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티니안섬의 방어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티니안섬에는 약 17,900명의 일본 시민들이 있었는데 1944년초 약 5,000명을 일본으로 이주시킨다.
이 때 티니안에는 차모로도 캘롤리니안도 없었다.
1944년 3월 일본군이 9,000 명으로 늘어 난다.
만주로부터 Kiyochi Ogata 대령이 지휘하는 육군 제 50보병연대가 왔고 사이판으로부터 135보병중대 900명이 왔으며 해안에는 Goichi Oya 해군 대령이 지휘하는 군인 1,400 명과 노무자 600명이 해안경비부대를 구측하고 있었다.
제 1공군기지의 본부인 Ushi Field에는 Kakuji Kakuta 부제독이 있었으며 아스리토공군기지보다 1.000 피트가 더 긴 4,750 피트 길이의 활주로를 가지고 있었지만 미국의 상륙할 때까지 그의 지휘하에는 단 1대의 비행기도 없었다.
해병 제 2사단의 지휘관인 James L. Underhill 소장은 티니안섬을 위한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선봉은 Harry Schmidt 소장이 지휘하는 제 4사단이 서게 된다.
티니안에 대한 함포 사격은 6월11일 부터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Micher 제독이 마리아나에 도착한 7월24일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한다.
티니안의 일본 방어군은 미국이 상륙할 것으로 예상되어 지는 Tinian Town 앞 비치와
일본인들에 의해 Asiga Harber 라고 불리우고 미국인들에 의해 Long Beach라고 불리운 Unai Dangkulo 에 방어 진지를 구축 한다.
Ogata 제독은 제50 보병연대의 2대대와 기술자 소대를 북쪽을 보냈고 1대대 3중대와 1개의 탱크분대가 서쪽 지역 갔으며 섬에서 가장 높은 산인 Lesso 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1대대 나머지를 보낸다.
그의 기동부대, 1대대, 135보병중대는 남쪽 중앙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12대의 탱크가 병참, 암호, 기술, 의료등의 본부대는 Lasso 산을 지켰다.
Oya 대령은 티니안 마을 위 높은 지대에 대포와 함께 그의 해군경비사령부를 설치 했다.
또한 방어군으로 시민의용군, 민방위, 청소년군이 구성되었다.
미국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일본 육군과 해군 사이에 거의 협조가 없었다는 것과 Kakuta라는 특이한 일본군 장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Aguiguhan섬을 잠수함의 집결지로 조정하여 12대의 고무 보트를 타고 그의 부하들과 2번의 탈출을 시도 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결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앗으며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미해병 제 4사단은 사이판 전투에서 유효병력의 27.6%를 잃었다.
이들은 티니안 공격을 위해 2주간의 시간을 가졌고 7월12일 Harry Schmidt 소장이 상륙부대를 지휘하게 되었으며 4사단의 총지휘자는 Clifton B. Cates 장군이였다.
미군의 지휘 장교들은 티니안을 상륙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는데 티니안 마을 앞의 흰 모래 사장은 가장 확실한 지점인 만큼 일본군들도 확신하는 지점이였다.
그곳은 적의 잇빨위로 들어 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차선책이 동쪽의 Asiga Harbor였지만 강한 무역풍이 상륙을 어렵게 만들었다.
미군에 의해 White 1, White2 라고 불리운 60야드 넓이의 Unai Babut 과 160야드 넓이의 Unai Chulu라는 작은 비치가 북서쪽에 있었다
이 작은 비치로 어떻게 병참부대와 함께 사단인원을 상륙시킬 것인가가 문제였다
7월10일부터 12일까지 수륙양용부대의 정찰대대 수중 폭파팀은 Asiga 와 White 1, 2를 정확히 관찰하였고 결론은 옐로우비치라고 표시된 Asiga는 더 강한 방어 진지가 있었고 환초에는 위험한 구명들이 많은 점을 발견한다.
7월12일 Turner, Spruance, Hill 제독들과 Smith, Schmidt 장군들은 상륙은 White1,2로 결정한다.
티니안섬의 상륙작전은 해병 제2사단이 일본군의 주의를 끌기 위해 티니안 마을로 상륙하는 척 위장 전술을 쓰는 동안 제 4사단의 24연대 수륙양용2대대 E 중대가 8대의 트럭대와 선봉로 나서 White 1으로 상륙하고, 25연대는 2대대, 3대대는 G, I 중대를 선봉 부대로 상륙하는 것이었다.
해병 제 4사단은 사이판의 슈가 덕으로부터 좁은 협로를 지나 상륙정을 타고 실어 날라졌는데 이것은 태평양전쟁에서 유일한 해안에서 해안으로의 작전이였다.
아무튼 화이트비치의 상륙 작전의 성공여부는 티니안 마을 앞에서의 위장 상륙 작전에 달려 있었다.
6월11일부터 시작된 티니안에 대한 미군의 함포 사격은 7월24일 상륙 작전을 위하여 22일~23일 더욱 집중되었으며 사이판의 Isely 공항을 출발한 P-47은 공습으로 지원한다.
이 비행기로부터 세계의 전쟁에서 처음으로 소이탄(네이팜탄)을 사용하며 티니안 북서쪽
해안에 상륙하는 해병을 지원하기위해 포병들은 사이판 남쪽에 200대의 야포를 정렬시키고 발포준비를 하였다.
7월4일 새벽 5시30분 해병 제 2사단과 지원부대는 일본인들이 예상한대로 티니안 마을 해안선 밖에 나타났다.
미국의 수륙양용트랙터는 천천히 공격 전선을 형성했고 해병들은 해안까지 위장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일본의 지휘관들은 티니안 남부로 그들의 모든 증원부대를 데려 올 시간여유가 있었고 해안경비부대는 비록 43일간 꾸준히 함포 사격을 받았을지라고 전투태세가 되어 있었다.
티니안 마을 뒤 동굴에 숨어 있는 3문의 6인치 포가 15분동안 미국의 전함 인 Corolado호를 22번 공격헸으며 Norman Scott 구축함은 같은 포로 6번 공격을 받아 47명이 부상하고 15명이 전사하는데 사망자중에는 Seymour D. Owens 중령도 포함되었다.
피해를 입은 2척의 전함은 는 사이판으로 보내졌으며 미국의 함대는 재빠르게 일본 포대의 위치를 알아내 쓸어 버린다.
그리고 상륙할 것 같이 박격포를 쏘아가며 충분히 해안 가까이 접근했던 해병 제 2사단은 다시 되돌아 나온다.
한 일본군인은 그의 일기에 “ 오전9시경 대포가 티니안 항구쪽으로 사납게 쏘아졌으나 적전함이 떠난 후 조용해졌다. 아마 그들은 퇴각한 것 같다” 라고 썼는데 그는 해병 제 4사단이 화이트비치에 상륙하고 있는 곳을 확실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병 제 2사단이 티니안 마을에서 위장 상륙 작전을 하는 동안 해병 제4단은 화이트비치에
상륙한다.
상륙전 전투함들이 수평으로 대포를 놓고 직사포를 쏘아댔고 순양함, 구축함, 헬리콥터, 대포가 참여하여 같이 쏘아 댔으며 네이팜탄은 상륙지역의 비치를 그슬렸다.
포연이 자욱한 가운데 오전 7시50분부터 해병들은 상륙을 시작하였으며 8시20분에는 선봉대대의 상륙이 완료되었다.
이 때 사이판에서 지원한 몇 명의 차모로 의용군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티니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Manual Lizama Dela Cruz가 있었으며 그는 티니안에서 길안내 역할을 잘 수행해 낸다.
오후2시30분 해병 제 4사단의 24연대, 25연대가 상륙을 마치고 오후5시49분에는 지원부대들도 상륙을 마친다.
한편 남쪽 티니안 마을에서 성공적으로 위장 전술을 마친 해병 제 2사단이 돌아 왔다.
상륙을 위한 42,000명의 군인중 총15,614명의 첫날 화이트 비치에 상륙하였으며 상륙중 77명이 전사하고 470명이 부상을 당했다.
상륙은 대성공이였고 일본인에게는 큰 놀라움을 가져다 주었다.
Supurance 제독은 훗날 “ 나의 의견은 티니안 작전이 2차세계 대전에서 가장 훌륭하게 고안되고 실행되어진 작전이였다” 라고 회고 했다.
그날밤 사이판에서 그랬듯이 일본군은 격렬하게 반격해 온다.
일본군 135연대 1대대의 Izumi 중령은 북쪽에서 미해병 24연대를 공격하였으며 해병A중대는 새벽에 공격이 다시 있기전 30명으로 인원이 줄었다.
일본군 50연대 1,2대대가 미해병 24,25연대 사이로 침투하여 공격을 하였으며 남쪽 전선에서 일본군의 경탱크가 공격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조명탄이 터지고 소총수와 함께 해병들은 바주카포를 앞세워 탱크를 부수기 시작한다.
이날밤 일본군은 1,241명이 전사하였으며 그중 700명이 보병부대였고 700-800명은 상처를 입었다.
1대대 135보병중대, Ogata 기동 반격부대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일본군의 척추가 부러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음날 해병 제 2사단이 모두 상륙을 하고 섬의 북쪽지역을 가로질러 Ushi Field를 점령하고 남쪽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전진은 다음날인 7월28일 태풍에 의하여 좀 어렵게 되었다.
7월30일 미국해병들은 페허가 된 티니안마을을 가로지르고 이동했다.
포로가 돤 일본 수병에 의해 1700-1800 명의 육군과 500여명의 해군이 개별적으로 Carolinas 포인트의 고지대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병들은 다시 언덕을 오르는 전투를 준비하였다.
언덕 꼭대기에 있던 Ogata 대령도 그의 최후 방어선을 준비 했다.
7월31일 해병 제2, 제4 사단도 울퉁불퉁한 Carolinas 절벽을 따라 전선을 구축했다.
소대의 지휘관들은 몇시간이면 오를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하루가 지난다.
잘 숨겨진 골짜기에 있는 일본의 방어 진지는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미군의 힘을 느끼기 전까지 가능한 많은 미군을 사살 하는 것을 목표로 최선을 다했다.
Ogata는 힘에 부쳤으나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미해병의 2개 사단을 상대로 일본군을 이끌었다.
미군은 밤사이 고지대 위까지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한 해병소대가 꼭대기까지 구명을 팠으며 다른 해병 동료들이 합류하여 소대는 중대가 되었고 오후5시45분 1대대 대부분이 그들을 따랐다.
Ogata는 그의 방어를 재구축했지만 결국 흉폭한 전투의 휘생자가 되었다.
티니안 전투는 아침에 사실상 끝이 났다.
해병은 절벽꼭대기에서 전진 공격을 계속하였고 일본군은 마지막 절벽선이 있는 곳까지 밀렸다.
그 곳에서 사이판에서 발생했던 것과 같이 일본 시민들이 미해병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절벽을 뛰어 내렸다.
일본시민들은 미국이 점령한 곳은 어느 누구도 미군으로부터 심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일본의 선전을 확신하고 잇었다.
그들은 미해병대는 그들의 어린이들를 잡아 먹는다고조차 말했었다.
약간의 일본 엄마들은 그들의 은신처에서 발견되지 않기 위해 보채는 아이들의 입을 막아 질식사 시킬 정도였다.
군인이든, 시민이든, 성인들은 포로가 되기 보다는 죽음을 택해 절벽을 뛰어 내렸다.
뛰어 내리지 않은 시민들은 동굴속에서 일본 군인들에 의해 뒤에서 총을 맞아 죽어 갔다.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아무 의미없이 죽어 갔던 것이다.
목소리응 높여 미국인들은 해병은 그들이 알려진 것과 같은 동물들이 아님을 일본 사람들에게 확신 시켜 주기를 시도 하였으며 항복하면 인간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으나 겁먹은 일본인들은 나오지를 않았다.
결국 항복한 설탕제당소의 감독자와 그의 부인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의미 없는 죽음 을 택하지 말 것을 간곡히 설득하기 시작하였고 천천히 일본인, 오키나와인, 한국인들이 처음에는 조금씩 그리고 나중에는 많은 인원이 피로와 굴주림, 겁을 먹은 채 동굴에서 나오기 시작하여 해병 경계선으로 행진을 하였으며 그들은 그들을 돌 볼 북쪽의 캠프로 가게된다.
원래 9.000명의 일본군이 있었는데 252명만 포로가 되었고 나머지는 전투에서 죽거나 자실 했던 것이다.
티니안섬은 8월 1일 오후6시55분 확보되었다고 선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해병 6연대 3대대 사령관인 John W. Easely 대령이 그의 지휘 본부에서 잘 훈련된 공격을 받고 전사한다.
8월10일 Underhill 장군은 우툴불퉁한 절벽에 산재해 있는 헤아릴 수 없는 동굴에 숨어 있는 일본군을 소탕하는 어려운 과업을 맡게 되었으며 해병 2사단은 사이판으로 돌아 갔고
많은 피해를 입은 해병 4사단은 하와이로 돌아 갔다.
10월25일 티니안에는 8연대 1대대만 남았다가 1945년 1월 1일 사이판의 그들 사단으로 돌아 간다.
소탕전에서는 542명의 일본군이 전사했고 미군은 38명의 전사했으며 125명이 부상을 당했다.
티니안 전투에서는 소탕전을 포함하지 않고도 미군의 389명이 전사하고 1,816명이 부상을 당했다.
Holland Smith 장군은 “티니안 전투는 태평양에서 가장 완벽한 수륙양용의 작전” 이였다고
평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