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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豊友會 원문보기 글쓴이: 시보네/54
영주이갸기 ...풍기읍
글 : 시나브로(옜님의정취 그 향기를 따라 카페)
안정면에도 매력적인 문화재가 없는 것이 아니고, 거리가 먼 것도 아니지만 시간이 부족해 다음 기회로 미뤘다. 하지만 풍기읍으로 가는 도중 2km 남짓 가면 천연기념물 제273호 영풍 단촌리 느티나무를 볼 수 있다는 표지판을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느티나무 주변은 수박밭이어서 수박꽃과 어린 수박을 보는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었다. 이 나무는 약 700년 정도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높이 16.4m, 둘레 10.3m의 크기이다. 매년 추석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나무 아래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오늘 소백산 동쪽 줄기에 자리하고 있는 네 절집을 완성한다. 부석-성혈-초암사는 초행이 아니었지만 비로사는 처음이다. 입구에서 3,000원의 주차료를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징수하는 대신 차로 비로사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걱정했던 것보다는 길이 넓고 마주치는 차량도 많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비로사는 683년(신라 신문왕 3) 의상 대사가 창건한 화엄종 사찰로, 신라 말에는 소백산사(小白山寺)라고도 불렀다.
현재 비로사의 가람구성은 법당인 적광전을 중심으로 나한전·산신각·종각·심검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간지주와 진공대사탑비는 종무소가 있는 아래쪽이고, 여기에서 계단으로 올라가면 적광전을 비롯한 법당이 있다.
적광전 안에는 보물 제996호 영주 비로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榮州 毘盧寺 石造阿彌陀如來坐像)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원래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었으나 광배는 깨진 채 버려졌다고 한다. 높이 1.13m의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은 원만한 얼굴과 당당한 어깨로 현실적 사실주의가 잘 반영되어 있다. 옷은 왼쪽 어깨만을 감싼 형태이며, 손은 가볍게 주먹을 쥔 상태에서 손바닥을 위로 하고 양 손의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높이 1.17m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단정한 얼굴과 안정된 신체의 형태로 석조아미타여래좌상과 같이 현실적 사실주의를 잘 나타내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얇게 빚은 듯한 평행계단식 주름으로 자연스럽게 보인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모양으로 일반적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취하는 손모양이다.
적광전 앞에는 여러 조각의 석탑재와 석등재를 1기의 삼층석탑 형태로 조립하여 두었다. 상면에 연화문이 양각된 석등의 대석이 있고, 이 양옆에 같은 크기의 석등 우주석이 2개 있고, 그 옆에다 방형의 지대석을 아래에 깔고 그 위에 팔각대석, 옥개석, 옥신, 석탑편, 팔각석등 옥개석 등의 순서로 3층탑 형식을 갖추어 조립하였다.
아래쪽으로 내려섰는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 비로사진공대사보법탑비(毘盧寺眞空大師普法塔碑)는 보이지 않는다. 비는 해체하여 보수공사 중이었던 것이다.
탑비 근처에는 여러 석조유물들이 흩어져 있다. 불신과 운문이 양각된 광배편과 석등의 우주석편, 옥개석, 그리고 십이지신상과 팔부중신상으로 추정되는 상이 조각된 석재의 기단석 편들을 한곳에 모아두고 있다.
탑비에서 아래쪽을 바라보니 그곳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호 영주삼가동석조당간지주(榮州三街洞石造幢竿支柱)가 서 있다. 서로 마주보는 두 기둥의 안쪽면은 평평하며, 맨 위와 가운데에 각각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을 두었다. 규모나 장식기법 등으로 보아 비로사의 창건시기와 비슷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고 있단다.
비로사에서 내려오면서 금계리에 있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88호 영주금양정사(榮州 錦陽精舍)를 찾았다. 16세기 중엽 유학자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이 학문을 닦고 교육을 하던 곳이다. 정사로 가는 길 입구를 농기계가 막아놓아 금선정 옆 공터에 차를 세우고 올라갔는데 200m에 불과하지만 경사가 심해 제법 힘이 들었다. 정사는 보수공사 중이었다.
금양정사에서 내려오는 길에 보니 마을 앞 개울 좌우에 잘 자란 송림이 무성하여 매우 아름다웠다. 금선정(錦仙亭)은 그 개울가 북쪽, 마을이 끝나는 곳 즈음에 자리한다. 황준량(黃俊良)이 학문을 닦던 곳으로 풍기군수 송징계(宋徵啓)가 절벽에 금선대(錦仙臺)라 새기고 금계의 후손이 정각을 세워 금선정이라 하였다. 건물 안에는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고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돌아섰다.
정림사지(井林寺址)는 풍기읍 교촌리 147-1, 풍기향교 일원에 위치했던 절집이라고 한다. 이 자리엔 향교와 경북항공고등학교가 들어서 이미 절터는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 풍기향교를 보고 대성전 뒤쪽으로 좌회전했는데 주차공간이 없어 마을 좁을 길을 통과해 지방도로 나오니 항공고등학교가 먼저 보인다. 석탑재가 향교 대성전과 고등학교 교정에서 확인된다는 정보에 따라 학교로 먼저 들어가니 입구 왼쪽에 연자마 등의 석물이 보인다.
교사 전면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와 그보다는 좀 젊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다.
교사 앞 화단에서 석탑재를 찾아보았으나 쉬 발견되지 않는다. 겨우 하나 찾아낸 석재는 양우주가 모각되어 있어 어쩌면 기단면석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선다.
그런데… 입구에 세워둔 차로 돌아오는 길에 대로변을 힐끗했는데 그쪽에 삼층석탑 한 기가 서 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석탑으로 다가선다. 자연석 위에 기단부 없이 3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쌓아놓았다. 내가 무슨 안목이 있어서 탑의 조성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3층 탑신과 상륜부를 제외하곤 최소한 요즘 것은 아닌 듯했다.
경북항공고와 담장을 같이 쓰고 있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1호 풍기향교(豊基鄕校)는 실망스러웠다. 출입문은 대로 옆에 있지만 물론 잠겨 있었고, 담장 너머로 살피기에도 어려운 구조였기 때문이다. 원래는 군 서쪽 8리에 있던 것을 중종 37년(1542)에 주세붕이 이곳으로 옮겨 지은 후 숙종 18년(1692)에 다시 옛터로 되옮겼다가 영조 11년(1735)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시골 소읍의 복잡함은 대도시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않은데 풍기읍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읍내에는 영전사라는 절집이 있는데 이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절집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4호 영주영전사석조여래입상(榮州靈田寺石造如來立像)을 비롯한 많은 석조유물들이 있는데 모두 ‘靈田寺址’로 추정되는 욱금리사지에서 옮겨온 것들이라 한다.
차는 멀찌감치 세워두고 걸어서 들어갔는데 입구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석탑은 석등부재로 보이는 부재를 지대석 삼고 하나의 탑신 위에 3개의 옥개석을 얹은 뒤 석등 옥개석으로 보이는 부재로 마무리한 형태다. 자그마한 강아지가 끊임없이 짖어댔지만 무시하고 일단 석탑 촬영을 마친 다음 법당을 바라본다. 아마도 석불입상은 법당 안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뒤쪽에 있는 요사에서 비구니 스님이 문을 열고 바라본다.
배관을 거듭 요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유, 관리자가 거절하는 데야. 대신 뒤쪽으로 돌아가면 다른 석조유물들이 있다고 알려준다. 요사 옆에는 과연 목도 팔도 모두 달아난 석불을 비롯한 여러 석물들이 담장 앞에 놓여 있고, 다른 곳에는 대좌들이 늘어서 있다. 영전마을에 있다는 욱금리 영전사지에도 약간의 석물이 있다고 하기에 비로사에서 나오는 길에 망설였지만 접고 말았었다.
당초 대상에 넣었던 영주 풍기읍사무소내 비군(榮州豊基邑事務所內碑群)을 건너뛰고 유석사 (留石寺)로 향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시작한 답사가 오후 6시를 넘기고 있고, 희방사는 포기하더라도 유석사와 백룡사까지는 가야하는데 두 절 모두 상당히 깊은 산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지도로 확인해보니 유석사의 해발고도는 600m 남짓한 정도인데 막상 가자니 대단한 경사가 이어진다. 절 입구 언덕에서 보니 전망이 좋다.
신라 의상대사가 이 절 앞 느티나무 밑 반석에서 묵고 간 일이 있다 고 하여 뒷날 절을 짓고, 유석사라 이름 했다는 이 절은 신라 효소왕 3년(694)에 창건,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중창했으며, 1928년 제봉스님이 중건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기 이래로 몹시 쇠잔하여 천년고찰이 쓰러질 지경이었는데 1976년 임철수 주지가 가람을 수리하고 황폐한 도량을 가다듬어 절다운 면모를 되찾게 되었다.
유석사에 간 것은 석탑재를 보기 위함이었는데 자료들에 ‘대웅전과 종각 사이’에 있다는 설명과 달리 입구에서 들어가는 것을 기준으로 종각 직전에 있다. 석탑의 부재를 모아 놓았는데, 현재 남은 부재는 옥개석 2점, 옥신석 1점, 갑석 1점으로 옥개석은 층급받침이 3단으로 비교적 잘 남아있고 반전도 확인된다. 상부의 옥개석에는 중앙에 지름 3.3cm의 구멍이 있고 받침은 역시 3단이다. 규모나 새김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단다.
마지막이 된 백룡사(白龍寺)는 풍기읍 수철리 260-1번지에 있다. 원래 죽령마루에 있었는데 한국전쟁 직전 공비토벌을 위해 철거되었다가 1952년 이곳에 사찰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유석사나 백룡사나 모두 중앙선 철로 북쪽에 있지만 바로 갈 수 없는 길이 없어 철로 남쪽으로 갔다 다시 북쪽으로 오는 등 구불구불한 길이었다. 절집에서 내려다보이는 역은 소백산역이란 이름인데 생각해보니 희방사역이 이름이 바뀌었나 보다.
절집은 벼랑을 등지고 좁은 터에 여기저기 당우를 세운 모습이다. [白龍寺]라는 편액이 걸린 요사도 보이고, 명부전도 보이고, 콘크리트로 만든 건물은 2층은 종무소, 3층은 대웅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
스님은 내가 찾지도 않았지만 나와 보지도 않는다. ‘불상은 어디에 있을까’ 하며 계속 위로 올라가다보니 절벽 아래 비를 피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어놓고 그 가운데 불상을 모시고 있었다.
여기에 있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2호 백룡사석조여래좌상(白龍寺石造如來坐像)은 상대·중대·하대로 구성된 대좌(臺座) 위에 앉아있는데, 현재 하대석은 없어지고 중대석만 남아 있다. 몸 뒤에는 다른 돌로 마련한 배(舟)모양의 타원형 광배(光背)가 있다. 광배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광배와 작은 부처 3구와 구름무늬, 불꽃무늬가 새겨진 몸광배로 구분되는데 이러한 특징들로 미루어 9세기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단다.
이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간다. 풍기읍내에서 사두었지만 해 떨어지기 전에 절집 답사를 마쳐야 하겠기에 미루어두었던 김밥을 먹는다. 여기서 풍기 IC와 단양IC까지의 거리는 비슷하지만 풍기는 반대쪽이니만큼 단양으로 향한다. 구불구불한 옛길을 오르고 또 오르니 충청도와 경상도가 나뉜다. 이제 충청도로 들어서 또 끝없이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간다.
[인용설명문 출처: 문화재청, 전국문화유적총람, 코리아템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