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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3월20일,, 화사해진 봄날을 못이겨 그 핑게로 점심을 맛난걸 먹고 사무실 앞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니 봄이 온통 나를 위해 온것인 듯 행복하다..
다시 한편 올려볼께...
⑭ 숙종의 폭탄선언, “관우야 사랑한다” - 왕권 강화와 관왕묘 - 임진왜란 때 선조는 명나라 장수들의 압력 때문에 관우의 사당을 만들고 억지로 네 번 절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적극적으로 관우를 좋아한 왕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숙종이다. 선조가 그토록 싫어한 일을 스스로 나서서 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속사정을 알아보자. -------------------------------------------------------------------- “크흑, 내가 말야, 밤을 새우면서 《삼국지》를 읽고 있는데 말야. 아무리 봐도 관우, 아니 관왕은 하늘이 내린 신장(神將)이란 생각이 들어. 조조의 백만 대군에 둘러싸였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속을 뚫고 들어가 유비의 아들인 아두를 구출해내는 모습..... 장판파에서의 그 놀라운 용력은 보는 사람을 무아지경으로 빠져들게 만든다니까. 감동이었어.” “저기, 전하. 장판파에서 아두를 구해내는 건 조자룡 아닙니까?” “뭐? 너 어디서 짝퉁 《삼국지》를 읽고 와서 설레발이야? 내가 본 《삼국지》에는 분명 관우가 아두를 구한 걸로 나와 있는데!”
“저기, 전하..... 혹시 삼국지 게임을 하신 거 아닙니까?”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내가 관우라면 관우야! 김연아라면 김연아고 관우라면 관우야! 과......관우가 어떤 사람인데? 너 알어? 그 사람은 말야, 딱 가서 너 조조? 나 관우야. 그런 다음에 청룡도를 들고 내리쳐. 그럼 딱 봐. 이렇게 팔을 올려. 그럼 팔이 부러지도록 청룡도로 내려 치는 거야! 이렇게!” “아이고! 내시 죽네~”
그랬다. 숙종은 관우에게 푹 빠져 있었다. 문제는 일반인이 그랬다면 개인의 일로 끝나겠지만, 왕이 관우에게 빠지게 되면 그것이 ‘나라의 일’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숙종은 관왕묘로 나아가 직접 절을 하고 술을 따르겠다고 나선다. “내가 관사마님이 있는 관왕묘에 찾아가 예를 올리려고 하는데, 어떤 식으로 예를 올려야 할지 한번 고민 좀 해봐.” “허, 이거 참. 야, 도승지! 왜 전하한테 《삼국지》같은 걸 보여줘서 일을 만들고 그래?” “그게 뭐 제 맘대로 되는 일입니까? 갑자기 《삼국지》를 꺼내 읽더니만, ‘진 삼국무쌍’이랑 ‘삼국지7’을 컴퓨터에 깔고 밤새도록 게임을 하더니만....” “결국은 삼국지 게임을 하다가 이렇게 되었다는 소리군.” “자자, 이미 《삼국지》를 본 거는 본 거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대책회의나 합시다.” “대책회의를 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잖아! 선조대야 명나라 놈들이 절을 하라고 등 떠미니까 어쩔 수 없이 한 거고,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등 떠미는 놈들은 이미 폭삭 망한 상황(명→청)인데, 무슨 배례야?” “그렇다고 안 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모가지 잘릴 텐데?” “아니, 좋아하려면 국산도 많은데 왜 하필 중국 애야? 욘사마도 있고, 이순신 장군이나 강감찬 장군도 있는데 왜 하필 관우냐고.” “지금 그런 푸념을 할 시간이 없거든? 참배를 어떻게 할 건지 일단 그거부터 정하자고. 내 생각에는 사배례(네번 절하는 것)를 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거 같고, 간단하게 허리나 숙이고 마는 수읍으로 하면 좋겠는데, 다들 어때? 반대 없지? 그럼 그렇게 하자고.” 숙종은 영의정과 조정 대신들이 건의한 배례 절차를 전해듣고 대충(?) 동의했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숙종은 관우를 정말 사랑한 것이다. “야, 너희도 관우가 얼마나 대단한 충의지사인지 알지? 문무겸전에 그 대단한 용력과 유비에 대한 아름다운 충절.........너희가 중국 사람이라고 좀 꺼려하는 건 나도 알아. 그런데 사람은 자고로 좋은 게 있으면 보고 배워야 한다니까! 너희도 관우의 마음을 좀 본받아봐. 뒤에 가서 왕 뒷담화 할 생각만 하지 말고. 이번에 관왕묘를 갔다 와서 생각한 건데, 전국에 관왕묘가 있는 것까지는 좋은데 관리가 안 되고 있어요. 좋은 거라고 알고만 있으면 뭐해? 실천을 해야지. 그래서 이참에 관왕묘에 제사 지내는 걸 정례화하는 게 어때?” 숙종의 폭탄선언이었다! 관왕묘에 지내는 제사를 정례화한다니! 이제 국가 차원에서 관우를 섬기겠다는 말이 아닌가? 난데없는 관왕묘 제사의 정례화 앞에서 조정 대신들은 고민을 하게 된다. “제길, 제사를 지내도 왜 하필 관우냐고. 그 자식 이야기는 뻥튀기된 거야. 실제로 별것도 아닌 놈인데.” “이게 다 전하의 꼼수라니까.” “꼼수?” “그래, 관우가 유비한테 충성했듯이 너희도 나한테 충성해라, 뭐 그런 거 아니겠어?” 그랬다. 동서붕당이 다시 남인․북인․노론․소론으로 갈라져 임금의 왕명보다 당명에 더 충실한 당시 분위기에서, 숙종은 관우를 데려와 임금에 대한 충성을 강요한 것이다. 이는 숙종 이후의 임금들에서도 유효한 ‘신하 관리책’으로 사용되었다. “꼼수든 뭐든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끄고 보자. 자, 어쩔 거야? 왕이 하자는 대로 할 거야?” “그럼 달리 방법이 있어? 심심하면 환국(換局-조정을 물갈이 하는 것. 정권교체로 보면 될 것이다. 숙종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서인과 남인세력을 통째로 바꾸었다. 이때의 키워드가 인현왕후와 장희빈이었다.)이다 뭐다 해서 사람들 때려잡는 게 취미인 사람한테.... 괜히 꼬투리 잡히지 말고, 대충 하자는 대로 하자고.” 이리하여 숙종은 자신의 뜻대로 모든 지방의 관왕묘에 정기적으로 향축을 하도록 명하게 된다. 이때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주관하도록 했고, 향축일은 매년 경칩과 상강일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쯤에서 끝났으면 ‘숙종이란 임금이 한때 관우를 좋아했었다’ 정도로 이야기가 끝나겠지만, 숙종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어이, 지난번에 영의정이랑 좌의정이 함께 ‘관왕묘의 참배는 수읍으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닌 거 같거든? 관우가 어떤 사람이었냐? 일단 너희가 《조선왕조실록》을 뒤져서 관우한테 한 행례의절을 좀 찾아봐. 옛날 사람들이 틀린 일 한 거 봤어? 선조들이 한 거 따라 하면 다 맞는 일일테니까. 우리도 그거 찾아서 해보자고.” 숙종의 연이은 폭탄선언!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옛 기록을 찾아 그 예에 따라 관왕묘를 참배하겠다니..... 솔직히 옛 기록을 몰라서 그랬을까? 숙종도, 숙종의 신하들도 임진왜란 시절 선조가 관왕묘에 사배례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숙종은 관왕묘에 절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것이다. “전하, 찾아보니까 선조대왕께서 관왕묘에 네 번 절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우리 할아버지께서 절하셨는데 내가 절을 안 하면 얼마나 불효겠냐? 오케이, 앞으로 나도 관왕묘에 가서 절을 할 테니까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 알았지?”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제 대신들이 들고일어날 차례였다. “와, 아무리 우리 임금이지만, 진짜 너무하는군. 선조 때 절한 건 명나라 놈들이 옆구리 찔러서 억지로 한 거 아냐? 그걸 들고 나와서는 뭐? 불효라고?” 민족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한 좌의정 서종태는 총대를 메기로 작정을 한다. “전하, 전하도 그렇고 저희도 그렇고 피차 알 거 다 아는 사람들이니까,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솔직히 선조대왕께서 절을 하고 싶어서 했습니까? 명나라 놈들이 옆구리 찔러서 억지로 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세상을 살다 보면 ‘급’이란 게 있잖습니까? 전하께서는 왕이고 관우는 일개 장수에 불과합니다. 급에 맞춰 살아야죠. 안 그렇습니까?” “야, 네 말을 듣다 보니 살짝 기분 나빠지려 한다. 관우가 나중에 무안왕이 된 거 알지? 그리고 축문에도 ‘감소고우무안왕’이라고 되어 있어, 선조께서야 어쩔 수 없이 했다지만, 나는 하고 싶거든? 그리고 뭐? 급이 안 맞는다고? 관우도 왕이고 나도 왕인데 무슨 급이 안 맞냐?” 이 정도까지인 걸 보면 숙종이 관우를 좋아하긴 무척 좋아한 모양이다. 이것은 숙종의 개인적인 취향도 취향이지만, 당대의 정치 상황이 붕당정치의 격변기였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이다. 그래서 죽은 관우를 끌어와 현재의 신하들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것이 숙종의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례화된 관왕묘 제사는 이후에도 면면히 전해졌으며, 가장 압권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었다. 나라가 망하기 바로 직전인 1901년 고종은 관우의 힘을 빌려 나라를 살려보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서울에 북묘와 서묘를 짓고 지방에는 전주와 하동에 관왕묘를 짓더니 관왕의 호를 지어 바친 것이다. 이래저래 관우는 한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가 보다. -------------------------------------------- 장희빈과 인현왕후 숙종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장희빈과 인현왕후이다. 영화로 두 번, TV 드라마로 다섯 번이 만들어진 사극의 베스트셀러 ‘장희빈’의 시대가 바로 숙종 시절이었다. 지금까지 그려진 사극을 보면, 숙종이 언제나 여자들의 치마폭에 휩싸여 이리저리 휘둘리던 ‘바보 왕’으로만 그려졌다. 그러나 숙종은 바보가 아니었으며, 여자들의 치마폭에 휩싸이지도 않았다. 숙종은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지켜나간 것이다. 서인과 남인 서인세력이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지자 인현왕후를 버리고 장희빈을 택한 숙종. 숙종은 장희빈을 택한 것이 아니라 장희빈 뒤에 있는 남인들을 택한 것이다. 바로 기사환국(己巳換局)이었다. 그 뒤 남인 정권이 비대해지자 숙종은 다시 서인세력은 불러들이게 된다. 바로 갑술환국(甲戌換局)이었다. 숙종의 정치력과 정치 보복 숙종은 당쟁이 격화되던 17세기 후반에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환국이란 비상 상황을 쓴 것이다. 이때 보여준 숙종의 카리스마와 행동력은 조선의 역대 왕들과 비교해봤을 때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되자 서인과 남인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죽여야 한다는 정글의 법칙으로 정치를 하기 시작했다. 숙종 시절에 일어난 세 번의 환국으로 숱한 정치인이 초주검이 되었고, 그 뒤 조선 당쟁사에 정치보복이 일상화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완전한 카리스마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신권(臣權)은 왕권에 짓눌리게 되었고, 신하들은 숙종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상황이 되었다. 자칫 잘못해 숙종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 것이 숙종 39년에 있은 존호(尊號) 주청 사건이었다. 왕이 죽은 후 신하들이 대행왕을 추도하며 올리게 되는 존호. 존호는 죽은 왕에게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 이례적으로 광해군이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존호를 받은 적은 있었지만, 조선의 왕들 중 살아 있는 왕에게 존호를 받치겠다고 신하들이 들고 일어난 적은 없었던 것이다. 군약신강(君弱臣强-왕의 권력이 약하고, 신하의 권력이 강함)의 나라 조선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숙종의 이런 정치 게임을 위한 도구였지, 숙종이 이들에게 휘둘린 것은 아니었다. ----------------------------------------------------------------------- ☞ 자료 출처 : 「엽기 조선왕조실록」 - 이성주 지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