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8년 충남 당진의 한 시골마을에서 5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께서는 직업 군인이지만 군인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 온유한 성품의 선비 같은 분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아버지의 부재 가운데 유아기와 사춘기를 보낸 나에겐 엄청난 고난의 시기였다.
어쩌다 한번씩 찾아오시는 아버지의 존재는 그저 어색하기만 한 손님 같았고 동생들이 하나씩 태어나는 과정일 뿐이었다. 생계를 책임진 어머님은 줄줄이 딸린 어린 동생들을 어린 나에게 맡기고 새벽같이 당진 읍내 길가 행상으로 나서 언제나 늦은 저녁에 돌아오시곤 했다. 늘 처져있는 어머니의 어깨를 보며 아침에 해놓으신 꽁보리밥을 동생들과 먹으며 늘 동생들 뒤치다꺼리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동네 또래들과 어울려 노는 한가로움은 엄두도 못 내고 고달프게 보내던 중학교 시절. 제대하신 아버지께서 이번엔 서울에서 사업을 하신다고 또 홀홀 단신 올라가시더니 몇 달이 못 되어 위장에 큰 병을 얻어 고향으로 오셨다. 그 무렵 유일한 낙이 있다면 주일날 교회에 나가는 것이었다. 유년시절 동네 어귀에 흙벽돌로 세워진 성결교회는 유일한 나의 쉼터요, 동무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하교 길에 아버지께서 입원하신 병원에 들러 가지고 온 이불과 잡다한 빨래들을 등교할 때 가지고 다니는 일로 2년여 동안 그렇게 보내며 사춘기가 왔다. 보호받고 자라야 할 어린 내가 가족들의 뒤치다꺼리나 하는 것이 한심스럽다는 반항심으로 겉잡을 수 없이 곁길로 나가기 시작하여 중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읍내 선배 건달들과 어울리며 손바닥만한 시골마을을 휘젖고 다녔다.
지금은 5공 시절 범죄단체 소탕으로 없어졌지만 당시 ○○○파라는 범죄 집단의 일원이 되어 ‘손도끼’라는 별명으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80년대에 물의를 빚었던 ‘서진 룸싸롱 사건’의 앞잡이가 그 때 함께 조직에 있던 후배였다. 그 때의 잦은 패싸움으로 인해 미간의 깊은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어 가끔 속이 상한다. 공부는 뒷전이고 동급생과 선, 후배를 협박하고 갈취하며 정학 여덟 번이라는 화려한 전적 끝에 가까스로 시골의 농업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폭력 조직과 인연 끊고 목회의 길로 그렇게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이렇게 살다가는 인간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에 군대를 지원하게 되었다. 동네 선배의 권유로 해군에 지원하여 진해에서 3년간 복무하던 중에 주일예배를 인도하던 군종병이 제대하고 그 자리가 공석이 되어 당시 고참이던 내가 얼떨결에 그 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제대 후 조직원들이 찾아와 다시 복귀할 것을 권했지만 주님의 길을 가고자 과감히 거절했더니 탈퇴하려면 손가락을 하나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나의 결심이 워낙 확고하니까 ‘저놈은 쓸만한 재목이지만 그래도 좋은 길을 간다니 배려한다’며 손가락 한 마디만 잘랐다.
이듬해 서울로 상경하여 어렵사리 신학공부를 하며 시흥동의 개척교회를 돕던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나 졸업할 즈음 결혼을 하여 다음해 아들을 낳았다. 방배동 순환도로 건너편 우면산 밑의 군사지역 인근의 단칸방 신혼살림은 말이 신혼이지 60년대의 시골 수준이었다. 어쩌다 돈이 생기면 책값으로 써버리기 일쑤고 점심시간이면 학급 동무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라면을 반 박스씩 끓여내곤 하는 아내의 모습에 늘 고마울 따름이었다. 방학 중에는 사당동 시장 골목에서 고향 바닷가에서 생산되는 김을 떠다 팔고 건축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렵사리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성남과 서울 등지에서 다년간 부교역자 일로 많은 훈련을 하다가 소속된 서울노회에서 1988년 강원도 원주에 있는 가나안 농군학교로 파송을 받았다. 어느 정도 알고는 갔지만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오후 11시나 되어야 돌아오는 고단한 여정은 많은 인내를 요구했다. 새벽부터 구보와 산악체험 인솔, 직원예배 인도와 강의, 견학 팀 안내로 인해 가정은 홈이 아니라 여관 같은 곳이었으며 가족은 그야말로 어쩌다 만나는 면회객처럼 지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몸에 배인 절약정신으로 지금도 치약은 1mm정도로 쓰며 비누는 세 번, 그것도 편도로만 문질러 쓰며 끼니는 1식 3찬을 별반 넘지 않는다.
몇 년의 파송을 마치고 2년 전 무연고지인 경기도 이천에 믿음 하나로 개척을 했는데 그야말로 고난의 시작이었다. 자주 피곤을 느끼고 몸이 마르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여 근처 병원을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서울 아산병원 내과에서 간암 초기라는 판정을 받았을 땐 정말 끝인가 했다. 그 때만 해도 지식이 없어 간에 이상은 술, 담배를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만 걸리는 재앙인 줄 알았다.
황당하여 한편으론 남에게 얘기도 꺼내지를 못해 끙끙거리고 도저히 입원하여 치료받을 형편도 되지 않았기에 하나님께 맡기고 오산리 기도원에 들어가 21일 작정 금식을 하며 매달리고 집에서는 아내가 나름대로 기도하며 몸에 좋다는 별별 돈 안드는 것만 골라서 준비하고 있었다. 물도 바꾸어 먹고 이런저런 좋은 보조식품을 먹으며 1년만에 거의 회복되었음을 판정받았다.
고난과 가난의 사막, 목회생활 고2짜리 아들의 지난해 여름 방학. 아내의 전화에 문자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엄마! 나 지금 집나가는 중이야”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1주일 넘게 아들을 찾으러 다녔다. 하지만 이미 신청한 아버지학교 입학 날이 되어 양재동 온누리교회로 향했다.
사흘 뒤, 낮에는 PC방에서, 밤에는 역전과 찜질방에서 세상을 두루 섭렵하고 열흘 만에 돌아온 아들은 예전의 눈빛이 아니었다. 나의 청소년 시절 휩쓸려 다니던 섬뜩하던 그 눈빛이었다. 그를 위해 기도하며 아버지학교를 5주 동안 다니면서 내가 교회에서는 천사처럼 인자한 목회자처럼 굴면서도 나와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는 가족들에게는 뒤에서 채찍을 휘두르고 공포탄을 쏘아대는 카우보이 아버지였음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지난 겨울은 참으로 힘든 추위를 맞았다. 주일 예배라야 촌로들 몇 분과 꼬맹이 신자 몇 명, 그리고 우리 세 식구와 사지육신 멀쩡한 두, 세 명의 구경꾼 성도가 고작인 교회 재정으론 교회를 유지하며 생활을 도저히 유지할 수 없는 경제 압박이 시작되자 뜨겁던 목회 열정과 특수사역에도 영적 고갈이 오기 시작했다.
보일러는 고장 나서 냉방에 전기장판으로 버티고 이동 히터는 예배시간을 위해 교회로, 평일에는 집으로 가지고 다니게 되자 급기야 마음을 추슬러 가던 아들이 폭탄선언을 했다. 자기는 절대로 목회자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목사인 아버지를 자랑하며 자기도 크면 그 길을 가겠다던 아이가 가난이 싫다는 것이었다. 독서실은 5만원이면 바닥에서 잘 수 있다며 독립을 선언했다. 이불 한 채와 컵라면 한 박스를 넣어주고 돌아오는 그 길에 우리 부부는 대단한 문화혜택으로 여기는 게딱지만한 털털이 경차를 몰고 고속도로에 올랐다. 한 주일 헌금으로 기름값도 빠듯하여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는 우리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을 얼마인가 달리다가 한적한 휴게소 근처에 차를 세우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쌀이 떨어진 줄 알고 초가을에 어느 분이 사다놓으신 20kg짜리 쌀은 벌써 동이 나고 어쩌다 우리는 밖에서 식사할 일이 많지만 아이는 걸핏하면 혼자서 라면을 먹으라니 속도 상했을 것이다. 청소년 시절 그렇게 친하던 세상 친구들도 목회하는데 걸림돌이 되기에 모두 연락을 끊고 사는 터라 비빌 언덕이 별로 없어 고향 부모님 집에 가기는 했지만 머리가 허연 중년이 되어 노인들에게 쌀과 난방 얘기를 할 수 없어 쌀자루에서 슬그머니 한 됫박 남짓의 쌀을 꺼내 봉지에 담아 아내 모르게 그의 가방에 넣어놨다. 그런데 모처럼 고향에 왔다며 이웃집의 할머니 한 분이 꼬마 손주를 업고 놀러 오셨다가 꼬마가 아내의 가방을 뒤적이는 바람에 쌀이 쏟아져 나왔다. 그 뒤의 상황은 말할 필요도 없이 집으로 오는 내내 맘 좋은 아내의 한없는 눈물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모른다.
어려서부터 어느 권사님 댁의 아이들이 신고 입던 옷을 물려받아 자라던 아들이 사춘기가 되니 자기 소원은 발에 맞는 신을 신어보는 것과(그래서인지 지금도 신발에 대한 욕심이 있다) 맨날 다운이 되어 외톨이가 된다며 486고물 컴퓨터 대신 잘 돌아가는 컴퓨터로 친구들과 게임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이라던 아이의 소리가 귓전에서 맴돌았다.
박넝쿨 아래서 죽기를 호소하던 요나의 심정도, 가시덤불 밑에서 체념하던 모세도, 풍비박산난 가정과 상처를 기왓장으로 벅벅 긁어대던 욥의 심정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헐렁한 운동복을 벗듯 간단히 벗을 수 없는 사명인 나의 목회 생활. 이것이 진정한 주님의 뜻이냐고 하늘에 삿대질을 해대며 통곡도 해봤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시내 근처의 테니스장에 회원들을 실어 나르는 운전하는 일을 하기로 하고 두 달 정도를 일했다. 낯익은 다른 교회 집사님들을 만나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아내가 말했다. “부끄러워 못하던 화장품과 건강보조식품 판매하는 일을 다시 시작해 보겠으니 나더러는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라”고… 지금은 목사부인 딱지 떼고 열심히 하고 있으나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아버지학교를 통한 새로운 삶과 비젼 사실 작은 교회도 하는 일은 거의 비슷하다. 큰 교회는 여럿이 나누어 일을 하고 작은 교회는 혼자서 다 하는 것의 차이다. 새벽 예배를 시작으로 유고심방. 설교준비. 주보작성. 상담과 훈련 이런저런 일로 늘 분주하지만 나는 아버지학교에서의 섬김도 목회의 연장선으로 본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주변에서 소금과 빛이 되도록 노력하며 지난해에는 적십자사에서 헌혈을 많이 했다고 무슨 유공훈장도 받았다.
요즘은 교회 주변의 독거노인들을 찾아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청소와 목욕 봉사로 돕고, 청소년 상담과 해체되는 가족들의 화합을 위해 상담으로 돕고 있다. 하나님은 한가한 사람보다는 바쁜 사람을 더 쓰시는 것 같다.
주변의 친구 목회자는 “목사는 그저 교회에 붙어 있어 기도하고 심방하고 설교 준비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묵묵히 내 길을 걸어간다. 아버지학교와 지역사회 봉사는 나에게 준 하나님의 보너스이며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라 생각한다. 다행히 지금은 천사를 통해 주신 보일러로 새로 교체하고 집안에 온기가 도니 독립을 외치던 아들도 돌아왔다. 시장기가 돌더라도 예전처럼 가정예배와 웃음기가 있다.
혹여 동역하는 스탭들의 눈에 “할 일 없는 개척교회 목사라서 부지런히 오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솔선수범하며 책임감을 다하는 섬김이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언제나 성령님을 앞서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감사한 것은 목사가 아버지학교 수료나 하면 됐지 매주 그렇게 올라 다닌다며 미쳤다고 하던 아내가 강동 3기 어머니학교를 수료하고 어머니학교를 섬기는 스탭으로 같이 미쳐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작년에 곁길로 가던 아들이 제 자리로 돌아와 태국 아웃리치를 마치고 돌아오니 자신이 원하던 컴퓨터공학과에 수시 합격이 되었다.
인생의 절반을 넘어선 하프타임 시간에 아버지학교를 만난 건 일생에 세 번째 행운이었다. 첫번째 행운은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과의 만남이요, 둘째는 좋은 부모와 아내, 자녀를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요, 셋째는 아버지학교와 귀한 형제님들과의 만남이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밝은 빛이 있기에… 겨울을 지나야 꽃이 피는 봄이 오기에… 나는 아버지학교가 있기에 행복하다. 비전이 있고 미래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하프타임을 거치며 인생의 전략과 충분한 휴식을 통해 얻은 체력을 바탕으로 인생의 후반전을 꽃피우려 준비하며 기도하고 있다.
아버지학교에 미친 목사 남편
신명란(박진기 형제의 아내)
딸의 목을 작두 속에 넣던 아버지
저는 1958년 충남 당진군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부농의 7남매 중 셋째 딸로 자랐습니다. 어려서는 별반 어려움 없이 곱게 자라다가 어느 해 겨울 농한기를 틈타 동네에 들어온 전문 도박꾼들에게 순진한 아버지께서 걸려들어 가산이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어머니는 저녁이면 어린 저를 앞세워 동네 어귀의 주막집에 아버지를 모시러 가곤 했는데 그게 그렇게도 싫었습니다. 조용히 문 앞에서 아버지를 부르면 처음에는 알았다고 하시며 먼저 가라고 하셨지만 좀처럼 나오시진 않았습니다.
그런 밤이 지속되면서 키우던 소도 끌어가고 많던 전토가 하나 둘 남의 손에 넘어가면서 아버지는 술을 벗삼아 사셨고 거나하시게 드시고 집에 돌아오시면 우리에겐 공포의 밤이었습니다.
그 때 저의 유일한 즐거움은 초라한 흙벽돌 교회였지만 산등성에 있는 교회에 고모를 따라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괜스레 심통이 나신 아버지께서 어느 날 소여물 써는 작두를 내다 놓으시길래 여물을 써는 줄 알았더니 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선 쭈볏거리는 어린 저의 머리채를 낚아 채셔서 작두 속에 제 목을 넣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에 안 나갈래? 아니면 여기서 죽을래?”
황급히 뛰어나온 가족들과 다급한 어머니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명란아! 어서 안 다닌다고 해” 순간 알 수 없는 오기와 분노로 어린 제가 “그냥 죽을래요” 하곤 정신을 잃었습니다.
가난한 신학생을 만나서…
세월이 흘러 서른 살 가까이 되어서 시흥동 어느 교회의 연로하신 전도사님 소개로 고향이 같은 가난하고 약간 낡은 신학생을 만나 서로가 첫눈에 반해 결혼을 하여 방배동 우면산 밑 군사지역 허름한 집에서 신혼이 시작되었습니다.
5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매사에 시집 중심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저는 우울증으로, 남편은 간암 초기 판정을 받고 위기도 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큰 일에 쓰시려고 여러 훈련을 거친 것 같습니다. 나중에야 시아버님이 직업 군인으로 남편의 사춘기 시절까지 실직적인 가장 노릇을 하며 자란 환경을 알게 되어 지금은 많이 이해도 하고 남편 역시 지금은 가정이 제일 우선임을 알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그저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힘들게 공부를 한 남편에 이어 저도 음악과 유아교육을 공부하고 늦었지만 상담학을 공부하여 내조하며 지역 상담실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 집을 나간 뒤 열흘만에 돌아온 아들의 눈빛은 예전의 순한 아이 눈빛이 아닌 세상을 온통 섭렵한 섬뜩한 눈빛이었습니다. 한때 젊은 시절, 거칠게 살았다는 남편의 예전 모습도 보였습니다.
나중에야 그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왜 나는 친구들과 싸움질도 못하고 욕도 못하냐고? 걸핏하면 선생님과 동료 학생들이 “넌 목사 자식이… 목사 아들이…” 하는 말에 언행의 제약으로 한참 성장하는 시기에 힘들어 했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래 넌 오늘부터 목사 아들 하지 말고 그냥 아빠 아들 해.” 아마도 남편이 그 무렵 아버지학교를 수료 하였길래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부모 얼굴에 먹칠을 하는 놈이라고 어른들의 체면만 생각하는 우리의 기준 때문에 큰 일이 났을 텐데 다행히도 때맞춰 수료한 남편은 아들을 쓰다듬고 왜 힘드냐고 안아주고 기도하며 품어주니 아이도 차츰 제 자리로 돌아와 지난 1학기에 원하던 컴퓨터 공학과 수시모집에 합격되어 지금은 다른 부모님들이 고3 자녀들 때문에 수고하는 일을 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위로는 주님의 은혜요, 아래로는 교회와 아버지학교에 열심인 남편의 축복기도와 격려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전에 의무적으로 하던 축복기도가 아닌 마음을 담아 가슴으로 전하는 축복기도는 아이의 자존감이 높아지고 밝아진 아이로 인해 가정에 활기가 넘칩니다. 몇 달 전에는 태국에 아웃리치를 떠나시며 1주일 분의 축복기도를 해주는 모습에 장난 같아 웃음도 나오고 한편으론 가장 행복한 부자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내 남편은 바람난 목사님
“당신 미쳤어요? 이런 몸으로 또 나간다니!” 지난 주 토요일엔 아버지학교 강의로 섬긴다고 나가더니 새벽 1시나 되어 들어오고 새우잠 자고 새벽부터 주일예배 드리고 차량운행 마치고 저녁엔 장호원에 헌신예배 인도(간증 및 설교)하러 다녀오고 월요일엔 양재동에서 목회자 아버지학교를 섬긴다고 이른 시간에 일어나 세수하러 들어가더니 “억”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쫓아 들어 가보니 코피를 한 사발은 흘렸습니다. 변변치 않은 먹거리 때문에 그런가 싶어 속이 쓰린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소처럼 씩씩하게 나섭니다.
파송 기도로 응원하고도 종일 맘이 편치 않습니다. 저녁때 반쯤 감긴 게슴츠레한 눈으로 돌아와서는 이리저리 조원들에게 편지를 띄운다고 컴퓨터 앞에 앉더니 밤 12시쯤 아들이 돌아와 컴퓨터를 요구할 때서야 내려옵니다. 화요일 저녁은 스텝 기도모임이라고 나가서 1시쯤 되어 오고 목요일은 성북구청에서 열린 아버지학교 준비 모임 한다고 또 나갑니다.
미쳤느냐는 내 말에 예전 같으면 큰 소리 깨나 쳤을텐데 꾹꾹 참으며 “그래 나는 거미가 되어간다”라네요. “웬 거미요?” “거룩하게 미쳐 간다는 뜻이야!” 꿈 보다 해몽이 좋다고 웃어 넘겼지만 하나님께서 죽음의 사지에서 연장시키신 생명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기도만 할 뿐입니다.
제가 일 때문에(화장품과 건강보조식품 판매) 멀리 갔다가 돌아와 보면 때로는 옷도 못 벗고 쓰러진 모습에 열심히 사는 모습이 장하기도 하고 건강은 생각지도 않고 교회와 가정, 아버지학교에 애쓰는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하여 “교회에 그렇게 열심이면 교인 걸려 다니지도 못하겠네”라고 어거지도 써 보지만 그래도 감사하기만 합니다.
요즘은 그 바쁜 중에도 강의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집안에서 단식원처럼 숨소리도 못 내고 고양이 걷듯 합니다. “우리 목사님 바람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에요?” 초지리에서 나오시는 인삼밭지기인 일흔이 넘으신 우종하 집사님의 말씀입니다. 늘 별 말씀이 없으신 분인데 요즘은 목사님 뵙기가 대통령만큼이나 어렵다는 말씀에 동감하며 “저도 잠결에 옆에서 코고는 사람이 있으면 남편이 왔나보다 해요”라며 같이 너스레를 떨어 봅니다.
저희 남편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함께 중보하심으로 이 나라에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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