓고 낙담하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 안에 있고 그분의 나라는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오늘도 자기 문제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좋은 기회입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드러낼 은총의 시간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듯 그분의 제자인 우리도 사람 낚는 그물을 세상에 던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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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이인주 베드로 신부님]
<선택받지 못한 생명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선택받은 생명이라 하면 마치 누구는 구원되고 누구는 안 되는 것인가 하고 의아해하겠지만, 생명은 다 귀하다. 다만 그 용도와 삶의 질에 따라 그 영역이 구분되는 것이라고 본다. 근본적으로 결정론이 있다 해도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지 인간이 왈가왈부할 사항은 아니라고 본다.
젊은 시절 필리핀에서 선교를 한 적이 있다. 갈릴래아 호수처럼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민다나오 섬의 이필이란 교구였는데, 지금도 그곳을 떠올리면 마음이 설렌다. 그곳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난했고 생계를 위해 물고기를 잡았다. 물고기는 하느님이 주신 일용할 양식이었다.
한번은 그곳 사람들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바다 한가운데서 밤을 보낸다길래 나도 그렇게 하겠노라고 공소 회장님과 약속했다. 공소 회장님은 예수님 시대의 베드로 사도 같은 분이었다. 그런데 내 복장을 본 공소 회장님이 머리를 갸우뚱하시며 안 되겠다는 사인을 보냈다.
가만있으면 중간이나 하지, 바닷가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는 나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데?’ 하며 오히려 난색을 표했다. 섬사람들의 행색은 초겨울 산행을 나가는 차림이었다. 도톰한 점퍼에 모자까지 쓴 것을 보며 ‘이 사람들이 한여름에 무슨 일이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카누(쪽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뭍이 희미하게 보일락 말락 하는 곳에 코코넛나무로 만든 그물이 있었고, 우리는 배에서 내려 코코넛 기둥을 타고 올라가 약 50센티미터 될까 말까 한 공간에서 일을 했다. 곧 어둠이 내렸고, 그물을 내리자 제법 많은 고기가 잡혀 무척 신이 났다. 그렇게 여섯, 일곱 차례 그물을 내렸는데, 자정이 넘자 바닷바람이 여간 매서운 게 아니었다. ‘아! 이거였구나.’ 하면서도 말도 못하고 몸을 웅숭거리자 공소 회장님이 웃으며 입고 있던 외투 하나를 벗어주었다. 열대의 나라 바다 한가운데서 추위에 떨며 새벽이 오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런 와중에도 그물을 올릴 때면 상황은 백팔십도 달라졌고, 파닥거리는 싱싱한 멸치에 코코넛술 한 잔은 추위를 잊게 했다. “요놈은 구원받은 놈, 요놈은 저주받은 놈.” 하는 공소 회장님의 물고기 감별 솜씨는 베드로 사도를 능가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버림 받는 물고기들을 보며 바로 저들을 구원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하며 중얼거리는데 동이 트고 있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다 구원해 주십시오.’ 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감사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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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모세가 세운 성막에 대하여 매우 자세하게 서술합니다. 증언판을 궤 안에 모신 성막은 이스라엘에게 하느님 현존의 표지입니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를 건너갈 때 움직이는 성소였습니다. 이 성막이 세워진 뒤, 주님께서는 구름으로 천막을 덮으시고 당신 영광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히브리인들이 볼 때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거처를 두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큰 위로의 동기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 보편적으로 현존하시지만, 여기에서는 당신과 대화를 허락하시는 개인적인 현존을 다룹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 안에 현존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성막은 만남과 안전의 장소, 다른 천막과 거처, 곧 사람이 되시면서 우리 가운데에 당신 천막을 세우실 주님 말씀의 천막에 대한 예고이며 전조입니다.
처음에 이 거처는 동정 마리아였습니다. 주님 탄생 때에 성령의 구름이 그를 덮었고 주님의 영광이 가득 채워졌습니다.(루카 복음 1장 35절 참조) 이제 땅 위에 머무르시는 하느님의 참된 거처는 예수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물의 비유를 들어 하늘 나라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모든 지체가 모두 좋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도 좋은 이들과 악한 이들이 공존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 종말에 좋은 이들은 받아들이고 악한 이들은 가려내시는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준엄한 경고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나태한 삶과 그릇된 확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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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빈 콩깍지>
저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모동산이 있는 아름다운 성당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아주 작게 느껴져도 그 멋스러움은 여전합니다. 지금은 주차장이 되어 있지만 텃밭에는 콩이 자라고 있었고, 들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밭모퉁이에는 가로등이 밤새 켜있었습니다. 가로등 가까이에 있는 콩과 들깨는 다른 것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잎도 넓었습니다. 그러나 가을 추수 때에 보면 열매가 없었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정작 속은 빈 껍데기였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견디고 밤에는 어둠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입니다. 결국 곳간에 채워진 것들은 겉보기에는 초라했던 콩이고 들깨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겉모양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인생 여정 안에서 겪을 것을 다 겪으면서 견디고 받아들인 삶의 모양을 헤아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 감춰져 있는 악이 나타나지 않고 그 사람이 존경받는다 하더라도 혹은 외적으로는 아무런 흠이 없고 유능한 사람으로 드러날지라도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은 ‘마지막 날’ 추수 때, 개인적으로는 죽음 앞에 밝히 드러나므로 지금 누리는 것들이 헛된 기쁨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처한 어려움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를 희망합니다. 시편저자는 노래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을 끌어올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13,48)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로마2,6). 사실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여정이 이미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이 세상의 삶은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습니다. 실패가 없다는 것은 지금 정신을 차려 알곡의 삶을 살면 된다는 의미요, 성공이 없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추수라는 심판의 두려움에 주눅 들지 말고,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이 과거를 발판 삼아 오늘을 새롭게 하고 그리하여 복된 내일을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까운 사이라 해도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맞대고 서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음은 천 개의 산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다 보십니다.(예레17,9) 사람이 하는 일이 제 눈에는 옳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마음속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분 마음에 드는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열매가 주님 그릇에 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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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시아 최고의 갑부이자 홍콩 재벌인 이가성 회장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회장은 30년 동안 자기 차를 운전해 준 운전사를 치하하고자 퇴직할 때 200만 위안, 우리나라 돈으로 약 3억 6천만 원의 수표를 건넸습니다. 그러자 운전사는 “필요 없습니다.”라며 그 큰돈을 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1 00
<“사실 회장님 덕에 이천만 위안(약 36억) 정도는 모아놓았습니다.”
회장은 깜짝 놀라면서 “자네 월급이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런 거액을 모을 수가 있었지?”라고 물었고, 운전사는 대답했습니다.
“회장님께서 제 뒷자리에서 전화하시는 걸 듣고, 회장님이 땅 사실 때 저도 조금씩 사고, 주식 살 때 저도 조금씩 샀더니 어느새 그렇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만나고 또 누구를 따르느냐의 중요함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이가성 회장보다 더 훌륭하고 더 힘센 주님을 만나고 또 따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앞선 이야기의 운전사는 회장의 말을 듣고 따랐기에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만 하느님 나라 안에서 진짜 부유하게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나에게 특별한 이익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익보다, 또 순간의 만족보다 더 중요한 것을 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쫓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가성 회장의 운전사는 지금의 만족이 아닌, 은퇴 후의 만족을 쫓았습니다. 그 지혜로움을 우리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군중에게,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부터 좋은 고기, 나쁜 고기를 고르지 않지요.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밖으로 던져 버린다고 하십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세상 종말에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 고기로 평가될까요? 그릇에 담길 좋은 고기일까요? 밖으로 던져 버릴 나쁜 고기일까요? 좋은 고기로 평가받는 모습은 주님의 뜻을 듣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것을 쫓는 사람이 더 많은 이익을 얻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지막 최후 심판 때에 우리 자리가 결정됩니다. 과연 어디로 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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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품>
마태오 13,47-53 (그물의 비유, 비유를 끝맺는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제자들이 “예!”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곳을 떠나셨다.
<그분의 품>
그분의 품 안에
내가 있으니
참 좋으나
그분의 품 안에
네가 있어서
안 좋다면
그분의 품 안에
네가 있으니
참 좋으나
그분의 품 안에
내가 있어서
안 좋다면
나의 품도 아니요
너의 품도 아니라
그분의 품 안에
나 있듯 너 있음을
너 있듯 나 있음을
헤아리는 거지
그분의 품 안에
지금처럼 영원히
함께 머물 수 있도록
나의 품도 너의 품도
그분의 품처럼
가꾸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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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흡족할 때 부족하다..>
“모세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마침내 둘째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성막이 세워졌다.”
전에 저의 형제들이 무전 순례라고 해야 할 것을 무전여행이라고 말하곤 해서 제가 듣기에 불편했고 경우에 따라 제가 바꿔 써야 한다고 잔소리하곤 했지요.
그렇다면 여행과 순례의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쉽게 구분하면 여행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놀러 가는 것이라면, 순례는 거룩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는 곳, 곧 목적지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냐, 아니면 하느님이 계신 곳이냐, 그것이 여행과 순례를 가르는 기준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아니 계신 곳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아니 계신다고 생각하는 곳에도 실은 하느님이 계시지요.
그러므로 여기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믿고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성당을 순례하고 성지를 순례해도 하느님 현존의식이 없다면 말짱 꽝이지요.
왜 이런 얘기를 길게 했느냐 하면 저의 이번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오늘 탈출기에 비추어 반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의 형식은 다 잘 갖췄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발자취와 우리 신앙 선조들의 교우촌을 방문했습니다. 매일 출발하면서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며 걸었습니다. 걷는 동안 제가 맨 뒤에 가며 고백성사나 영적 대화를 나눴습니다.
문제는 의식의 문제입니다. 오늘 탈출기를 보면 구름 기둥과 성막이 나오는데 저희는 구름 기둥을 따르고 성막을 정성껏 세우려는 의식이 부족했습니다.
구름 기둥을 따르려고 하기보다 스마트폰의 길 안내에 더 의존했습니다. 그러다가 잘 알려지지 않은 ‘한실 성지’라는 곳을 스마트폰의 길 안내를 받아 가다가 아주 혼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 혼자 속으로 이 점을 반성하였지요.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지 않았던 점 말입니다.
다음으로 저희는 내 천막만 신경 썼지, 성막을 치는 것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먹고 마시고 내 육신 편히 쉴 공간이 마련된 것에 흡족하여 하느님 계실 곳을 우리 가운데 마련하려는 의식이 부족했습니다.
여기서 반성이 되는 것이, 흡족할 때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세상 것에 흡족할 때 우리는 천상 것에 부족하게 됩니다.
이것을 어제 마지막 나눔 때 반성하였지만 오늘 또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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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귀향(歸鄕)의 여정>
- 늘 새로운 시작 -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히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행복하옵니다,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그들은 더욱더 힘차게 나아가리이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날보다 더 좋사옵니다.”(시편84;5.6.8ㄱ.11ㄱ)
오늘 화답송 시편이 은혜롭습니다. 너무 밝아 하늘에 등불 달린 줄 알았습니다. 뒤돌아 눈들어 하늘 보니 둥근달이었습니다. 오늘 새벽 달빛도 별빛도 맑고 밝았고 풀벌레 소리도 영롱했습니다. 8월8일 입추이니 서늘한 기운에 가을이 성큼 다가온 듯 싶었습니다. 제가 산책중 가장 많이 자주 카톡 사진에 담는 장면은 세 곳입니다. 하늘길, 십자로 중앙의 예수성심상, 불암산을 배경하고 정원을 앞에둔 제 집무실이 포함된 수도원 성전입니다. 어제 해질 무렵의 성전 풍경이 참 평화롭고 아름다워 여러분에게 선물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참보물 자매님! 수도원 성전의 위로와 치유, 평화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힘내세요!”
3월 초 입원하여 5개월간 입원했다 7월 말 퇴원한 참 고마운 자매에게 보낸 메시지이고 받은 답신입니다. 1998년부터 2022년까지 무려 25년간 제 시집과 강론집을 제본해다 준 참 한결같은 성녀(聖女)같은 분입니다.
“감사하옵니다. 신부님! 하루를 지내며 힘들었나이다.”
대부분 폭염에 생활고에 병고에 때로는 희망을 잃고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자주 만나는 분들에게 드리는 권고입니다.
“성인이 되십시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을 꿈꾸면서! 오늘 지금 여기서 부터가 중요합니다. 힘내십시오. 우리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뿐입니다.”
제가 경탄하는 두분입니다. 참으로 젊은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겸손하고 지혜롭고 쾌활한 아랫집 87세의 노수녀님입니다. 병고로 힘들어도 매일미사에는 1등으로 성전에 입장하고 자세도 반듯하게 하루하루 온힘을 다해 한결같이 견뎌내고 버텨내는 수녀님입니다.
또 한분은 88세 노령의, 그러나 영혼은 영원한 청춘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세계 젊은이날 행사에 참석차 42차 해외 순방길에 오른 교황님이 포르투칼 리스본에 도착하여 하신 연설중 한 대목입니다.
“나는 유럽을 꿈꿉니다. 서구의 심장인 하나의 유럽을!
갈등을 종식시키고 희망의 등불에 불을 붙이기 위해 그 엄청난 은사를 발휘하는 유럽을 꿈꿉니다. 직접적인 필요를 넘어 온전한 위대함을 바라보듯, 나는 청춘의 심장을 회복할 수 있는 유럽을 꿈꾸며 바라봅니다.”
“나는 유럽을 꿈꿉니다(I dream of a Europe)!”, 마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시작한 미국의 비폭력주의 흑인 민권 운동가이자 개신교 침례회 목사 마르틴 루터 킹의 연설이 연상될 정도로 참으로 멋진 영원한 청춘의 교황입니다.
바로 이 꿈을 지니고 자비하고 너그러운 영원한 청춘의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귀향의 여정에 올라야 합니다. 탈출기의 장면이 그대로 귀향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여정에 앞서 성막을 준비하는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늘날 희망의 표징이듯 탈출기의 모세가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명령한 대로 다 하였다’, 똑같은 말마디가 3차례나 반복됩니다. 주님의 충실한 종, 순종의 지도자 모세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자손들의 여정에 함께 하시는 다음 묘사도 우리에겐 힘과 위로가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모든 여정중에, 구름이 성막에서 올라갈 때마다 길을 떠났다. 그러나 구름이 올라가지 않으면, 그 구름이 올라가는 날까지 떠나지 않았다.
그 모든 여정중에 이스라엘의 온 집안이 보는 앞에서, 낮에는 주님의 구름이 성막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귀향길의 순례 여정중 친히 성막의 이정표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봅니다. 성막의 이정표와 같이 하루하루 순례 여정중의 이정표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요 똑같은 하느님께서 모세가 아닌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 친히 귀향의 여정중인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 주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그물의 하늘나라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귀향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을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러할 것이다. 천사들이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가라지의 비유와 흡사한 종말 심판의 하늘 나라 비유입니다. 주님은 충격 요법의 표현을 통해 회개를 촉구합니다. 괴물이나 폐인이 아닌 성인의 삶을, 악인이 아닌 의인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비유를 읽을 때마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이란 노자에 나오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바로 ‘천지자연의 법칙은 광대하여 엉성한 듯 보이지만, 악인에게 벌을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최후심판을, 하느님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며 우리가 죽는 날은 그대로 그물을 걷어 올리는 시간이겠습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할까요? 이래서 사막교부들을 비롯해 베네딕도 성인은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삶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향의 여정입니다. 귀향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 하루하루 환상이나 허영, 탐욕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물의 비유로 일곱 개의 하늘 나라 비유를 마치신 후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묻습니다.
제자들처럼 “예!”하고 대답할 수 있을런지요? 평생 깨달음의 화두로 삼아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어 하늘 나라를 살라는 비유들입니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참 좋은 분별력을 지닌 자유자재의 지혜로운 현자가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또 “늘 옛스럽고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진인사대천명의 삶을, 분별력의 현자의 삶을 살게 해 줄 것입니다. 또 다음대로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최후심판의 두려움은 저절로 해소될 것입니다. 늘 고백해도 늘 새로운 제 좌우명 고백기도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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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13,47)
<심판!>
오늘 복음(마태13,47-53)은 '그물의 비유와 비유를 끝맺는 말씀'입니다. 마태오 복음이 전하고 있는 하늘 나라의 신비에 관한 일곱 개 비유 중 마지막 비유입니다.
일곱 개 비유 중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 진주 상인에 비유'는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 곧 지금 여기에서 들어가야만 하는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비유라면, '그물의 비유'는 세상 종말의 때에 맞이하게 되는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일곱 개의 비유를 다 말씀하시고 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마태13,5)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비유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미와 아직인 하느님의 나라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 대한 정답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친히 일러주신 정답(비유)을 깨닫지도 못하고, 실행하지도 못하면 세상 종말의 때에 하느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이 바로 '그물의 비유'가 살아있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13,49-50)
이 말씀은 허구가 아니라 사실(fact)입니다. 하느님이시고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분을 굳게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원히 사는 것, 영원한 지옥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희망이요 목적입니다. 이 궁극적 희망과 목적 때문에 믿는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 기쁘게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합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눕니다. 그것도 되돌아 올 것을 바라지 않으면서.
심판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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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7_WP-xtA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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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 13, 47)
물고기가
있기에
그물이
있습니다.
모아들이는
그물의 마음이
하늘 나라의
본마음입니다.
그물을 던져야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일 수 있고
온갖 종류의
고기를
건져올릴 수
있습니다.
건져올려
우리를
구원하는
그물입니다.
건져올려
전혀 다른 삶을
살게하는
그물입니다.
정녕 우리를
살리는
그물입니다.
새로운 물결과
새로운 파도를
만납니다.
모든 것은
잠시 잠깐입니다.
던져지는 것도
건져 올려지는
것도 잠시
잠깐입니다.
모든 생명에는
사랑과 구원이
있습니다.
그물과 물고기
하늘 나라와 사람은
이와 같이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 같이
하늘 나라에서
기뻐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멈추게 할 수 없는
구원의 그물입니다.
잡히는 것이
아니라
건져 올려지는
것이며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물고기의 길을
바꾸어 놓는
하늘 나라의
그물입니다.
생활을
건져 올리면
삶은 감사와
기쁨의
변화가 됩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하늘 나라의
사랑입니다.
구원은 식별과
분별, 구별까지
아우르는
모든 것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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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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