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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이 조용호 인 가수 김정호는 1952년 3월27일 태어났다. 그
리고 85년 11월29일 떠났 다.33년 8개월간의 짧은 생애. 마치 ‘33과 3/1’ 속도
로 도는 레코드판처럼, 그 의 삶의 수치는 그 시점에서 멈췄다.
그와 가졌던 인터뷰, 그 기억이 지금 도 새삼스럽다.
74년 5월 ‘작은
새’ ‘이름 모를 소녀’ 등을 발표하며 통기타 가수 대열의 선두에 섰던 그. 당시
‘김정호 노래의 코드로 기타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다.’라는 말까지 생길 정
도였다.‘하얀 나비’ ‘사랑의 진실’ ‘잊으리라’ ‘꽃잎’ ‘푸른 하늘 아래로’ ‘보고 싶
은 마음’ 등을 발표하며 한국적 포크를 지향 했던 김정호.
통기타를
멘 채 지그시 눈을 감고 꿈꾸듯이 노래하는 그의 독 특한 모습. 그러나 그는 이
미 폐가 몹시 나빠 투병 중이었다.‘폐결핵 가수 김정 호’라는 말은 이미 나돌고
있었으나 음악만큼은 누구보다도 건강했으며 또한 아름다웠다.
그는
75년 ‘대마초 파동’과 함께 대중들 앞에서 사라졌다. 그리 고 대마초 가수들이
해금되어 하나 둘씩 활동을 재개할 때도 그는 등장하지 않 았다.‘행방불명설’
‘잠적설’이 나돌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로 온갖 추측 보도 도 많았
다.
그러던 그가 84년 홀연히 나타났다.83년 6월부터 11월까지,5개 월
이라는 최장 녹음시간을 기록한 4집 앨범으로. 호흡조차 힘들어져 한 곡 녹 음
하는 데도 수십 번씩 끊어 편집해야 했던 이 앨범, 결국 ‘유작’이 되어버린 이
앨범을 들고. 그러나 이 앨범이 나온 뒤에도 그는 공개석상을 기피했
다.
이 앨범 중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가 제법 방송을 타고 있었
지만 그는 어 느새 ‘얼굴 없는 가수’가 되어 있었다. 이 노래가 같은 요양소에
서 보게 된 어 느 여 환자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는 애틋한 얘기만이 화제가
된 채.
필자가 그를 만나 그간의 얘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 한 것이 이 무렵으로 처음
에 그는 완강히 거절했다.‘지금은 어느 누구도 만나 지 못하는 입장을 이해해달
라.’고도 했고, 또 통과의례처럼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을 때 가장 먼저 연락하
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석 달을 매 달려 그를 만날 수 있
었다. 다만 조건은 그냥 만나는 것, 그리고 자기와 나누는 얘기는 절대로 기사
화하지 말아달라는 것. 그의 아파트에서였다. 그 핏기 없던 얼굴, 그리고 기침
소리 속에 겨우 나누던 얘기들. 정말이지, 이러한 식의 기사 는 나도 결코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송창식의 고집에 관해 얘길 했으 며 김수철의 ‘별
리’를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에 관해 서로 격의 없이 의견을 나 누었다. 어느 순
간부터 그는 내 얘기에 따라 빙그레 웃기도 하고, 간호원이 주 사를 놓으러 왔
을 때는 나에게 ‘잠깐이면 되니 기다리라.’고도 했다.
그때부 터 나는
몇 번이나 일어서려 했지만 그가 자꾸 괜찮다고 했다. 그러던 그가 자 신의 노
래 ‘님’을 들어보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때까지 그 노래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가 음반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님’. 그 때, 그 느낌이란. 그 노 래
를 듣는 내내 엄습해오는 불길함을 어쩌지 못했다. 그의 아파트를 나서는 늦
은 시간에 그는 마침내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게 뭐냐고 물었다. 나는 말했다.
시 간을 낼 수 있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공기 좋은 야외로 함께 나가보고 싶다
고. 의외로 그가 쾌히 승낙했다. 그러면서 말했다.“기왕이면 사진 잘 받는 곳으
로 가지. 그리고 오늘 내가 했던 얘기 중 노래에 관한 얘기라면 기사로 써도 좋
겠 는 걸….”한번도 웃지 않고 옆에 있던 부인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
다.
다음다 음날 아침, 우리는 ‘뚝섬’엘 갔다. 우리가 서로 약속한 시간
은 한 시간 정도였지 만 정작 촬영은 오후 다섯시 무렵에나 끝났다. 그가 무리
를 하면 안 되기에 사 진 찍는 중간중간 쉬어야 했고 그런 중에도 그는, 그때까
지 밝히지 못했다던 얘 기들을 서슴없이 털어놓기도 했다. 정신병원에 입원했
던 얘기, 탈영해 군 영창 에 갇혔던 얘기까지. 띄엄띄엄 노래를 불러 이은 그의
마지막 노래처럼 촬영도 그렇게 되었다. 오히려 나는 이 정도의 사진이면 충분
하다고 말렸으나 되레 그 가 사진 찍는 일에 더 열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진 촬영에 임하던 그의 표 정이 매우 긴장되어 있었다
이따금씩, 그는 함께 동행했던 그의 후배에게 담배 를 빼앗다시피 해 때론 냄새
만 맡기도 하고, 직접 불을 붙여 입에 물기도 했다. 그러면서 말했다.“의사는
내게 더 이상 노래를 부르면 죽는다고 경고했지, 허 나 난 노래를 부르지 않으
면 되레 죽을 것 같아.”
‘남은 열정을 모두 국악에 바치겠다.’고 밝히
던 김정호, 이 말은 그가 자신 있게 한 말이라서 더 안타깝 다. 얼
마
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의 죽음이 ‘병’ 때문
이 아니라 ‘한’ 때문이었다고 생
각되어졌다. 허나 지금은 생각
이 많이 달라졌다. 오히려 그에게 늘 부족했던 ‘산소’를 노래 속에 다 연소시키
고
행복 하게 간 것이라고
김정호 노래모음
01) 이름 모를 소녀
02) 하얀나비
03) 날이 갈 수록
04) 저 별과 달을
05) 보고 싶은 마음
06) 나그네
07) 새벽길
08)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09) 그 사람 무정한 사람
10) 달맞이 꽃
11) 사의 찬미
12) 달님
13) 님
14) 한 세상에 태어나
15) 세월 그것은 바람
16) 푸른 하늘 아래로
17) 꽃잎
18) 하얀 천사의 노래
19) 기다림
20) 별리
이름모를 소녀의 가수 김정호 가수 김정호씨는 1985년 폐결핵으로 돌
아가셨습니다.
작은 가슴으로 큰 족적을 남긴 藝人
어니언스의 히트곡 <사랑의 진실> <작은 새>의 진짜 주인공이 밝혀
지자 미8군무대에서 기타를 치며 <사월과 오월> 멤버로 잠시 활동을 하
던 김정호는 TBC방송 신광철 PD에 의해 패티킴의 스페셜프로에 게스트로 출
연하게 되었다.
이미 전국그룹사운드경연대회에서 가수왕으로
등극하며 솔로데뷔를 꿈꾸던 조용필과 함께 김정호의 동반 게스트 초청은 파
격이었다. 폭발적인 반응속에 두사람은 대중들속으로 탄탄한 첫발을 내딛었
다.
우이동시절부터 김정호의 음악성을 인정해온 기독교방송 김
진성PD는 데뷔곡 <이름모를 소녀>를 듣고 '한국의 모짜르트 탄생'이라고
극찬했다. <이름모를 소녀>는 부인 이영희를 애타게 짝사랑하면서 품었
던 회한을 담은 노래.
교동초등학교 선배의 사촌동생이었던 부인
은 김정호가 중학시절부터 점찍어 오랜 세월을 홀로 애태웠던 평생의 반려자였
다. 자신의 일상적인 음악생활을 이야기하는 연애편지를 하루에도 수차례 보내
고 용기를 내 집으로 찾아갔다.
보수적인 그녀의 어머니는 직업
도 불안정하고 음악을 한다는 김정호가 미덥지 못했다.
그러나
순수한 심성의 사촌오빠 후배가 싫지않았던 이영희. 74년 늦봄 쉘브르에서 노
래 부르고 있는 김정호 앞에 불쑥 나타났다. 3년간의 열애후 77년 반포의 17평
주공아파트에 둥지를 틀고 쌍둥이 딸 정숙과 정운을 얻었다. 12번씩이나 이사
를 거듭할만큼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
다.
인기정상의 가수였건만 존경하던 신중현과의 첫만남에 감격
스런 마음을 감추지 못했을 만큼 순수했던 김정호. 7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
던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음악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대마초는 자신의 노
래 '작은 새'처럼 좌절과 방황의 견디기 힘든 고행길을 걷게 했다.
매니저 이상기와 친형처럼 김정호를 보살피던 최무성은 경제적
이중고까지 겪는 그를 위해 76년 10월 무교동에 '꽃잎'이라는 생음악 레스토랑
을 맡겼다. 83년 재개발로 헐릴때까지 '꽃잎'은 유일한 노래무대였다.
김정호는 좌절속에서도 작곡에 전념하며 생의 전부인 음악을 포
기하지 않았다. 한달중 20여일은 한적한 남이섬이나 우이동 월벽산장에 칩거하
며 꺼져가는 음악혼에 불을 지폈다.
77년 방위소집으로 군복무
를 마칠무렵 호되게 걸린 감기는 지병을 재발시켰다. 함께 활동이 금지된 하남
석은 이 당시 둘도 없던 음악친구.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인생에 대한 고민
은 물론 국악리듬에 어쿼스틱 기타와 신디 사이저를 접목하는 새로운 음악을
함께 구상하기도 했다.
80년, 5년만에 대마초 망령에서 벗어난 김
정호는 재기앨범 <인생-유니버셜,K-APPLE-893,80년3월>을 발표했지만
해금의 달콤함도 잠깐. 오랜 정신적 고통과의 싸움에 지쳐 만신창이가 된 심
신 때문이었다.
인천 바닷가에 위치한 결핵요양소에 입원했다.
"과거의 화려했던 때는 흥미가 없다. 인기보다는 마음에 있는 좋은 노래
를 불러 남기고 싶다"던 김정호. 일년이상 치료를 해야했건만 결핵균보
다 더 강하게 꿈틀거리는 음악적 열정은 4개월만에 요양원을 뛰쳐나오게 했
다.
82년 다큐멘터리 음악에 빠져있던 뚜아에 무아 출신 이필원
과 가까워지며 신디사이저로 창출하는 환상적 음악에 빠져들었다. 새로운 음악
적 열정이 꿈틀거리자 김정호는 오산의 금식기도원과 삼각산 산상기도에 매달
리며 살고 싶은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필원이 직접 디자인한
<님-아세아,83년11월>은 김정호의 국악적 감성이 배여있는 눈물겨운 음
반이다. 외삼촌의 국악에 자신의 음악을 접목하려 아쟁, 가야금, 꽹과리를 직
접 두둘기며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에 혼을 담아내려했다.
부인
이영희는 “신보제작은 뒷전이고 차에 꽹과리를 싣고 다니며 1시간씩 두드렸을
정도로 국악에 빠졌었다“고 말한다. 그 한스런 탄식의 이미지를 담은 노래가
<님>이었다. 그것은 죽음을 예견한 상여가락을 연상시키는 선율이었다.
머리가 쭈삣 서는 듯한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님>은 그야말로 온몸을 불
사른 김정호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또한 수록곡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는 요양원 시절 송도해변을 걷는 여인에게서 느낀 슬픔의 이미지
를 뽑아낸 히트곡이다. 이 앨범은 숨쉬기조차 힘들어 5개월의 최장시간 녹음
을 해야만 했던 그의 유작앨범이다.
85년 11월 29일 33세의 천재
음악가 김정호는 50여곡의 주옥같은 곡을 남긴채 세상을 등졌다. 너무도 사랑
했던 부인에게 '고생시켜 미안해'라는 애틋한 유언만을 남긴 그는 흰눈이 내리
던 날 경기 고양의 기독교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고 죽어가는 순간에도 음악적 열정을 불태
워 행복했던 진정한 대중음악가 김정호. 사후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헌
정음반과 편집음반이 쏟아져 나왔다.
마지막 노래 <님>은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부인을 여관에 드나드는 다방아가씨로...
김정호는 이복형제에게 핍박받고 무대에서 숨을 거두는 허무맹
랑한 내용으로 제작, 재상영 금지처분이 내려지기도 했다. 86년 10월 동료들에
의해 세워진 무덤앞 노래비에 새겨진 <하얀 나비>의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라는 노래구절처럼 인생을 구슬프게 노래한 그의 영혼은
<하얀나비>같이 그를 그리워하는 대중들의 곁에서 영원히 순백색의 날개짓을 하고 있다 김정호
요절가수 김정호가 그렸던 고독한 인생의 이미지는 짙은 회
색빛이었다.
비범한 재주는 신조차 질투가 솟았을까! 너무도 젊은 나이
에 앗겨버린 그의 노래세상은 온통 그리움, 고독, 슬픔, 이별 등으로 뒤범벅된
삶의 반영이었다.
숨쉬기조차 힘들게 폐부 깊숙한 곳에서 요동쳤던 결핵
균들은 오히려 숨이 끊어질 듯 가슴속의 한을 토해내게 했다.
대중들은 한순
간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어느 누구도 마음 깊은 곳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어 촉촉히 적셔대는 처연한 멜
로디와 노랫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감수성 예민한 소녀팬들을 얼어
붙게한 '이름모를 소녀' '하얀나비' 그리고 젊은층의 사랑을 독차지한 '사랑의
진실' '작은 새' 등은 그가 남긴 주옥같은 명곡들.
[김정호(조용호) : 1952년 3월∼1985년 11월 29일]
어니
언스(Onions)의 노래 '작은새'의 작곡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김정호는 국
악의 명인들이 많은 외가 쪽의 피를 받고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학
교 때 삼촌으로부터 선물 받은 기타로 음악가의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고
등학교 때에 밴드부에 가입해 악기를 다루었다.
졸업 후 미8군에서 기타
를 치다가 후배 임창제가 결성한 그룹 어니언스의 앨범에 작곡자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그룹의 인기와 더불어 그의 이름도 알려지게 되었다.
<쉘부 르> 등의 통기타 업소에서 노래를 시작한 그는 그룹 4월과 5월에서 잠깐 머
물다가 1973년 자신의 자작곡인 '이름 모를 소녀'로 데뷔했다.
이후 '하
얀 나비'로 정상에 오른 그는 '사랑의 진실', '잊으리라', '꽃잎' 등의 히트곡을
쏟아 부으며 최고의 포크가수로 자리 매김 한다.
그는
<꽃잎>이란 카페를 운영하며 강은철, 김학래, 임하룡, 남궁옥분 등과 함
께 무대에 섰으며 자주 국악 공연을 관람하며 소울풀한 음색에 토속적인 맛을
입혔다.
폐결핵 환자라는 소문이 돌던 시기에, 그는 1975년 마약 사범으
로 잡혀 들어간다. 그는 이 대마초 파동으로 구금되어 정신병원까지 가야 했으
며 이후 두문불출하며 자신의 깊어지는 병마와 싸웠다. 심해지는 병은 그를 파
산으로 몰고 갔으며 변변치 않던 작곡비로 연명하던 그는 단칸방을 전전해야
했다.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5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끊어 녹음한 끝에 1983년 마
지막 앨범을 낸 김정호는 병원의 환자에게서 영감을 얻은 '고독한 여자의 미소
는 슬퍼'로 재기에 성공하지만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1985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임종 3개월 전, 딸에게 자신이 인기가수였음을 증명하기 위해 TV에 출연
했고 이것이 마지막 그의 모습이 되었다. 그의 유작에선 또한 '하얀 나비'와 함
께 그의 죽음을 예견한 곡으로 비유되곤 하는 '님'이 사후에 많은 인기를 얻었
다.
그의 음악은 포크로 분류되지만 독특한 음색에서 품어져 나오는 혼의 목소리는
소울과 블루스의 어느 지점에서 머물고 있으며 마지막까지 꽹과리를 들고 우리의 소리에 심취한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또 다른 원천은 국악임을 알 수 있
다.
그
가 사망하자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에서
는 추모 방송을 연일 내보냈고 1986년에는 홍민, 김수희, 김학래, 하남석, 윤시
내, 김범룡, 이정선, 신형원, 윤승태, 한마음, 전영록, 김현식, 서수남, 하청일
,
송창식, 이태원, 강은철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이 힘을 합친 트리뷰트 음반이
나왔다.
팬들
의 사랑이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그는 1998년 조선일보가 선정한 건국 이후 가수 베스트 50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