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스타 부담 내려놓고… 임종때 처음으로 평화로워”
강수연 빈소 각계 인사 조문 발길
8일 영화배우 고 강수연 씨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을 찾은 임권택 감독, 장례위원장인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과 배우 박정자 씨, 봉준호 감독, 배우 김혜수 씨(왼쪽 사진부터). 이날 연상호 김태용 윤제균 감독과 이미연 김윤진 배우 등 영화계 관계자들이 잇달아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고 강수연 배우 장례위원회 제공
한국 영화를 세계에 알린 원조 ‘월드스타’ 고 강수연 씨의 장례가 11일까지 나흘간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8일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에는 조문이 이어졌다.
고인을 월드스타로 만든 영화 ‘씨받이’와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연출한 임권택 감독은 부인 채령 씨와 한걸음에 달려왔다. 전날도 빈소를 찾은 임 감독은 내내 굳은 표정이었다. 임 감독은 “더 활동할 수 있는 나이인데 세상을 떠나 아깝다”라며 비통해했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전날에 이어 이날 오전 9시 반쯤 가장 먼저 빈소를 찾아 자리를 지켰다. 이날 그는 자필편지를 통해 “청천벽력이라는 말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압구정동 만둣국 가게에서 점심을 나누고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눈 것이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스물한 살부터 ‘월드스타’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살았다. 어쩌면 수연 씨의 숙명이었는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이어 “응급실에 누워 있을 때, 임종할 때, 세파에 시달렸고 어렵게 살아왔던 수연 씨가 처음으로 평화로운 모습으로 누워있는 것을 목도했다. 명복을 빈다”고 애도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영화계 인사들은 비통해했다. 배창호 감독은 “10대 때부터 배우로 성장하는 과정을 쭉 지켜봤고, (고인이) 더 무르익은 연기를 보여줄 때가 됐는데 우리 곁을 떠나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장호 감독은 “고인은 톱스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노력했고 참을성 있게 연기에 임했다”고 밝혔다.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은 “부산국제영화제를 같이 만들어 여기까지 오게 한 분”이라고 애도했다.
고인과 함께 연기한 배우들도 안타까워했다. 배우 박정자 씨는 “영화 ‘웨스턴 애비뉴’(1993년)를 같이 하며 본 강수연은 아주 똑 부러지는 배우였다”며 “지나치게 잘나서 많이 외로웠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배우 김학철 씨는 “영화 ‘지독한 사랑’을 같이 촬영했다. 늘 고마웠고 꼭 한 편 더 좋은 영화를 함께 찍고 싶었다”며 울먹였다.
배우 김혜수 이미연 김윤진 문근영 한지일, 영화감독 윤제균 봉준호 김태용 박정범 임순례를 비롯해 가수 노영심도 빈소를 찾았다. 온라인에서도 추모가 이어졌다. 고인의 유작이 된 영화 ‘정이’를 연출한 연상호 감독은 이틀 연속 빈소를 찾은 데 이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편히 쉬세요. 선배님과 함께한 지난 1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라고 추모했다. 영화감독 겸 배우인 양익준은 인스타그램에 “누나 같았고 따뜻했고 사랑스러웠던 분”이라며 “누나라고 한번 불러봤어야 했는데”라고 썼다.
정치권에서도 추모가 이어졌다.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은 이날 페이스북에 “학창 시절 강수연 님의 연기를 보며 성장했다. 명연기를 평생 기억하겠다”고 애도했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정부가 올겨울에 고인에게 훈장을 추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고인은 1987년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김부겸 국무총리,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박찬욱 감독, 배우 엄앵란 안성기 전도연 이병헌 송강호 강동원, 박기용 영화진흥위원장은 조화를 보내 고인을 추모했다. 영결식은 11일 오전 10시에 열린다.
김태언 기자, 손효주 기자
너무 앞서간 강수연
여섯 개 보조개로 웃던 배우 강수연. 향년 56세로 7일 별세한 강수연은 아역 배우 출신이다. 모든 아역 배우들이 그러하듯 그에게도 연기 변신을 시도할 때가 왔고, 스무 살이던 1986년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에서 19금 연기에 도전한다. 이듬해 개봉하자 국내에선 ‘수위’에 관한 논란만 시끄러웠는데 뜻밖에 해외에서 뜨거운 반응이 전해졌다. 한국 최초의 ‘월드 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강수연은 1987년 아시아 여배우로는 처음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씨받이’의 옥녀 연기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주요 영화제 수상은 한국영화 68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신예 여배우 투톱은 동갑내기 동명여고 출신인 조용원과 강수연. 임 감독은 옥녀 역할에 영화 ‘땡볕’으로 앞서 스타덤에 오른 조용원을 먼저 떠올렸지만 ‘암팡진 조선 미인’ 강수연을 선택했다. 그는 임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1989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월드 스타 지위를 굳혔다.
▷강수연이 해외에서 연거푸 수상하던 시기는 경제 문화적으로 약진하던 동아시아 국가의 영화계가 작가주의 감독과 스타성 있는 여배우를 앞세워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서던 때다. 중국 5세대 감독 장이머우에게 궁리, 홍콩 뉴웨이브 감독 왕자웨이에게 장만위가 있듯 임 감독의 페르소나는 강수연이었다. 강수연이 연기한 임 감독 특유의 한 서린 에로티시즘에서 서구 영화계는 이국적 미학을 발견했고, 둘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문화적 자산이 됐다.
▷민주화 이후 새로운 영화 실험에 나서는 코리안뉴웨이브 감독들이 등장하는데 강수연은 이들 작품에서 전통적인 수동적 여성상을 벗고 현대 여성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 박광수의 ‘베를린 리포트’, 이명세의 ‘지독한 사랑’, 임상수의 ‘처녀들의 저녁식사’가 이 시기 대표작들이다. 국내에선 호평받았지만 해외 평단은 냉담했다. 2000년대 이후 강수연은 ‘배우’보다는 ‘영화인’으로 바쁜 삶을 살게 된다.
▷영화계에선 그가 스물하나 너무 어린 나이에 월드 스타가 된 것이 배우로서는 독이 됐다고 아쉬워한다. 강수연에 이어 두 번째 해외 3대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자(2007년 칸영화제 ‘밀양’의 전도연)가 나오기까지 20년이 걸렸으니 고인이 얼마나 앞서간 배우였는지 알 수 있다. 임 감독은 “요즘 같은 배우 관리 시스템만 있었다면 더 큰 배우가 됐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돈 때문에 ‘가오’를 버리는 법 없었던 영화배우 강수연의 눈부시게 아름답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너무 앞서간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