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엉뚱하기까지한 제 인생 경로 (공학도 - 세일즈맨 - 통역사 - 시트콤 PD)를 궁금해 하는 주위 사람들이 가끔 물어옵니다. 어떻게 하다 시트콤 피디가 되었냐고... 참 어려운 질문이지만 간단히 답하라면 한 단어로 '딜레탕트'라는 말을 댈 수 있습니다.
딜레탕트... 사전적 의미로는 취미파 학자라는 뜻의 불어지요. '무언가를 아주 좋아해서 취미로 열심히 하다 그것이 직업이 되거나 무언가의 전문가가 되는 사람...'
저의 시트콤과의 인연은 원래 영어 회화 공부하는데 생활 영어 표현 몇개 건지자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대학 재학 시절, 영어 회화 서클에 있던 저는 저녁에 당시 AFKN에서 방송하던 Seinfeld (지금 저의 아이디가 되었죠.)와 Friends (나중에 남자셋 여자셋이나 지금의 뉴 논스톱 같은 청춘 시트콤의 모델이 된...) 같은 시트콤을 즐겨 봤죠. 처음에는 방청객들의 웃음이 터지는 장면에서 그게 왜 웃기는지 저의 짧은 청취력을 한탄하며 끈기있게 지켜봤죠. 몇달이 지나니까 그게 영어 표현이 안 들린 탓도 있지만 연기자들의 캐릭터를 몰라 웃음 포인트를 놓치기도 했다는걸 알겠더군요.
그렇게 취미삼아 공부하던 영어가 나중에는 실력이 좀 붙어 '이걸로 밥먹고 살아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들더군요. 해서 영업직으로 일하던 회사 (한국 3M)에 사직서를 던지고 외대 통역대학원 영어과에 지원했죠. 통대에서 공부하며 저의 시트콤 시청은 계속되었습니다. 본말전도라는 표현 아시죠?
그러던 제가 대학원 졸업 즈음에는 시트콤의 광팬이 되었습니다. 한국 드라마는 전혀 보지도 않던 제가 공부삼아 시작한 시트콤 시청에 중독이 된거죠. 결국 한국 최초의 시트콤 연출가가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당시 96년에는 아직 남자셋 여자셋이 태동기에 있던 시절...) 문화 방송 PD 공채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죠...
정작 입사후에는 파란만장한 생활을 좀 했습니다. 제가 그렇게도 하고 싶던 청춘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은 송창의 PD라는 걸출한 연출가 선배님의 손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고, 저는 정작 가요 프로의 순위 소개 촬영이나 연예 정보 프로에서 탤런트 스탠들 추적에 청춘을 불사르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기다리는 자에게 기회는 오더군요. 시트콤 매니아라고 여기 저기 울고 다닌지 3년, 남자셋 여자셋 후속 시트콤 '점프'의 조연출이 제게 맡겨졌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사람을 웃긴다는게 생각만큼 만만한게 아니더라구요. 야외 촬영하고 온 것을 밤새 편집하고 다음날 방청객들 앞에 틀어놓고 선배 피디와 작가와 함께 보다 민망해서 얼굴 화끈거렸던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다고는 물론 말 못하지요... 흘.)
그렇게 '점프'와 '점프 2'에서 조연출을 하다 '가문의 영광'이라는 시트콤을 하며 완전히 이미지 구겼지요. 시청률이 저조해서 바닥을 기게 되었거든요. 결국 다른 프로로 밀려가서 '아, 이제 나의 시트콤 사랑은 이렇게 짝사랑으로 끝나는구나.'하고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되었습니다. 역시 시트콤 연출이 쉬운건 아니었습니다.
끈기있게 기다리는 이에게 기회는 다시 찾아오더군요. 작년 7월 '뉴 논스톱'이 출범할 때, 위에서 다시 한번 조연출의 기회를 주시더군요. 당시 저의 각오는 자못 비장했습니다. 이번에 청춘 시트콤 망하면 이제 MBC에서 두번 다시 시트콤 못 맡겠구나... 나름대로 비장미있게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대박(?)의 조짐이 보였습니다. 개성있는 연기자 (양동근 박경림 김영준 등)들의 캐릭터가 잡혀가고 힘있는 게스트 (조성모, god 등)들의 줄연으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죠. 그후 조인성 같은 대박급 신인이 합류하고 장나라 김정화 같은 여자 연기자들이 들어오면서 지금은.... 흠. 아시죠? 나름대로 대박 시트콤인거...
결국 저는 올 봄 논스톱의 연출 (조연출과 연출의 차이는 인턴과 닥터의 차이라 보시면 됩니다.)로 입봉하게 되었습니다. 취미로 시작한 시트콤 시청이 시트콤 연출이라는 업으로 이어지게 된 거죠.
요즘 저는 참 행복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직접 하고 있고, 또 그 결과물로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으니까요. 시트콤 피디는 어떻게 만들어지느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