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文) 諺文 造語論攷 甲子上疏 本文
世宗 二十 六 年 (甲子 년) 2 月 20 日 (庚子日)
編輯 作成者: 大宗會 靑年局長 겸 中央靑年會 會長 英林 榮吉
國文 諺文 造語論攷 甲子 上疏 本文
世宗 二十 六 年 (甲子 년) 2 月 20 日 (庚子日)
편집작성자: 대종회 청년국장 영길
* 參考 * 본 갑자상소 전문은 당시의 상황 또는 시기를 잘 생각 하면서 읽으면 일부 한글,사학자들이 주장하는 부분에 과거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실제로 보일것 입니다. 제가 이번일로 인하여 여러 서적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을 토대로 조합하여 저에 소견을 달아보았습니다.
庚 子 集 賢 殿 副 提 學 崔 萬 理 等 上 疏 曰 臣 等 伏 觀 諺 文 製 作 至 爲 神 妙 創 物 運 智 夐 出 千 古 然 以 臣 等 區 區 管 見 尙 有 可 疑 者 敢 布 危 懇 謹 疏 于 後 伏 惟 聖 裁
庚 子 日 (20일) 에 集 賢 殿 副 提 學 崔 萬 理 等 이 다음과 같은 上 疏 를 올리었다.
“신등이 엎드려 살펴보건대, 언문의 제작은 지극히 신묘한 일로써 사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발휘 하심에 있어서 천고에 훨썩 드러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 보건대,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으므로 감히 미미한 심중의 뜻을 드러내어 뒤의 글과 같은 상소를 삼가 올리오니, 전하의 결재를 엎드려 바라옵니다.
*참고* 이 대목 첫줄에 보면 신,등이라고 하였다. 만리선생 혼자가 아니라 여러사람이 같이 상소를 올리면서 집현전의 최고 책임자로써 부제학공 께서 疏 頭 가 된것이다.
一 , 我 朝 自 祖 宗 以 來 至 誠 事 大 一 遵 華 制 今 當 同 文 同 軌 之 時 創 作 諺 文 有 駭 觀 聽 儻 曰 諺 文 皆 本 古 字 非 新 字 也 則 字 形 雖 倣 古 之 篆 文 用 音 合 字 盡 反 於 古 實 無 所 據 若 流 中 國 惑 有 非 議 之 者 豈 不 有 愧 於 事 大 慕 華
첫째로, 우리조정 에서는 조정 이래로 정성을 다하여 事 大 (큰나라또는 큰세력을 붙쫒아섬김)를 하여 같은 문자를 사용하고, 모든 것에 있어서 중국의 제도(규범과 법률제도)를 준수하여 왔습니다. 지금 천하가 같은 글을 쓰고 같은 제도를 시행하는 때에 언문을 창작 한다는것은 보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움을 갖게 하는것 입니다. 언문이 비록 옛글자에 근본을 두고 있는 것으로써 새로 만든것이 아니라고는 하나 글자의 형태에 있어서는 옛날의 篆 文 漢 字 (서체의하나)를 모방 했을지라도 소리를 내고, 글자를 합성함에 있어서 모두 옛것에 위반되고 있으니 실상에 있어서는 아무것에도 의거하지 않은 순전한 창작에 의한 것입니다. 이 언문이 만일 중국에 흘러들어가서 혹시 이를 두고 비난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 어찌 事大慕華(사대모화: 중화를 섬김)를 함에있어 부끄러움이 없겠나이까?
* 參考 * 이 대목에서 당시의 시대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음을 알수 있다. 이것을 모르는척 하는 일부사학자들과,한글학자들은 맹목적으로 한글의 우수성과 세종의 업적을 높힘으로써 한글이 만들어졌을때 와 그이후 450여년을 멸시천대 받았다는 보상 심리로 諱 萬理 先祖님을 비방폄하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아무리 생각 하더라도 현시대에 사는 이들로 하여금 왜곡된 역사를 가르켜서 오해의 소지를 남기고 있다고 생각된다. 본 상소문을 올리게된 동기가 갑자상소 본문에 보이는데도 일부 한글학자들과 사학자들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무시한채 현재 그들의 잣대로 재어 액면 그대로 해석을 하다 보니 지금과 같은 왜곡된 오해의 소지를 남기고 있는것이다. 또 앞으로도 이일로 인하여 우리 후손들에게는 더많은 시련이 있지 않겠나 하는 우려가된다 . 또한 일부 학자들 의 논문을 보면 본문에 나오지 않는 문구를 그들 마음대로 인용하여 과대 포장 한 것임을 알수 있다. 그들의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본문을 보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조선은 중국( 明 )에 예속된 국가였던것이다. 왜냐하면, 태조 이성계는 국호를 조선이라 한것도 명의황제에게서 명명 받았다는것을 조선왕조 실록(태조실록)에 그기록이 있다.그리고 년호는 물론 임금의 책봉도 그들에게 받았고, 조공도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부터)에 있음은 그누구도 부인하지는 못할것 이다. (아래 별지참조,태조실록)
一 , 自 古 九 州 之 內 風 土 雖 異 未 有 因 方 言 而 別 爲 文 字 者 唯 蒙古 , 西夏 , 女 眞 , 日本 , 西 蕃 , 地 類 各 有 其 字 是 皆 夷 狄 事 耳 無 足 道 者 傳 曰 用 夏 燮 夷 未 聞 燮 於 夷 者 也 歷 代 中 國 皆 以 我 國 有 箕 子 遺 風 文 物 禮 樂 比 擬 中 華 今 別 作 諺 文 捨 中 國 而 自 同 於 夷 狄 是 所 謂 棄 蘇 合 之 香 而 取 螳 螂 之 丸 也 豈 比 文 明 之 大 累 哉
둘째로, 예로부터 九州 (고대 중국에서 전국을 통치하기 위하여 나누었던 9개의주) 이내의 각 지역이 비록 풍토가 다르다
하더라도 方言 (지방의언어)에 따라서 따로 문자를 만들었던 예가 없습니다. 오직 蒙古 , 西夏 ( 티벳인이 세운나라), 女眞 , 日本 , 西 蕃 (현재 아프카니스탄 지역)의 부류가 제각기 자기들의 글자를 가지고 있습니다만은 이들은 모두 夷狄 (오랑캐)의 일일 뿐이니 언급할 필요 조차 없는 것입니다. 傳 (전하여 오는 말)에 이르기를, 중국의 문화로써 夷狄 (오랑캐)의 문화를 변화시킨다. 라고 하였을뿐 일찍이 中華 의문화가 夷狄 (오랑캐)의 문화에 변화를 당한다는 이야기는 듣지를 못하였습니다. 역대의 중국이 모두 우리나라에 대하여 箕 子 (단군이후 한반도를 지배하던세력)의 유풍을 간직하고 있어 예악과 문물이 중국과 비견할만 하다고 인정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듦으로써 중국을 버리고 자진하여 이적과 동류가 되려고 하니, 이것이 이른바 蘇 合 香 (약재이며 향료로쓰임)을 버리고 螳 螂 丸 (사마귀의 똥처럼만든 환약)을 취하는 격입니다. 이 어찌 문명을 이루는데 큰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一 , 新 羅 薛 聰 吏 讀 雖 爲 鄙 俚 然 皆 借 中 國 通 行 之 字 施 於 語 助 興 文 字 元 不 相 籬 故 雖 至 胥 吏 僕 隷 之 徒 必 浴 習 之 先 讀 數 書 粗 知 文 字 然 後 乃 用 吏 讀 用 吏 讀 者 須 憑 文 字 乃 能 達 意 故 因 吏 讀 而 知 文 字 字 頗 多 亦 興 學 之 一 助 也 若 我 國 元 不 知 文 字 如 結 繩 之 世 則 姑 借 諺 文 以 資 一 時 之 用 猶 可 而 執 正 議 者 必 曰 興 其 行 諺 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