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전통정원 - 경주.,최부자집 & 요석궁
솟을대문 형식을 취했으나
화려하지도 당당하지도 않으며
수수하고 평범한.,최부자집 대문.
최부자집 6훈은 집안 단속을 위한 내핍생활적 측면과
이웃 구휼을 위한 배려생활적 측면으로 갈라볼 수 있다.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검소생활을 몸으로 익혀라’는 뜻이다.
집안 살림을 직접 담당하는 아녀자들의
절약정신이 중요하다는 계율인 듯 하다.
거기다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말게 했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재난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의지가 숨쉬는 가훈이라 할 수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은 하지 말라>
부를 가진 자가 벼슬을 높이면 더 높은 벼슬을 위해
부정거래 또는 정쟁의 화를 면치 못하게 된다는 가훈.
<재산은 만석을 넘기지 말라>
‘넘치지 말라’ 는 중용의 도를 강조한 가훈
‘베풀 줄 알라’는 교훈을 함께 암시한 듯 하다
가르침대로 최부자집 재산은 만석을 넘기지 않았다
만석이 넘어가면 소작인들에게 되돌려줬다.
소작인들은 되돌려 받는 재미에 땀을 흘렸고,
낮아지는 소작료에 소작농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지만
최부자가 논을 사면 쌍수를 들었다.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최부자집에는 ‘파장에 물건 사지 말라’,
‘물건값을 깍지 말라’ 계율도 전해온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최부자집 사랑채는 백여 명 수용할 수 있는 큰 객사
이들 과객들을 위해 연간 천 석이나 되는 쌀을 사용
묵어 가는 과객을 위해 노자용 뒤주를 따로 마련하여
누구든지 쌀을 꺼내 다음 목적지까지 가도록 배려했다.
뒤주 입구를 좁게 만들어 한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쌀을 가져가는 폐해를 차단하는 지혜를 발휘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최부자집 소작료는 삼천 석.
그 중 천 석은 자신들 생활에,
다음 천 석은 과객 접대용으로,
나머지 천 석은 주민 사업에 사용
그러고도 흉년이 들면 구휼미를 따로 내어놓았다니
가진 자의 훈훈한 인심을 따로 느낄 수 있는 마당이다.
최부자집 가훈의 여운
1926년 10월 경주의 신라고분 발굴단 중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가 끼어 있었다.
훗날 국왕이 된 그는 그때 고분 근처
양반집 사랑채를 잊을 수 없었단다.
최부자집 가문의 마지막 상속자 최준
백산상회를 세워 독립자금을 마련했고,
1950년 전 재산을 기증., 영남대학 설립
스스로 역사의 뒷마당으로 물러났다니
최부잣집 종손다운 깔끔한 마무리 같다.
< 사랑채 전경 >
최근에 복원한 사랑채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아담하면서 품격이 있다.
< 사랑채 >
< 사랑채 누마루 >
조선 전기에는 정자나 누각을 지어놓고
공부를 하거나 풍류를 즐기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누각이 사랑채에 붙기 시작
사랑채 전면 한칸이 튀어나오게 해 누마루를 깔아 누정 역할
누마루는 통풍이 잘되고 습기를 차단할 수 있어 여름에 유용.
< 사랑채 기단 >
기단(죽담)은 막돌이나 다듬은 돌로 쌓기도 하나,
민가에서는 일반적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하지 않았고,
다듬은 돌을 사용하더하도 3층 이상 쌓지 못하도록 하였다.
< 뒷간 >
]
사랑마당 구석에 있는 뒷간
오른쪽으로 불에 탄 별당터
< 안채로 들어가는 내외벽 >
조선후기는 남녀유별을 강조한 시기였으므로
양반가 안채는 밖으로 노출되지 않도록 하였다.
마당에서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벽으로 가려져있어,
안채로 들어갈 때 내외벽을 돌아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 내외벽 >
< 내외담 >
최부자집 왼쪽에 '전통 법주'를 제조하는 집
담을 쌓아 안채를 가린 담을 '내외담'이라 한다
< 안채 >
안채는 사랑채에 비해 당당하고 크다.
마당 가운데 장독대가 잘 정리되어 있다.
장독대는 햇볕이 잘들어야 한다.
안마당은 건물에 가려 햇볕이 들지 않아
장을 담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다.
< 대청과 건너방 >
건너방 문의 구조가 특이하다.
살문이 일반적이나 이집은 판문
판문은 살문에 비해 튼튼하기는하나
실내가 어두우며 품격이 낮아보인다.
< 향단의 건너방 문 >
양동마을 '향단'의 안채 건너방의 방문
가운데는 띠살문, 양쪽은 넉살문으로 구성.
< 대청 >
< 창고 >
최부자집에서 눈여겨 볼., 창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전통 한옥
부를 짐작할 수 있는 건물이다.
쌀 700석-800석을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창고 건물이 여러채 있었다고 한다.
< 요석궁 >
최부자집 바로 앞에 '요석궁' 한식집.
이집은 최부자집의 작은 집이였다 한다.
최부자집 터는 원래 신라시대 요석궁터
요석궁 식비는 1인당 3만원 - 10만원 정도.
< 요석궁 중문>
정원이 잘 꾸며진 요석궁 마당에는
옛 건축물의 부재로 사용된던 돌들.
< 요석궁 정원 >
.........
요석궁
..........
입구에 들어서자 고가의 풍취와
들어 열개문이 반갑게 맞아준다.
연못과 소나무가 인상적인., 전통정원.
삼합과 갖가지 음식들,
식사 나오기전 나온 요리
부가가치세는 별도
가격은 1인분 30,000부터
50,000~100,000까지 있고
가족단위 20,000 음식도 있다.
화장실에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칫솔과 세면용품
금붕어
한참을 앉아 있고 싶은.,툇마루.
멋이 풍기는 이곳에서 찻물 끓여 놓고
좋은 사람과 마주앉아 차 한잔 하고픈 곳.
대숲 대나무처럼 촘촘한., 선자 서까래
고가의 풍취를 한층 더 멋스럽게 만든다.
나즈막한 토담에 살짝 기대어 있는 소나무
덧 말.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에게 프로포즈한 말.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눈 전설의 고향.,요석궁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유학자가 곧.,설총
조선시대 최부자집이 곧.,옛 요석궁터
최부자집 손님접대용 음식 =요석궁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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