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꺼내보는 명품시조 114, 「산수근처」외
신웅순(시인․평론가․중부대명예교수)
나에게 모두에게
얼굴 가득 웃음 띠고
언제든 등을 주는
동산이 되고 싶다
어스름
노을빛으로
남몰래 익고 싶다
- 이석규의 「산수근처」
따뜻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가보다. 나이 들면 언어도 기름기가 다 빠진 뼈대만 남는다. 무슨 미사여구가 필요한가. 은은히 감동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생의 깨달음 없이 이런 시조를 쓸 수 있을까. 탁 내려놓으면 그게 바로 명품이다.
티 없는 순수, 동시조 같다. 버릴 것 다 버리고 남을 것만 남는다. 이것이 팔십의 노을빛 문인화이다. 나에게 모두에게 얼굴 가득 웃음 띠고 남에게 등을 내주고 싶고 나에게는 어스름 노을빛으로 익어가고 싶다는 만년의 작은 대서사시이다. 따뜻한 여백이다. 이것이 시조이다.
열매조차 버린 생은
얼마나 가벼운가!
마지막 한 잎 마저 떨치고 서 있는
저 무욕
꿋꿋한 혼을
찬 하늘에 새긴 뼈대
- 이복현의 「겨울나무」
꿋꿋하게 살아왔다. 찬 하늘에 혼을 새기지 않았는가. 뼈대만 남은 결기. 겨울나무를 보면 왠지 경외스럽다.
초록잎도 열매도 마지막 잎새도 다 버렸다. 그동안 새들에게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고 포근한 둥지를 틀어주었던 겨울나무이다.
빈둥지만 남았다. 늘그막 누구의 노래가 이런 것이고. 누구의 서체가, 누구의 편지가 이런 것인가. 하늘에 혼을 새긴 이 아름다운 세한도는 누구의 경건한 교향곡인가. 시조의 멋과 여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주간한국문학신문,2024.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