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꺼내보는 명품시조 117,「고목」외
신웅순(시인․평론가․중부대명예교수)
천년을
압축시킨
생의 마디 닦아내며
생불의
등뼈 속에
새겨넣은 여래 말씀
어스름
생의 뒤쪽에
적막 하나 놓고 간다
-조경순의「고목」
고목은 굵고 주름져 있다. 남을 것만 남겨 놓고 마디를 닦아내는 고목. 등뼈 속에 여래 말씀을 새겨놓고 생의 뒤쪽에 적막하나 놓고 간다. 무언무설(無言無說), 무언무답(無問無答), 불이선이다.
고목은 버릴 것 다 벗어버린 어스름 생의 뒤쪽이다. 간결체이다. 시란 고목과 같은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더 아름다운 것이다. 인생은 고목과 같다. 시는 고목 같은 맨 나중의 인생이다. 그래야 우리들은 시처럼 적막 하나 놓고 갈 수 있다.
쥐죽은 듯
촛불도 고요한데
주장자
쾅-쾅 치는
큰 스님 호통 소리
동백꽃 엿듣다 그만
쳐든 고개 떨쿤다
-김기수의 「선운사 동백꽃」
촛불도 고요한데 큰 스님 호통소리에 동백꽃이 고개 들다 그만 툭 떨쿤다. 무슨 법문, 무슨 화두가 이런가. 무슨 소리인지 통 알 수가 없다. 상황만 있고 나머지는 여백이다. 홍운탁월, 달 주변 구름만 그렸다. 호통소리와 동백꽃만 그렸지 달을 그리지는 않았다. 시는 굳이 의미를 묻지 않는다.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면 된다. 슬픈 말을 한다고 해서 슬픈 것이 아니다. 슬픈 말을 하지 말아야 슬픈 것이다. 시가 산문이 아닌 이유이다. 오미 중 시조는 톡 쏘는 어떤 맛일까.
호통치며 스님이 묻는다.
-2024.1.31.(수)주간한국문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