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간 김에 오르세 미술관에 들러 인상파전을 구경 했었다. 센느 강 남안에 자리 잡은 오르세는 원래 기차 역사였다. 1871년 파리코뮨 때 파괴된 터에 역사를 짓고 1900년 7월14일에 준공하였다. 오르세 역은 당시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역 건물이었다.
그러나 오르세 역은 생각만큼 실용적이지 못해서 급속도로 발전하는 열차를 수용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오르세 역은 마침내 문을 닫았고 어떤용도로 사용할지를 고민 하던중 1977년 미술관 건립을 결정하고 1986년에 오르세 미술관이 개관하였다.
루브르 박물관이 고대 오리엔트 시대와 19세기 중반에 이르는 유럽 미술을 일목요연하게 조감 할 수 있다면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인상파를 중심으로 하여 1848년 프랑스 2월혁명에서 제1차 세계대전 까지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집중 전시하고 있다.
유리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자연 채광 등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오르세 미술관은 미술전시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발상의 전환을 보여 준다. 오르세 미술관의 파격적인 개조는 파리 근교의 옛 병기창을 고쳐 화가들의 작업장으로 전환한다거나 런던의 경우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미술관으로 바꾸는 등 이후 리모델링의 모범사례가 되었다.
인상파전을 보면서 문득 고흐가 마지막 열정을 불살랐던 ‘오베르' 엘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1870년대 인상파의 거두 피사로(Camille Pissarro)가 오베르 근처에 있는 뽕뚜와즈에 살고 있었고 도미에르(Honore Daumier)도 그 이웃마을인 방몽드와에 살았으며 도비니(Fracoir Daubigny)는 바로 오베르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젊은 화가들이 당시 구라파 화단에 선풍을 일으킨 인상파를 배우기 위해 오베르로 몰려들었다. 세잔느(Paul Cezanne)도 그곳에서 2년 동안 작업을 했었고 모네(Claude Monet)도 아르젠떼이유에서 살면서 그림을 그렸던 말하자면 인상파의 거점이랄까 본산이 바로 오베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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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5월 20일 파리에서 출발한 기차가 오베르 역에 도착했다. 그 기차에서 한 네델란드 화가 한사람이 잠깐 머물다 갈 요량으로 오베르에 내렸다. 지금 우리에게 낮익은 그러나 그때는 가난한 무명화가였던 빈센트 반 고호였다.
그는 그의 형 테오가 추천해 준 가세(Gachet)박사를 찾아가서 그 가 머물 여관을 소개 받았다. 마침 읍내에 있는 라부(Ravoux)여관 다락방 하나가 비어 있었는데 그 방은 당시 오베르에서 제일 싼 그러면서도 보다 비싸고 편리한 집들 못지않은 유일한 방이었다.
그는 간단한 식사를 포함해서 하루 우리 돈 350원짜리 하숙을 구했다. 가난했던 그에게는 행운이었고 그의 죽음으로 봐서는 비극의 단초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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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집
오르세를 구경한 바로 다음 날, 난 고호를 보러 서둘러 오베르행 기차를 탔다. 파리에서 동북방향으로 22마일, 파리 북역에서 뽕뚜와즈행 기차를 타고 뽕뚜와즈에서 한참을 기다려 지선인 오베르행 기차로 바꿔 탔다. 한적한 시골 역이었다. 때는 4월 하순이었다. 풍광이 빼어났다. 고호가 오베르에 도착한 때 보다 한달 쯤 이른 셈이었다.
오베르의 정식 이름인 '오베르 슈르 오와즈' 라는 말은 오와즈 강가에 있는 오베르라는 뜻이다. 오와즈강은 센느강의 지류다. 센느강이 알프스에서 발원하여 파리를 관통하여 남동에서 서북으로 흐르는 강이라면 오와즈는 동북에서 남서로 흘러들어 뽕뚜와즈 근처에서 쎈느강에 합류한다. 오베르는 센느와 오와즈가 만나는 삼각주에 둥지를 틀고 있다.
인상파의 본산답게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고 삼각주의 강둑을 경계로 밀밭길이 펼쳐져 있다. 고호의 그림의 배경이 된 ‘오베르 성당’ ‘가세박사의 초상’ 에 나오는 가세박사의 저택과 크고 작은 집들 그리고 고호와 그의 형 테오가 나란히 잠들어 있는 마을 묘지가 작은 오솔길로 이어져 있고 저 멀리 거대한 푸른 밀밭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었다.
오베르는 반 고호와 또 다른 많은 화가들이 이 마을에 흠뻑 빠질 수밖에 없었던 어떤 느낌 --기묘함과 평화--들이 깃들어 있었다.
라부 여관자리는 마을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집은 반 고호의 추억어린 작은 방 하나를 조개처럼 품고 있었고 고흐가 머물렀던 당시에 아래층은 감미롭고 생동감 넘치는 까페였다. 100 수 년 전 고호는 그의 형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오베르를 '심오한 아름다움(profoundly beautiful)'이라는 한마디로 설명했었다. 달리 표현 할 수 없는, 고호에게 걸맞은 바로 그 단어만을 골라 썼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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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성당
캔버스에 오일 1890
오르세박물관. 파리
지금 라부 여관은 ‘고흐의 집’ 으로 불리운다. 고호가 머물렀던 작은 방은 한번에 다섯 명씩만 들어가 볼 수 있게 하고 슬라이드 쇼룸인 또 다른 방에는 역시 한번에 스물다섯 명씩을 들여보낸다. 아래층 로비에는 그림엽서와 화집 그 밖에 각종 기념품을 진열해 놓고 있다
이 집은 1855년 이제 막 결혼을 한 크로스니에라는 벽돌공이 신부와 함께 손수 지은 집이다. 그가 자리 잡은 집터는 나중에 아주 좋은 자리가 되었다. 당시 전신전보가 처음 등장한 때에 우체국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고 몇 년 후에는 바로 건너편으로 하얀 벽에 슬레이트 지붕 그리고 종탑이 있는 읍사무소 건물이 들어섰고 초등학교 겸 교장 관사가 된 공회당이 지어졌다.
그 집이 있는 블록은 금세 활기 넘치는 거리로 자리 잡아갔다. 이 집은 그 후 이 집에서 나서 결혼한 크로스니에의 딸이 포도주 도매상을 했고 주인이 바뀌어 르베르 부부가 여관을 열었고 이 여관을 ‘아서 구스타프 라부’ 라는 사람이 인수했다. 그는 가게를 인수하자 당시 파리의 레스토랑과는 다르게 실내를 꾸몄다.
튼튼하게 보이는 세 개의 나무 탁자와 시골풍의 의자 그리고 몇 개의 골풀 방석의자를 놓았다. 바닥은 막장 돌을 깔았고 벽은 아주 진한 붉은 색을 칠했다. 틀에 박힌 유행을 마다하고 그 집에 어울리는 자기만의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라부는 오베르에 오기 전에 여러 가지 장사일과 정육점 세탁소 등을 하면서 돈을 모았다.
그는 풍채가 좋고 친근감이 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알맞게 벗어진 이마에 둥근 안경을 쓰고 풍성한 콧수염을 달고 있어서 사람들로부터 꽤 존경을 받았다. 게다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라는 말을 실증이라도 하듯이 그는 고흐에게 방을 빌려준게 인연이 되어 그 자신의 이름을 영원토록 남기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그 집은 약간의 리모델링을 거치기는 했어도 지금도 그 자리에 남아 수많은 미술 애호가들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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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 역에서 파리행 기차를 가다렸다. 한 시간이나 남은 기차시간이었지만 그 곳에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에 가려서인지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기차역 옆에는 낡은 창고를 개조한 꽤 큰 헌책방이 있었다. 그 한적한 시골 마을에 헌책방이 있다는 게 여간 어울릴 것 같지 않았지만 금세 생각이 바뀌었다. 꼭 있어야 할 가게가 거기 있었구나 하고....
예기치 않았던 오베르 여행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어떤 여행에서도 체험하지 못한 아름다운 풍광에 젖어서 내 자신이 그가 머물고 스케치한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듯 했다. 오베르의 추억이 아직도 내게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 느낀 진한 감동도 감동이지만 전통과 문화는 어떻게 보존되고 가꾸어져야 되는지를 보고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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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침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