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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기도)
주님,
새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오늘도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오니 정결한 자 되게 하옵소서.
죽어 마땅한 존재가 십자가 보혈로 인해 생명을 얻게 되고
주님과 친밀한 교제의 시간을 가지니
이것이 가장 큰 기적입니다.
오늘도 하늘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3.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6.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
7.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정의를 행하기 싫어함이니라
8.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곧으니라
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10.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하나니 그 이웃도 그 앞에서 은혜를 입지 못하느니라
11.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
12.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시느니라
13.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14.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 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
(본문 주해)
1절 : “왕의 마음은 흐르는 물줄기 같아서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왕을 이끄신다.”(새번역)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지으시고 그 마음을 다 살펴보신다. 왕의 마음도 주님이 주관하신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권력자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상황이 되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소원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것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시는지를 보여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 마음들을 움직이신다.
2절 : “사람의 행위는 자기의 눈에는 모두 옳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꿰뚫어 보신다.”(새번역)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선악을 자기중심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의 행위를 옳다고 여기며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자기 행위가 정직하다고 여겨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추어지면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게 된다.
말씀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 늘 옳은 줄로 알고 살아간다. 또 말씀을 보아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면 필요한 문자만 취하여 세상만사를 자신의 가치관과 자신의 선악체계로 판단하는 교만한 자가 된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말씀을 보고 듣는 시간은 우리의 속이 하나님의 눈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시간이다.
3절 : “주님께서는 정의와 공평을 지키며 사는 것을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반기신다.”(새번역)
이스라엘은 온갖 절기를 지키며 제물을 바치지만 그들의 일상은 속임과 도둑질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성전에 나와서 이렇게 제물을 바치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알지 못하였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망하게 되었다.
4절 : “거만한 눈과 오만한 마음, 이러한 죄는 악인을 구별하는 표지이다.”(새번역)
선악과 이후의 모든 인간은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다. 그래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고 악인의 형통을 빛으로 본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은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눈이 오만하지 않기에 큰일이나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는 것이다(시131).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자기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한 것이 젖을 배부르게 먹고 엄마 품에 있는 아이와 같다는 것이다.
5~8절 : “부지런한 사람의 계획은 반드시 이득을 얻지만, 성급한 사람은 가난해질 뿐이다.
속여서 모은 재산은, 너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안개처럼 사라진다.
악인의 폭력은 자신을 멸망으로 이끄니, 그가 바르게 살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죄인의 길은 구부러졌지만, 깨끗한 사람의 행실은 올바르다.”(새번역)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삶은 풍부함에 이른다.
그런데 이것은 물질만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사는 것에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단기속성 코스 같은 것이 없다. 평생을 말씀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물질이나 말씀이나 조급하게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망하는 길이다.
악인의 강포라는 것은 흉악한 범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자신이 선악의 판단자가 되어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강포가 가득한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의를 행하기 싫어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의는 긍휼과 자비이다. 그래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너희가 바로 긍휼을 입어야 하는 존재임을 알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긍휼을 버리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기에 이들이 결국은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이다.
9절 : “다투기를 좋아하는 여자와 넓은 집에서 함께 사는 것보다, 차라리 다락 한 구석에서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새번역)
“다투는 여자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잠27:15~16)
이 외에도 ‘다투는 아내, 바가지 긁는 여인’과 관련된 잠언 구절은 아주 많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아내를 둔 남편의 슬기로운 대처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좀 더 확장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내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다. 신약으로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그리스도는 남편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삶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만 생각한 자들이다. 남편이신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데 늘 원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오늘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가 남편이신 그리스도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온갖 행사를 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하고 찾는 모습이기도 하다.
10절 : “악인은 마음에 악한 것만을 바라니, 가까운 이웃에게도 은혜를 베풀지 못한다.”(새번역)
참으로 은혜를 입은 자의 곁에서는 은혜를 입지만 악인 곁에서는 은혜를 입지 못한다.
그는 은혜의 경험이 없으니 당연히 은혜를 베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남의 재앙을 원한다.
11절 : “오만한 사람이 벌을 받으면 어수룩한 사람이 깨닫고, 지혜로운 사람이 책망을 받으면 지식을 더 얻는다.”(새번역)
세상은 거만한 자가 벌을 받아도 그것을 교훈으로 삼지 않는다.
연일 온갖 권력자들의 비리가 쏟아지는 뉴스를 보아도 바르게 살려고 하는 자들이 별로 없다. 그러므로 거만한 자들이 벌을 받을 때 지혜를 얻는 자가 있다면 이런 자가 지혜로운 자가 된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여지는 것이다.
성도는 성경을 보거나 세상을 보거나 간에 교훈을 받는다.
12절 : “의로우신 하나님은 악인의 집을 주목하시고, 그를 재앙에 빠지게 하신다.”(새번역)
하나님께서 악인을 감찰하시고 그를 환난에 던지실 것이다. 그러면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악인의 결국을 보고 교훈을 삼는 것이 지혜인 것이다.
13절 : “가난한 사람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으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새번역)
성경에서 가난한 자를 돌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압제당할 때 그들은 가난한 상태로 있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언약을 따른 사랑과 긍휼로 구원하여 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율법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잘 돌보라고 하셨다.
14절 : “은밀하게 주는 선물은 화를 가라앉히고, 품 속에 넣어 주는 뇌물은 격한 분노를 가라앉힌다.”(새번역)
마치 뇌물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뇌물을 받지 말라고 하셨다(출23:8).
그런데도 이 말씀을 버리고 뇌물을 받음으로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의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웃과 정을 나누는 것은 선물이지만,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주는 것은, 그것이 적든 많든, 뇌물이 되는 것이다.
(나의 묵상)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9절)
‘가난해도 화목한 가정이 더 낫다’는 정도로 언뜻 이해가 된다.
바가지 긁는 아내, 대가 쎈 아내, 문제를 일으키는 아내....는 남편의 근심이 된다는 것으로,
남자(남편)들이 격하게 동의하는 구절일 듯하다.
이 비슷한 구절이 잠언에 반복해서 많이 나온다.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9:13)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21: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25:24)
“다투는 여자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27:15~16)
그런데 왜 아내들이 이렇게 다투거나 문제를 일으킬까?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3:16b)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새번역)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공동번역)
아담의 타락 이후로 아내는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어 하지만 남편은 그런 아내를 다스리고 손아귀에 쥔다고 한다. 그러니 늘 다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더욱 확장한 해석을 읽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내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다. 신약으로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그리스도는 남편이다.
남편이신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데 늘 원망만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신실한 남편이시기에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들여놓으셨다.
그런데 이제 이 여자가 원망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놓고 남편이신 하나님을 떠나 주구장창 바람피우기 바빴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해 온갖 우상을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느 남편이 이런 아내와 살고 싶겠는가?
오늘날 그리스도의 신부 된 교회가 남편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자기 소원을 이루고 싶어서 온갖 행사나, 철야 기도, 금식 기도 등으로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하고 찾는 모습이 그것이다.
주님께서 당신의 마음과 동떨어진 이런 교회와 살고 싶겠는가?
옆집 남자와 연애하는 것-세상 것을 사랑하는 것-을 이해해 달라고, 허락해 달라고 참 남편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댔으니...... 나는 과연 남편을 근심하게 하고 괴로움을 끼친 아내였으니, 당장에 이혼을 당해도 마땅한 존재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바람난 아내를 또다시 데려와 살라고 호세아 선지자에게 말씀하셨다!
십자가 보혈로 용서하시고, 십자가 보혈로 정결케 하시고, 십자가 보혈로 단장하게 하셔서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신붓감으로 삼아 주신 것이다.
그래도 염치는 있어서 우물쭈물하는 내게 ‘네가 언제 내 말을 거역했느냐? 네가 언제 바람난 적이 있었느냐?’ 하시니, 주님은 기억상실증의 끝판이시다.
더 이상, 참 남편이신 예수님의 근심거리가 되고 싶지 않다.
물론 여전히 아둔하지만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 주님의 뜻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
인간의 실력으로는 공이로 찧어도 벗겨지지 않는 어리석음이지만 주님께 연합될 때, 주님께서 입혀주신 옷, 그 명철의 옷을 덧입게 될 것을 기대한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31:10~12, 30)
(묵상 기도)
주님,
다투는 아내, 말썽 많은 여자임에도 내치지 않으시고
오래 참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제게 차고 넘치니
이제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봅니다.
날마다 주님의 보혈로 덮어주시니
최고로 정결한 신부, 현숙한 아내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날마다 주님의 기쁨이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성령님,
제 마음을 주관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