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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화 시인편<오늘 밤은 이렇게 축복을 받는다> 강연일시 : 2004년 5월 14일(금) 19:00 ∼ 20:30 |
- 본강연 -
이시영 : 오늘 초대손님으로 모신 분은 정규화 시인입니다. 정규화 시인은 1949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981년에 창작과 비평에서 나온 신작시집을 통해 시단에 등단한 후 『농민의 아들』로부터 시작해서 모두 일곱 권의 시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슬픔의 내력』이라는 시집이 나왔는데 우리가 오늘 대상으로 삼을 작품집은 바로 지난해에 나온 『오늘밤은 이렇게 축복을 받는다』라는 시집입니다. 현재 경남 창원에 살고 계신데 아픈 몸을 무릅쓰고 이렇게 올라와주셨습니다.
또 한 분의 초대손님은 평론가 구모룡 선생입니다. 해양대학교에 교수로 계시고 현재 『오늘의 문예비평』이란 잡지와 『신생』이라는 시 전문지의 편집위원으로 계십니다. 1982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으로 데뷔한 후 현재 『앓는 세대의 문학』이라는 평론집과 『구체적 삶과 형성기의 문학』등 여러 권의 저서가 있습니다. 먼저 구모룡 선생께서 정규화 시집 『오늘밤은 이렇게 축복을 받는다』라는 시집을 읽은 소감을 발표해주시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자연의 철학 혹은 빈자(貧者)의 철학
구모룡 : 정규화 시인은 지속적으로 고향인 하동 지리산 자락의 경험과 체험을 바탕으로 시를
쓰고 계시는 분입니다. 선생님의 생애를 보면서 한 개인에게 있어 태어나고 자란 공간은 평생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렇기에 문학적인 지향도 일반 농민, 서민들의 삶을 지향하는 가치를 추구해오셨습니다. 특히 이번 시집에도 보면 다윈의 진화론을 비판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을 지향하는 삶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면서 자연이 모든 것을 품에 안고 공생하듯이 그런 가치가 실현되는 세상을 꿈꾸면서 시를 써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선생님의 시적인 지향은 자연과 인간, 삶의 조화로운 평화와 사랑이 존재하는 세계를 지향해왔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추상적인 이념을 주장한 것이 아니고 어렸을 때부터 지리산 자락에서 살면서 경험한 구체적인 사실들을 시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번 시집에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삶의 족적들이 자세하게 이야기되고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가족사라든지 또는 어린 시절의 친구나 이웃들, 자연공간에서 접한 사물들의 이야기들이 절절하게 시에 녹아 있습니다. 그런데 정규화 선생님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여러 가지 개인 사정으로 건강도 나빠지셨고 운영하시던 사업까지 어려워졌는데도 불구하고 시를 통해서 삶을 이야기하고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전혀 버리지 않습니다. 극도의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시를 버팀목으로 삼아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내는 의지를 보면서 역시 '지리산의 시인'이신 정규화 선생님의 저력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최근의 삶들이 역시 이번 시집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적인 고백입니다만 우리가 개인적인 고통을 시로써 고백할 때 어떻게 시가 될 수 있는가 이야기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고백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면서 또 다른 세계와의 만남을 시도하는, 그래서 자기를 객관화하고 의지를 다지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극도로 어려운 지하실 생활에서 밤을 새워가면서 시를 쓰는 장면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정규화 선생님에게 시라는 것이 갖는 현실적인 가치, 세속적인 가치를 넘을 수 있는 지향이라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을 다 잃고 난 뒤에 오히려 자연의 철학 내지는 빈자의 철학을 체득하면서 자연을 새롭게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서 동시에 삶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사의 실패와 병고는 시인으로 하여금 자기와 자기를 둘러싼 많은 인연들을 돌아보게 하였을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 원한과 분노의 감정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임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변덕과 배신이 가난과 질병으로 입은 시인의 고통을 가중시켰을 것이라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인간에 대한 환멸을 말하기보다 그에 대한 신뢰를 찾고자 합니다. 그는 아직은 이 세상에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완전하게 놓아버리지 않습니다. 이러한 시인은 무엇보다 자기 성찰에 투철합니다. 가계를 통해 존재의 뿌리를 확인함으로써 보다 뚜렷한 자기 정체에 다가서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내력은 운명의 얼굴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운명을 극복하게 하는 개인의 역사를 추동합니다. 시인의 희망이 그의 개인사와 겹쳐져 있음을 짐작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를 민중적 희망이라고 한다면 지금 극도의 곤고함에서 의지를 잃지 않는 시인의 낙관 혹은 따뜻한 외로움이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은 사회적 실패를 존재의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강제된 가난이지만 시인은 이를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넉넉함을 보입니다. 정규화 선생님의 시에서 구체적인 삶과 더불어 자연이 두드러지게 되는 현상은 가난의 현실의 다른 한편에 자연이 놓여 있다는 인식에 상응합니다. 시인은 민중에게서 읽었던 희망을 다시 자연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이 포개지는 원점에 고향이라는 원초적 장소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향은 현실세계에서의 실패에 대한 단순한 벌충으로 선택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의 시적 비전은 비극적 간극을 더욱 크게 할 것이므로 현실세계에서의 시인의 실패는 필연에 가까운 것입니다. 문제는 시인이 현실세계를 넘어서는 희망을 추구하였다는 데 있는 바, 이를 앞서 민중적 희망으로 규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정규화 시인의 시는 이러한 공간을 열어 가는 의지적 행보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시는 물질의 집을 잃은 대신 영혼의 집을 짓는 도정에 있는 것이며 시인과 그의 시로 인하여 우리 시대의 비루함과 남루함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라 믿습니다.
이시영 : 바로 이어서 정규화 시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삶과 일치되는 문학을 하고 싶어
정규화 : 제가 그동안 문학을 해오면서 문학이라는 것은 도달을 하는 것이지 원래 내 주변에 축적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IMF로 인해서 재산을 잃게 되면서 어려운 고통을 당하다보니까 우리가 탐구했던 것, 이를테면 재산, 권력, 명예 이런 것들이 부질없는 것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부질없음 속에서 과연 내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면서 제 스스로 그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생활고 때문에 창고나 다름없는 지하실 생활을 하면서 결국 책을 읽거나 시를 쓰는 그런 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제가 느꼈던 것은 사람이 도달하는 과정 중에서 어디로 도달하느냐를 생각했죠. 마지막에는 죽음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 앞에 섰을 때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무것도 필요없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한 사람의 역할이 그 과정에 이르는 동안의 고통을 정확하게 관찰해서 형상화할 수 있다면 시 쓰는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서 지금까지 써왔던 방향에서 바꿔서 시를 써보았습니다. 글이라는 것은 계속 쓰다보면 '테크닉'이 늘어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너무 테크닉에 심취를 하다보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주제가 혼돈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쓰고 싶은 작품은 내 몸에 맞게 내 정체성을 확실히 알고 무리하지 않게 내가 느낀대로 쓰면 될 것 같았습니다. 자기가 진솔한 삶을 살아가는 만큼 작품도 작가의 삶과 일치되어가게끔 하는 것이 바른 문학작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타내려고 하는 대상물 자체가 되려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인 명작들은 사랑, 더 깊게 나가면 짝사랑 이런 데서 많이 나타납니다. 투르게네프 같은 사람이 어떤 여가수를 38년 동안이나 짝사랑해서 불란서까지 같이 가서 자기는 독신으로 살았던 것은 결국 그런 문학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기반을 마련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것은 시인의 양심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우리가 쓰는 시에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전달되고 표출된다면 우리 사회가 좀더 풍요로워지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이것이 곧 제가 시를 대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시영 : 구모룡 선생도 이 시집에 나타난 자연의 철학이라거나 빈자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말씀하셨고 정규화 시인도 마음의 빈곳을 채워준 것이 문학이라는, 체험에서 우러난 말들을 솔직하게 해주셨는데요. 최근에 홍일선 시인이 하는 『시경』을 보니까 권두대담에서 염무웅 선생이 "늘 마지막까지 가보는 것이 문학의 자세이다"라고 하셨어요. 타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 뜻이 되겠죠. 정규화 시인은 문학을 위해서 갈 데까지 자신을 밀고 나간 게 아니라 생활 자체가 그렇게 만든 것이죠. 결국 그러한 고통으로 인해 터져 나온 것들이 『오늘밤은 이렇게 축복을 받는다』는 시집의 전편에 아주 절절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저도 소감을 준비해온 것을 몇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시집의 최고의 성취는 「서설」
정규화 선생의 시집을 읽으면서 첫번째로 저는 천상병 시인이 생각이 났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1970년 추석에'라는 부제가 붙은 「소능조(小陵調)」라는 시의 전문은 이렇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돈이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그리고 2003년 말에 간행된 정규화 시인의 「추석날」이라는 시는 이렇습니다.
"고향에도 못 가고/ 성묘도 못 갔다/ 내 몸부림만으로는/ 돈이 되지 않아서/ 예의고 체면이고 따질 만한/ 여유가 없다/ 그러나, 내게까지 찾아온/ 고마운 추석날/ 흐르는 눈물 그냥 두고/ 고향이 있어도/ 고향에 못 갔다"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라는 천상병의 어떤 초연한 시적 인식에는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내게까지 찾아온/ 고마운 추석날" 같은 정규화의 구절은 천상병의 초탈한 시적 표현에 육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 다 "돈이 되지 않아서" 고향에 못 갑니다. 이밖에도 천상병적 시적 표현에 근접한 또 한 편의 그의 시가 있으니, 그것은 이 시집의 최고의 성취로 기록될 만한 「햇살 따뜻하고 바람 시원하게 부는 날」입니다.
"햇살 따뜻하고/ 바람 시원하게 부는 날/ 나는 떠날 것이다/ 실컷 산천을 사랑해 봤고/ 지는 해 붙들고 억지도 써봤다/ 한 생애 뒤돌아보면/ 너무 많은 욕심을 부린 것 같다/ 많은 벗들과 아름답던 여인들이 그렇다/ 그러나 이 순간까지만 해도/ 그것이 욕심인 줄 몰랐다/ 하나같이 부질없는 짓임을/ 왜 몰랐을까/ 영원히 내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은/ 내가 생애를 두고 키운/ 외로움뿐이다"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천상병의 시는 그 유명한 「귀천(歸天)」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둘 다 외로움의 극치에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온 처연한 시입니다. 천상병을 연상시키는 시는 더 많지만 여기에 한 편만을 더 들겠습니다. 이 역시 정규화의 절창으로 기록될 시입니다.
"할 말이 없다/ 산다고 살았는데/ 여기까지 왔다// 우리 다섯 식구/ 오순도순 살,/ 방 한 칸이 없다// 이 엄동설한에/ 애들은 얼마나 마음 아플까/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잠도 오지 않는다// 애들아, 미안하다/ 우리 그만/ 하늘에 가서 살자// 이런 밤에는/ 눈이라도/ 펑펑 쏟아져 줬으면 좋겠다"
「서설」전문
"산다고 살았는데" 그는 지금 "여기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가난의 밑바닥인 지하생활자의 처지로. "애들아, 미안하다/ 우리 그만/ 하늘에 가서 살자" 대목을 읽었을 땐 내 가슴도 그만 그의 가슴처럼 시큰했다는 것만 밝히기로 합니다. 일체의 시적 수사를 거부하고 화자가 곧 시인으로서 지상에서의 슬픈 삶의 자취를 가감없이 토로해내고자 하는 것이 그의 삶의 철학이자 시학입니다. 어느 평론가는 "모국어의 속살에 도달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고종석) 시인이라고 했습니다만 정규화의 시는 그냥 체험의 밑바닥을 치고 올라온 것들입니다. 시학이란 말은 지금의 그에게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사치일지 모릅니다.
그래도 낙관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 시인
천상병처럼 일탈의 삶을 산 시인 중에 김관식이란 50년대 시인이 있습니다. 그의 「병상록(病床錄)」이란 시는 이렇습니다.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 누운 지 이제 10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내가 살 길은 없는 것이냐./ 간(肝), 심(心), 비(脾), 폐(肺), 신(腎)……/ 오장(五臟)이 어디 한 군데 성한 데 없이/ 생물학 교실의 골격표본처럼/ 뼈만 앙상한 이 극한상황에서……/ 어두운 밤 턴넬을 지내는/ 디이젤의 엔진 소리/ 나는 또 숨이 가쁘다 열이 오른다/ 기침이 난다./ 머리맡을 뒤져도 물 한 모금 없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인다./ 방안 하나 가득 찬 철 모르는 어린것들./ 제멋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가로세로 드러누워/ 고단한 숨결은 한창 얼크러졌는데/ 문득 둘째의 등록금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가 어른거린다./ 내가 막상 가는 날은 너희는 누구에게 손을 벌리랴./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憂患)에서 살고 안락(安樂)에서 죽는 것,/ 백금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 아하, 새벽은 아직 멀었나보다."
"아하, 아직 새벽은 멀었나보다"라는 탄식 속에서도 이 시는 가난 속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애비의 서릿발 같은 준엄한 기상이 서려 있으니 그 빼어남은 바로 "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이라는 인식에 있습니다. 김관식처럼 도저하지는 않지만 정규화에게도 비슷한 인식의 시가 있습니다. 「지금 내 위 속에는」이라는 시입니다.
"지금 내 위속에서는/ 네 개의 혹이/ 자라고 있단다/ 그리고 콩팥에는 두 개의 결석이 있다/ 그것들이 뭣인지는 모르지만/ 한 달간 약을 먹어보고/ 삭지 않는다면/ 수술을 해야 된단다/ 공장에 다니는 딸,/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대학원에 다니는 큰아들,/ 한동대학교를 휴학하고/ 영국연수를 꿈꾸는 작은아들/ 내가 죽으면/ 모든 게 헛일인데, 그놈의 혹과 돌이/ 너무 일찍 돋아났다/ 4년 정도만 더 기다려줄 것이지/ 내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무슨 미련이 있어/ 머뭇거리냐고 호통이다"
자신의 혹과 결석에 대한 수술 걱정보다는 당장 "내가 죽으면" 그 모든 꿈들을 접어야 할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앞섭니다. 그리하여 그는 수술도 못하고 "오직 진통제와 하나님만/ 의지"(「진통제와 하나님만 의지할 뿐이다」)하며 저녁이면 "내 몸 하나 눕혀 잠들 곳이 없"어 "벌써 5개월을, 헤매고" 다니면서도 "식구들아, 살다보면/ 우리에게도/ 저녁이 편안하고 즐거운 날이 올 것이다"(「저녁이 되면」)라는 낙관과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도저한 절망 속에서도 다음과 같은 역설의 희망을 노래합니다.
"지하실 맨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누울 자리를 마련했다/ 노숙을 생각해봤지만/ 노숙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급이다/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에서/ 오늘 몫의 명상에 잠긴다/ 죽음도 이렇게/ 편안하고 조용하게 오는 것일까/ 외로움에 잔뼈가 굵어진 몸이라/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오늘밤은 이렇게/ 축복을 받고 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밤은 이렇게 축복을 받는다」전문
맨 마지막 행은 좀 없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한 달을 사는 게 아니라/ 하루를 사는데도 너무 힘든"(「무거운 어깨」) 그의 처지를 돌이켜보면 그런 나의 생각 자체가 그야말로 사치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1920년대의 김소월이 임과 집과 길이 없는 암울한 자신의 처지를 식민지 현실에 의탁해 노래했다면 정규화는 이 풍요와 소비로 넘쳐나는 듯한 후기자본주의사회의 영락한 신용불량자이자 경제적 파산자가 되어 자신의 집 없음과 길 없음과 임 없음을 직설적으로 노래합니다. 그리하여 "애들아, 미안하다/ 우리 그만/ 하늘에 가서 살자"(「서설」)라는 그의 절규는 저 20년대 소월의 「옷과 밥과 자유」를 차라리 한 편의 수사로 만듭니다.
<질의, 응답>
문(이승철 시인) : 건강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잇달아 시집을 내셨습니다. 몸이 힘들수록 시심이 솟아나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답 :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시를 쓰는 일에는 큰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문(김사인 시인) : 이 시집의 표제시는 정말 굉장한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밖에 이 시집 전반에 걸쳐 아주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서 시를 쓰는 일에 있어서의 어설픈 꾸밈새랄지 수사랄지 하는 것들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여지신 것인지 좀 궁금합니다.
답 : 모든 것을 다 잃고 생계문제로 괴로워하는 상황에서 내가 정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글 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무기력한 나날들 속에서 어느 때는 말이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소리내어서 책을 읽기도 하고 그랬어요. 또 어떤 때는 하루 저녁에 시 30편까지 쓴 적도 있어요. 그러다가 깨달은 것이 욕심을 부린다는 일 자체가 아무런 도움이 안 되겠구나 생각했죠. 어느 날 내가 왜 이런 느낌을 가져야 되는가 하는 본질에 접근을 해보았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내 시에 직접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꾸밈새'나 '수사'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죠.