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해 동인
오하룡
그를 알기는 시동인지 잉여촌을 통해서였다. 이준웅 시인이 같은 동인이어서 울산하면 이들 두 사람을 같이 기억하였다. 그를 익히 알기는 경남문협이 결성되던 80년대 이후였다. 그 전에는 작품만으로 알았으니 얼굴도 채 익히지 못했다. 그때는 울산시도 경남권이어서 그도 같은 경남문협 회원으로 참여하며 행사 등으로 자주 만나서였는데 나중에는 그가 지역안배 차원에서 거명될 때 울산 쪽 문인들의 천거로 경남문협 부회장 감투를 쓴 적이 있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친화력이 있어 처음 인사를 나누는 경우에도 서먹함이 없이 십년지기 같은 태도를 보였다. 내가 전화라도 하면 그 살갑게 응답하는 목소리 놀러 좀 오지? 하는 예사말도 설탕에나 굴린 듯이 달콤하니 나 같은 둔재에겐 인상적으로 각인된다. 잉여촌이 18집으로 종언을 고했더라면 그 정도로 그와의 인연도 더는 진척이 없이 고만고만하게 지나가고 말았겠는데 뜻밖에 복간 되면서 다시 만나 동행자의 팔짱을 억지로라도 끼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한 반갑고 기쁜 일이 있겠는가. 그는 어느 해보니 울산에서는 한 참 떨어진 내 사는 이곳의 김달진문학제 제전위원장 감투를 쓰고 있었다. 어느 해보니 역시 같은 단체 백일장 심사위원장이 되어있었다. 그 심사위원장은 그 다음해 그 다음해도 그의 차지였다. 그 모임에는 전국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들러리로 서 있어 이것으로도 그의 영향력을 읽고도 남음이 있으리니. 나는 그것을 그의 천성적인 친화력의 결과로 보고 있다. 그런 그를 진해 해군회관 그 단체의 회식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그를 우리 잉여촌 동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따로 오붓하게 만나고 싶었으나 그는 나보다 이 행사에 주빈으로 참석하는 만큼 그런 생각자체가 지극히 사적으로 여겨져 그를 금방 풀어주고 귀가 하고 말았다. 그 후로는 동인으로서의 그의 활동만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나를 다스리고 있거니와 그의 이름이 보이고 그가 어디 나타난다면 가봐야지 가서 악수를 나누어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그냥 그런 사실이 있었구나. 잘 다녀갔겠지 하고 무심하게 아니 무심찬척 해 버리고 있다. 혹자는 오하룡이가 지 동인이 이 지역에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는다고 빈정거리지나 않을지 염려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그를 이해하듯이 그도 나를 이해하리라. 그는 대구에서 고교 교장을 지냈다. 지금도 울산시 중구 송정동 735번지 그의 변하지 않는 주소를 기억한다. 그의 집은 울산의 문화재라고 한다. 그런 집이 그의 본가다. 그의 친화력은 거기서 나오는 걸까. 그런 그가 시를 쓰고 교장을 하고 지금은 울산 예총회장 감투를 쓰고 있다. 그가 지난 5월에는 이곳 권환 문학제 백일장 심사위원장으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 아무리 사정이 있었지만 그를 만나지 못하고 가게 한 것이 걸린다. 그를 어디에서나 불러대도록 하는 친화력, 사람 산다는 것 복잡한 인과로 얽혀있지만 친화력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생각이 지금 이 순간 나를 떠나지 않는다. 그가 친화력을 기를 때 나는 어디서 무엇을 했던가.
잉여촌 22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