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협객 장동휘 그리고 나훈아
연일 지면을 장식하는 쌍룡 자동차 분규를 보니 액션 영화의 주인공으로 활약했든 장동휘 선생이 생각난다. 우리나라의 노사갈등 , 내부 분규 등으로 빚어지는 손실액을 연 70조로 추정하고 있다. 외국 전체 유학비용이 년 70억불이 안되는 데 어마어마 한 돈이 매년 싸움으로 사라지고 있다.
장동휘 선생이 살아 계셨을 적에는 적어도 영화계에서는 큰 분란이 없었다. 장선생이 마을 이장이나 변호사처럼 양측의 이야기를 듣고는 사전에 조정을 잘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장선생은 중도의 입장에서 치우치지 않고 서로 WIN-WIN 을 느끼게 굴복 보다는 승복을 잘 받아 내었다. 또한 꿋꿋한 의리파여서 동료의 빚을 20년에 걸쳐 갚아 나가기도 했고 흥행실패로 가난하게 된 영화사에게는 무료 출연도 숱하게 해주었다. 그러한 인격과 재주가 그냥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일제하 소년 시에도 협객 기질은 있어 친지를 괴롭히는 왜놈 형사를 때려 눕혀 중학교에서 퇴교를 당한 후 만주를 떠돌며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 신영균, 신성일 등 서울대 , 명문고 출신의 배우들이 깃발을 날릴 때에도 장선생만은 배우들은 물론 영화제작업자, 감독들에게 까지 "선생님"으로 불려지고 깍듯이 예우를 받았다. 아직까지는 전무후무한 아낌과 존경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된 배경 스토리는 부산 부둣가 근처의 극장에서 시작된다.
60년대 후반 우리 영화계에서는 홍콩영화를 능가할 활극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화교계 자금이 받쳐 주는 홍콩 영화계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돈이 적게 들면서도 노련한 노장배우들을 써서 영화를 만들고는 주인공이 영화상영 전에 전국 지방 극장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까지 순회하여 관객 유치와 영화 시장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다.
장선생은 처음 부산 부둣가 근처(남포동 ?) 극장에 내려갔는데 부산에서 최고로 세다는 주먹계의 두목이 자기 사무실로 와달라고 전화가 왔다. " 서울서 손님이 왔으면 자신이 와야지 길도 모르는데 오라가라 하는가? “ 입장을 굽히지 않고 극장 사무실에서 신문을 보는 사이 부하로 보이는 중간 보스가 와서 협박했다.
“ 대우할 때 대우 받아야지 우리를 어떻게 보고 함부로 하는가?”일갈하며 군용 대금으로 장선생의 허벅지를 찍어 버렸다. “ 어! 손님 대우가 조금 지나치네 ! ” 장선생은 칼이 꽂힌 채 신문을 다 보고는 계속다른 책을 보고 있었다.
궁금하게 여겨진 두목이 극장장에게 물어 보니 여전히 책을 보고 있다고 하기에 늦기 전에 치료하라고 일러 주었다. “결자해지라고 꽂은 놈이 뽑아야 할 것 아닌가? ” 장선생은 요지부동이었다.
뒤늦게 도착한 두목이 장선생을 보자 눈빛에 벌써 기가 죽어 버렸다.
“ 나는 칼을 찬 왜놈을 맨손으로 때려 눕혔는데 너희는 부산시민에 인사차 온 빈손의 나그네를 정말 함부로 대하네 !”
“아이구 선생님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모셔오라고 심부름 보낸 녀석이 크게 잘못했습니다. ”
충실히 명을 받들어 집행한 부하의 뺨을 후려치며 “ 임마 선생님께 큰절하고 꿇어 잘못을 빌어 ! ” 하며 호통을 쳤다.
그 후 장동휘 배우는 부산 주먹 사회부터 선생님으로 불려졌고 부산에 장선생이 출연하는 활극 영화가 개봉되면 부산 경남의 체육계, 내노라하는 어깨들, 크고 작은 주먹쟁이들의 친지, 동창, 회사원 장선생은 참으로 인정과 의리에 살면서도 공정했고 나누어 먹을 줄 알았다. 목돈이 들어오면 고생한 팀원 전원을 불러 노력한 만큼 다 나누어 주고 본인 몫은 제일 나중에 “ 애 공납금주어야 하니 이번에는 내가 조금 더 갖고 갈게” 하며 투명하게 챙겼다.
그렇게 경위 바르게 살고 대소사건에 조정역을 많이 맡다보니 술도 더 들어야 했다. 정작 은퇴 후 집이 없었다. 장선생으로부터 신세를 지고 도움을 받았든 사람들이 모여 기금을 모아 충청도 한곳(청주?)에 정원이 딸린 아담한 집 한 채를 마련해 주었다.
그를 흠모하고 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은 부산 남포동 어깨중의 한사람이 나훈아였다. 나훈아의 일본 순회공연 첫 무대가 도꾜 신주쿠 극장에서 시작되었다.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교민들과 한국문예를 좋아하는 일본인들
앞에서 거침없이 불렀다. 그날 밤에 나훈아가 묵고 있는 호텔 방으로 야쿠자의 전화가 왔다.
“ 우리 일본 땅에서 그 노래 한번만 더 부르면 반드시 칼로 그어 버리겠다. 명심해라 ! “
그러나 나훈아는 부산항 지역의 밀수, 밀항, 영역싸움 등 그쪽 세계에서 죽고 다치는 모습을 익히 보고 들은 지라 동요하지 않았다. 마지막 공연까지 독도는 우리 땅을 불렀다.
상대가 적으로 보일 때에도 더욱 예의를 지키고 품위와 기세를 잃지 않았기에 장동휘 선생은 측근과 영화계의 동료들이 살아가는 데 엄청 큰 힘이 되어 주었고 나훈아는 남아로서 흔들림 없었기에 경찰, 군인, 공무원들이 못한 일을 일본 내부 깊숙이 해낼 수 있었다.
쌍룡 자동차의 고급 기술을 빼먹고 튄 중국 쪽에는 항의 제대로 못하고 우리끼리 저렇게 싸움만 하니 장동휘 “선생님”의 인정, 의리, 배포, 예법, 포용성, 겸손, 매서움 등이 모두 그립다.
첫댓글 가수 나훈아에게 그런 일이 잇엇군요. 본받을만 합니다. 또 장동휘 선생님의 훌륭한 리더십을 본받을만 하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는 누구와 싸워야 할 대상을 모르고 있지는 않는지 걱정입니다요.
쌍용은 신용 회복에 힘을 쓸때다 대다수의 소비자 들은 쌍용차 아예 처다보지도 않는다 열외 시키고 차를 고른다 투쟁 하기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장기 투쟁후 신용이 사라진 것이다 그전에는 그래도 쌍용이 힘드니 맘에 드는 구석이 있으면 도와주자의 분위기가 투쟁후 싹 사라졌다 사라진 신용회복에 힘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