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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appy Blackgosi★ 원문보기 글쓴이: 여전히 아름다운지
숨은 명문高’ 검정고시 인맥과 파워
자 료
2007/02/26 09:39 |
“좌절 인생, ‘패자부활전’ 칼 갈며 생존력 키웠다”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
● 서울대 합격자수, 사법시험 합격자수 매년 상위권 랭크 ● 좌절과 방황 이겨낸 검정고시派, 참여정부 성격과 잘 맞다? ● 고교동창회보다 결속력 약해도 ‘마음으로 밀어주기’는 더 끈끈 ● ‘검정고시 출신’ 편견 싫어 법조인, 전문직, 공무원 선호 ● 고교 내신 안 좋은 학생들에겐 유일한 탈출구 |
법무법인 화우의 박영립(54) 변호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아버지가 작고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학교를 더 다닐 수 없었다. 장남인 그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여관 조바(심부름꾼), 음식점 점원, 막노동, 신문배달…안 해본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초등학교 학력으로 취직할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공장에 취직하려 해도 최소한 중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했다. 평생 먹고살 수 있는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고 학원을 알아보던 중 검정고시학원을 알게 됐다. 검정고시에 합격하면 학교를 안 가도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학력을 준다는 것이었다. 못다 한 공부에 대한 미련과 열정이 솟구쳤지만 결심은 쉽지 않았다. 당장 입에 풀칠을 해야 했고, 그가 돈을 벌어야 동생들이라도 공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졸업장이라도 따자는 생각에 주경야독을 했어요. 그러다 고졸 검정고시까지 합격했고, 내친김에 대학에 진학해 변호사가 됐으니 검정고시가 제 인생을 바꿔놓은 셈이죠.”
구두닦이 출신 판사
박 변호사의 경우처럼 검정고시는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못한 사람에게 시험을 통해 학력을 인정해주고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는 제도다. 검정고시는 1925년 일제 조선총독부가 서울과 평양에서 실시한 ‘검정고시’에서 유래했다. 1950년 ‘대학 입학자격 검정고시 규정’이라는 문교부령으로 정식 제도화됐고, 1968년 지금의 대학수학능력시험 격인 대학입학 예비고사와 구별하기 위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로 개칭돼 오늘에 이른다. 시험은 각 시·도 교육위원회에서 주관한다. 지금까지 검정고시를 통해 학력을 취득한 사람은 160만명, 이 가운데 고졸 검정고시 출신만 1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검정고시 출신은 대개 경제 사정으로 학업을 포기했던 사람들이라 대학에 진학하는 비율도 높지 않고, 사회지도층은 더더욱 적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검정고시 파워’는 의외로 막강하다. 서울대의 경우 1960∼80년대엔 검정고시 출신 합격자가 해마다 80∼100여 명에 이르렀다. 1983년엔 135명이 합격하기도 했다. 고교 평준화 이전이든 이후든 고교 출신별로 신입생 숫자를 산출하면 항상 5위권 안에 들었다. 명문고는 부침을 거듭했지만 검정고시는 꾸준히 ‘명문고’ 자리를 유지한 셈이다. 최근 사정도 마찬가지다. 서울대 합격자 중 검정고시 출신은 2002년 89명, 2003년 66명, 2004년 53명, 2005년 34명, 2006년 40명으로 특목고를 포함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그뿐 아니다. 법률신문사에서 조사한 지난 5년간 사법시험 합격자 출신고교를 보면 서울 대원외국어고(163명) 다음으로 검정고시 출신(72명)이 많다. 한영외고(66명), 순천고(55명), 대일외고(44명) 등 내로라하는 명문고를 압도한다. 전체 법조인 1만4831명의 출신고교를 따져도 경기고(417명), 경북고(305명), 전주고(256명), 서울고(220명) 다음으로 검정고시 출신(215명)이 많다.
검정고시 출신의 법조계 인사로는 우선 김석휘(72) 전 법무부 장관, 이근웅(59) 전 사법연수원장이 눈에 띈다. 임성덕(49) 서울고검 검사, 김대호(49) 서울남부지검 부장검사, 지상목(47) 인천지원 부장판사, 조욱희(50) 부산지검 동부지청 부장검사, 김칠준(47) 법무법인 다산 대표 등도 검정고시 출신 법조인이다.
광주지원 서정암(45) 판사는 구두닦이 출신 판사로 유명하다. 그는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자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머니를 도와 3년 동안 농사만 지었다. 그러다 ‘서울에 가면 야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상경, 구두를 닦으며 2년 만에 검정고시로 중·고등 과정을 통과했다. 직접 번 돈으로 대학에도 진학했다. “어렵게 대학을 졸업했지만 이미 서른이 넘어 취직이 안 되더라고요. 오기가 생겨 사법시험을 준비했죠. 검정고시를 치러본 게 사법시험 준비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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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력과 끈기
법조인이 많은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검정고시 출신에겐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끈기가 있다. 그래선지 학계에도 검정고시 출신이 많다. 이성근(69) 전 한성대 총장, 정문성(55) 울산대 학장, 성병욱(67) 세종대 석좌교수, 김종순(52) 건국대 부총장, 백좌흠(54)경상대 법대 교수, 채이식(58) 국제해사기구(IMO) 법률위원회 의장, 황희연(56) 충북대 교수, 장용근(37) 단국대 교수, 신구식(54) 미국 메릴랜드대 아시아부 교수 등을 꼽을 수 있다.
정·관계인사 중에는 교육부 장관을 지낸 이명현(65) 서울대 교수가 입지전적 인물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목욕탕욕조 때 건지는 일부터 전차표 판매원, 신문팔이, 학교 급사 등 사회 밑바닥에서 생업에 종사하며 독학으로 서울대에 진학했다. 이병석(55) 의원, 이상희(69) 전 과기처 장관, 주진우(58) 전 의원, 조일호(59) 전 농림부 차관, 이연수(53) 시흥시장, 최병국(51) 경북 경산시장, 황일봉(50) 광주 남구청장도 검정고시 출신이다.
‘참여정부’에는 이전 정부 때보다 검정고시 출신이 많은 편이다. 한나라당 안경률 의원에 따르면 참여정부 1∼3급 고위공무원 1303명의 출신고를 분석한 결과 경기고(69명), 경북고(48명), 광주일고(44명), 서울고(35명), 대전고(34명), 경복고(33명), 전주고(30명), 광주고(28명) 다음으로 검정고시(27명) 출신이 많다고 한다. 청와대만 해도 정상문(61) 대통령비서실 총무비서관, 소문상(43) 대통령비서실 정무기획비서관, 박범계(44) 전 민정수석실 법무비서관 등이 있다. 박범계 전 비서관은 “검정고시 출신은 기본적으로 좌절과 방황을 이겨낸 사람이라 의지가 굳다. 그게 참여정부의 성격과 맞아떨어진다. 또한 참여정부가 특정 학연과 지연에서 탈피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가정용 밀폐용기 락앤락으로 유명한 (주)하나코비 김창호(47) 대표도 중·고등 과정을 검정고시로 마쳤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 혼자 힘으로는 생계를 꾸리기 어렵게 되자 2남5녀의 장남인 그는 학교를 그만뒀다. 이후 목수, 공사장 막노동꾼, 페인트공 등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닥치는 대로 하며 독학한 끝에 1980년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인간승리’의 주역들
재계에는 김 대표 같은 ‘인간승리’의 주인공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류장수(55) AP위성산업 대표, 문주현(49) MDM 대표, 이강현(47) 에이스텔 대표, 손태영(51) 문헌정보 대표, 조현정(50) 비트컴퓨터 대표 같은 벤처기업인들이 그들. 또한 둘둘치킨으로 유명한 일동인터내셔널 정동일(53) 대표(서울 중구청장), 김순진(56) 놀부 대표, 김서중(55) 빵굼터 대표, 남상해(68) 하림각 사장, 스포츠용품 전문업체 한국오지케이 박수안(54) 전 회장도 검정고시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인물들이다. 대기업 임원 중에는 정병태(55) 비씨카드 대표이사, 심창섭(55) 삼성전자 전무, 이정식(50) 삼성전자 상무, 천정철(50) 삼성SDI 상무, 김영익(48) 대신증권 이사 등이 검정고시 출신이다.
언론계에서는 ‘아기공룡 둘리’ ‘날아라 슈퍼보드’ 등 어린이 만화영화를 제작하며 우리나라 만화영화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린 민영문(50) KBS PD, 김벽수(56) TU미디어 상무, 방민준(57)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김효순(54) 한겨레신문 이사 등이 활동하고 있다.
문화예술인으로는 소설가 이문열(59)을 비롯, 소설가 겸 번역작가인 이윤기(60), 시인 이승하(47) 중앙대 교수, 시인 황학주(53), 문학평론가 김지룡(43)씨 등을 꼽을 수 있다. 연예인 중에도 검정고시 출신이 의외로 많다. ‘뚝딱이 아빠’로 유명한 개그맨 김종석씨는 가정 형편 때문에 상고에 진학했지만 대학 진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자퇴, 스스로 돈을 벌며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진학했다. 방송인 정재환(46)씨는 중학교 때부터 기계 조립하는 재미에 빠져 공고에 진학했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게 생각했던 것과 달라 실망하고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진학했다. 가수 보아, 김장훈, 홍경민과 탤런트 서민서, 개그맨 김형인도 검정고시 출신이다.
검정고시 가족
종교인으로는 곽선희(74) 강남 소망교회 원로목사와 대한조계종 총무원 문화국 국장을 지낸 덕신(50) 스님 등이 있다. 군은 상대적으로 검정고시 출신이 드문 편. 검정고시 출신 장성이 이성출(합참 전략기획본부장·육사 30기) 중장, 김인동(3사관학교 생도대장) 준장 등 한 손으로 꼽을 정도. 김병관 서울시 재향군인회장도 검정고시 출신이다.
집안 형편 외의 이유로 검정고시를 거친 사람도 많다. 이승준(54) 충남대 교수는 ‘검정고시 가족’이다. 이 교수 본인은 물론, 아들과 딸도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했다.
“경기중학교를 고집하다 삼수를 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려고 고1 때 검정고시를 봤습니다. 덕분에 또래들과 같은 해에 대학에 갈 수 있었죠.”
이 교수의 장남(27)은 과학고를 다니다 내신이 안 좋아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통해 서울대 기계과에 합격했다.
“내신이 안 좋은 학생에겐 검정고시가 유일한 탈출구더라고요. 과학고나 외고의 영재들이 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검정고시라는 편법을 이용하는 것은 잘못된 교육정책 때문이죠.”
이 교수의 아들 친구 5명도 함께 자퇴해 검정고시로 서울대에 입학했다고 한다. 자퇴하는 학생이 워낙 많다보니 과학고에서도 자퇴 여부와 상관없이 동문으로 인정한다. 이 교수의 딸(18)은 또 다른 경우다. 이 교수가 외국에서 교환교수로 있는 동안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딸은 귀국한 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 “교사들과 트러블이 심했어요. 자유스러운 외국 학교와는 많이 다르니까요. ‘학교 다니기 싫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중1 때 자퇴하고 그해에 중졸 검정고시를 봤습니다. 고등학교 과정 역시 검정고시를 이용했고요.”
이 교수의 딸은 올해 이화여대에 합격했다. 또래들보다 1년 빠른 셈이다. 류장수 AP위성산업 대표는 미션스쿨인 고등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자퇴했다. D대학의 한 교수도 고등학교의 종교적 강압이 심해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본 사례. 그는 “덕분에 또래들보다 1년 빨리 대학(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며 웃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씨는 고교 1학년이던 1980년 대학 운동권 선배들과 어울리다 계엄사령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퇴학당한 후 1983년 검정고시를 통해 고려대에 입학했다. 박범계 전 청와대비서관은 학창시절 집단 패싸움을 하는 등 문제학생이었다고 한다. 결국 고2 때 자퇴한 그는 ‘이대로 인생을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검정고시를 준비해 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검정고시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인생의 패자부활전”이라고 했다.
조기 대학입학 수단
대학에 일찍 들어가기 위해 검정고시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핵물리학자 고(故) 이휘소 박사는 경기고 2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조기 입학했다. 입학 당시 서울대 전체 수석이었다. 김용준(69) 전 헌법재판소장은 서울고 2학년 때, 김두희(66) 전 법무부 장관도 경기고 2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과학기술처 장관을 두 차례 지낸 정근모(68) 명지대 총장에 따르면 당시 경기고나 서울고에서 2학년 때 검정고시를 통해 1년 일찍 대학에 진학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정 총장은 경기고 1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해 서울대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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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당시 12세에 검정고시에 응시, 최연소로 합격했던 송지용(18)군은 이듬해 포항공대 생명과학부에 입학했다. 지난해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자인 최승호(22)씨도 중학교 2학년 때 자퇴해 중·고 과정을 검정고시로 통과하고 연세대 법대에 입학했다. 천재소년 송유근(10)군도 검정고시로 중·고교 과정을 마치고 인하대에서 특별교육을 받고 있다.
하지만 검정고시 출신 중 상당수는 검정고시를 통한 조기 대학 입학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정근모 총장은 “학창시절의 추억이 없다는 아쉬움이 큰 것은 물론이고, 또래 친구들을 깊게 사귀지 못해 힘들 때도 많다. 또한 학문의 수준이 갑자기 높아지면서 자칫 자신감을 잃어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공부는 빨리 하는 것보다 완벽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
중학교 입학이 늦어지자 검정고시를 선택해 또래들보다 1년6개월 빨리 고교 과정을 끝낸 이석연(53) 변호사도 “고교 과정을 생략하는 게 꼭 좋은 것은 아니다”고 했다. “저는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려는 모험심 때문에 선택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권하고 싶지는 않아요. 시간을 단축한다는 장점은 있지만 고교 시절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커요. 짧은 시간에 목표를 달성한 데서 오는 자만심에 빠지기도 쉽고요.”
‘전검동’의 힘
저마다 사연은 달라도 이들은 모두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동질감을 갖고 있다. 그런 동질감으로 뭉친 게 전국검정고시총동문회(전검동)다. 전검동은 1973년 만들어진 전국대학검정고시연합동문회(전검련)가 모태가 됐다. 그 1년 전인 1972년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류장수씨와 심창섭씨가 주축이 되어 서울대 검정고시동문회를 만들었다. 대학에 들어오긴 했지만 불러주는 고교동문회가 없어 외로움을 느끼던 두 사람은 ‘검정고시 출신들끼리 모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즉각 행동에 옮겼고 심창섭씨가 초대회장으로 추대됐다.
이듬해인 1973년에는 전국의 검정고시 출신 대학생들이 모여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번에도 류장수씨가 앞장서서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등을 돌아다니며 ‘검정고시 출신들 모이자’는 방을 붙였다. 의외로 많은 학생이 연락을 해왔다. 그렇게 해서 1973년 100명이 넘는 대학생이 모여 전검련이 만들어졌고, 류장수씨가 초대 회장이 됐다. |
류씨에 따르면 전검련은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고 한다. 우선 형편이 어려운 검정고시 출신 학생들을 도왔다. 다들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렵게 생활했지만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학교마다 몇 명씩 선발해 학자금을 대주었다.
“서울대 수의대에 입학한 친구가 있었는데, 등록금이 없어 학업을 포기할 처지였어요. 등록금을 지원해줬는데, 1년 뒤 의대로 전과(轉科)했을 만큼 열심히 공부했어요. 지금은 훌륭한 의사가 되어 있을 겁니다.”
또한 검정고시 후배들을 위해 모의고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일반 고등학교에선 본고사용 모의고사를 치러 입시에 도움을 주지만 검정고시 출신들은 모의고사를 볼 기회가 없어 실력을 검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검련 출신들이 사회에 진출해 자리를 잡게 되자 1989년 당시 전검련 대표였던 이진청(공무원)씨와 김원복씨 등이 선배들에게 제의해 대학과 사회인을 포괄한 조직인 전검동을 만들었다.
전검동 유경선 사무국장에 따르면 그간 조직이 꾸준히 발전해 전국 16대 광역시도는 물론, 서울 25개 구 중에서 18곳에 지부가 결성돼 있다고 한다. 또한 10여 개의 나이별 모임이 있어 지역과 세대별로 친목을 도모한다.
그런데 1989년 결성 당시 전검련 회원이 3000명이었는데, 지금 전검동 회원은 40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 이유를 묻자 “당시 숫자는 이름만 올린 것이고, 지금은 입회비(3만원)와 연회비(2만원)를 내는 회원들이기 때문에 숫자만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전검동 회원으로 가입하려면 반드시 검정고시 합격증을 팩스로 보내 확인을 받아야 한다. 검정고시 출신이 아니면서 불순한 목적으로 가입하려는 이들을 막기 위해서다.
마음으로 밀어준다
전검동은 회보 등을 통해 동문 소식을 전하고, 지역별 세대별 정기 모임을 통해 우의를 다지는데, 전체 송년회 때는 해마다 600명 이상이 모인다고 한다. 하지만 함께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공유할 만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니 고교 동문들에 비해 유대의 끈이 약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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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계 전 청와대비서관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막강한 게 학연(學緣)이다. 특히 고교 학연은 결정적이다. 17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 지역에서 학연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절감했다. 그런데 검정고시는 고교동창회 같은 끈끈한 유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류장수 AP위성산업 대표는 “검정고시 동문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면에서는 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비슷한 고생을 했다는 경험이 하나로 만들어준다. 결속력은 약하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는 더 크다”고 했다.
박영립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시절에 검정고시 출신 변호사 동우회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고 한다. 만사를 제쳐두고 만날 만큼 강한 흡인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에 띄게 도와주지는 않아도 마음으로 밀어주는 점은 있어요. 변호사가 됐을 때 검정고시에다 명문대 출신도 아니어서 밥벌이나 하겠냐고 걱정했는데, 평균 이상은 했어요. 의뢰인이 누가 추천해줘서 왔다고 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검정고시 출신이에요. 법원에서도 행정처리가 빨리 되는 경우가 더러 있어서 왜 그런가 했더니 직원 중에 검정고시 출신이 도와준 거였어요.”
코스닥에 상장된 엔터테인먼트업체 Y사 대표 B씨는 검정고시 출신이다. 그런데 이 회사가 코스닥에 상장할 당시 자본금이 법적기준으로 계산하면 200만원에 불과해 상장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엔터테인먼트사업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가능성을 믿은 검정고시 출신 법조인과 세무사들이 상장을 도왔고, 결국 Y사는 상장에 성공한 뒤 대박을 터뜨렸다. 오늘의 Y사는 검정고시 출신들의 믿음으로 만들어진 회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래방 기기업체 K사를 운영하던 K씨 역시 검정고시 출신이다. 한때 경영 위기에 처했던 K사는 중국에서 사업을 하던 검정고시 출신 B씨의 도움으로 중국이라는 새로운 수출시장을 뚫을 수 있었다. 지금 중국 전역엔 K사의 노래방 기기가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편견이 싫다
우리 사회엔 검정고시 출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없지 않다. 무엇보다 단체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 고집이 강하고 조직에 잘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관이 강하다. 서정암 판사도 “검정고시 출신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훈련이 돼 있다는 게 장점이지만 학교생활을 못한 게 가끔 단점으로 드러나곤 한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개성이 너무 강하고 소속감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고 털어놨다.
검정고시 출신 중에는 변호사, 세무사 등 전문직과 공무원이 많다. 어려서부터 ‘먹고사는 문제’의 절박함을 체감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검정고시에 대한 기업의 편견이 싫어서 그쪽 길을 선택했다는 사람이 많다.
최근 서울대에 진학하는 검정고시 출신은 점점 줄어드는 경향이다. 그나마 내신 때문에 특목고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치러 진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집안 사정 등으로 검정고시를 통해 서울대에 입학한 경우는 드물다. ‘돈 없이 공부 잘하기 어려운 세상’으로 변한 탓이다.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에 진학한 특목고 자퇴생들은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자부심도 희박해 동문회에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검정고시 출신 인사들은 “검정고시는 여전히 의미 있는 제도”라고 입을 모은다. 박영립 변호사는 “검정고시는 어떤 경로로든 제도권 교육에서 이탈한 사람이 다시 배움의 길로 진입하는 유일한 연결로”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