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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예로부터 ‘사람의 산, 역사의 산’으로 여겨진 지리산은 흔히 어머니의 산이라 불린다. 백여 리의 주능선과 15개의 지능선의 생김생김이 어머니의 넓은 품과 같이 포근해서일 것이다. 높이 만큼이나 큰산으로 여겨지는 지리산과 더불어 두꺼비 떼의 울음으로 왜구를 막았다는 전설로 ‘두꺼비 섬’자를 붙여 이름지어진 섬진강의 오백리 물길은 지리산을 끼고 굽이쳐 흐른다. 굽이치는 물길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왕시루봉이 손꼽힌다. 왕시루봉을 오르기 위해 피아골과 노고단을 지나기로 한다. 피아골은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의 아지트였기에 치열한 격전지였다. 피아골의 이름도 그렇게 죽어간 이들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이고, 유난히 붉은 피아골 단풍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 이곳에서 식용 피를 많이 생산했던 피밭골에서 이름지어진 것으로 직전리(稷田里) 마을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봄의 마술에 걸린 피아골 직전리 조금 못미처 부도의 전시장이라 할만큼 뛰어난 부도가 많은 연곡사를 지나친다. 마을에 도착하면 30여 분의 넓은 길이 피아골의 맑은 계곡을 아래에 두고 선유교까지 이어지는데 나비 두 마리가 마치 길을 안내하듯 취재팀을 따른다. 동행한 문성진씨(25세. 경상대학교 산악부)는 배낭 가득 무엇을 넣었는지 꽤 모양새를 갖추었다. 1킬로미터의 비포장도로를 따라 출렁다리를 건너면 등산로가 시작된다. 피아골의 맑은 계곡은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어낸다.
지난 겨울에 내린 눈과 꽁꽁 얼어붙은 계곡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겨울의 마술이 풀리고 다시 봄의 마술에 걸린다. 마술에 걸린 피아골의 경치는 계곡으로 발길을 당긴다. 초록빛의 투명한 물빛과 파란 하늘빛은 어떤 말로도 형용하지 못하고 단순히 ‘좋다’라는 단어만을 연발하게 만든다. 내려서서 두 손을 모아 물 한 모금 마시고 쉬어 간다. 떠나기 아쉬워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기니 아름다운 소들이 이어지면서 삼홍소에 도착한다. 삼홍소는 ‘단풍으로 산도 붉고 물도 붉게 비치며 사람도 붉게 물든다’하여 삼홍이라 하였다. 이곳에 있는 30여 미터의 삼홍교를 지나니 ‘3인 이상 통행 금지’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맨앞에 문성진씨와 뒤로는 장병희 기자가 줄지어 지났으니 3명이 건넌 것인데 다리는 끄떡없어 보인다. 아직 보지 못한 장기자에게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팻말을 가리킨다.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을 따르면 구계포교에 이르고 다리 건너편에는 노각나무가 우뚝 서 있다. 멀리서 보아도 노각나무임을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나무 껍질이 얼룩덜룩하기 때문이다. 계곡을 따르는 멋진 풍경에 눈이 시원하다. 길을 걷다보니 거대한 바위 밑 좋은 비박지가 있다. 누군가가 편안히 잠잤을 자리는 두 명이 나란히 누워도 충분하다. 연녹색 잎의 싹을 피운 나무들을 지나 평평한 곳을 지나면 신선교와 피아골 산장이 보인다. 이곳의 신선은 털보 산장지기 함태식씨(73세)일 것이다. 이전에 노고단 산장을 관리해 오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관리하게 된 이후 피아골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산아래 집으로 내려간 함태식씨를 만나볼 수 없어 아쉽다. 대신 서성렬씨가 잠시 산장을 지키고 있다. 책을 읽고 있던 서씨의 모습에서는 한적한 산장 생활을 느낄 수 있었다. 산장을 찾은 이가 반가웠는지 고로쇠물을 건네며 맛보기를 권한다. 따뜻한 햇볕 아래 통나무 둥치로 만들어 놓은 식탁과 의자에 앉아 점심 준비를 한다.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와 나무로 만들어 놓은 식수대가 정겹다. 진달래 산천의 돼지령 함태식씨의 안부를 물어보자 서씨의 대답에는 건강을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혼자서 보내는 하루가 길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자신도 무안했는지 “오늘 할 말 다 했네” 라며 웃음을 짓는다. 산불경방기간 중 등산객을 통제하고 산장까지 찾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피아골 산장의 식구인 다람쥐에게 먹이를 주기도 하는 것이 일과이다. 적적한 산장의 생활을 고집하는 그가 이곳에 있는 것은 산이 있기 때문이다. 답답한 도시의 생활은 산과 호흡하고 산에 안겨 잠을 이루는 것을 잊지 못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오로지 산에 있으면 조응께.”
서씨는 산장 뒤 임걸령 오르는 길로 안내했다. 산불경방기간 때문에 잠겨 있는 문을 열어 주며 함박 웃음으로 취재팀을 배웅한다. 따뜻한 인사를 나눈 뒤 산죽으로 가득한 길을 올라 아치형의 불로교를 건너면 울창한 숲의 깔딱고개가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는 오르기도 내려서기도 힘든 나무 계단이 계속 이어져 있고, 계단 끝으로 하늘금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두 번의 깔딱고개를 지나야 임걸령 삼거리에 닿을 수 있다. 보폭에 맞지 않게 다리를 벌려 계단을 오르면 고갯길 옆에는 굴참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가 새둥지 마냥 사뿐히 걸쳐 있다. 말려서 차로도 먹고 한약재로 쓰이기도 한다. 한약재로 쓰인다는 것에 탐이 나지만 그냥 지나치고 마지막 철계단을 지나 능선에 올라서서 숨을 몰아쉰다. 직전마을을 출발해서 4시간 소요됐다. 피아골과는 달리 주능선의 북사면에는 가는 겨울이 뭐그리도 아쉬웠는지 겨울을 붙잡고 있다. 녹고 있는 눈 때문에 미끄럽고 질퍽한 능선길을 따라 돼지령으로 향한다. 진달래와 철쭉산행지로 유명한 돼지령은 멧돼지가 원추리 뿌리를 종종 파 먹던 곳에서 유래되었다. 돼지령에서 보이는 왕시루봉은 어림잡아 보아도 꽤나 길어 보인다. 여자의 엉덩이로 비유되는 반야봉과 저 멀리 천왕봉, 돌탑이 있는 노고단이 보인다. 청학동 도인들이 3일간 공들여 쌓은 거대한 돌탑 주변, 휴일을 이용해 노고단을 찾은 유산객들에게 팔을 번쩍 들어 흔들어 본다. 산이 조용하다. 산불경방으로 주능선의 산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노고단으로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눈앞에 관리공단의 직원이 가로막는다. 산불경방기간이라 철통경비를 하고 있다. 허가증을 보여주고 공단 직원의 호의를 받으며 노고단으로 올라선다. 노고단은 언제나 북적거리는 듯하다. 1988년 구례 천은사에서 성삼재를 거쳐 남원 반선에 이르는 일주 도로가 개통되어 차량을 이용하여 쉽게 노고단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산장으로 내려서니 김순완 분소장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배낭을 풀고 야영장 벤치에 앉아 산장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성삼재에서 걸어 올라온 것이 힘들었을까. 모두들 매점 앞에 오밀조밀 붙어 음료수 사기에 정신이 없다. 왕시루봉은 섬진강 전망대 그리고 해가 지기 전 내려가는 인파들로 다시 산장은 시끄럽다. 노고단에서의 일몰을 찍기 위해 장기자 역시 부산하다. 셔터를 누르는 소리를 들으며 일몰을 감상해 본다. 종석대 뒤로 넘어가는 해는 하루 일을 다하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의 뒷모습 같다. 해가 넘어가고 어느새 밝은 보름달이 노고단 하늘에 떴다. 너무 밝은 달 때문에 지리산의 쏟아질 듯한 별은 어디로 다 숨어 버렸다. 낮의 시끌벅적함은 어디로 가고 산장에는 고요함이 밀려온다. 산장의 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지금의 노고단대피소 옆에는 1920년경에 지어진 선교사 별장이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다. 1948년 빨치산의 거점을 막기 위해 불태워 버렸다. 57년 별장은 왕시루봉으로 이전되었다. 왕시루봉(1232m)은 큰 떡시루를 엎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이름지어졌고 봄이면 철쭉이 가을이면 억새가 산을 뒤덮는다. 이른 새벽을 맞이하여 노고단의 일출을 보고 방송 송신탑과 부속건물의 오른쪽으로 난 왕시루봉 초입을 찾는다. 잡목이 우거지고 이끼 낀 돌밭 길을 내려가면 산죽을 지붕에 얹은 암자가 나온다. 50미터가 넘는 문수대를 병풍 삼은 암자에는 출입을 막는 나무막대가 돌담에 걸쳐 있다. 지붕이 이색적이라 다시 한번 쳐다보고 산죽밭을 따라 오른다. 어깨 치까지 오는 산죽을 헤치고 시야가 트이는 곳은 돼지령에서 뻗어 나온 왕시루봉 능선이다. 이제부터 완만한 내리막을 내려가면 된다. 피아골에서 보았던 겨우살이가 이곳에도 군데군데 눈에 띈다. 내려가면 올라가야 되는 것이 산행의 진리인데 질매재까지의 내리막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남사면에는 싹도 올라오지 않은 진달래 군락이 시골아이 입가의 버짐 같다. 진달래꽃이 만발하면 시골아이의 빨간 볼과 같을 것이다. 질등을 오르면 산아래 고요히 앉은 직전마을이 보이고 잠시 내려갔다가 암봉이 이어진 문바우등으로 오른다. 정상에는 오르지 못하고 우회함으로 조망이 좋을 듯한 암봉을 쳐다만 본다. 문바우등을 지나면 완만한 능선길이 이어지고 싸리나무와 진달래가 빼곡한 경사면으로 떨어진다. 왕시루봉 능선은 물이 귀하다. 지도에 표시된 이름 없는 샘에는 ‘싸리샘, 왕실봉 4킬로미터, 질매재 8킬로미터’라 쓰여 있는 철판이 진달래 나무에 매달려 있다. 싸리나무가 많아 부쳐진 이름인 듯 하다. 샘을 보니 썩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샘터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하늘빛을 감상한다. 평평한 이곳은 갈 길이 먼 나그네의 발길을 잡기에 적당하다.
싸리샘에서의 잡힌 발목을 재촉해 다시 잡목 사이를 올라서면 느진목재까지 30분 정도의 내리막이 이어진다. 내리막은 하산을 하듯 하염없이 고도를 떨어뜨려 느진목재에 도착한다. 왕시루봉을 바라보니 팍팍한 오르막을 오를 생각에 긴 한숨이 나온다. 휴식년제로 출입이 통제되는 이곳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왕시루봉에서 내려오는 일가족이 옆에서 휴식을 취한다. 배낭 가득 고로쇠물이다. 제일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멘 아들은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부모님을 돕는 것이라며 부부의 아들 자랑이 이어진다. 이곳에서 피아골 내동리와 문수리로 하산할 수 있다. 느진목재에서 왕시루봉까지는 1시간 가량 계속 오르고 또 올라야 하지만 다리 품을 팔아 올라온 이에게 시원한 조망을 선사한다. 왕시루봉 아래 조망 좋은 자리를 잡고 지리산의 산세를 즐긴다. 노고단과 걸어왔던 능선길이 눈앞에 파노라마 같이 펼쳐진다. 노고단을 출발한지 5시간이 지났다. 왕시루봉 정상을 넘어서면 섬진강과 노고단, 종석대, 천왕봉을 조망할 수 있고 사진작가 임소혁씨가 굽이치는 섬진강을 찍는 장소가 있기는 하나 능선 길에는 울창한 숲으로 주변을 볼 수 없어 다소 지루하다. 정상에 올라서면 남은 일은 하산 뿐이다. 시야가 트이고 절로 콧노래가 나오는 억새 밭으로 내려오면 줄을 세워 논 듯한 잣나무 숲이 나온다. 이곳에서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초록색의 관리사택과 교회건물이 있고 10여 채의 외국인 별장이 있다. 임소혁씨는 이곳을 작업실로 만들어 지리산의 사계와 운해, 바람 등을 사진에 담는다.
그래서인지 그의 지리산 사진 속에는 지리산에 안주한 편안함이 느껴진다. 작업실 구경을 하고 싶었으나 서울로 올라간 그를 만날 수 없다. 아쉬운 발걸음을 옮겨 다시 억새 가득한 능선으로 빠져나간다. 누런 억새밭 아래 헬기장에서 바라본 구례평야와 백운산을 뒤로 세운 섬진강의 물줄기는 평화롭기 그지없다.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바다로 흘러들고 싶을 정도다. 그리고 가느다란 햇빛도 들지 않는 소나무숲 오솔길은 하산하는 이에게 주는 왕시루봉의 선물이다. 나무둥치로 막혀있는 곳에서 능선 길을 버리고 진달래나무 한 그루가 바닥에 떨어진 갈색의 솔잎의 색과 대비를 이루는 이곳은 구산리에서 오르는 길과 만나는 곳이다. 왼쪽 길을 따라 돌길을 건너고 마을이 가까워져서야 물이 조금 흐르는 계곡을 만나며 ‘등산로’라고 쓰여진 입간판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좀더 내려가면 아직 포장이 끝나지 않은 임도가 나온다. 임도를 따라 3킬로미터 정도를 걸어 나와서야 조용한 단산마을로 접어든다. <글·임현주 기자 사진·장병희 기자> |
2002년까지 자연휴식년제 구간인 왕시루봉의 등산로는 일반인의 발길이 뜸하지만 길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산행의 나들목은 구례군 토지면 단산마을이다. 마을 왼쪽 끝까지 돌아서 북쪽의 언덕을 오르면 왕시루봉 능선으로 올라설 수 있는데 능선에서 물을 구하기 어려움으로 마을을 떠나기 전 수통에 물을 채우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왕시루봉의 묘미는 하동으로 굽이쳐 흘러가는 섬진강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초보자가 동행할 경우 1박 2일의 산행지로 잡는 것이 좋을 듯 하다. | |
피아골로 가려면 연곡사까지 가는 버스와 직전마을까지 연장 운행하는 버스가 있다. 구례시외버스터미널(☎061-782-3941)에서 피아골행은 08:30 09:40 11:40 13:40 14:40 15:40 17:40 19:40. 연곡사행은 06:40 07:40 10:40 12:40 14:30 16:40 18:40. 직행은 09:20 16:00 하루에 2회 있다. 토지면 단산에서 구례행 버스는 06:00부터 20:00까지 20분 간격으로 있다. 구례에서 서울행 버스는 09:10에서 17:10까지 하루 5회 있으며 4시간 소요된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구례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토지면 외곡리에서 865번 국도로 접어든다. 죽리마을의 늘푸른산장(☎061-782-8103) 산행초입인 직전마을에는 민박이 가능한 많은 음식점들이 있다. 천왕봉산장(☎061-782-8106) 야베스산장(☎061-782-1129) 솔봉산장(☎061-782-7449) 노고단산장(☎061-782-1877) 피아골식당(☎061-782-8034) 지리산상회(☎061-782-7445) 에덴식당(☎061-782-8526) 산아래첫집(☎061-782-7460). 토지면 단산마을에는 19번 국도변 토지 농협 옆 보라미식당(☎061-781-5777)은 신선한 주꾸미와 해물파전 그리고 지리산 동동주 맛이 일품이다. 구산식당(☎061-781-6696) 참나무가든(☎061-781-3338)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